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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 안개 너머의 여인 (51/146)

第三章 안개 너머의 여인

귀도신마와 흑령대를 추격했던 혈풍대와 비영대.

그 생존자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혈풍대주 유자서는 혈로를 뚫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럼에도 장유추를 비롯한 극소수의 대원들만이 생환한 것이다.

장유추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귀도신마에게 팔을 하나 잃은 데다 가장 많은 적을 상대하느라 중상도 가장 많이 입었다.

다른 생환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게 용할 정도였으니까.

생환자들을 위해 갖가지 약재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집행부주 군월중의 이마엔 주름살이 하나 더 늘었다.

모용린이 왔을 때에도 모용준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

모용린의 두 눈이 금세 젖어 들었다.

평소엔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던 작은 오빠였다. 하지만 그런 오빠가 온몸 가득 상처를 입고 돌아온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뇌혈도 선배를 제외하면 가장 큰 중상을 입었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혈로를 뚫은 모양이더군.”

어느새 다가온 군월중이 말을 걸었다.

모용린은 대답하지 않고서 모용준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추격에 나섰던 혈풍대와 비영대는 전멸했다고 봐야 할 거요. 제대로 확인되진 않았지만, 아마도 마교의 역공에 당한 모양이더군.”

“…….”

“진료를 한 의원의 말로는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더군. 앞으로 무공을 펼치는 데에도 문제는 없을 거라 하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하세요.”

단도직입적인 모용린의 한마디. 군월중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과연 영민하시군.”

“눈치가 조금 있을 뿐이에요.”

“뭐, 좋소. 나도 쓸데없는 위로로 시간을 더 끌고 싶진 않으니.”

입맛을 다신 군월중이 말했다.

“사실 생환자 중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던 이는 절반 정도였소. 혼절한 나머지 절반을 그들이 업고서 이곳까지 온 것이지. 물론 그중엔 모용준도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오. 사실 뇌혈도 장유추 선배를 업고 온 사람이 그라오.”

모용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군월중이 말을 이었다.

“모용준은 혼절하기 전 이런 말을 남겼소. 귀도신마가 우리를 살려 주었다.”

“귀도신마가……?”

“마교도답지 않은 짓이지. 자기들을 추격해 온 적을 살려 보낸 것이오.”

모용린은 잠시 생각하고서 반문했다.

“자신들의 무용을 전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을까요?”

“본 부주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소. 그러나 이어진 모용준의 말이 의미심장하더군.”

“작은 오라버니의 말이라고요?”

“배신자가 있었다.”

모용린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군월중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천무맹 안에 배신자가 있었다고 했소. 그들이 마교도에게 기별을 넣어, 추격대를 요격할 병력을 편성하게 해 주었다는 거요.”

“그런……?”

“그 이후에 혼절해 버린지라 자세한 얘기를 듣지를 못했소만, 본 부주는 그들과 이번 북풍장을 습격한 무리가 큰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소.”

“그렇군요.”

모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다지 시원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무의미한 일 아닌가요? 이미 반역 세력은 척결당했잖아요.”

“그리고 배후는 어둠 속에 묻히게 됐지. 하지만 본 부주는 이게 끝이라고 결단코 생각할 수 없소.”

“그래서, 제게 무얼 바라시는 거죠?”

군월중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지난번에 모조리 설명해 드렸을 텐데요.”

“이번엔 제대로 설명해 달라는 말이오. 그때 숨겼던 얘기까지도.”

모용린은 하마터면 놀라는 표정을 지을 뻔했다. 자신이 숨긴 게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단 말인가?

사실 군월중으로서도 심증만이 있는 상태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흔적을 살피던 도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했던 까닭이다.

‘마철이 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살수들 중 대부분은 시체의 흔적도 찾기 힘들 정도의 무공에 당했다. 처음엔 맹주님의 것인 줄 알았으나, 아무래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모용린의 증언에 의하면 남궁운은 단장이 끊어지는 극독에 처음부터 당한 상태였다.

그런 마당에 절초를 펼쳐 수십의 살수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어려웠을 터.

‘그렇다면 또 다른 강자가 한 명 있었다는 의미.’

미안한 얘기지만 모용린이나 다른 이들이 그런 강자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군월중은 그녀를 추궁하기로 한 것이다.

“…….”

“…….”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한 채 눈싸움만 했다. 물론 이건 처음부터 모용린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보셨어요. 그 자리엔 또 다른 무인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역시.”

