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음모를 간파하다 (44/146)

第九章 음모를 간파하다

“놈들은 이제 끝이다.”

촛불이 밝혀진 막사 안. 혈풍대주 유자서가 고무된 어조로 말을 잇고 있었다.

“비영대주의 활약 덕분에 마교 놈들을 이곳 망원곡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유자서의 손끝이 탁자 위의 지도 중앙을 가리켰다.

하나의 입구만을 지니고 있는 원형의 협곡, 망원곡이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거듭 감사드리오, 비영대주.”

유자서의 말에 천막 구석에 있던 무엽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원체 성격이 조용하기도 했지만 지난 며칠간의 공작으로 기진맥진한 까닭이 컸다.

무엽과 비영대는 갖가지 방해 공작으로 흑령대의 후퇴를 방해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들, 혈풍대의 몫이다.”

유자서가 한마디로 단언하고는 바로 옆의 장유추를 돌아보았다.

“내일 결전에서 귀도신마를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음.”

장유추는 나직이 대꾸할 따름이었다.

그의 표정은 유자서나 다른 혈풍대 조장들과 달리 그리 밝지는 않았다. 유자서는 문득 의아함을 느끼고서 그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닐세. 그저…….”

“그저, 무엇입니까?”

잠시 속으로만 끙끙거리던 장유추가 한숨처럼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저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말이네.”

“하하, 꿈은 반대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유자서가 웃음 섞인 말로 장유추를 안심시켰다. 기실 그보다는 혈풍대 조장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가 더 컸지만.

막사에 모인 이들은 각 조의 조장들.

하나같이 연륜이 있는 만큼 뇌혈도 장유추의 위용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장유추의 거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자서로선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풀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장유추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으음, 왜 이리 느낌이 구린지 모르겠군.’

상황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혈풍대 전원의 숫자는 물경 삼백.

옛 용검대의 세 배에 이르며 당장 지금만 해도 마교도의 세 배였다.

개개인의 실력 역시 마교도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니, 아마도 마교도들을 가볍게 상회할 것이다. 다름 아닌 천무맹의 최정예 타격대가 아니던가.

귀도신마 역시 마찬가지.

‘놈이 제법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노부가 놈에게 뒤진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좋게 봐줘도 호각.

나아가 천뢰강림까지 펼친다면 귀도신마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장유추였다.

‘그런데 어째서?’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온 무인의 감각이 불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감각이란 언제든 주인을 배반할 수 있는 법이었다. 장유추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잖나.’

비영대원들의 희생을 봐서라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전장이 마련되었으니 남는 것은 싸우는 일뿐인 것이다.

장유추는 애써 입을 열었다.

“노부가 그 마교의 떠벌이 녀석을 베어 버릴 것이네. 후배들도 전력을 다해 놈들을 쓸어버리게.”

그제야 조장들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맡겨만 주십시오!”

* * *

진군은 이튿날 아침에 시작되었다. 밤새 망원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혈풍대는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서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우리의 승리는 명백하다.’

유자서는 그렇게 확신했다.

혈풍대가 패배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단순한 전력 차이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조건에서 그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선은 군량.

혈풍대는 잇따른 비영대의 공작으로 지난 며칠 동안 변변한 식사조차 못했다.

임시변통으로 사냥을 하거나 풀을 캐서 허기를 채우긴 했으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한 혈풍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리적인 면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쫓는 입장보다는 쫓기는 입장이 피로를 더 느끼는 법이었다.

‘혹여나 놈들이 배수진의 각오로 싸우려 든다면 잠시 물러나면 그만이다.’

사방이 가로막힌 협곡. 사방이 워낙 험준해 경공으로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이미 이곳으로 몰린 시점에서 그들은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승리한다.’

유자서는 재차 확신했다.

망원곡의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대신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아서, 혈풍대가 기습을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안으로 상당히 깊숙이 들어가니, 분지 형태의 땅이 그들을 맞이했다.

