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음모의 희생자들
일흑령을 비롯한 흑령대원들은 무릉현 외곽에 대기하고 있었다. 혹여나 모를 천무맹 측의 추격에 대비한 채로 말이다.
비영대원들의 시체를 감쪽같이 인멸하긴 했으나,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물론 아직까진 별다른 조짐이 없었다. 때문에 일흑령은 이번 임무와 귀도신마의 태도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얻었다.
정확히는 정천에 대한 생각이었지만.
‘정말 괜찮은 것인가?’
귀도신마 및 자신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장본인.
그가 강룡단을 사칭하여 서신을 넣었음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마교 전체를 낚아 버린 셈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그는 마교의 무공을 다수 익히고 있었다.’
정천은 자신이 진마동 토벌대의 일원이라 했다.
당시 그 자리에서 그게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던 사람은 귀도신마와 일흑령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의미가 얼마나 큰지도 잘 알았다.
‘진마동.’
마교 내에서도 철저히 엄폐되어 있는 과거. 지난 십 년간의 억지스러운 평화를 만들어 낸 계기가 된 곳.
그곳에서 유일한 생환자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거짓 같던 평화는 깨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자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어째서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한 거지?’
일흑령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흑령대의 대주라 해도 그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말단이었다.
그러나 칠절의 일원, 귀도신마라면 다르다.
그렇기에 정천도 그를 지목한 것이겠고.
‘하지만…….’
일흑령은 불안했다. 귀도신마가 보고를 올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강하다. 한 사람의 무인이라면 응당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중심적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칠절의 대부분이 그렇다. 애초에 마교를 관통하는 유일 교리는 강자존의 법칙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귀도신마로선 그저 자신의 흥미와 의문만 만족하면 그만일 터였다.
그게 설령 마교의 이윤과 배치된다 하더라도.
‘보고를 올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일흑령은 고심했다. 자칫하면 귀도신마의 분노를 사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에 조심스러웠다.
그가 어찌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대주님.”
흑령대원 한 명이 다가왔다. 일흑령은 고민을 애써 옆으로 치웠다.
“무슨 일이냐?”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흑령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무맹 놈들이냐?”
“아닙니다. 그게…… 귀도신마와 그 사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니?”
“무릉현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려는 것 같습니다.”
산책이나 다녀오려는 건 아닐 것이다. 일흑령으로선 또다시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엔 판단을 내리기가 수월했다.
“신마께서 따로 남기신 말은 없었나?”
“없습니다. 애초에 우리를 그다지 신경 쓰시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굳이 쫓아온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일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경공이 뛰어난 자 다섯을 데리고서 내 뒤를 따르도록. 그들이 무얼 하려는지 확인해야겠다.”
* * *
“워낙 의뭉스러운 친구니, 지금쯤 수하들을 데리고서 우리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겠지.”
귀도신마의 말에 정천은 의문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단련된 무리 같더군요. 심부름시키기 꽤 편할 것 같습니다.”
“흘. 천하의 흑령대를 고작 그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은 자네뿐일 걸세.”
두 사람은 내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주변은 숲이 아닌 누런 갈대밭이었다.
휘이이.
드센 바람이 벌판에 불었다.
정천과 귀도신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갈대숲 사이에 섰다.
귀도신마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가볍게 풀어 주고는 곧장 귀령도를 뽑아 들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네.”
“그게 뭡니까?”
“자네의 정체.”
정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 대해선 앞서 몇 번이고 설명해 드렸을 텐데요.”
“그건 정천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닐세.”
쉭.
가볍게 귀령도를 떨치니 허공으로 갈대 잎 몇 가닥이 치솟는다. 그 뒤로 스멀스멀 어둠이 기어올라 귀도신마를 감쌌다.
무시무시한 기운의 중심에서 귀도신마가 웃었다.
“정천이란 그릇이 품고 있는 무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지.”
“무위라.”