군월중은 짤막하게만 대꾸했다. 그리고 더 설명하라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저 역시 그자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정말이오?”

미심쩍은 눈으로 되묻는 군월중. 모용린은 최대한 침착해 보이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왜 그때 말하지 않았소?”

“말했더라도 믿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요. 무명의 신비 고수가 갑자기 나타나 적들을 궤멸시켰다, 그렇게 말한다면 부주님께서 정말 믿으셨을까요?”

“으음…….”

군월중은 침음을 뱉었다. 사실 그 역시 흔적들을 살피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의문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군월중은 다시 추궁하는 눈으로 모용린을 보았다.

“정말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오?”

“인상착의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였고, 체격은 평범한 수준에 인상 역시 크게 눈에 띄지 않았어요.”

말하나 마나한 인상이었다. 군월중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전부요?”

“평범한 인상. 그게 제가 받았던 느낌의 전부예요. 원하신다면 화상을 그려 드릴까요?”

“……그럴 필요까진 없을 듯하군. 그 정도 되는 고수를 그림쪼가리 들고 찾아다닌다고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을 테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용린의 표정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군월중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구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음.”

군월중은 더 말을 나누지 않고서 방을 나섰다. 사실 그로서는 없는 시간을 겨우 쪼개어 모용린을 찾아온 것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모용린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미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얘기할 수 없어요. 그가 바라지 않을 테니까.’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정천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용린 역시 천무맹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군월중은 믿음직한 사내다. 그라면 정천의 정체를 알더라도 협력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집행부 전체가 그러할까?

그럴 리는 결코 없으리라는 게 모용린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정천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천무맹은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집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 어느 곳에 적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곳.

그것이 지금의 황룡성이었다.

“왜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지?”

“……!”

모용린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모용준이 어느새 실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언제부터 깨어 계셨죠?”

“조금 전부터. 보아하니 이곳에도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모용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북풍장이 습격받았어요. 연회를 빌미로 맹주님을 암살하려던 무리가 있었죠.”

“그랬군. 그리고 얘기를 듣자하니 그들은 실패한 모양이로군.”

“그래요.”

모용준은 힘없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천 선배인가.”

“오라버니가 그걸 어떻게?”

모용린이 놀란 눈으로 모용준을 보았다.

정천이 모용훈을 제압했던 때에 모용준은 기절해 있었고, 이후에도 그녀는 그때 일을 발설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모용준이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장유추 선배님께 들었다. 본연의 실력을 숨기고 있지만, 사실 그는 천무맹 내에서도 따를 자를 찾기 힘든 고수라더군.”

“그랬군요.”

“걱정하진 마라. 나 역시 어디 가서 떠들어댈 생각은 없으니까.”

“알고 있어요.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말하셨겠죠.”

모용준은 한숨을 뱉고서 말했다.

“힘들구나. 다시 잠들게 되면 언제 일어나게 될지 모르겠어.”

“푹 쉬세요, 오라버니.”

“그래야겠구나.”

모용준은 눈을 감았다. 모용린은 그의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고서 이마를 매만졌다.

“큰 형님께선 괜찮으시지?”

“……물론이죠.”

모용린이 애써 밝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경황이 없어 살피지 못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모용준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기실 그와 동료들은 중상을 입고 혼절한 동료들을 위해 며칠 밤을 새 가며 귀환한 것이었다.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한 모용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살펴야 할 것은 모용준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북풍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정천,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 * *

“그게 뭔가?”

칠삼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정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시체가 되기 직전의 사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내가 고문했지.”

“대체 왜?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그런 자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치료하려고.”

칠삼은 더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정천도 더 대답하지 않고서 들쳐든 마철의 몸뚱이를 안으로 들였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화연란이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더 대답하기 귀찮았던 정천은 짤막하게 말했다.

“뜨거운 물이랑 천 좀 가져다 줘.”

“아, 알겠어요.”

부엌에 있던 담미화와 소윤 역시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정천은 그녀들에게도 각각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나 곧장 달려 나간 소윤과 달리 담미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침착한 표정으로 정천에게 말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음?”

정천은 그제야 마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는, 벌써부터 식어 가기 시작한 시체를.

“그렇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중얼거리는 정천.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열심히 살리려 하던 것치고는 너무 차가운 반응이었다.

“대체 그자가 누구기에 그러는 건가?”

칠삼이 다시 물으니 정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이었지.”

“적이라고?”

