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章 이것이 무림
연회의 날이 밝았다. 조금 있으면 수많은 무림 명숙들의 모용세가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풍장을 방문할 터였다.
“…….”
모용린은 옥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는 연습을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엔 근심이 드리워졌다.
평소에도 웃음기가 거의 없는 그녀였으나, 오늘따라 더더욱 웃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그 인간 때문이야.’
정천이 불참하겠다는 말을 한 이후부터였다. 그 뒤로 입맛도 없고 멍하니 있게 될 때가 많았다.
모용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대체 뭘 기대한 거지? 그 사람 하나 오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머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한 것이었다.
“감히 모용세가의 초대를 거절하다니.”
그녀는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고 나니, 어느 정도 자기 합리화가 되는 것 같았다.
“기껏 초대를 했더니 거절당했어. 그래서 네가 화가 나는 거야, 모용린.”
옥경 속의 자신에게 중얼거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손님들이 올 때가 되었던 것이다.
한 시진 뒤,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이름난 문파의 대표들이 속속들이 방문했다.
강서제일검(江西第一劍)으로 불리는 추연검(追聯劍) 낙운추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림명숙들이 북풍장의 연회에 참석했다.
“가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리오. 부디 오랫동안 가문을 이끌어 가셨으면 좋겠구려.”
“방문에 감사드려요.”
모용린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무인들을 일일이 맞이했다.
조금 전과 달리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녀의 완벽한 자태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물론 체면들이 있는지라 대개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했다.
“허허, 천무일미라는 세간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닌 듯하군.”
“우리 아들놈과 맺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꿈 깨시게. 천하의 모용세가가 금지옥엽을 쉽게 내놓으려고?”
“듣자 하니 차기 세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것 같다던데. 그렇다면 신랑을 들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야심이 상당한 모양이군.”
자기들 딴엔 조심스레 얘기하는 것일 테지만 대부분 모용린의 귓가에도 들렸다.
‘그런 얘기를 하려거든 멀리 구석으로 가든지 할 것이지…….’
안 그래도 상한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그래도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내색하지도 못한 채 웃어야 하는 그녀였다.
시간이 좀 지나니 진짜 거물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춘부장의 생신을 축하하네.”
윤우장로 마철이 몇몇 수하들과 함께 들어섰다.
지금까지처럼 감사를 표하려던 모용린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흠칫했다.
‘뭐지?’
마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이라고 생각할 만한 미소였다.
그런데 모용린은 비수에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착각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마철이 살기를 흘린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마철은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히 장내를 둘러봤다.
“허허허,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이 모든 걸 준비하느라 무척 힘들었겠군. 세상 사람들이 모용세가의 여식이야말로 가주의 자격을 지녔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네.”
“과찬이십니다.”
“너무 겸손해 할 것 없다네.”
지금이 아니면 즐길 일도 없을 테니까.
속으로만 중얼거린 마철이 모용린의 어깨를 살짝 짚고서 지나갔다. 그 순간 모용린은 전기가 몸을 훑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그녀는 의혹 어린 눈으로 마철을 뒷모습을 돌아봤다. 그러나 몰려오는 손님들로 인해 의심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 뒤로도 숱한 손님들이 북풍장을 방문했다.
영민한 모용린으로서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였다.
연회 자체는 별다른 일 없이 진행되었다. 애초에 무림명숙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기본 골자였으니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
이따금 앙숙지간의 무인들끼리 으르렁거리는 일도 있었으나, 대개는 보다 이름난 무인들의 눈총과 제지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무인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켜 예를 표했다.
천무맹주 남궁운이 북풍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천무맹주 만세!”
형식적이지만 우렁찬 인사에 남궁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모두 연회를 즐기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궁운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
평소 위풍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남궁운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가득했다.
‘정신적인 피로일 테지.’
모용린은 정파일존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연민을 느꼈다.
요사이 남궁운의 지위를 두들기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었다.