전투를 벌이기에 손색이 없는 지형.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마교의 흑령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가지.”

장유추가 나직이 말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흑령대 쪽에서도 귀도신마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장유추를 본 귀도신마가 사납게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날강도 놈아.”

“그렇구나, 떠벌이 녀석.”

“우리 귀령이를 빼앗아 가려고 왔느냐?”

“그래. 그러는 김에 네놈 모가지도 취해 가려고 왔다.”

“욕심도 많은 놈이구먼. 역시 정파 놈들이란 하나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강도 놈들이지.”

“그러는 마교 놈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거지들인 모양이구나.”

귀도신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뿐 아니라 흑령대원들 대부분이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

며칠을 굶은지라 뱃가죽이 등에 닿을 지경이고, 매일같이 쫓기느라 씻을 새도 없었다.

말 그대로 동냥하는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네놈들도 꽤나 사람 괴롭힐 줄을 알더구나.”

“그리고 그것을 끝내 줄 정도의 자비도 있지. 죽음은 각오하였나?”

“각오라. 그거야 처음 귀령이를 든 날부터 해 왔던 것이지.”

귀도신마의 두 눈에 아득한 빛이 스쳤다. 그 빛은 이내 생생한 열기로 변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그거야 네 바람일 뿐.”

스르릉.

광천뇌도를 뽑아 든 장유추의 두 눈에서 뇌전이 번뜩였다.

“도를 뽑아라. 마지막 춤사위만큼은 제대로 어울려 줄 테니.”

“흘흘.”

귀도신마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는 귀령도를 뽑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잠깐. 할 말이 더 있네만.”

장유추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벌려는 속셈인가? 미안하지만 그런 얕은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그저 귀를 기울여 보라는 걸세.”

“귀를?”

“그래. 저 소리가 들리지 않나?”

장유추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기감을 확장시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발소리가.

휙!

잽싸게 고개를 돌린 장유추가 발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망원곡 곳곳이라는 걸 깨닫고는 흠칫했다.

“설마……!”

우르르르!

협곡 곳곳에서부터 무인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혈풍대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유자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장유추는 이를 악물고 귀도신마를 노려봤다. 귀도신마는 미안하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사실 우리도 어제까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놀랍게도 이곳 망원곡 안에 마교의 지원 부대가 잠복해 있었단 말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일어났다고?”

“우연이 아닐세, 필연이지. 아무래도 너희 쪽에서 정보가 샌 것 같더군.”

‘배신자!’

장유추는 치미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설마 마교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대체 누가?’

우선 의심이 간 것은 혈풍대나 비영대였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했다고 하기엔 시간적인 여유가 너무 없었다.

‘귀암산에서부터 지원 병력이 움직였다고 한다면, 배신자는 혈풍대가 출진하는 시점에 이미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군사부나 그에 준하는 부서에 배신자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체 누가?’

장유추가 속으로 울부짖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단은 배신자보다도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스르릉!

귀령도를 뽑아 든 귀도신마가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춤사위만큼은 제대로 어울려 주지.”

“…….”

“죽을 각오는 되었나?”

장유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한마디 말을 할 여력조차도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장유추가 다짐하는 가운데, 마교의 지원 병력이 혈풍대를 향해 짓쳐 들기 시작했다.

“모두 죽여라!”

* * *

황룡성의 하늘 아래 어둠이 깔렸다.

홍등가를 위시로 한 시가지엔 여전히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으나, 성내의 대부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화륜문 역시 마찬가지. 모두가 잠든 그곳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 울리고 있었다.

현재 시각은 축시(丑時). 대부분의 사람들이 곤한 잠에 들어 있을 시각이다.

암무살이 가장 좋아하는 때였다.

기실 그가 화륜문을 찾아온 시각은 반나절 전. 해가 기웃거리며 서쪽으로 넘어가던 저녁때였다.

암무살은 그때부터 은신한 채 화륜문 사람들을 관찰했다.

