第八章 검왕
제갈가의 두 형제와 정천이 다시 모였다. 이번엔 아예 환의궁에 자리를 마련해 놓은 차였다.
“금역이라. 우리가 손을 쓰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군.”
제갈현이 탄식을 뱉었다.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곳. 그곳이 금역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곳을 의심했어야 했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머릿속에서 지워 두고 있었다.
우선은 지독한 안개.
광륭혈독무라 불리는 안개는 그 자체로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만독불침의 초고수라면 독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시야를 비롯한 오감을 흐리게 하는 자욱한 안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영대 중 최정예만 선발한다면 내부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정천의 물음에 제갈현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한 차례 시도해 본 적이 있네. 그 결과 당시 모집됐던 인물 중 절반을 잃었지.”
“그들의 실력은?”
“지금으로 쳐도 특급 이상이었네.”
“지금 다시 보내더라도 별 차이는 없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제갈현이 말했다.
“당시 밝혀낼 수 있었던 건 두 가지뿐이네. 금역 자체에 광대한 규모의 살진(殺陣)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 안개로 인해 오감이 차단된 상황에서 멋대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
“귀찮게 됐군요.”
정천의 쓰게 중얼거렸다. 특급 비영대원조차 손을 못 쓸 정도라면 대규모의 토벌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소수 정예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
더군다나 백미련을 보아하니 혈선 측은 살진에 정통한 모양. 이거야 호랑이굴에 눈 감고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살수의 실력은 어떠했소?”
그것을 의식한 건 마찬가지인지 제갈순이 입을 열었다. 정천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지만 나와 수십 합을 겨뤄 밀리지 않았소.”
“막상막하란 소리로군.”
“진심으로 싸웠다면 내가 이겼을 거요.”
“그쪽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닐 테지. 그렇지 않소?”
정천은 살짝 혀를 찼다. 반박할 말이 없었으므로.
제갈순은 제갈현을 돌아보았다.
“이자의 실력은 천무맹 내에서도 수위입니다. 그런 자와 호각의 수위를 보인 살수. 아마 혈선들은 저런 실력자를 다수 보유하고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을 뿌리 뽑으려면 천무맹 전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갈순은 각 방파의 힘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제갈현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그리 생각하지 못했겠느냐. 다만 문제가 있다.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제갈순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존심 문제겠군요.”
“그래. 방주 급 인물들을 설득하려면 그에 준하는 권위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맹주님께선 쓰러진 상태인데다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설명이 어렵다.”
잠자코 듣던 정천이 운을 뗐다.
“혈선들에 대해 말하십시오.”
“낸들 그러고 싶지 않겠나? 다만 그들이 믿어 주느냐가 문제 아니겠는가.”
하긴 믿기 어려울 만도 할 터.
자신들의 심장이라 생각했던 곳에,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던 배후가 있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
더군다나 문제는 더 있었다.
“거기에 누가 과연 우리 편인지, 누가 혈선의 끄나풀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문제일세.”
“…….”
“배후에서 천무맹을 지배해 온 그들이, 과연 대문파나 세가의 수뇌 하나를 구워삶지 못했을까? 나는 그것이 두려운 것일세.”
“그들을 먼저 솎아 내는 게 문제로군요.”
“쉽지 않을 거야.”
일이 상당히 귀찮게 됐다. 정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교 일보다도 이쪽이 급선무로군.’
천무맹 전체가 합심할 수 있는 문제라면 정천은 미련 없이 마교로 떠났을 것이다. 힘을 모으고도 무너져 버린다면 그건 존속할 의미가 없는 단체라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천무맹 자체의 힘을 모을 수 없는데다 이쪽의 전력은 제갈세가와 군사부 정도. 이들만으로 혈선의 세력을 감당하긴 힘들었다.
“믿을 수 있는 문파나 세가는 어디가 있습니까?”
제갈현은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속단하기 어렵네. 지금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곳은 화산파와 남궁세가 정도로군.”
백운신이 제거당한 것만 보더라도 화산파의 성격을 알 수 있으며, 맹주의 가문인 남궁세가야 신뢰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모용세가도 포함시키십시오.”
“모용세가? 하지만 그들은 야심이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 측면을 생각해 보면 팔부혈선과 접촉이 있었으리라 볼 수도 있을 텐데.”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모용세가는, 최소한 황룡성의 북풍장은 믿을 수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때였다. 한 사람이 천장에서부터 스르륵 내려와 앉았다.
무엽의 뒤를 이은 신임 비영대주 비목(飛目)이었다.
“무슨 일인가?”
제갈현의 물음에 비목이 대답했다.
“각 문파의 문주들이 몰려왔습니다. 아마 환의궁의 습격 때문으로 보입니다.”
