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二章 폭풍 전야
칠삼은 화륜문 근처의 벌판에 드러누운 채 곰방대를 빨고 있었다.
그도 심후도 지옥 같던 물 긷기 수련엔 상당히 익숙해졌다. 그것을 안 이후로 화연란은 당분간 육체 단련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짤막한 휴식.
얼마 후에 지금까지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릴 듯했지만, 어쨌든 당장이 이 휴식을 즐기기로 한 칠삼이었다.
후욱.
뱉어진 담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서는 스러졌다. 칠삼은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저 구름처럼 훌쩍 떠나고 싶구나. 술병 하나랑 장검 한 자루만 손에 쥐고 유랑한다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겠지.”
“화륜문에 시인이 납셨군.”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칠삼은 몸을 일으켰다. 정천이 논두렁을 걸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나?”
“북풍장.”
“모용가 아가씨를 만나고 왔나? 그렇게나 귀찮아하더니 웬일인가?”
“뭐,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정천은 터덜터덜 다가와 칠삼 옆에 앉았다. 칠삼은 무슨 말을 꺼낼까 생각하며 곰방대를 질겅거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자네, 무척 바쁜 모양이구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정천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일이야 언제나 넘치는 법이지.”
“그야 그렇겠네만…….”
칠삼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갖고 있는 의심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싶어서였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목격한 적은 없지만 정천이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지.’
무심함과 게으름 등으로 자신을 가려 놓긴 했으나, 정천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내공을 잃었다는 것 역시…….’
칠삼은 이제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심증만 가득할 뿐 직접적인 물증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자네 말이야.”
“응?”
“혹시 내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없나?”
칠삼으로선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꺼낸 질문이었다. 반면 거기에 대한 정천의 대답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있지. 그것도 꽤 많이.”
“……그렇구먼.”
“왜,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어?”
“아니, 됐네. 물어봐도 자네가 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잘 아는군. 아쉬운데, 딱 잘라 시원하게 거절해 주고 싶었는데.”
“자넨 정말 악질일세.”
정천은 피식 웃었다.
“칭찬 고맙군.”
두 사람이 한가하게 구름이나 세고 있으려니 장원 쪽에서 심후가 다가왔다.
“뭐하세요, 두 분?”
“빈둥거린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정천의 대답. 심후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죽겠네요, 정말.”
“또 왜?”
“요즘은 제가 화륜문의 제자인지 하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예요. 문주님이야 그렇다 쳐도 소윤이까지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려 한다니까요.”
“네가 만만하니까.”
심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어서 빨리 강해져야 할 텐데 말이죠.”
“강하고 자시고의 문제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지금의 너도 꽤 강한 축에 속해. 뭐, 외공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정천은 나름대로 위로하려 한 말이었지만 심후로선 더 우울할 따름이었다.
체력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여느 때처럼 내공이었다.
내공 소모가 적은 진운패화각검을 익히고 있으니 공격 쪽으론 문제가 없으리라.
진짜 문제는 방어 쪽이었다.
“제가 내가중수법에 당한다면 속수무책이겠죠?”
“응.”
시원스런 정천의 대답에 심후는 더 우울해졌다.
“뭔가 방도가 없을까요?”
“스승은 뒀다가 뭐에 쓰냐? 란아한테 물어봐.”
“문주님은 대답해 주지 않으세요. 그저 지금까지의 수련만을 열심히 반복하라 하실 뿐이죠.”
심후의 목소리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그분도 달리 방도가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정신머리가 썩었군. 네가 내 제자였으면 팔다리를 부러트렸을 거다.”
“……엄청 무서운 얘기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시네요.”
“보기에 답답해서 그런다.”
“그렇게 답답하시면 뭔가 조언이라도 해 주세요. 그 정도는 스승님이 아니더라도 하실 수 있잖아요.”
정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럴까?”
심후의 얼굴에 기대감이 드러났다.
“정말이세요?”
“응.”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심후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 뒤로 얼얼한 느낌이 온몸을 훑었다. 심후는 어이가 없어서 정천을 쳐다봤다.
“왜 때리세요?”
“최고의 방어책이 뭐라고 생각하냐?”
선문답하듯 되묻는 정천이었다. 심후는 화끈거리는 뺨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공격 아닐까요? 흔히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들 하잖아요.”
짝!