장로들의 실종과 마교의 준동. 이로 인해 남궁운의 위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웠다.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가 상당할 터였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모용린은 남궁운에게 다가가 예를 표했다. 남궁운은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영민한 재녀라는 말은 자네 아버지에게서도 익히 들었네. 자녀들 중에서도 가장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라고 하더군.”
“아버님께서 불민한 딸을 띄워 주시려 하셨던 모양입니다.”
“겸손해할 것 없네. 용봉소회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 역시 자주 들었으니.”
모용린은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음.”
남궁운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려니 마철이 다가왔다. 그를 본 남궁운의 표정이 약간은 풀렸다.
“자네도 와 있었군.”
“예, 맹주.”
마철은 장로들 중에선 그나마 젊은 축이었다. 그런 만큼 친(親)맹주적 성격이 강했으며,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고는 했다.
여기에다 반혈선연맹이라는 끈이 두 사람을 묶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백이 보이지 않는군. 그 친구는 오지 않았는가?”
“글쎄요. 아마도 다른 일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만.”
“그런가. 슬슬 거사에 대해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안 되겠군.”
마철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남궁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아졌다.
“반기를 드실 생각이십니까?”
“음. 그들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하지 않나 싶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옛말에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철이 술 한 잔을 따라 남궁운에게 건넸다.
“한 잔 하십시오.”
“음.”
남궁운은 별다른 의심 없이 술잔을 받아들였다. 마철은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기에 저 역시…….”
한 모금의 술이 남궁운의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갔다.
“최선의 방어를 하려는 것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 순간 남궁운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
마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윽고 그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남궁운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아악!”
“아악!”
장내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자욱하게 사방으로 퍼지는 피 냄새.
마철의 손짓에 따라 다수의 무인들이 주변인에게 암수를 가한 것이었다.
‘배신!’
남궁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그는 체내의 독기운을 한데 모았다.
만독불침인 그에게 타격을 줄 만한 독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타격을 입었다고는 해도 해독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파앗!
온몸의 모공을 통해 독기운이 분출되었다. 그로 인해 호흡이 상당히 거칠어지긴 했지만, 남궁운이 입은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변명거리라도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마철은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냉소를 지었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해도 맹수는 맹수인가. 아니, 오히려 상처 때문에 맹수의 흉포함을 건드린 셈이군.’
그러나 낭패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했던 까닭이다.
그사이 상당수의 무인들이 비명에 죽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인데다 마철 측에 붙은 이들이 예상 외로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암수는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파파팟!
담벼락으로부터 갖가지 암기가 날아들었다.
“크윽!”
“커어억!”
어찌어찌 기습을 막아 낸 무인들도 연달은 암습에 대부분 쓰러졌다.
“적습이다!”
가까스로 암기들을 쳐낸 모용린이 소리쳤다. 북풍장 내의 모용세가 무인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담벼락 쪽에서도 암수들이 모습을 보였다. 마철이 데려온 백팔암객들이었다.
내부의 배신자들의 숫자 역시 엇비슷한 수준. 반면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모용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실수했어.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날이 날인 만큼 무인들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시켰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얼마 안 되는 휴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실수라 볼 수는 없었다. 설마 어느 누가 안방과도 같은 황룡성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했겠는가.
‘아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시기이기에 더욱 만전을 기했어야 했어. 내가, 내가 실수한 거야.’
전력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눈치 빠른 식솔들이 비상시에 쓰이는 봉화를 피우기는 했지만…….
“무의미한 짓을 하는군. 시체 숫자만 늘릴 뿐이다.”
마철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에 모용린은 이를 악물었다.
“윤우장로, 당신 같은 이가 맹의 배신자일 줄은 몰랐군요.”
“놀랐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느낀 배신감에 미치지는 않을 테지.”
마철은 냉소를 머금은 채 남궁운을 돌아봤다.
“지금 심경이 어떻소, 맹주?”
“네놈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을 따름이다.”
남궁운이 한 마리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모든 게 네놈의 소행이었나? 장로들이 사라진 것도, 마교도들이 준동한 것도 모두 네 짓이었는가?”
