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第一章 상황 종결 (49/146)

第一章 상황 종결

고요 속에 울린 굉음에 장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윽고 그 시선들 대부분이 격하게 흔들렸다.

우르르르…….

담벼락에 반쯤 박혀 있던 암객의 몸이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반파된 담벼락이 요란하게 무너졌다.

정천은 언제 주먹을 뻗었냐는 듯 담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는 듯한 실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정천은 고개를 돌려 장내를 훑었다. 당황하는 얼굴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였다.

그중엔 파리한 안색의 천무맹주 남궁운도 있었다.

“제때에 도착했군.”

정천의 목소리에 장내의 인물들이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렸다.

마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일에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그는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서 현 상황을 파악했다.

‘쥐새끼가 하나 굴러들어 왔군!’

뭐하는 놈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세를 뒤집을 수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철은 백팔암객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하나! 잡놈 하나가 끼어들었을 따름이다. 즉시 해치워라!”

그러나 암객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동료가 일격에 절명하는 모습을 본 까닭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무슨……? 이들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말인가?’

마철은 내심 당황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마철의 심복들. 마철 본인이 수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 중의 정예였다.

무력 증진은 물론이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정신을 강철처럼 무장시켰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공포를 느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있을 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사실이 마철을 분노케 했다.

“무얼 하는 거냐!”

마철의 일갈에 암객들이 움찔했다. 마철은 목소리를 더욱 높여 소리쳤다.

“조금 전엔 그저 기습에 당했을 뿐이다. 하물며 놈은 혼자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너희들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냐!”

그제야 암객들의 눈빛에 냉정이 깃들었다. 뼛속까지 마철에게 복종하도록 세뇌되어 있는 그들인 만큼 마철의 호통이 즉효를 보인 것이다.

타타탓!

남궁운을 압박 중인 몇몇을 제외한 암객 대다수가 정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천은 힐끔 하는 눈으로 모용린을 돌아봤다.

“피해 있어.”

“예?”

멍하니 있던 모용린이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녀 역시 지금 상황이 얼떨떨했던 것이다.

정천은 두 번 말하지 않고서 앞으로 도약했다. 그녀가 피하길 기다리느니 자신이 멀리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필연적으로 정천과 암객들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던 암객들이 단도를 뿌렸다.

수십 개의 단도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허공에 펼쳐졌다. 틈을 파고들거나 피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수준이었다.

애초에 정천으로선 피할 생각이 없었지만.

휙.

정천의 주먹이 허공을 격타했다. 순간 무형의 파동이 그의 주먹으로부터 퍼져 나와 전방으로 쏘아졌다.

파르르르!

허공을 가르던 단도들이 순간적으로 힘을 잃었다. 마치 파도에 휩쓸린 돛단배 같은 모습이었다.

정천이 두 번째 주먹을 뻗었다. 이어진 파동이 비틀거리던 단도들을 날아오던 방향으로 되밀었다.

결과적으로 단도들은 암객들을 향해 뿌려지게 됐다.

“……!”

암객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것은 상황을 살피던 마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권기를 응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역시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이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생사투를 넘나든 것도 수십 번. 그러나 지금 같은 권격은 난생처음이었다.

반사된 단도들엔 정천이 실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암객들은 본능적으로 쉽게 막을 수 없겠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들이 각자의 병기로 단도들을 쳐냈다.

정천은 그 순간을 파고들었다.

쉬쉭!

정천의 몸이 전방으로 도약했다. 천마보를 펼친 그의 몸은 단도들을 장벽 삼아 암객들에게로 쇄도했다.

단도를 쳐내느라 틈을 보인 암객들이 첫 표적이었다.

정천의 주먹이 연달아 세 번 펼쳐졌다. 쾌(快)의 무리를 극한까지 추구한 고속의 권격이 암객들의 미간과 명치, 인중을 강타했다.

퍼퍼퍽!

“컥!”

“쿨럭!”

공격당한 암객들이 외마디 비명을 토하며 고꾸라졌다. 섬전 같은 속도로 급소를 찌른 까닭에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빠르다!’

마철은 기겁하는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속도만으로는 남궁운조차 능가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저런 놈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많이 놀란 모양이로군, 마철.”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마철이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지친 기색의 남궁운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맹주…… 저놈은 당신의 수하인가?”

“한때는 그랬었지.”

남궁운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쳤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는 내가 만든 업보의 잔재다. 아마도 그랬기에 내게 본신의 실력을 숨겼던 것일 테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뜬구름 잡는 소릴 지껄이는군. 업보의 잔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냐?”

남궁운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용검대 최후의 일인이다.”

“용검대!”