정천이 심후의 반대편 뺨을 후려쳤다. 그게 또 얼이 빠질 정도로 아픈지라 심후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왜 때리세요!”
“해 봐.”
“예?”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며? 한번 입증해 보이라고.”
“이익!”
심후도 더 참지는 않았다. 이유도 모르게 따귀를 맞고 나니 오기가 덜컥 생겼던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다. 어차피 그나 정천이나 내공이 거의 무용지물인 몸. 단순한 몸싸움뿐이라면 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앗!”
심후가 정천의 콧등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내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빠르고 위력적인 권격이었다.
그러나 이내 심후가 눈을 부릅떴다. 정천이 미끄러지듯 그의 주먹을 피해 버린 것이다.
어물거리는 사이 심후의 양쪽 뺨에서 불꽃이 튀었다.
짜작!
“으으윽!”
심후가 두 뺨을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역시나 내력이 실리지 않았는데도 더럽게 아팠다.
게다가 채찍처럼 피부만 후려치는 것이기에 몸을 단련한 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뺨까지 단련하는 경우가 없기도 했지만.
심후의 양 볼이 이내 부풀어 올랐다. 지켜보는 칠삼이 다 찔끔할 정도.
정천은 픽 웃고서 다시 손을 떨쳤다. 심후의 얼굴이 짝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꺾였다.
“이런 시팔!”
심후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평소 유약하기 짝이 없던 그였지만 계속 두들겨 맞으니 악다구니가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
그가 정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이 있었다면 각검술을 펼쳤을 기세였다.
심후는 정천의 허리를 감아 내동댕이칠 심산이었다. 일단 엎어트리기만 하면 암만 빨라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너무 정직한데.”
정천은 한마디와 함께 몸을 옆으로 흘렸다. 동시에 다리만 쏙 내밀어 심후의 발목을 걷어찼다.
심후는 달리던 자세 그대로 엎어졌다. 관성이 관성이었던지라 코가 깨져서 피가 났다.
“젠장!”
벌떡 일어난 심후가 정천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그래도 평소 단련한 성과가 있어 무게가 제대로 실리긴 했지만…….
“안 맞으면 무슨 소용이지?”
정천은 그 모두를 어렵잖게 피했다.
지켜보는 칠삼이 절로 감탄사를 토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세상에…….”
정천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심후의 주먹 전부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사이 틈이 날 때마다 심후의 뺨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가히 회피와 반격의 정석이라 불릴 만한 움직임이었다.
“허억! 허억!”
제풀에 지친 심후가 허리를 꺾을 채 헐떡였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손을 든 채 심후에게 다가갔다.
“으아앗!”
심후가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려 얼굴을 가렸다. 더 이상 뺨을 맞고 싶지 않았기에 무의식중에 방어를 취한 것이다.
“다른 부위로 약점을 가린다. 방어법으로 나쁘진 않지만 결코 최선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의외로 정천은 때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심후가 고개를 들자 정천은 다시 손을 들어 보였다.
“히익!”
기겁을 한 심후가 근처에 있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것을 본 정천이 담담히 말했다.
“엄폐물이나 방패 등으로 몸을 막는다. 차선책 정도는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효용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심후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천이 자신을 일깨워 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그, 그럼 최선책은 뭡니까?”
“앞으로 나와 봐.”
심후가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정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으아앗!”
기겁을 한 심후가 뒷걸음질 쳐서 달아났다. 그것을 본 정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최선책이다.”
“……예?”
“거의 모든 내가중수법은 직접적으로 신체가 닿지 않는 한 제 위력을 발휘하지 않아. 그러니 거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거리를 벌려 피하면 그만이다.”
심후는 기가 막혀서 정천을 바라봤다.
“고작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뺨을 때린 겁니까?”
“응. 그래야 몸이 기억하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천은 팔짱을 낀 채 심후를 응시했다. 자못 진지한 그 시선에 심후는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넌 항상 내공을 쌓기 힘든 네 몸에 대해서 불평하기만 하지.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
“…….”
“눈이 안 보이는 검객이 청각을 발달시켜 보다 고도의 검술을 펼친다는 얘기는 들어 봤겠지? 물론 모두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순 없겠지만, 너처럼 포기부터 하고 들어가선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라지기 마련이다.”
“저, 전 포기하려 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네 몸 상태로 적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 말이야.”
“…….”
