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사냥개를 잡는 함정
어스레한 빛이 사위로 흐르는 새벽.
황룡성 백호문 앞에 일련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
비영대주 무엽이 직접 엄선한 정예 비영대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엔 어제 본래의 임무를 해지당한 담미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인원 열둘.
담미화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내심 긴장했다.
‘하나같이 일급 이상의 대원들이구나.’
특급이 최소 셋.
추적 임무에 이 정도 정예가 투입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이급 대원이니, 이 자리에선 가장 실력이 떨어질 터였다. 그만큼 무엽이 자신을 고평가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만.
어쨌든 절로 긴장이 되는 구성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모두 모인 것 같군.”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메마른 눈매를 한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담미화를 비롯한 모두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난영객(亂影客) 반준.
비영대 내에서도 무엽 다음이라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냉철한 성격과 뛰어난 판단력을 겸비하기도 했다.
군사 제갈현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
그만큼 이번 일이 중하다는 의미일 터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마교의 무리를 뒤쫓게 될 것이다.”
건조한 반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혈풍대의 보고에 의하면 마교도 중엔 칠절 급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고요한 떨림이 주변을 스쳤다. 어지간해선 당황하지 않는 비영대원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칠절이란 단어가 지니는 의미를 모두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마교 무공 서열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자들. 천마와 철절삼마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다는 실력자들.
그들의 무용담은 갖가지 기록과 서적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반준은 대원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이번 임무는 혈풍대 이, 삼조와의 협동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혈풍대는 십 리가량의 거리를 둔 채 우리의 뒤를 따라올 것이다.”
“…….”
“우리는 놈들의 흔적을 좇고, 혈풍대는 놈들과 대적하게 될 것이다.”
혈풍대의 두 개 조라면 칠절 급 무인을 상대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아마 군사부에서도 상당한 고심을 통해 편성한 숫자일 터였다.
“질문할 것이 있는가?”
반준의 물음에 반문하는 이는 없었다. 반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면 출발하도록 하지. 우선은 놈들의 흔적을 찾는 게 먼저다.”
추적대는 우선 전투가 있었던 공터로 향했다.
뇌혈도 장유추와 귀도신마가 한판 붙었던 자리. 워낙 두 사람이 거하게 붙어 준 덕분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비영대원들은 빠르게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거리를 두지 않은 채 그들의 뒤를 좇는 이가 있었다.
정천이었다.
‘제법이군. 역시 제갈현이야.’
정천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추적대 및 타격대의 구성이 절묘했던 까닭이다.
귀도신마와 장유추의 실력은 엇비슷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격전을 벌였던 장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잔뼈가 굵은 무인들인 만큼 숨겨 놓은 한 수가 없을 리 만무하겠지만, 그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둘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아마 이는 혈풍대의 보고를 통해 제갈현도 알고 있는 점일 터.
제갈현은 그 사실에서 귀도신마에게 맞설 전력을 추량했을 것이다. 장유추의 실력을 기준으로 혈풍대의 두 조를 차출한 것일 테고.
‘별다른 변수만 없다면, 정말 이들만으로도 귀도신마와 마교도들을 제압할 수 있겠지.’
물론 언제나 문제는 그 변수란 놈이지만.
정천은 기척을 숨긴 채 추적대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대략 이십여 장.
비영대원쯤 되는 이들에겐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였으나, 정천의 은신 능력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더불어 이들이 숲으로만 이동하고 있다는 점도 컸다. 말 그대로 주변 모두가 은신처고 엄폐물이었으니까.
‘뭐, 이렇게 뒤만 잘 좇으면 되는 거겠지.’
정천은 느긋하게 생각하며 추적대의 뒤를 따랐다.
* * *
추적대의 이동 속도는 꽤나 빨랐다. 마교도들이 남겨 놓은 흔적이 생각보다 많은 까닭이었다.
‘이상하군.’