마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시에 엄백에게서 들었던 정보가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놈의 이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그래, 저 친구가 바로 정천이지.”

“……!”

마철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놈이었나!’

엄백이 말했던 절세의 고수.

갖가지 무림방파의 무공들과 마교의 무공까지 섭렵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인물!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이기에 머리 한쪽으로 치워 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것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남궁운은 부들거리는 마철을 보며 내심 통쾌함마저 느꼈다. 어떻게 정천이 자신을 속였었는지 여전히 의문이긴 했지만.

그사이 정천에 의해 십여 명의 암객들이 쓰러진 상태였다.

나머지 암객들도 주춤하여서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모습. 마철은 일이 수틀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런 빌어먹을……!”

“도망칠 생각은 마라!”

남궁운이 일갈하며 마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철은 깜짝 놀라 후방으로 경공을 펼치는 동시에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나, 멍청이들!”

엉거주춤하고 있던 주변의 암객들이 흠칫 놀라 남궁운에게 공세를 펼쳤다.

남궁운의 두 손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순간 그의 절정권법인 천신장(天神掌)이 펼쳐져 마철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큭!”

마철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는 검막을 펼치는 동시에 신형을 최대한 좌측으로 틀었다.

콰과광!

검막이 박살 나는 것과 권강이 마철의 옆구리를 스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에 마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남궁운도 무사하진 못했다. 공세에 집중하느라 암객들의 반격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두 자루의 단도가 그의 복부에 박혔다. 그 외 자잘한 상흔이 몸 위에 생겨났다.

상처 부위에서 흐르는 피는 검은빛이었다. 갖가지 방식으로 배합한 독들이 남궁운의 체내에서 날뛰었다.

이는 만독불침인 남궁운으로서도 참기 힘든 격통이었다.

“크으…….”

남궁운의 몸이 비틀거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마철이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흥! 멍청한 늙은이, 냉정을 잃고 자멸해 버렸군!”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남궁운은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그저 나직이 마철에게 권고할 따름이었다.

“네놈의 뒤나 보고서 그런 말을 해라.”

“뭐야?”

마철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목석처럼 굳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정천이 서 있었다. 어느새 수십 구로 늘어난 암객들의 시체를 주변에 두른 채로.

“이, 이런 미친…….”

마철은 어이가 없어 말을 더듬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객들 중 상당수가 살아 있었다.

십여 명이 당하긴 했다지만 남은 숫자는 그 몇 배에 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인원이, 잠시 남궁운에게 한눈이 팔린 사이에 전멸해 버렸단 말인가?

공포보다도 황당함을 느끼던 마철의 시선이 정천의 손아귀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흑색의 검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그것을 검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검강을 형상화하여 손에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저것이 암객들을 전멸시킨 장본인일 터였다.

“네놈과 달리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지.”

후방에서 들리는 남궁운의 목소리. 왠지 모르게 그는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이런 견식을 하게 되는군.”

“큭!”

마철은 이를 악물었다. 황당함이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뒤늦게 공포와 불안이 찾아들었다.

남은 암객들의 숫자는 대략 사십 명. 더불어 배신하여 그에게 붙은 무인들까지 치면 백 명을 훌쩍 넘는 병력이었다.

반면 저들은 다섯 명이 채 안 되는 숫자.

그나마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고작 둘뿐인데다, 그중 한 명인 남궁운은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고?’

일 대 백. 누가 봐도 후자가 압도적이어야 할 숫자 차이다. 그것은 아무리 신산절기가 난무하는 무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마철은 백 명이 한 명에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정천이 강룡검을 들어 올렸다.

이글거리는 흑색 칼날 끝이 마철의 얼굴을 겨냥했다.

“넌 죽이지 않는다.”

“……뭐라고?”

“네게서 캐내야 할 게 많거든. 사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혈선이란 놈들에 대한 것이지만.”

마철의 얼굴이 경직됐다.

“팔부혈선을?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냐?”

“그래.”

태연히 대답한 정천의 시선이 잠시 남궁운에게 향했다. 남궁운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마철을 돌아본 정천이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지.”

“…….”

“천무맹은 나와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왔던 곳이다. 우리의 고향이고 부모이며 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궁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음 같아선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우리의 집이지. 내 동료들이 돌아왔어야 했을 집.”

“…….”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배후가 혈선들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난 그들을 만나야 한다.”

마철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만나서 무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간단한 걸 묻는군.”

정천의 눈이 순간 폭발적인 살기를 내뿜었다.

“용검대의 목숨 값을 받아 내야지.”

“미, 미쳤군.”