“놈에게 약속을 하나 했었어. 마지막까지도 살아남는다면 전력을 다해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러기 전에 죽어 버렸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먼.”

정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 오던 화연란이 걸음을 멈췄다.

“모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걸 처리하고 와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정천은 할 말만 남기고서 마철의 시체를 가지고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결국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도 그걸 알고 싶습니다요.”

화연란의 물음에 칠삼이 대답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담미화가 입을 열었다.

“저 시체, 장로였어요.”

“장로요? 천무맹 장로 말인가요?”

고개를 끄덕인 담미화가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북풍장을 습격했던 반역 세력의 주동자가 장로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렇군요.”

화연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 남궁운이 치명상을 입고 모용세가가 큰 타격을 입었던 사건. 그 사건과 지금 상황을 연결해 보니 이내 답이 나왔다.

반면 정천의 정체를 모르는 칠삼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장로라니? 정천 저 친구가 대체 왜 천무맹 장로의 시체를 들고 있답니까?”

“그건…….”

담미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심후와 칠삼은 아직 정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 반역 세력이란 작자들을 해치운 사람이, 아마도 저 인간일 거예요.”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소윤이었다. 칠삼이 멍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담미화는 물론이고 화연란도 당황해 버렸다.

“소윤아!”

“뭐 어때요? 어차피 우리 중에 심후 오빠랑 칠삼 아저씨만 그 사실을 모르잖아요. 따돌리느니 차라리 비밀을 공유하는 편이 낫죠.”

“하지만…….”

화연란은 난처해하면서도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이미 말해 버린 것을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었고.

정작 칠삼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저, 죄송한데 대체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 거죠?”

자기 방에 있던 심후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화연란은 곧장 그를 돌아보고서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죠?”

“예? 아, 그러니까…… 반역 세력? 뭐 그런 자들을 해치운 사람이 정천 대협일 거라고…….”

다 들었구나. 화연란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이렇게 됐으니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어.”

짤막한 말이 화연란의 말을 잘랐다. 돌아보니 어느새 정천이 장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윤이 물었다.

“벌써 내다 버리고 왔어요?”

“그래. 암만 악인이래도 사람 시체를 내다 버린다고 표현하고 싶진 않다만.”

“아저씨가 할 말 같진 않은데요.”

“나만큼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소윤은 피 하는 소리를 냈지만 더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어쨌든 기왕 이렇게 됐으니 털어놓도록 하지.”

정천은 심후와 칠삼을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나 사실 절세고수야.”

“예?”

“뭐야?”

딱 예상한 만큼의 반응이 돌아왔다. 직접적으로 정천의 싸움을 보지 못한 그들이기에 당연하기도 했지만.

“뭐, 간단히 말하자면 그간은 실력을 숨기고 있었지. 고수에게 있어서 신비성은 꽤나 중요한 요소니까.”

“자네 지금 진담으로 하는 소린가?”

칠삼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사실 그는 맹주 남궁운의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이다.

“분명 맹주께서 자네는 내공을 모두 잃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었지.”

“그럼 지금 자네가 내공이 없는 절세고수라고 말하고픈 것인가?”

“그렇진 않아. 대신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군.”

피식 웃은 정천이 말했다.

“천무맹주를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절세고수라고.”

“으휴, 잘난 척은.”

소윤의 한숨에도 정천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와 함께 칠삼과 심후의 표정도 더더욱 굳었다.

“못 믿겠다는 표정들이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네.”

칠삼의 말에 정천은 심후를 돌아봤다.

“너도 못 믿겠어?”

“예? 아, 저기. 그게…….”

심후는 확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저번에 두들겨 맞았을 때 느낀 거지만, 확실히 정천의 움직임은 고수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심후 자신이 상당한 단련을 거쳤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더욱.

하지만 듣기로 정천은 내공을 소실했다고 했다. 본인 역시 그렇게 행동했었고.

“뭐, 하긴 나도 누가 절정고수라고 말로만 떠든다면 믿지 못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정천이 눈을 살짝 감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던가?”

나직이 읊조리며 눈을 뜨는 정천.

그의 눈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운.

심후와 칠삼은 물론, 내공이 약한 소윤 역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부르르르.

심후는 자신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기운의 푹풍 앞에서 본능이 울부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험하다고, 눈앞의 존재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고.

‘어, 어어…….’

심후는 입만 벙긋거렸다. 발버둥치고 비명 지르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이런 것이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쯤.

정천이 기운을 거두었다.

“허억!”