그 뒤를 따르던 정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비영대의 실력이 수준급인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허술한데.’
실제로 추적대의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물론 흔적을 찾는 데에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고는 있었으나, 그게 생각만큼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실로 미묘한 수준.
꼭 안배라도 해 놓은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하다. 마교도들이 일부러 흔적을 이 정도로 남겨 놓은 거야.’
그 말은 곧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저들을 유인하고 있다.’
분명했다. 올 때는 바람 같던 저들이 이렇게나 흔적을 남긴다는 건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비영대의 추적을 역이용하리라는 의미.
자칫하면 비영대원들이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다.
같은 시각.
담미화 역시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추적은 순조로웠다. 선두에 선 반준은 뛰어난 실력으로 마교도들의 흔적을 감지, 추적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조롭다는 사실이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만약 저들이 우리를 유인하는 거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황룡성 바로 앞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왔던 저들이니, 이 정도 계책을 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주변의 동료들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모습들. 좋게 말하면 침착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자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반 대장님.”
추적대장인 반준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담미화.”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이동 속도를 조금 낮추시는 게 어떨지요?”
“위화감이라고?”
반준의 얼굴에 반감이 스쳤다. 자신도 느끼지 못한 것을 일개 이급 대원이 느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이내 감정을 가라앉혔다. 오랜 경험으로 인한 반사적인 작용이었다.
“설명해 보게. 납득이 가도록.”
“예, 추적 작업이 너무 순조롭습니다. 마치 저들이 일부러 흔적을 남겨 놓는 듯한 느낌입니다.”
“겨우 그 정도인가?”
반준이 혀를 살짝 찼다. 그러고는 이내 전방의 나무둥치를 가리켰다.
“저 근방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나? 열 걸음을 옮기기 전에 대답해 보게.”
담미화는 안력을 돋워 나무둥치 근방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눈썰미는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테지. 자네의 실력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흔적이니까.”
쉭.
반준이 비도를 던져 나무둥치 가운데를 맞혔다.
“저 자리에 자그마한 홈이 파여 있었네. 상당한 내력을 지닌 자가 앉았었고,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병기가 그루터기를 짓눌렀던 흔적이지. 상당한 무게였던 걸로 보아 대도나 그에 준하는 병기였던 것으로 보이고 말이네.”
“…….”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가 추적을 맡았다면 이런 속도를 낼 수 있었을 성싶은가?”
결국 자신이 뛰어나 추적 속도가 빠른 것뿐이라는 소리. 자랑 같은 말을 웃음기 하나 없이 내뱉는 반준이었다.
비웃음 섞인 시선들이 담미화에게 몰렸다. 정작 담미화는 그것조차 모를 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하지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점까지 저들이 예측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 대장님의 실력까지 저들이 짐작한 거라면…….”
“놈들이 그렇게까지 치밀할 것 같지는 않네만.”
“아뇨, 조금 전 대장님이 말씀하셨던 흔적만 해도 그렇습니다. 병장기가 아무리 무거워도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그루터기에 홈을 파이게 할 수는 없어요.”
“내력을 쏟았던 직후라면 다르지.”
“과연 내공을 쓸 만한 일이 그들에게 있었을까요?”
“싸우는 데에만 내공이 쓰이는 건 아닐세. 간단한 신법을 쓰는 데에도 내공은 쓰이는 법이네. 그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무기에도 내공이 실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자네 말이 옳다고 치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우리의 후방엔 혈풍대의 두 개 조가 버티고 있잖은가.”
담미화는 입을 닫았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반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설령 이게 놈들의 유인책이라 해도 문제는 없어. 우린 반 시진 주기로 혈풍대와 연락을 하고 있고, 십 리 밖에 있는 그들이 언제든 지원을 올 수 있네. 설령 전투 상황에 돌입하더라도 십 리 거리라면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수준도 아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담미화가 말끝을 흐렸다. 여전히 불안함을 씻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추적대와 혈풍대의 연락 수단은 전서구.