정천도 자세를 편하게 했다. 일견 허점투성이로 보이는, 그러나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돌변할 수 있는 자세였다.
“강룡단의 무공으로 대적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네만, 자네는 그들의 무공을 어느 정도나 습득할 수 있었는가?”
“전부.”
귀도신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핏 강룡단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법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광오하군.”
“우린 수라장을 뚫고 지나와야 했습니다. 그곳에선 서로가 가진 바를 모두 풀어놓고, 그것을 재차 발전시키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말만 듣자니 대단한 지옥을 경험해야 했던 모양인데, 과연 이 귀령도가 거쳐 와야 했던 수라장보다 더할지 의문이군.”
“구태여 물을 것도 없지요.”
이번 역시 간단한 대답. 동시에 귀도신마를 자극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귀도신마의 미소가 기묘하게 변했다.
“나를 능가하는 수라장을 헤쳐 나왔다고? 그곳에서의 경험이 이 귀도신마의 삼십 년 무림행을 능가하는 것이란 말이냐?”
“물론.”
역시나 짤막한 대답. 귀도신마로선 이제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증명해 보아라!”
귀도신마가 땅을 박찼다. 그는 섬전처럼 쏘아져선 단번에 정천의 목을 노리고 들어갔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감탄스러운 돌진이었다.
정천은 곧장 기수식을 취했다.
귀도신마는 그 자세가 마령섬열권(魔令閃熱拳)의 기본식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겹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정천과 귀도신마가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잠시 몸을 살핀 귀도신마가 혀를 찼다.
‘좋지 않군.’
목을 노리던 귀령도는 중도에 마령섬열권의 기운과 충돌해 튕겨졌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당한 열기가 몰아쳤다는 것이다.
이는 마령섬열권에 의한 것. 그 위력은 한서불침인 귀도신마의 살을 발갛게 익힐 정도였다.
타닥. 타다닥.
주변의 갈대들은 충돌 시의 열기로 하얗게 재가 된 뒤였다. 반경 십여 장의 땅이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대성에 이른 마령섬열권인가. 우습게 볼 수 없는 위력이로군.”
귀도신마의 말에 정천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조금 전엔 칠성의 공력밖에 싣지 않았습니다.”
“……뭐야?”
“십이성 공력의 섬열권을 보고 싶다면, 보여 드리죠.”
화르륵!
정천의 몸 주변으로 백열(白熱)이 치솟았다. 귀도신마는 순간 정천의 말이 허풍이 아니란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귀도신마가 자세를 낮게 잡았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가 몸을 웅크리는 것 같았다.
텅!
그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귀령십살도의 절초인 야차출사(夜叉出師)가 펼쳐진 순간 주변의 어둠이 귀령도의 칼끝에 뭉쳤다.
귀령도가 심장을 뚫는 화살처럼 출수됐다. 절정 고수라도 눈 깜빡할 새에 당하고 말 속도였다.
정천 역시 피할 여유가 없다는 걸 느꼈다.
‘과연 입신의 경지에 든 도법이구나.’
뇌혈도 장유추의 도법이 광대하고 압도적이라면 귀도신마의 도법은 군더더기가 없고 표독스러웠다.
전자가 태산을 불사를 힘이라면, 후자는 거인조차 꿰뚫어 버릴 힘인 것이다.
그런 공세를 어설프게 피할 순 없는 일. 자칫하다간 그대로 사냥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천은 정면으로 주먹을 뻗었다.
백열에 휩싸인 정천의 주먹과 귀령도의 검극이 한 지점을 향해 빨려들 듯 쇄도했다.
콰앙!
첫 대결은 무승부. 서로의 힘이 상쇄되며 상대방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한 시점에서 두 사람 모두 제이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쾅! 콰광!
연달은 충돌이 이어졌다.
그사이 귀도신마의 흑의는 대부분 불살라졌다. 그 사이로 비치는 살갗 역시 벌겋게 익은 상태였다.