“귀찮게 되었군.”
제갈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의 의도야 뻔하다. 이참에 군사 제갈현을 철저히 압박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혈선들의 조종 때문이 아니라는 게 더더욱 한탄할 일이었다.
“군사부, 나아가 제갈세가를 견제하자는 의도일 테지. 말이야 지지부진한 상황을 지탄하겠다는 식으로 포장하겠지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갈현은 피로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자네는 일단 물러가 있게. 일이 대강 수습되고 나면 다시 부르겠네.”
“그러죠.”
정천은 간단히 수긍하고는 몸을 돌렸다.
* * *
화륜문으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묘했다. 정천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장유추가 한쪽만 남은 팔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날아가 버린 왼팔엔 아직 불그스름한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벌써 움직여도 됩니까?”
“의원이 말리더군.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왔네.”
“……의원님 말씀 잘 들으라고 어렸을 적에 배우셨을 텐데요.”
“몸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무인에겐 보약이라는 사실 역시 배웠지.”
“누구한테서 말입니까?”
“강호에게서.”
“뭐, 그렇다고 치지요.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장유추는 팔꿈치까지만 남은 왼팔을 들어 보였다.
“귀도신마라는 떠벌이 놈과 겨루어 보았지. 재수 더럽게도 놈에게 왼팔을 선물로 주게 되었군.”
“결투에서 패했습니까?”
“멍청한 소리! 난전 중에 기습을 당했네. 일대일로 겨룬다면 노부가 그깟 떠벌이에게 패할 성싶은가?”
“그 역시 그렇다고 치지요. 그런데요?”
“놈이 자네 얘기를 하더군.”
정천은 팔짱을 끼었다. 장유추는 어렵사리 생각해 낸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전하라더군. 기별을 기다리겠노라고.”
“그 말을 전하러 오셨군요.”
“그런 의도도 있지. 하지만 내 볼일은 그게 아닐세.”
장유추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정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임에도 그새 살이 빠진 까닭에 예전과 같은 위압감은 없었다.
“자네와 놈이 무슨 관계인지,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상관하지 않네. 하지만 나는 놈과 꼭 결판을 내야겠네.”
“…….”
“하지만 몸이 이래서야 의미가 없겠지. 고작 팔 하나가 날아갔을 뿐인데도 광천뇌도의 손맛이 예전 같지 않더군.”
정천은 불안한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새로운 도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왜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자네뿐이니까. 또한.”
스르릉.
광천뇌도를 뽑아 든 장유추가 말을 이었다.
“노부야말로 자네의 가장 큰 우군이 될 터이니.”
“…….”
“노부에게도 대강의 눈치는 있네. 보아하니 천무맹의 꼴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더군. 맹주는 두 차례나 습격을 받은 데다 인사불성이고, 각 문파의 수괴들은 자기네 잇속을 챙기는 데에 급급하지.”
“수괴라.”
장유추다운 표현이라 생각한 정천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직한 우군이 아니겠는가. 노부만큼 그에 적격이라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네.”
정천도 어느 정도는 동감했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자, 더불어 힘이 될 만한 자란 결국 뻔했다.
우선은 세력이 없어 혈선의 꾐에 넘어갈 리도 없는 인물.
이에 더하여 한 세력에 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인물.
장유추는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손을 잡는다면 강력한 우군이 될 테지만.’
정천은 그럼에도 쉽사리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장유추는 한 팔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전력의 이 할 이상을 소실한 셈.
새로이 도법을 정비한다고 해도 얼마나 걸리게 될지 모른다. 정비한 이후에도 예전 같은 실력을 보일 수 있을지도 의문.
협력을 담보받는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지 문제였다.
장유추도 정천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말을 보탰다.
“한 달의 기한을 주게. 그 안에 반드시 뇌혈천섬도법을 재정비하겠네.”
“만약 그 기간 안에 해내지 못한다면요?”
“우군이 아닌 심복이 되어 주지. 바닥을 기라면 길 테고 발을 핥으라면 핥겠네.”
장유추의 자존심을 생각해 본다면 놀라울 정도의 다짐이었다.
이번 일에 걸은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몇 차례의 대련과 말동무만 되어 준다면 좋네. 나머지는 노부 스스로 해결해 갈 터이니.”
“알겠습니다.”
말동무라는 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도 장유추 자신이 막힌 부분이나 의아해하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는 것일 터였다.
어쨌든 장유추는 당분간 화륜문에서 지내게 되었다. 장원 크기에 비해 사람이 너무 없었던 만큼 화연란도 달가워할 터였다.
“그나저나…….”
장유추가 술잔을 비우고는 물었다.
“백운신이 죽었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씁쓸한 정천의 대꾸에 장유추는 픽 웃었다.