“구혈난맥으로 인해 체내 기혈이 엉망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운이 따르거나 기연을 얻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질 수 있는 게 아니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심후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네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강해져라. 거지같은 일이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정천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싸울 수 있는 건 몸뚱이뿐만이 아니다. 네 머리로도 필사적으로 싸워. 무엇이 네 몸에 최선일지를 항상 생각해라.”
“예…….”
할 말을 마친 정천은 화륜문 장원 쪽으로 걸어갔다. 심후는 생각에 잠긴 건지 낙심한 건지 고개를 떨어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칠삼이 허겁지겁 정천의 뒤를 따라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저 녀석이 바보도 아니고, 말로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랬다면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었겠지. 독기까지 품게 만들 수는 없었을 거야.”
“그거야…….”
칠삼은 말끝을 흐렸다. 왠지 정천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만날 칭얼거리기만 하는 것도 짜증나고. 저 녀석은 자기 스승을 좀 더 믿어야 돼.”
정천은 두 손을 탁탁 털고서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아침을 굶었는데 힘까지 쓰고 나니 죽겠군. 그래도 기분 전환은 됐으니 만족해야지.”
“……역시 그냥 기분 풀이용으로 때린 거였구먼?”
“겸사겸사.”
두 사람이 장원으로 들어서니 화연란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잠깐 밖에 좀.”
대강 얼버무린 정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왜 문주인 네가 마당을 쓸고 있어?”
칠삼이 찔끔했다. 화연란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미화 언니랑 소윤이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 녀석들이?”
정천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왠지 불안한데.”
“괜찮을 거예요. 그나저나 혹시 심 소협 못 보셨어요?”
“……란아, 너 아직도 그 녀석한테 소협 소리를 붙이는 거야?”
“네? 아, 네.”
정천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심후를 모질게 대하긴 했지만, 그가 화연란을 불신하는 것도 약간은 이해가 되었다.
“앞으로는 그 녀석한테 경칭 쓰지 마. 이 양반한테도 쓰지 말고. 네 제자니까 편하게 대해.”
칠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 정천이었다. 화연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착하기만 해서는 좋은 문주가 될 수 없어.”
그 말이 화연란을 자극했다. 그녀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할게요.”
심히 어정쩡한 대답. 정천은 뭐라고 더 다그칠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엄밀히 말해 화연란은 문주의 자질이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모용린 쪽이 훨씬 뛰어날 터였다.
‘단순의 무공의 문제만은 아니니까.’
문주뿐만 아니라 한 집단의 수장은 독해야 한다.
인간성 좋고 무능력한 사람과 인간성 개차반에 유능한 사람이라면, 응당 후자 쪽이 뛰어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다.
부패한 경우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밥이나 먹자. 이 녀석들은 대체 언제까지 꾸물거리려는 거야?”
“거의 다 됐어요!”
정천의 목소리를 들은 듯 부엌 쪽에서 소윤이 외쳤다. 이윽고 그녀와 담미화가 밥상을 들고서 나왔다.
“심……후를 찾아봐야겠어요.”
밖으로 나가려는 화연란을 정천이 말렸다.
“됐어. 당분간 혼자 있고 싶을 테니 내버려 둬.”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게 있어.”
화륜문 식구들은 한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반찬들을 하나씩 맛을 본 정천이 놀란 얼굴로 담미화를 쳐다봤다.
“비영대에서 요리도 가르치나 보지? 이제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됐군.”
“산나물은 내가 다 무쳤거든요?”
“왠지 나물이 제일 맛없더라.”
소윤이 도끼눈으로 정천을 쏘아봤다. 그때 화연란이 나직이 말했다.
“그만해요, 둘 다.”
그 한마디로 평화가 찾아왔다. 칠삼과 담미화는 내심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화연란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라버니, 모용세가의 연회 날에 뭔가 선물이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래도 초대를 받은 입장에 빈손으로 가기는 좀…….”
“괜찮아. 어차피 안 간다고 말하고 왔어.”
“네?”
화연란의 두 눈이 커졌다. 정천은 장난기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날은 장원을 떠나지 않도록 해. 되도록 이곳을 지키고 있어.”
심상찮은 정천의 말에 모두들 침묵했다.
담미화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요?”
“아마도.”
정천은 담담히 대꾸했다.
“무척이나 큰일이 벌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