정천의 주먹에서도 선혈이 흘렀다. 용린이나 다름없다고 자부하던 피부가 찢겨진 것이다.
두 사람은 경이를 띤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이 정도로 호각을 이루는 적수를 만난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도신마의 눈매가 일순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다.’
그는 잊지 않았다. 첫 대결 때 정천의 손아귀에서 생겨나던 흑색 검을. 얼핏 검강 같으나 검강과는 다른 성질의 그것을.
정천은 그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귀도신마의 주문대로 강룡단의 무공인 마령섬열권만을 펼쳤을 뿐.
그렇기에 귀도신마로서는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어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휘릭!
귀도신마의 자세가 돌변했다. 그는 역수로 귀령도를 쥐고서는 정천의 몸 곳곳을 향해 떨치기 시작했다.
일격필살의 도법이 난격의 도법으로 돌변했다. 귀령십살도의 상징과도 같은 변화무쌍한 도기(刀技)였다.
정천도 마령섬열권으론 대항하기 힘들겠다는 걸 느꼈다. 도법이 변하면서부터 귀도신마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천은 천마보를 펼쳐 거리를 벌렸다.
단순히 뒷걸음질을 치는 것뿐인데도 일순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물론 귀도신마는 그 정도에 속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얕은 수를!”
귀도신마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쉬쉬쉭!
거의 동시에 다섯 방향에서 도격이 펼쳐졌다. 어찌나 빠른지, 귀령도가 아닌 채찍이나 가벼운 검으로 무기를 바꿨는 싶을 정도였다.
정천은 양팔을 빠르게 떨쳐 각각의 도격을 방어했다. 소림의 천수관음장(千手觀音掌)의 수법이었다.
귀도신마는 혀를 살짝 찼다.
‘마교의 권법에 이어 정파의 장법이라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군.’
마치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을 상대로 차륜전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아니, 차라리 차륜전이 이것보단 나을 것이다.’
차륜전이라면 그래도 하나를 쓰러트려야 다음 적을 상대하게 될 텐데, 이건 싸우는 도중에 다른 적이 튀어나오는 격이었다.
찝찝하고 불안한 기분. 그것이 귀도신마의 공세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공방이 뒤집어졌다.
정천이 공세에 나선 것이다.
탓!
정천은 귀도신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귀령도를 휘두르기 힘든 사각이었기에 귀도신마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런 귀도신마의 흉부를 향해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빠르면서도 육중한, 귀도신마로서도 처음 보는 각법이었다.
빠악!
귀령도의 옆면으로 막긴 했으나 그 충격이 갈빗대까지 전달되었다. 충격 자체는 앞선 마령섬열권마저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귀도신마는 울컥 치솟는 핏물을 애써 삼키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처음 보는 각법이군.”
“그럴 겁니다. 우리들이 실전을 통해 발전시킨 각법이니. 별다른 이름조차 지어 줄 수 없었습니다만.”
“우리들?”
“용검대와 강룡단의 이백 형제들 말입니다.”
일순 귀도신마의 눈빛에서 전의가 사라졌다.
“형제라. 자네는 그들을 형제로 여겼단 말인가.”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생사를 서로에게 맡겼었으니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귀도신마는 귀령도를 쥔 팔에서 힘이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귀령도를 회수해 허리춤에 찼다.
“흥이 깨지는군. 여기까지만 하세.”
“그렇습니까?”
“꼬리를 내리는 거라 생각하지 말게. 일격을 먹긴 했지만 아직 싸울 여력은 넘치니 말일세.”
정천은 피식 웃었다.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만.”
“흠.”
귀도신마는 고개를 돌려 갈대밭 한쪽을 응시했다.
“대련은 끝났네. 자네들도 그만 나오게.”
움찔하는 움직임이 있더니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흑령과 흑령대원들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새삼스러운 질문이구먼. 설마 자네들이 숨어 있는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송구스럽습니다.”