“재수 없던 놈의 최후치고는 허무하군. 일개 살수에게 당해 버리다니.”
“잠시 겨뤄 보았는데 상당한 실력이었습니다.”
“노부와 비교한다면 어떠한가?”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 바로 튀어나왔다. 내심 쓴웃음을 지은 정천이 잠시 가늠을 해 보았다.
“기(氣)의 규모 면에선 선배님이, 기(技)의 다양성 면에선 그녀가 우위일 겁니다.”
“그녀? 계집이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다 늙은 계집 주제에 살수 짓이라니, 놀랄 일이군.”
정천은 장유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수는 저보다 약간 어린 여자였습니다.”
“…….”
장유추는 기울이던 술병을 옆에다 치웠다.
“환골탈태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을 겁니다. 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저보다는 어릴 겁니다.”
“그럼에도 노부와 필적한다고?”
“믿기 힘들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으음.”
장유추가 불편한 침음을 뱉었다.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어지간해선 인정하기 힘든 말일 터였다.
“자네도 실수를 하는 모양이군. 필시 그 계집과 겨룰 적에 집중하지 못했거나 상태가 좋지 않았을 걸세.”
“온전한 상태가 아니긴 했습니다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실력은 상당했습니다.”
“음…….”
“뭐, 그렇더라도 제대로 겨룬다면 선배님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만요.”
정천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장유추를 달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장유추는 그제야 술병을 싹 비웠다. 절정의 무인들이란 하나같이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듯했다.
바로 옆 마당에서 알짱거리던 소윤이 쪼르르 달려와서는 술상을 가져갔다. 장유추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 보고는 말했다.
“걸음걸이가 꽤나 단련되어 있군. 지속적으로 경공을 익혀 온 모양이야. 자네가 가르쳤나?”
“아뇨. 아버지 되는 사람한테서 배웠다는 모양입니다.”
장유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파의 문도가 아니란 말인가?”
“그냥 식충이죠.”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단련을 한 눈치인데.”
정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매일 밤마다 소윤이 몰래 나가 경공을 연마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다.
그녀가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운다면 심후나 칠삼을 금세 능가할 자질을 지녔다는 것 역시.
하지만 본인이 싫어서야 말짱 황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도로 들고 싶어 하질 않더군요. 이곳에 애착을 갖는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흠.”
수염을 쓰다듬은 장유추가 말했다.
“노부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네.”
“알 것 같다고요?”
“간단한 얘기지. 그저 얘기를 할 시기를 놓칠 것뿐일세. 아마 저 아이 마음속에는 화륜문의 검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을걸.”
“…….”
“자네나 화륜문주나 그런 면에선 무딘 것 같군.”
장유추는 몸을 일으켜 자기 방으로 향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는 아직은 더 쉬어야 할 때였다.
“푹 주무십시오. 몸이 그래서는 도법이고 뭐고 익힐 수도 없을 테니.”
“알고 있네. 그리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좀 말라고 전하게.”
무뚝뚝하게 대답한 장유추가 방으로 들어갔다.
정천은 쓴웃음을 짓고서 입을 열었다.
“담미화.”
담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장유추가 온 직후부터 몸을 숨기고 그를 관찰하고 있었을 터였다.
“저 사람은 숨어서 관찰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인물은 아니야.”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는 건 아니었어. 어쨌든 네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말씀하세요.”
정천은 입을 떼고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양.
그는 한참을 숙고한 뒤에야 담미화에게 말했다.
“현재 천무맹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 달리 말해 차기 맹주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
정천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을 마쳤다.
“그를 감시해.”
약간은 추상적이기까지 한 명령. 정천은 지금 담미화 스스로 판단을 내려 임무를 수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맹주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담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아. 지금 당장 움직여.”
“예.”
그녀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정천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물론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맹주님이 두 번씩이나 목숨을 위협받다니, 군사부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거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오, 군사.”
환의궁.
몰려든 수십 명의 문주들이 제갈현에게 항의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사실 관계에 기반을 둔지라 제갈현으로선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어쨌든 아직까지도 수괴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상황이니까.
그나마 다행한 것은 암살 자체는 막았다는 점.
물론 문주들은 그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제갈현을 압박해야 하는 그들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문주들을 진정시킨 제갈현이 말했다.
“우리 천무맹은 지금 중대한 위기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 위기에 대처를 못하고 있으니 군사를 규탄하는 것 아니오.”
다시 한 번 문주들을 진정시킨 제갈현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를 구박하셔도 좋습니다. 무능력하다고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부나 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인의 실책을 전가하려는 것 아니오?”
“제가 무능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가 잘 압니다. 그에 관한 말씀이야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현은 추궁당하는 이가 아니라 추궁하는 이의 눈으로 문주들을 돌아보았다.
