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혈선의 준동 (43/146)

第八章 혈선의 준동

거대한 탁상 위로 여러 병의 술병이 뒹굴었다. 엄백과 마철은 안주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술만 기울이고 있었다.

거하게 취한 두 장로의 얼굴은 시뻘겠다. 이 정도 취기야 내력을 운용해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었지만, 취하기 위해 마신 술인 만큼 그러진 않았다.

“그러니까…….”

마철이 나직이 운을 뗐다.

“지금까지 실종된 장로들의 행방을 엄 장로께서 알고 있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정확히는 그들이 실종된 연유를 알고 있소이다.”

“놀라운 일이구려. 대체 그것을 어디서 듣게 되었소? 아니면 혹여, 엄 장로께서 그 일에 연관되어 계신 것이오?”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구려.”

“허허.”

마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혈선천하의 주춧돌과 같은 이들. 엄 장로께서 그런 이들의 척결에 앞장섰던 거라니 탄복이 절로 나오는구려.”

“앞장섰다고 할 정도는 아니오.”

엄백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자고로 취기에 칭찬이 더해졌을 때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그들 장로들은 지금 살아 있소?”

“아니오. 지금쯤 어딘가에서 진토가 되어 가고 있을 것이외다.”

“그렇구려. 그럼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제거한 것이오?”

“방법이랄 것까진 없소만…….”

“좀 자세히 설명해 보시구려.”

엄백은 백엽주를 쭉 들이켰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취기가 지금 당장 털어놓으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절세의 고수를 만났다오.”

“절세의 고수라……?”

“마 장로께서도 듣고 나면 놀라게 될 것이오. 실상 실종된 장로들은 모두 그에게 당한 것이라오.”

마철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풀렸다. 거하게 취해 있는 엄백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보다 은밀해진 목소리로 마철이 물었다.

“그게 대체 누구요?”

“화륜문의 정천!”

“화륜문? 난생 처음 듣는 문파이오만.”

“그럴 것이오. 개파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니.”

“정천이란 자는 그곳의 문주요?”

“아니, 문주는 따로 있소. 그는 아마…… 그곳의 문객이라 불러야 할 것이오.”

“문객? 식객 노릇하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요?”

“그렇소. 아마 그게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외다.”

마철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송했던 것이다.

떨떠름한 그의 반응에 엄백이 이맛살을 구겼다.

“마 장로는 지금 내가 농지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그건 아니외다. 다만 너무 믿기 힘든 얘기인지라…….”

“못 믿겠다면 확인시켜 줄 수도 있소이다. 물론 그 전에 맹주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말이오.”

“흐음.”

마철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선 취기가 사라진 뒤였으나, 엄백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엄 장로.”

마철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그? 정천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그자의 무공에 대해, 무위가 어느 정도에 달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하오.”

“그야…….”

잠시 정천의 실력을 가늠해 본 엄백이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그로서도 정천의 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무위보다는 무공에 대해서만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것과 다른 무공을 사용하오. 굳이 분류하자면 독문무공이라 해야겠군.”

“독문무공? 수십 년간 은거해 온 은둔고수라도 된다는 말이오?”

“그렇진 않소. 그의 나이는 많이 잡더라도 마흔 언저리일 테니.”

‘고작 마흔도 안 되는 애송이가 장로들을 쓰러트렸다고?’

유명세가나 대문파의 최고 제자쯤 된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서야 천무맹 장로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엄백 이자가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괜한 헛소리나 들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엄백은 그것도 모른 채 말을 이어 갔다.

“또한 그는 여러 무공을 섭렵했다오. 화산의 매화검에서부터 소림의 금강장, 나아가 마교의 무공까지 익히고 있다오.”

“……마교의 무공을 말이오?”

“그렇다오. 정말 대단한 고수 아니오?”

‘이건 또 뭔가?’

마철은 떫은 표정으로 엄백을 보았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엄백의 허풍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화산의 검법이나 소림의 장법까진 이해할 수 있다. 역사가 깊은 만큼 무공의 유출도 많았고, 그중 상당수가 암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마교의 무공이라고?’

마교는 여느 문파와는 다르다.

일반 교도들이 익히는 것은 세간의 것들을 섞어 놓은 잡탕 무공뿐인 것이다.

칠절 급 강자들 역시 주로 사용하는 것은 자기들의 독문무공이다. 마교 자체가 문파라기보다도 종교의 색채가 강한 까닭이다.

물론 마교만의 무공이라 할 만한 게 있긴 했다.

그야말로 극소수에게만 허용된 그것. 정예 중의 최정예인, 예컨대 과거의 강룡단 같은 이들에게만 전수되었던 무공.