‘하나같이 애송이들뿐이군.’

암무살의 감상은 그러했다.

우선은 삼류나 갓 벗어났을까 싶은 무인이 둘이었다. 하나는 젊은 놈인데 몸뚱이가 망가졌고, 다른 하나는 무공을 익힐 시기를 놓친 중늙은이였다.

거기에 어린 여자애가 하나. 소질은 있어 보이고 간단한 보법 정도는 익힌 듯했으나, 그래 봤자 아이에 불과했다.

그 외에 여인이 둘이었는데, 그나마 그 두 사람이 이중에선 가장 나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계집은 정순한 검법을 익혔고, 다른 계집은 은신술과 잠행술을 상당히 수련했다.’

두 사람 일류에 가까운 실력. 꾸준히 수련한다면 훗날 일가를 이루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암무살은 마지막으로 최종 목표를 떠올렸다.

화륜문엔 이들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정천.’

그러나 그는 암무살이 관찰하는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외출을 한 모양.

암무살은 짤막히 고민해야 했다. 정천이 돌아온 후 일거에 쓸어버릴 것인가, 나머지 녀석들부터 미리 해치울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먼저 쳐 죽인다.’

암무살의 입가가 잔인한 미소를 그렸다.

그는 꼼꼼하면서도 잔인한 손속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암살자로서는 최적의 성정이라 할 수 있었다.

‘놈이 돌아왔을 때가 기대되는군. 자기 가족과 같은 이들이 갈가리 찢겨져 있는 모습을 볼 때의 기분이 어떠할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암무살은 복면 너머로 미소를 짓고서 화륜문의 담을 넘어서려 했다.

“……!”

순간 후방에서부터 강렬한 살기가 몰아쳤다. 암무살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의 살기 역시 사라진 뒤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마치 꿈이라도 꿨던 듯한 기분이 암무살이 당황하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한 것보다도 일찍 찾아왔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

암무살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그의 감지를 뚫고서 지척까지 접근해 왔단 말인가?

‘반격을!’

암무살의 손가락에서 거무스름한 빛이 번뜩였다.

피잉!

극독이 발라져 있는 흑암사(黑巖絲)가 허공에 뿜어졌다. 암무살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뒤편으로 흑암사를 펼쳤다.

닿기만 해도 피부를 파고들어 생채기를 만들고, 그 안으로 맹독이 침투해 뼈와 근육을 녹여 버린다. 암무살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암기였다.

휘리릭!

암무살의 표정이 굳었다. 흑암사가 뭔가를 베는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놈은 어디로?’

그제야 뒤를 돌아보는 암무살. 그리고 나서야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천은 암무살이 예상한 자리에 서 있었다. 흑암사를 오른팔에 휘감은 채로.

‘잘리지 않았단 말인가?’

암무살의 흑암사는 보통 물건이 아니다. 호신강기마저 갈라 버린다는 흑암철(黑巖鐵)을 잘게 갈아 뿌려 놓은 표독스런 암기였다.

어지간한 내공의 소유자라 해도 함부로 만질 수는 없다.

암무살 본인이야 특수한 장갑을 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 뿐.

그런 것을 맨손에 감고 있으니, 단번에 갈가리 찢겨졌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혹시나 하여 흑암사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럼에도 흑암사는 정천의 팔에 파고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천이 피식 웃었다.

“팔부혈선이 보낸 놈이냐? 아니면 놈들의 수하쯤 되는 녀석이 보냈을 수도 있겠군.”

암무살은 흠칫했다. 놈은 예상한 것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대답이 없자 정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건 내 정보가 드디어 놈들에게 흘러들어 갔다는 소리로군. 백운신이 그랬을 리는 없으니, 역시 엄백이 정보를 흘린 건가?”

“…….”

“끝까지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뭐, 좋아. 입을 여는 방법이야 간단하니까.”

정천이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순간 그의 오른팔 주변으로 흑색의 기운이 피어났다.

그리고…….