“천무맹을 향한 애정과 헌신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
“흠흠.”
무안해진 문주들이 헛기침을 했다.
“군사의 헌신을 모를 리가 있겠소? 다만 이번 일의 경우는 그 경중이 너무나 중요한지라…….”
“어쨌든 맹주님을 노린 자들의 정체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이오.”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갈현이 확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의 힘이 천무맹에 필적,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 말은…….”
문주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역시 마교인 것이오?”
“아닙니다. 마교와는 별개의 세력입니다.”
제갈현의 설명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 된단 말이오? 천무맹에 필적하나 마교는 아니라니. 대체 그런 세력이 중원무림에 존재하긴 한단 말이오?”
“설마 신비의 세외세력이라도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그렇습니다.”
제갈현이 단언하자 또 한 번의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그런 가운데 제갈현은 문주들의 눈빛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혹시나 내통자를 가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하기야 이 정도에 정체를 드러낼 만큼 멍청하다면 혈선들의 선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심 아쉬움을 느끼며 제갈현이 말했다.
“그들은 천무맹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습니다. 지금 본 군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
“그렇기에 지금은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고 은밀하며, 신중한데다 강대합니다. 그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우선 우리들의 신뢰부터 확고히 해야 합니다.”
은연중에 내통자의 존재를 비치는 말이었다. 이를 알아들은 몇몇 문주들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진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군사께서 설명해 주셔야 할 것이 있군.”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목소리가 지닌 무게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갈현 역시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말씀하십시오, 검왕.”
태천검주, 동시에 정파제일검인 사내.
어떤 의미에선 천무맹주조차 뛰어넘은 권위를 지닌 남자.
본명보다도 검왕이란 별호로 자주 불리는 존재.
검왕 유극태가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의 살수 홀로 화군장로 백운신을 살해했소. 그리고 이곳 환의궁에까지 찾아와 맹주님을 살해할 뻔하고는 물러났소. 이것이 군사의 설명이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더군.”
“의문이라 하심은……?”
“본좌는 이미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살펴보았소이다.”
넌지시 내뱉는 검왕의 한마디. 그 짧은 말 속에 숨겨진 속뜻에 제갈현은 긴장했다.
제갈현이 침묵하자 검왕이 말을 덧붙였다.
“그 흔적은 분명 일대일, 두 사람 사이의 결투의 흔적이었소. 멸마대가 살수를 막았다는 군사의 설명과는 대치된다는 말이오.”
문주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은 반박하지 못하는 제갈현을 보고서 의문을 더욱 굳혔다.
검왕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 갔다.
“구태여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에서 의문이 느껴지더군. 본좌가 의심한 것은 둘 중 하나였소. 살수를 물리쳤다는 자의 출신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검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상황 자체가 조작되었거나.”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자칫하면 그들이 제갈현, 나아가 군사부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제갈현이 설명했으나 문주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한 것이오?”
“서로 간에 신뢰가 필요하단 것은 군사 본인이 말했던 것 아니오.”
“당사자부터가 우릴 속이고 있었다니!”
천하의 제갈현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낭패다. 멸마대를 통해 흔적을 최대한 지우도록 했거늘, 검왕은 그것조차 꿰뚫어 본 것인가?’
그가 굳이 정천에 대해 숨긴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혈선들의 정체를 알릴 때 함께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씨알이나 먹힐지 의문인 상황. 문주들은 속았다는 사실에 이미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불만이 잦아들었다. 검왕이 넌지시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손짓 하나만으로 문주들을 가라앉히는 모습. 제갈현은 그 광경에서 착시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미 맹의 무게중심은 옮겨진 것일지도.’
남궁운 역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의 검왕에겐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
차기 맹주의 자리라는 게 존재한다면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리라.
좌중을 진정시킨 검왕이 제갈현에게 말했다.
“본좌는 군사에게 악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진 않소.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 보오만,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본좌는 군사를 믿소.”
그 한마디에 여론이 미묘해졌다.
조금 전까지도 군사를 힐난하던 문주들이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각 문파의 수장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군. 실로 무서운 사내다.’
교활한 책사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인물. 그럼에도 그 표정엔 일말의 간사함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아마도 저 무지막지한 지배력은 의도한 것이 아닐 터. 그는 별다른 계산 없이 그저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리라.
검왕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기에 군사께서 숨기려 한 인물에 흥미가 동하는군. 보아하니 그자와 살수 사이의 대결은 정말 대단했으리라 생각되오.”
제갈현은 의아한 눈으로 검왕을 보았다.
검왕은 그의 시선에 나직한 한마디로 화답했다.
“본좌는 그자를 만나 보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