“됐네. 어쨌든 돌아가도록 하지.”
일흑령은 움찔했다. 귀도신마가 말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시자는 말씀은, 어느 곳으로 말입니까?”
“어느 곳은 어느 곳이겠나. 귀암산으로 돌아가자는 걸세.”
“하오나 신마님…….”
일흑령을 말을 잇지 못하고 정천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알아내야 할 게 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귀도신마도 정천을 돌아봤다.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우리를 불러들였던 것을 보면 마교에 볼일이 있었던 거라 생각하는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않겠나? 우리와 함께 귀암산으로 가는 걸세.”
일흑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마님, 외인을 귀암산에 들이실 생각입니까?”
마교의 총본산인 귀암산. 그곳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천마신교의 일원뿐이었다.
외인이 방문할 수 있는 경우는 사자로서의 용무가 있을 때뿐이었다.
하물며 천무맹 소속의 무인이라면…….
귀도신마는 괜찮다는 듯 정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말게. 이 친구는 내가 직접 초빙하는 손님이니까. 특별한 경우니 문제는 없을 걸세.”
“하지만…….”
“자네도 봤잖은가. 이 친구는 강룡단의 무예를 익히고 펼쳐 보였어.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다고도 했고. 강룡단의 형제라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귀빈 아니겠나.”
“…….”
일흑령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천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 이건 아닙니다. 그들의 무공을 펼쳐 보였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웃는 낯이던 귀도신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귀도신마의 안목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신중을 기하자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그는 천무맹의 무인. 섣불리 친해져선 곤란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무얼 더 검증하란 말인가? 이만큼 증명했으면 믿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신마님, 이 모든 게 음모일 수도 있잖습니까?”
귀도신마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일흑령의 태도가 못내 답답한 모양이었다.
일흑령도 간단히 물러서진 않았다. 그가 보기에 정천은 여전히 위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조금 전의 전투로 확신을 굳히게 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귀도신마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흑령의 감상이었다. 얼핏 용호상박의 대결로 보이긴 했으나, 미묘하게 정천이 내내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호흡.
귀도신마는 지금까지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정천은 평온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는 강하다. 그리고 강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 요소다.’
일흑령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러한 성격 덕에 수많은 위기에서 목숨을 건지기도 했었다.
그런 신중함이 제동을 걸어 오고 있었다.
한편 귀도신마는 귀도신마 나름대로 답답했다.
외인을 들일 수 없는 귀암산이라지만, 딱히 외인의 정의가 내려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마신교는 힘을 숭상한다. 그것은 정파의 무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자는 그 자체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에게 우호적이라면…….’
정천은 비영대원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여인 하나를 살리긴 했지만, 그거야 아는 사이이기 때문인 듯했고.
‘그 실력을 가지고도 나서지 않았다는 거야 뻔하지 않는가.’
정천은 천무맹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것이 귀도신마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정천이 마교에 가담할 수도 있음을 뜻했다.
만약 그렇다면 별다른 문젯거리는 없었다. 천마신교 자체가 신도를 받아들임에 있어 별다른 제약이 없기도 했고.
애초에 이를 통해 세를 불려 온 교단이 아니던가.
“나는 이 친구를 데려가야겠네.”
“그러도록 내버려 둘 순 없습니다.”
귀도신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그럼 자네가 뭘 어떻게 할 텐가? 이 몸을 막아 보기라도 할 것인가?”
일흑령도 각오를 다진 채 맞섰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럴 겁니다.”
“우습군. 자네의 목을 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세.”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귀암산으로 전서구가 날아가게 될 겁니다. 신마님께서 반역을 꾀한다는 내용이 적힌 서신이 전해지겠지요.”
“얕은 수를 쓰는군. 그런 중상모략을 두려워할 성싶은가?”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시게 될 겁니다. 철절삼마께선 저를 신뢰하고 계시니까요.”