투투툭!

오른팔을 휘감았던 흑암사가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예리한 물건으로 자른 것도 아니고, 그저 기운을 뿜어낸 것만으로 끊어 버린 것이다.

암무살은 그제야 실감했다. 자신이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괴물이다. 엄백의 말이 한 치의 오차가 없을 정도로.’

정말 그 많은 무공들을 익힌 것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해 보였다.

장로들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

판단을 마치니 택해야 할 행동도 명료해졌다. 암무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

암무살은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어느새 다가온 정천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는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을 정도의 신속.

암무살은 거의 본능적으로 정천을 향해 흑암사를 날렸다.

‘암만 괴물이라도 목을 끊어 버린다면!’

그 순간 암무살의 눈앞으로 흑색 바람이 몰아쳤다.

투투툭!

이번에도 여지없이 끊어져 버리는 흑암사. 암무살은 그제야 정천의 손아귀에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음을 깨달았다.

‘저건 대체……?’

의아해할 여유는 없었다. 이미 정천이 반격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정천은 경악한 암무살의 왼팔을 향해 강룡검을 휘둘렀다.

팍!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암무살은 자신의 왼팔이 허공으로 치솟는 걸 보며 경악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천은 한 차례의 검격을 더 날렸다.

이번엔 암무살의 오른팔이 끊어져 날아갔다.

단 두 번의 공격만으로 그의 양팔을 모두 끊어 버린 것이다.

“크어억!”

천하의 암무살도 비명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옛날부터 갖가지 고문에 대비한 훈련을 해 왔다지만, 양팔이 동시에 끊어져 나가는 고통은 그로서도 참기 어려웠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 마치 두 어깨를 불개미들이 갉아 먹는 것만 같았다.

‘이, 이대로는 안 된다.’

암무살은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렸다. 그리고 혓바닥 안쪽에 위치한 독약 주머니를 깨물려고 했다.

“죽게 내버려 둘 줄 알고.”

푸욱!

정천의 왼팔이 암무살의 입에 틀어박혔다. 암무살의 이빨들이 왕창 뽑혀 나갔다.

“커억!”

암무살이 버둥거렸다. 그래 봐야 몸을 뒤트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천은 그가 깨물려던 독약 주머니를 뽑아서 땅에다 내던졌다. 암무살은 자진할 방법조차 사라졌다는 것에 절망했다.

“어디에 머리를 박거나 할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러기 전에 널 붙들 자신이 있거든.”

“…….”

정천은 양 어깨의 혈도를 눌러 암무살을 지혈시켰다. 그래 봐야 오래 살 수는 없을 터였지만.

그런 다음 암무살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짓밟고서는 입을 열었다.

“간단히 하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것에 성심성의껏 대답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하지만 계속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정천의 두 눈에서 흉광이 뿜어졌다.

“극심한 고통 속에 천천히 죽어 가게 될 거야.”

“…….”

“계속 대답하지 않을 건가?”

암무살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천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협박에……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이빨들이 왕창 뽑혀 나가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래도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고통에 굴하지 않겠다는 건가?”

“물론……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암살자. 이 세계에 들어설 때 이미 잔혹한 죽음 정도는 각오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겠다?”

“한 가지 정도는 말해 줄 수 있다.”

암무살이 씩 웃었다.

엉망이 된 입 때문인지 그의 미소가 무척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도 남궁운도 혈선들을 당해 낼 수는 없다. 그들은…… 천무맹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들의 손아귀가 닿지 않는 곳은 이 중원에 존재하지 않아. 곧 죽음이 너를 찾아올 것이다.”

“…….”

“그때까지 의문과 불안 속에서 고통스러워해라. 너 역시 엄백이 그랬던 것처럼 처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표독스러운 저주에도 정천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 엄백이 죽었다는 소리군.”

암무살은 흠칫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정천의 시선은 그야말로 삭막 그 자체였다.

익숙한 눈빛이다.