큰숨을 내뱉은 심후가 한동안 헐떡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칠삼과 소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소윤은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 나쁜 놈아!”

울먹이며 소리치는 소윤이었다. 정천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마워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느낀 이 감각이 훗날 너희의 목숨을 구할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칠삼이 여전히 헐떡이는 가운데 물었다.

“간단한 거야.”

모두를 한차례 돌아본 정천이 말했다.

“황룡성에 돌아왔을 때 난 한 가지 결심을 했어. 내가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내 본래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너희 모두는 내 신뢰를 얻게 된 거지.”

“그래서요? 고마워라도 하란 거예요?”

이번에도 쏘아붙이는 소윤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독기가 줄어들었지만.

피식 웃은 정천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마음을 다잡으라는 거다. 내 신뢰를 얻었다는 것은 곧, 내 적들의 표적이 되게 되었다는 의미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얘기를 더 들어라, 심후. 어쨌든 지금의 감각을 잘 기억해 둬. 그리고 이따금 떠올리며 몸서리치도록 해. 그 몸서리가 오한으로 줄어들고, 오한이 다시 작은 떨림 정도로 변할 때, 칼날이 눈앞에 있어도 떨지 않는 담력을 얻게 될 테니.”

가만히 있던 화연란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단 말씀이군요.”

“그래. 너희도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일동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이번의 맹주 암살 미수는 그 전의 사건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게다가 마교의 무리까지 천무맹 앞에 나타났던 직후인 만큼 그 의미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십여 년 전의 전쟁이 재개될 수도 있다.

무인들의 뇌리엔 어느새 그러한 생각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마교라는 거군요? 이제 곧 마교와의 전쟁이 시작될 거고요.”

소윤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천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교는 내 적이 아니야.”

“네?”

놀란, 혹은 경악 어린 시선이 정천에게 집중됐다. 정천은 의미 전달이 이상하게 됐다는 걸 느끼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무맹이 내 적이라는 의미도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간단해, 란아. 모든 걸 집단 전체의 것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는 거지. 예컨대 이번 맹주 습격 건도 온전히 마교만의 행동이라 볼 수는 없어.”

“하지만 마교의 무리가 나타났었잖아요?”

“까마귀가 날자마자 배가 떨어졌다고 해서 까마귀가 배를 떨어트렸다고 볼 수는 없지.”

“어느 정도의 영향은 주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 하지만 그 영향이란 결국 간접적인 것에 불과해.”

화연란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정천을 보았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이들은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래.”

정천은 간단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이 윤우장로 마철을 조종하여 맹주 남궁운을 피습하게 했지. 그 결과 맹주는 치명상을 입었고.”

일동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뭔가 알 수 없는 배후가 있는 것 같군.”

칠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이는구먼. 자네의 목표라는 게 바로 그 배후라는 것 말이야.”

“그래.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잠시 뜸을 들였던 정천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적은 천무맹과 마교의 전쟁이야.”

* * *

금역.

언제나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그곳을 감시하는 무리가 있었다.

천무맹주 남궁운이 정신을 잃기 전에 남긴 명령. 금역을 드나드는 이들을 감시하라는 것.

지금 소수의 비영대원들이 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영대 내에서 그다지 뛰어난 실력자들은 아니었다. 사실 평소 같았다면 이런 임무에 선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예 대원들 중 상당수가 마교와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금역의 경계선에 은신한 채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감시라 해 봐야 결국 나무나 수풀 등에 숨은 채 주변을 살피는 정도였지만.

대단한 일은 결코 아니고, 그렇기에 무척이나 지루한 일이었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안개로군요.

—쓸데없는 전음 사용을 자제하라, 삼호.

삼호라 불린 비영대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작 이런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할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멍청이가 이런 곳까지 오겠느냔 말입니다.

—맹주님께서 내리신 명령이다.

—독으로 사고 능력이 저하됐을 때 내리신 명령이기도 하지요. 명령을 들으신 새 대주님도 그 이유를 듣지 못하셨다고 하잖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명령은 명령이다.

—쩝, 융통성이 없으시네.

그렇게 투덜거린 삼호는 이내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삼호!

—젠장. 몸이 찌뿌드드한 걸 어쩝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들 모두가 며칠째 여기서 죽치고 있잖습니까. 그동안 발견한 게 뭐가 있습니까? 이따금 독사들이나 기어 다닐 뿐이잖습니까?

—그거야…….

그때였다. 금역의 안개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잡담을 하던 비영대원들은 순간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

“…….”