“…….”
“…….”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한동안 대치했다.
단순 무위야 물론 귀도신마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일흑령의 뒤엔 철절삼마가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귀도신마로서도 껄끄럽기 그지없는 존재들.
안 그래도 교단 내에서 반쯤 찍혀 있는 상태였기에 이번 일로 정말 기반을 잃고 밀려날 수도 있었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어쩌면 철절삼마의 분노에 맞서게 될지도 몰랐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귀도신마지만, 그것만은 꺼려졌다.
“정말 이렇게 해야겠나?”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습니다, 신마님.”
두 사람은 팽팽히 맞서는 내내 정천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든 반응을 했으면 하는 심정에서였다.
어쨌든 그가 좋다 싫다 결정을 해야 결론이 날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쯤 했으면 자기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쩝, 뭐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구먼.’
두 사람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결국 입을 열었다.
“귀암산으로 가는 건 훗날로 미루겠습니다.”
일흑령은 내심 안도했고 귀도신마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으음, 그런가?”
“대신에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부탁할 것이라고?”
“저에 대해 마교의 상부에 발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귀도신마가 물었으나 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짐시키듯 말할 따름이었다.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귀도신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숨길 거리조차 없는 일이었다. 정천을 만났고, 그가 토벌대의 유일한 생환자라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 발설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그런 요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귀도신마였다.
“뭐, 자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못 지킬 것도 없겠네만…….”
정천은 일흑령을 돌아봤다. 일흑령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약조하겠소.”
“시원시원해서 좋군.”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몸을 돌렸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저도 천무맹으로 돌아갈 겁니다.”
“으음…….”
귀도신마가 침음했다. 기껏 이곳까지 와서 얻게 된 결론이 이것이라니, 너무 허무했던 것이다.
그때 정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약속은 깨질 겁니다.
—응?
—그는 오늘 일을 상부에 발설할 겁니다.
정천이 말하는 그가 일흑령임을 모를 귀도신마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는 것이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약조를 받아 낸단 말인가?
—제발 해 달라고 말하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저런 자들의 습성이죠. 하지 말라고 하면 일단 하고 보는 게 저들이고요.
—그게 무슨……?
—강룡단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천의 반문에 귀도신마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은 내 형제들이기도 했네.
—그 대답, 믿겠습니다.
정천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이후에 따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 후에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왜 지금 속 시원히 얘기하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지켜봐야 하니까요.
—그들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강룡단은 음모의 희생자였습니다. 우리들 용검대가 그랬듯이.
—……!
귀도신마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 순간 정천이 무엇을 염려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정천은 더 말하지 않은 채 멀어져 갔다. 귀도신마는 그의 뒤를 쫓을까 하다가 참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일흑령은 자그만 천 조각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고 있었다.
귀도신마가 안력을 돋워 보니 이번 일에 대한 보고문이었다.
“자네, 약속을 어길 생각인가?”
일흑령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는 위험 요소입니다. 그런 존재를 그냥 방치해 둘 수만은 없습니다. 최소한 존재 자체는 알려 두어야 합니다.”
“자네, 정말…….”
귀도신마는 말끝을 흐렸다. 정천의 전음 내용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흑령은 자못 진지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말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신마님. 계속 저자를 두둔하신다면 저는 신마님 역시 의심하게 될 겁니다.”
“…….”
귀도신마는 씁쓸한 눈으로 일흑령을 보았다. 그의 행동이 마교를 향한 충심에서 나온다는 점이 어쩐지 우스웠다.
‘본인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겠지.’
귀도신마는 일흑령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역시 정천이 의도한 바일 테니까.
대신 그는 정천의 의도 자체에 대해 생각했다.
‘음모의 희생자라, 그렇다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의문들이 새로이 떠올랐다.
‘마교가 의도적으로 강룡단을 사지로 몰아넣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