이는 바로 천마의 무공이었다.

‘그런 천마의 무공까지 익혔다고? 헛소리도 이쯤 되면 예술이로군.’

마철은 엄백의 얘기를 더 들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실성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소리를 진지하게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 얘기 전부가 거짓말일 리는 없다.’

장로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무명고수가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엄백이란 자가 그런 것까지 꾸며 낼 인물은 아니었으니.

마철이 짐짓 취한 척 몸을 일으켰다.

“좋은 얘기도 들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 조금만 더 마시도록 합시다.”

“벌써 일어나잔 말이오?”

“풍취가 좋은 기루를 한 곳 알고 있소. 그곳에서 마시는 술맛이 또 별미라오.”

“그럼 그러도록 합시다.”

엄백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일어났다. 마철은 그 순간 은밀하게 전음을 날렸다.

—기루를 봉쇄하라.

천장 위에서 은밀한 인기척들이 일었다. 마철이 엄백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취한 까닭인지 느끼지 못한 듯싶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기루는 마철이 사전에 점거해 놓은 곳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안방과도 같은 곳인 셈.

그가 이러한 준비를 해 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엄 장로, 좀 부축해 주시겠소?”

“그러리다.”

엄백은 스스럼없이 마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마철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퍼어억!

“컥!”

엄백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마철을 노려봤다.

그의 흉부에는 시퍼런 손자국이 나 있었다. 별안간 마철이 날린 복마장파수(伏魔腸破手)로 인한 타상이었다.

“마, 마 장로…….”

“후후후.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오, 엄 장로.”

그제야 엄백은 깨달았다.

“네놈…… 혈선의 끄나풀이었던가!”

“누가 이 시대의 주인인지를 알고 있을 따름이지.”

엄백은 뒤늦게 체내의 취기를 배출시켰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맹주부터 만났어야 했던 것을! 아니, 애초에 정천과의 약속을 지켰어야 했다.’

그러나 후회해 봐야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은 일단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게 중요했다.

엄백은 주변을 살피며 체내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인기척이 없다.’

처음 왔을 때에도 사람이 적기는 했다. 그땐 그저 한적한 기루거니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백의 반응을 본 마철이 웃었다.

“이곳은 내 관할이지. 살아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오.”

“닥쳐라!”

일갈을 뱉은 엄백이었으나 이내 후회했다. 흥분하자마자 흉부의 상처가 찌르듯 아파 왔던 것이다.

“크으으…….”

“열 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복마장파수의 무서운 점은 열독처럼 체내에 남아 발작을 일으킨다는 점이니까.”

“네놈, 우리의 연맹에 들었던 것도 계획적이었나?”

“당연한 것을 묻는군. 더불어 그간 그대들이 시행해 온 알량한 계획 역시 그분들은 모두 알고 계신다오.”

“혈선 놈들……!”

으르렁거리는 엄백과 대조적으로 마철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운이 좋았지. 매일같이 맹주각을 드나든 것이 주효했어. 뭐, 남궁운은 내가 자기를 근심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독사 같은 놈!”

“떠벌려 준 정보는 감사히 받지. 뭐, 마교의 무공을 비롯한 수많은 무공을 익힌 절세고수의 이야기 따위는 믿지 않지만 말이야. 기껏해야 이런저런 잡탕 무공을 익힌 거겠지.”

“…….”

“어쨌든 그대는 여기서 죽어 줘야겠소, 엄백. 새 시대를 여는 첫 제물로써 말이오.”

“새 시대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간단하오. 마교로 인해 세상 전체가 뒤숭숭하니, 옛 무리는 사라지고 새 무리가 천무맹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소?”

“뭐라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던 엄백이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맹주님을 시해할 셈이냐!”

“남궁운도 그 선배들의 전철을 밟는 것뿐이오. 지금껏 혈선들의 눈 밖에 나서 제명에 죽은 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오?”

“…….”

엄백은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역대 천무맹주들 중 상당수가 비명에 횡사를 당했었던 것이다.

독살을 당한다거나 암살을 당하는 일은 기본이요, 뜻하지 않게 이유 모를 급사를 하는 일도 몇 차례 있었다.

‘설마 그것이 전부……?’

엄백은 질린 눈으로 마철을 보았다. 그 시선이 마철로선 그리도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맹주도 장로들도 그저 꼭두각시였을 뿐이오. 그대들의 알량한 반혈선연맹 역시 마찬가지고.”

“너……!”