그들은 호흡을 죽인 채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안개 너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입니다!

—쉿! 전음을 자제해!

초보적인 실수였다. 정예 비영대원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전음을 쓰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전음마저 엿들을 수 있는 고수가 얼마 없기는 했지만.

비영대원들은 다시 상황을 살폈다. 이제 안개 너머로 투영되는 그림자는 한층 선명해져 있었다.

장인의 손을 거친 도자기처럼 부드러운 굴곡. 나긋나긋한 걸음과 머리 뒤로 흩날리는 긴 머리칼.

‘여자!’

‘독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여자라고?’

비영대원들이 의아함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쉭!

별안간 안개 너머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삼호의 목덜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어리석은데다 주의 깊지 못한 것들이로구나. 하긴 전음 따윌 나누지 않았더라도 본후의 심안(心眼)을 피할 순 없었겠지만.”

“큭!”

삼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서 품속의 비수를 빼 들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가 같은 편일 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삼호의 두 팔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어?”

의아해하던 삼호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

“……!”

그 모습을 목도한 비영대원들 모두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삼호를 쪼갠 것은 채찍, 혹은 버들잎처럼 흩날리는 연검이었다.

그것도 한 자루가 아닌 수십 자루, 아니 수백,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칼날들!

‘어, 어떻게?’

‘이기어검?’

각각의 칼날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희미하게만 보일 따름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 확실했다.

‘멍청하게 있다가는…….’

‘여기서 죽는다!’

파파파팟!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영대원들이 몸을 날렸다. 하나같이 서로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방향으로.

“후후후.”

여인은 보드랍게 웃었다. 순간적으로 안개가 흩어지며 절세미색인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칼날들의 정체 역시.

피와 같은 흑적색(黑赤色)을 띤 머리칼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재미있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 비영대원의 귓가에서 들렸다. 그 순간 내달리던 비영대원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토막이 났다.

“재미있어.”

이번엔 또 다른 비영대원의 곁이었다. 거리상으로 수십 장은 떨어져 있던 위치였다.

쩌어억!

이번엔 깔끔하게 절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물론 그들의 몸뚱이를 가른 것은 그녀의 머리칼이었다.

‘머리카락에 검기를 실었다고?’

우연찮게 두 죽음 모두를 목격할 수 있었던 비영대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이건 이기어검보다도 더욱 놀라운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지를 지닌 고수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으, 으아아!”

그 비영대원은 그 순간 땅을 굴렀다. 자갈에 발등을 채이는 바보 같은 실수를 벌인 것이다.

“으, 으으으.”

비영대원은 엎어진 몸을 뒤집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던 중 그의 몸이 부드러운 느낌의 무언가에 닿았다.

여인의 다리다.

비단결의 부드러운 감각과 그 너머의 살갗이 느껴졌다. 동시에 어울리지 않게도 향기로운 매화향이 코끝을 찔렀다.

“네가 마지막이로구나.”

“히익!”

몸을 돌란 비영대원이 경기 어린 소리를 뱉었다. 여인은 우습다는 듯 미소를 띤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름다웠다.

비영대원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료들을 잔인하게 도륙한 마녀 같은 계집이건만, 고작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다니.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여인의 미소는 천진하고 매혹적이었기에.

“마철은 어떻게 되었지?”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영대원이 자기도 모르게 반문해 버렸다.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윤우장로 마철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다.”

“마철은…….”

비영대원은 잠시 대답을 삼키고서 다른 말을 꺼냈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린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소?”

“응?”

여인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어찌 보면 기괴하고, 어찌 보면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

“대답의 대가로 내 목숨을 놓아 주실 수 있느냔 말이오.”

잠시 천진한 얼굴로 비영대원을 보던 여인이 아 하는 감탄성을 뱉었다.

“그렇구나. 넌 지금 본후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그렇소.”

쉭!

비영대원의 옆으로 바람이 스쳐 갔다. 다음 순간, 비영대원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으아아악!”

비영대원은 잘려 나간 팔을 움켜쥐고서 땅을 굴렀다. 여인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누구도 감히 본후에게 거래 따위를 제안할 수 없노라.”

“미친 것!”

“질문에 대답이나 하여라.”

“닥쳐라! 네깟 것에게 해 줄 대답 따윈 없다!”

비영대원이 고통 속에 소리쳤다. 그 반응에 여인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하냐? 그렇다면…….”

쉭!

비영대원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네게 볼일은 더 이상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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