놀랍게도 그의 눈빛은 언젠가 보았던 팔부혈선들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약간의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은 눈빛.

살기나 적의조차 담겨 있지 않기에 더더욱 소름이 돋는 눈빛.

“넌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정천의 손이 암무살의 머리에 얹혔다. 그 순간 암무살은 자신의 두개골을 칼날 같은 무언가가 꿰뚫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육체가 아닌 정신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느낌!

암무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으으으!”

“굳이 협박하지 않더라도 네게서 정보를 빼낼 방법은 많아.”

정천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기운이 암무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두 팔을 잃은 암무살은 어떤 형태의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헤집는 기운에 떨기만 할 뿐.

“으, 으, 으아아!”

암무살이 비명을 토했다.

육체의 고통이야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지만 정신의 고통은 견딜 재간이 전혀 없었다.

정천은 지금 암무살의 머릿속에 금제를 펼치고 있었다. 다만 평소 쓰던 것과의 차이점이라면, 철저히 그의 정신을 파괴하는 목적뿐이란 점이었다.

그리고 부서진 정신에서 정보를 빼내는 것은 지금부터였다.

파아앗!

정천의 두 눈에서 핏빛 기광이 뿜어져 나왔다. 암무살은 그것이 바로 말로만 들었던 마안이란 것을 깨달았다.

‘누, 눈을 피해야……!’

그러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눈알이 정천의 눈을 향해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정천에게서 흘러나온 붉은빛 기광이 암무살의 눈 안으로 들어갔다.

마안의 기운은 엉망이 된 암무살의 머릿속에서 정천이 필요로 하는 정보만을 뽑아냈다.

이윽고 정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윤우장로 마철.”

“……!”

암무살은 고통과 경악을 동시에 느꼈다. 정천은 그가 단언했던 대로 암무살의 머릿속에서 정보를 뽑아낸 것이다.

“그가 배신자였군. 혈선들에게 반기를 드는 척 연맹에 들어가 때를 살피고 있었어.”

“…….”

“엄백 역시 그에게 당했군. 그리고 다음은 맹주인 남궁운인가?”

암무살의 머릿속엔 남궁운 암살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 역시 들어 있었다.

마철의 측근인 만큼 그의 계획 대부분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지식을 훑던 정천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계획 일자는 칠주야 뒤로군.”

익숙한 날이었다. 앞서 약속을 잡았었기 때문이다.

“모용세가주의 생일이로군.”

마철의 계획은 간단했다.

모용세가주의 생일을 기념, 북풍장에서는 각 무림명숙들을 초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천무맹주인 남궁운 역시 참석하게 되어 있다.

그곳에서 맹주를 암살한다는 게 마철의 계획이었다.

‘얼핏 봐선 너무 단순한 계획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날 초대받게 되는 명숙 중 상당수가 혈선의 수하들이었던 것이다.

정천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그 숫자가 많다는 걸 깨닫고는 놀랐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혈선의 수족 노릇을 해 왔다는 건가?”

“으, 으으…….”

암무살이 기괴한 침음을 흘렸다.

임무에도 실패한 데다 머릿속의 정보까지 모조리 빼앗겼다는 충격 때문이었다.

정천은 암무살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를 처리하는 일뿐이었다.

“너 같은 놈들을 처리하는 좋은 방법이 있지.”

“무, 무슨 짓을…….”

“내 사람들을 건드리려 한 대가는 크다.”

정천은 암무살을 들어 올린 채 경공을 펼쳤다. 그는 허공을 질주하여 어느 넓은 들판에다 암무살을 내동댕이쳤다.

굶주린 들개들이 자주 오가는 벌판이었다.

“호상장로 유군광을 늑대 먹이로 준 적이 있었지. 들개들은 늑대보다도 체격이 작은 편이니, 넌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다.”

“……!”

“네 인생의 마지막을 마음껏 즐겨라.”

정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암무살은 살려 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빠져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주변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들.

들개들이 암무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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