“걱정하진 마시오. 이후의 천무맹은 더욱 강력한 집단으로 재탄생할 테니. 나아가 이번에야말로 마교를 완전히 뭉개 버릴 것이오.”

마철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엄백을 둘러싼 사방팔방의 어둠으로부터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흑의를 입은 암수들. 조금 전부터 신경을 긁던 인기척은 이들의 것이었다.

쉬리릭!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그것이 잔뜩 독이 발라진 암기임을 모를 엄백이 아니었다.

“큭!”

엄백은 당황하여 허공으로 솟구쳤다. 평소라면 호신강기만으로 튕겨 냈을 테지만, 복마장파수로 인한 타격이 너무 컸다.

덜컹!

천장의 장판이 뜯어지며 또 다른 인영들이 내려섰다. 얄궂게도 엄백이 치솟던 허공 바로 위였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쳐 들어오는 독검!

엄백은 각혈을 참으며 천장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로 희미한 기운이 맺혔다.

파앙!

그가 펼친 장법과 암수의 칼끝이 충돌하여선 반대 방향으로 튕겨졌다. 반발력을 받은 엄백의 신형 역시 땅으로 떨어졌다.

‘제기랄!’

평소였다면 방금 전의 일장으로 암수의 골수를 뽑아 버렸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방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타타탓!

엄백이 떨어져 내리는 자리로 암수들이 쇄도했다. 곧장 엄백의 바로 아래로 창칼의 수풀이 만들어졌다.

그대로 떨어졌다간 꼬치가 되어 버릴 터. 엄백은 이를 악물고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퍼억!

복마장파수가 남겼던 상처가 순간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 버렸다. 시커먼 피가 엄백의 흉부에서부터 솟구쳤다.

“커어억!”

엄백은 극심한 고통에 발버둥 치며 추락했다.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갖가지 암기와 병기들.

푸푸푹!

엄백이 온몸을 꿰뚫린 채 허공에 매달렸다. 그는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마철이 혀를 끌끌 차며 다가왔다.

“허무한 최후로군. 장로쯤 되는 이도 기습을 당하고 나니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구려.”

“끄으, 끄으윽…….”

“편히 쉬시오. 그러나 그대의 개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기리지 않을 것이오.”

퍽!

마철은 내력을 실은 일권으로 엄백의 골통을 부숴 버렸다. 엄백의 몸이 생기를 잃고 축 늘어졌다.

“시체를 처리하라.”

마철의 명에 따라 암수들이 엄백의 시체를 끌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마철은 자연히 생각에 잠겼다.

‘정천이라 했던가?’

엄백이 침을 튀겨 가며 떠들어 댄 인물.

물론 그의 말마따나 대단한 고수일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장로들이 당한 것도 요행이거나, 연맹 쪽의 도움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기는 한데…….’

그 이름에 대해 떠올려 보려던 마철은 이내 포기했다.

‘어쨌든 그냥 둘 수야 없는 일이지.’

요행이든 뭐든 장로들을 살해했으니 그냥 내버려 둘 순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혈선들을 돕는 꼴이 됐지만 말이다.

‘잇따른 장로들의 실종과 마교의 준동으로 인해 남궁운은 지지 기반을 상당 부분 잃었다. 지금이야말로 새 맹주와 장로들을 뽑기엔 적격이겠지.’

물론 아주 좋다고만 할 순 없었다. 지금껏 실종된, 아니, 살해된 장로들은 하나같이 혈선에 충성하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충성스러운 번견들을 새로 기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놈은 제거해 두어야겠다.’

마철은 어두운 천장 쪽을 응시하고서 말했다.

“암무살(暗霧殺), 그곳에 있나?”

“하명하십시오.”

스산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마철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서 명령했다.

“화륜문이란 곳을 찾아내어 완전히 멸하라. 특히나 정천이란 놈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것이다.”

“존명.”

암무살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마철은 그것만으로도 안심해도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만큼 암무살에 대한 신뢰가 컸던 까닭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군.”

마철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천무맹주의 목!”

* * *

백운신은 자신의 방에서 정천을 독대했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접근조차 불허한 상태였다.

“그래,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곧 어떤 형태로든 혈선들이 움직이는 때가 올 테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가?”

“지금쯤이면 그들이 제 존재에 대해 의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백운신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정천도 그 눈빛을 느낀 듯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하루아침에 장로들이 사라지고 마교가 움직였습니다. 정말 혈선들이 천무맹을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다면, 연달은 사건들의 주동자가 있으리란 것을, 그리고 그가 천무맹 내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음…….”

“물론 귀환한 전 용검대원의 소행이란 것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혹은 알고서도 때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네나 자네 주변의 인물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군.”