“크크크, 모든 게 이 마철의 손아귀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다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요. 일련의 상황은 내가 벌인 일이 아니오. 난 그저…….”
마철이 큭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상황들을 이용했을 뿐이지.”
“…….”
남궁운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원흉이냐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좌우를 훑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그의 가까이로 모여들고는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
남궁운의 일갈에 다가오던 이들이 움찔했다.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조차 믿을 수 없다!’
남궁운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저들 중에도 배신자가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바로 옆의 동지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
실상 마철이 득의양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맹주의 수급을 취하는 자에겐 장로의 자리를 하사하겠다! 모용가 계집을 해치우는 자에겐 신생 천무맹의 첫 번째 문파 자리를 약속하지!”
마치 맹주라도 된 듯이 소리치는 마철이었다. 배신자들의 얼굴에도 탐욕스런 표정이 스쳐 갔다.
“네놈……!”
남궁운이 이를 갈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표정이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낭패로다.’
상서로운 자리에 패검하고 갈 수는 없었기에 군자검을 집무실에 두고 온 차였다. 사실 검이 없더라도 남궁운의 무위가 절대적이기도 했고.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군자검이 있더라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
마철이 그런 남궁운을 보며 뇌까렸다.
“걱정 마시오, 맹주. 그대 정도는 나 홀로도 상대할 수 있으니.”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차기 천무맹주의 위를 보장받은 이 몸이, 그대 같은 늙은이를 상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오?”
마철이 손을 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핏빛이 감도는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그가 느긋한 어조로 명령했다.
“모두 죽여라.”
타타탓!
백팔암객들이 먼저 움직였다. 남궁운과 모용린을 비롯한 무인들이 그에 반응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백팔암객 중 하나가 모용린의 전방으로 짓쳐 들었다. 암객이란 이름답지 않게 정직한 접근이었으나, 모용린은 비웃을 수가 없었다.
‘빨라!’
눈으로나 겨우 쫓을 정도의 쾌속.
이들의 실력은 그녀가 생각한 것을 가볍게 웃돌았다.
쐐액!
귀를 찢는 소리가 울렸다. 모용린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연인검을 휘둘렀다.
타앙!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목젖을 노리던 비수가 연인검에 부딪친 것이었다.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 손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함, 그리고 암수가 사라졌다는 당혹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등허리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파악!
모용린이 앞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암수의 검이 그녀의 등을 스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시뻘건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상처 자체는 살갗만 베인 수준. 그러나 그와 함께 몸속으로 침투하는 독이 문제였다.
“윽!”
이마를 감싼 채 그녀가 비틀거렸다. 설마 암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중독되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실력자가 백팔 명이라면……!’
그녀는 당황한 채 주변을 살폈다.
상황은 염려한 것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그녀를 노리는 암객의 실력이 유별히 뛰어난 편이긴 했지만, 백팔암객의 전체적인 전력 역시 모용세가 무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크아악!”
일방적인 학살. 모용세가 무인들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나마 무림명숙들은 제법 버티는 편이었다. 문파와 가문을 대표하는 입장인 만큼 그들의 실력은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무기가 없다는 게 문제였으나, 쓰러진 무인들의 것을 주워 든 이후엔 그럭저럭 암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위태로운 줄타기에 불과할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천무맹주 남궁운은 마철과 맞붙고 있었다. 무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어렵잖게 마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크으으……!”
마철은 당황한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강하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절대적일지는 몰랐다.
“죽을 각오나 하라, 마철!”
남궁운의 주먹에 백색 강기가 어렸다. 백열권강의 강렬한 기운이 마철의 정면으로 휘몰아쳤다.
콰과과광!
허공을 비틀어 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위력에 마철의 몸이 휘청거렸다.
“크윽! 뭐, 뭣들 하나! 남궁운의 목을 쳐라!”
배신자들과 암객들이 남궁운에게로 달려들었다. 모용세가 무인들이 전멸한 직후였기에 전력 대부분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마치 맹수를 노리는 벌 떼 같은 모습.