마철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정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말을 이어 갔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네가 상당한 강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들은…… 혈선들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자들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들을 당해 낼 순 없다.”

“잘됐군.”

정천의 짤막한 말에 마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놈이 잘됐다고 말한 것인가?

“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놈들이 평범한 수준의 강자여서야 말이 안 되지. 너 같은 놈이 벌벌 떨 정도의 괴물들이어야 사냥하는 보람도 있을 테니까.”

“미, 미친놈. 혈선들을 사냥하겠다고? 네놈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래.”

시원할 정도로 간단한 대답.

마철은 욕설을 한껏 퍼부어 주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감만 충만한 놈의 멍청함을 비웃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장내는 지금 놈 하나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마철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암객들에게 전음을 날리려 했다.

—목숨을 걸고 놈을 막…….

정천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마철이나 남궁운으로서도 휘둘렀다는 사실 자체만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쾌속으로.

그 순간 마철의 왼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커억……!”

손이 끊어지는 감각에 마철이 소스라쳤다. 그 순간 정천은 두 번째 검격을 날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눈으로나 겨우 좇을 수 있는 속도. 어찌나 빠른지 손이 잔상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

파악!

마철의 오른팔 역시 마찬가지로 끊어졌다. 졸지에 양팔을 잃은 마철이 무릎을 꿇었다.

“크아아악!”

끓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피식 웃으며 농담 투로 말하는 정천. 그 모습은 남궁운조차 순간적으로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양팔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채로, 마철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놈을 죽여! 놈을 죽이란 말이다!”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있던 암객들이 주춤주춤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정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덤비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어차피 너희 모두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테니.”

“……!”

“어디 한 번 마음껏 몸부림쳐 봐라.”

화아악!

어마어마한 살기가 장내를 휩쓸었다. 어지간히 담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정도의 살기였다.

직접적으로 살기에 노출되진 않은 남궁운조차 몸이 저릿할 정도였다. 물론 그의 몸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다는 점도 있긴 했지만.

하물며 직접 살기에 노출된 암객들과 배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으, 크으…….”

“으…….”

곳곳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주로 배신자 무리의 무인들이 흘리는 소리였다.

암객들은 비교적 자제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럼에도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정천은 웃으며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촤악!

강룡검의 흑색 검신 위로 순간 붉은 기운이 뭉쳐 들었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주변으로 몰아쳤다.

십이성 내공을 실은 강룡검이 최초로 펼쳐졌다.

제일검(第一劍), 열파나락(熱波奈落)!

콰과과과광!

강렬한 열폭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게걸스러운 열기가 공기를 집어삼키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길 속으로 빨아 들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암객들이 경공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열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르륵!

열폭풍에 빨려 든 이들이 삽시간에 타올라서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던 이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엄청난 열기로 인해 영락없이 화상을 입게 된 것이다.

마철 역시 그중 하나였다.

“크으으윽!”

양팔이 잘린 까닭에 방어를 할 수도 없었다. 두 손이 없으니 균형도 잃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달리거나 할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열기에 노출된 그의 몸은 발갛게 익은 상태였다.

양팔의 절단면이 열기로 인해 봉합되긴 했으나 그 사실을 결코 기뻐할 순 없었다.

마철은 그저 격통 속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정천이 열파나락의 열기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남은 적들을 세었다.

이미 일격으로 절반이 궤멸된 상태.

그렇다고 나머지를 그냥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맹주는?’

남궁운은 이미 멀리 피신한 상태였다. 하기야 그 정도 눈치 정도는 있을 터였다.

마음을 놓은 정천이 나머지 적들을 응시했다.

“이제 끝을 내도록 하지.”

정천이 다시 땅을 박찼다. 그것을 신호 삼아 남아 있던 적들이 하나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망을 치려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은 공포가 지배하게 된 뒤.

마철마저 당한 마당이다. 더 이상 그를 도울 의리도 방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목숨이 더욱 중했다.

이는 정천으로서도 예상한 반응. 그는 조금 전 말했던 것과 달리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쫓지 않을 셈인가?”

어느새 다가온 남궁운이 물었다. 정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답했다.

“예. 어차피 놈들에겐 더 이상 볼일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도망친다 해 봐야, 이곳은 황룡성이니까요.”

그랬다. 남궁운조차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황룡성, 천무맹의 심장이자 그들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천무맹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다. 하물며 지금처럼 구심점마저 잃게 된 직후라면.

반역이 이빨을 드러낸 저들이 도망칠 곳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집행부에 명령을 내려야겠군.”

“그러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 소동에 대해선 순식간에 퍼질 테니까요. 집행부주는 똑똑한 사람이니 곧장 행동에 나서겠죠.”