“이곳에 돌아올 때 각오한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아직 더 때를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어쩌면 너무 서둘러 본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일지도 모르네.”

“지금이 아니면 때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혈선들이 이미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정천은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어 백운신의 앞에 내놓았다. 오래전 담미화가 비영각에서 필사해 온 문헌이었다.

“이게 뭔가?”

“읽어 보십시오.”

백운신은 문서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어렸다.

“이건…… 역대 천무맹주들의 사인(死因)이 적힌 문헌이 아닌가?”

“놀라울 정도로 비명횡사가 많다는 걸 알 수가 있죠.”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천무맹주는 정파의 상징 격인 인물. 당연히 그 목숨을 노리는 이들 역시 많았다. 그중 대표 격이라면 단연 마교를 들 수 있을 테고.

실제로 상당수의 천무맹주들이 마교의 암수에 당했다는 게 세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모름지기 집 밖의 적보다는 집 안의 적이 무서운 법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맹주들이 죽은 시기들을 살펴보십시오.”

백운신은 다시 문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맹주들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원인 불명의 학살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었군.”

“한 번도 빠짐없이 말이죠.”

백운신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이런 사실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거지?”

“간단합니다. 각각의 사건들이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졌었기 때문이죠. 천무맹의 역사와 사건들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전체적인 측면에서 봤을 땐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으음…….”

“하지만 그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렇게 명확해집니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백운신은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맹주들의 목숨을 앗아 왔다는 말이로군.”

“천무맹 내에서 맹주를 능가하는 세력을 지녔으며, 맹 곳곳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말입니다.”

“혈선들 말인가?”

“혈선들 말입니다.”

백운신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무턱대고 확신할 순 없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의심해서 나쁠 것 역시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도출되는 결론 한 가지.

남궁운 역시 앞선 맹주들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몰랐다.

“맹주가 위험할 수도 있단 말이군.”

“맹주가 팔부혈선에 반기를 들려 한다는 것을 당사자인 혈선들이 모를 리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은밀히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어디에서 자그마한 균열은 있는 법이니까요.”

“그럼 왜 지금껏 맹주가 무사하단 말인가?”

“혈선들도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맹주를 죽일 결정적인 순간을.”

백운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네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면 백 장로님이 혈선의 끄나풀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그게 무슨……!”

역정을 내려던 백운신이 말끝을 흐렸다. 정천의 말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정천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에까지, 누구에게까지 혈선의 영향력이 닿고 있는지 모르기에!’

결국 정천은 지금 나름대로 승부수를 띄운 셈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백운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정천의 말마따나 백운신은 자신이 혈선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테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무서움이군.’

실체를 아는 이는 극소수.

그나마 그들조차 함부로 힘을 모을 수 없다.

서로가 진실한 아군인지 혈선의 수하인지 확인할 수 없기에.

백운신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몇 사람 더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나마 개중에 신뢰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 사람들을요.”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정천은 대답 대신 빤히 백운신을 응시했다. 백운신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산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나는 그들의 수하가 아닐세.”

살짝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말했다.

“……일단은 군사를 만나 볼 생각입니다.”

“군사? 제갈현 말인가?”

“예.”

“그를 믿을 만한 이유라도 있는가?”

“간단합니다. 그는 만통지재라 불릴 정도의 인물이니, 팔부혈선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들의 모든 것을 캐내려 했을 테죠. 혈선들의 입장에선 그 자체로 위험한 요소가 될 테고요. 아마 그랬다면 제갈현을 살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를 포섭하는 방안도 있을 텐데?”

“그런 자는 죽이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수하로 두기엔 너무 영악한 사람이니.”

“결국 제갈현은 혈선에 대해 아직 모르고,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인가?”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신은 왠지 안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위험을 감수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이유로군.”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제갈현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들에게 대항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테고.”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그렇다면 맹주 역시 만나 보는 게 어떻겠나? 내가 자리를 주선할 수도 있네만.”

“그럴 순 없습니다.”

딱 잘라 대답하는 정천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백운신이 곧장 물었다.

“어째서 그러는가?”

“맹주는 미끼로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미끼……?”

“예. 팔부혈선이란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 말입니다.”

백운신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맹주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밈으로써,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커진다는 말이로군.”

“예. 이 이상의 미끼도 없지요.”

“알겠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백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방을 나서려던 정천이 문득 입을 열었다.

“조철운이 깨어나거든 화륜문으로 보내 주십시오.”

“응? 그건 또 어째서인가?”

피식 웃은 정천이 대꾸했다.

“키워 볼 만한 녀석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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