남궁운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오너라!”
그의 주변으로 백색 강기가 몰아쳤다. 강기는 이윽고 열풍이 되어 전후좌우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콰과과과!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이들의 몸이 갈가리 찢겼다. 그들 역시 호신강기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강자들이었으나, 남궁운의 제왕강기(帝王剛氣)의 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이란 없는 법.
마철은 수하들을 방패막으로 삼은 채 일검을 뻗었다. 그의 검강이 제왕강기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남궁운의 어깨를 찔렀다.
파앗!
새빨간 피가 튀어 올랐다. 남궁운의 무위 앞에 주춤하던 이들이 다시금 전의를 다졌다.
마철이 득의양양하여 소리쳤다.
“봐라! 놈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두들기고 두들기고 또 두들기면 부서지고 죽는다. 쉴 틈을 주지 말고 밀어붙여라!”
암객들과 배신자들이 광기에 휩싸인 채 다시금 남궁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타 죽을 줄 알면서도 등불로 돌진하는 나방처럼.
그러나 이들은 나방이 아니고 남궁운 역시 등불이 아니다.
연달아 제왕강기를 날리는 그였으나,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마철! 비겁하게 굴지 말고 직접 덤벼라!”
분개한 남궁운이 소리쳤으나 마철은 그저 비웃음만 흘렸다.
“댁 같은 늙은이도 죽음이 두렵긴 한 모양이군. 그러나 걱정하진 마시오. 그대가 남겨 놓은 천무맹주의 자리는 내가 잘 써 줄 터이니.”
“너 같은 놈이 천무맹을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맹주의 자리에 필요한 것은 적당한 가식과 권모술수뿐이라오. 그대도 그렇게 천무맹을 이끌어 오지 않았소이까?”
“크으!”
남궁운은 이를 악물었다. 분하기도 했지만 마철의 말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맹주로서 맹의 안위를 위해 많은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중엔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는 일도 많았다.
자그만 문파를 희생시킨다거나, 맹에 충성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거나…….
‘그들, 용검대처럼…….’
남궁운의 눈에 회한이 어렸다.
그는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모용린은 연인검을 땅에 꽂았다. 검신을 지팡이로 삼아 어떻게든 몸을 지탱하려고 했다.
독기운이 이미 온몸을 유린한 뒤. 그녀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그녀를 중독시킨 암객이 천천히 다가왔다.
모용린은 그의 눈을 노려봤다. 목숨을 잃을지언정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암객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독사와 같은 이들이라지만 피도 눈물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암객의 말에 모용린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새카만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당신들이 천무맹을 망치게 될 거야.”
“우리는 그저 새 시대를 열려는 것뿐이다.”
“무고한 이들의 시체 위에서?”
“세상에 무고한 사람은 없다. 시체 위에 세워지지 않은 집단도 없고.”
모용린은 이를 악물었다.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
암객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겨누었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칼끝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이것이 무림. 나를 원망하진 마라.”
모용린은 눈을 꾹 감았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모습은 이게 아닌데.’
주마등이라고 하던가, 모용훈과 모용준을 비롯한 가족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가까운 이들과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들이 귓가를 스쳤다.
좋아했던 이들은 물론, 싫어했던 이들의 목소리도.
그중엔 물론 그자의 것도 있었다.
“말 한번 잘하는군. 그러니 너도 나를 원망하진 마라.”
모용린은 눈을 떴다. 얄궂게도 그 남자의 목소리만은 이리도 생생히 들리다니.
그녀를 겨누던 칼끝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너머, 당황한 암객의 얼굴.
“무, 무슨……!”
콰아앙!
대답 대신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암객의 몸이 허공에 붕 떠서 수십 장을 날아가 담벼락에 처박혔다.
콰드드드!
난전 중임에도 벽 무너지는 소리가 확연하게 들렸다. 전투 중이던 이들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몰렸다.
내뻗었던 주먹을 회수한 정천이 중얼거렸다.
“이것이 무림이니까.”
〖강룡검제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