남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월중이라면 필시 이번 일의 배후까지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질적 배후인 혈선들까지 건드리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남궁운은 여러 심경이 담긴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몸의 상처나 피로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정천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천은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궁운을 무시하고서 시선을 옮겼다.

비슷한 표정의 모용린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도 남궁운보다는 침착해 보이는 그녀였다. 정천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겨우 입을 연 모용린.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정천이 피식 웃고서 말했다.

“천무맹의 썩은 치부에 직면하게 된 심정이 어때?”

“…….”

모용린은 침묵했고, 그것은 남궁운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정천은 그녀가 아닌 남궁운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천무맹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었다고.

남궁운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잘못을 실감할 뿐.

“모든 것은 나의 불찰이었네.”

그제야 정천이 남궁운을 돌아봤다.

“왜 우리를 그곳에 보냈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 그것을 꺼낸 정천의 눈빛은 조금 전 암객들에게 향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남궁운은 내심 씁쓸함을 느꼈다.

“자네에게 있어선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는 모양이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내게 인내심이 남아 있다는 데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알고 있네. 어쩌면 나는 죽을 때까지도 자네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쓰게 중얼거린 남궁운이 조금 뒤에 덧붙였다.

“용검대를 파견하게끔 명령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비록 혈선의 의지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변명하진 않겠네. 그러나 내게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말게. 당시의 나는 그들의 수하나 다름없었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고.”

덜컹!

별안간 문이 열리며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봉화를 보고 되돌아온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시체가 즐비한 장내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했다.

“이게 무슨!”

“아가씨!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삽시간에 소란이 벌어졌다. 정천과 남궁운은 쓴웃음을 지었고, 모용린이 황급히 그들을 통제했다.

“이래서야 얘기를 나누기가 힘들겠군.”

“더 변명할 거리가 있습니까?”

“변명하진 않을 거라고 말했네. 그리고 자네도 그런 걸 듣고 싶진 않을 테고.”

남궁운이 다른 장소로 향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채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정천은 그를 부축하지도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우선은 몸을 회복하십시오. 이후에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자네는 어쩔 셈인가?”

정천은 한쪽을 가리켰다. 반죽음 상태의 마철이 그곳에 고꾸라져 있었다.

“놈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남궁운은 그 볼일이란 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기에…….

정천은 마철을 어깨에 걸치고서 말했다.

“지금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누굽니까?”

“믿을 수 있는 인물?”

“그렇습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으며, 혈선의 손아귀가 닿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인물 말입니다.”

남궁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몇 인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 대다수는 물론 반혈선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을 믿을 순 없었다.

‘설마 마철이 배신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었던가? 다른 이들 역시 다를 것은 없다.’

더 이상은 연맹의 유대감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연맹 바깥의 사람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으며, 누구보다도 든든한 인물을.

결국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군사라면, 군사 제갈현이라면 믿을 수 있네.”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남궁운을 똑바로 보며 묻는 정천이었다. 남궁운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조차 믿을 수 없다면 천무맹 안에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걸세. 만일 그마저 혈선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이미 이곳에 희망은 없다고 봐도 좋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십시오. 오늘 일, 그리고 저에 대해서도.”

“알겠네.”

정천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로 걸음을 떼진 않았다.

“맹주님이라면 혈선들과 접촉했었겠지요?”

“물론이네.”

“어디서 그들을 만났었습니까?”

“금역. 혈선들은 광륭혈독무의 안개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네.”

정천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도 가까운 곳에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군.”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늘 일에 대해 들으려면, 역시 누군가가 보고를 해야만 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들이라고 해도 안개 속에 앉아서 천무맹의 일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을 테니까. 보고를 하는 누군가가 있었을 테지.”

“그 누군가를 막는다면 당분간 그들을 교란할 수도 있겠군요.”

남궁운은 정천의 의도를 이내 파악했다.

“당분간 그 누구도 금역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네.”

정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혈선들과 연락을 취할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겠군.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달리 접근을 금지하지는 말되, 금역에 들어서는 이들이 혹여나 있는지 감시하게 하십시오.”

“그럼 군사에게 말해야겠군. 이 임무엔 무엇보다도 비영대가 적합할 테니.”

그제야 정천은 발걸음을 떼었다.

“맹주님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됩니다. 몸을 보중하십시오.”

마치 아끼는 물건을 잘 보관하라는 듯한 말투. 그러나 남궁운은 그런 태도에 불만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는 정천에게 크나큰 빚을 졌고, 오늘은 목숨까지 구원받았던 것이다.

“알겠네.”

“그럼…….”

정천은 가벼이 목례만 하고서 장내를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