반준의 말마따나 반 시진 주기로 전서구를 보내 위치와 경로를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점에 못내 마음에 걸렸다. 담미화 역시 전서구를 맹신하다가 크게 당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정천에게.
‘만약 마교도들 역시 이 점을 역이용한다면?’
그러나 그녀는 그 염려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이것만큼은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 번 당했던 적이 있노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담미화가 침묵하자 반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안감은 이해하네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리 역시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으니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결국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담미화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추적대는 다시금 후방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자신들의 위치와 경로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전서구는 후방을 향해 한동안 날아갔다.
그러던 도중, 별안간 숲 아래쪽에서부터 화살 하나가 치솟았다. 화살은 전서구의 배를 그대로 찢어발겨 땅으로 추락시켰다.
잠시 후, 또 다른 전서구가 화살이 날아왔던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새 전서구는 본래의 전서구가 향하려던 곳, 즉 혈풍대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서신을 읽은 혈풍대는 방향을 틀었다.
추적대가 있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준이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이각 후의 일이었다.
“이상하군.”
반준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돌아와야 할 전서구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반 시진 전에 날아갔으니, 못해도 지금까진 돌아왔어야 정상인데 말이다.
그는 뒤늦게 주변을 돌아봤다. 흔적을 찾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숲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라면 좌측과 우측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기암절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
전투가 벌어진다면 퇴로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설마?’
그제야 담미화가 했던 말들이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반준이었다. 정말 이 모든 게 마교도들의 계략이라면? 그들이 자신들을 유인한 거라면?
‘나아가 놈들이 혈풍대를 교란시켰다면?’
그렇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이 인원만으론 귀도신마 한 명조차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다급해진 반준이 입을 열었다.
“모두 퇴각…….”
그때였다. 스산한 웃음소리가 반준의 말을 잘랐다.
“흘흘. 이미 늦었다네.”
“……!”
반준과 비영대원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흑의를 걸친 중년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제법 유능한 친구들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우리의 뒤를 밟을 줄은 몰랐어.”
중년인, 귀도신마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유능함도 추적술에만 국한된 모양이군. 설마 간단한 교란책에 넘어가 덩그러니 남겨질 줄이야.”
“큭.”
반준이 침음을 삼켰다. 우려했던 대로 저들이 계책을 써서 혈풍대를 떼어 놓은 모양이었다.
귀도신마가 애병 귀령도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미안하지만 귀찮은 혹을 달고 다닐 수야 없지. 자네들은 이곳에 묻혀 주어야겠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반준이 입을 열었다.
“정녕 천무맹과의 정면충돌을 원한단 말씀이오?”
“뭐,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쩌겠나. 안 그런가?”
뒤의 물음은 반준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귀도신마는 자신의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흑령을 비롯한 흑령대원들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어느새 비영대원들을 둥글게 포위한 상태였다.
지형적 불리함에 포위까지 당한 상황. 반준은 생로가 거의 보이지 않는 데 이를 악물었다. 비영대원들 역시 절망감을 느끼며 침음을 삼켰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일흑령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그는 마지막까지 전투를 반대했다.
여기서 천무맹도를 해치운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마교의 일원. 귀도신마만큼은 아니지만 다가오는 싸움을 피할 정도의 겁쟁이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중원에 혈풍이 불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얘기가 달랐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던 것이다.
그 점이 마지막까지 일흑령을 망설이게 했다.
귀도신마 역시 일흑령의 불안을 느꼈지만 딱히 내색하진 않았다. 같은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그는 오히려 기쁘기만 했다.
‘기왕 피의 길을 거쳐야 한다면 첫 걸음을 먼저 떼는 편이 낫겠지.’
그는 귀령도의 검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소살도라는 칭호에 걸맞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네들은 죽어 줘야겠네.”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소.”
반준이 나직이 대꾸하고서 두 손을 등허리로 가져갔다. 두 자루 비도가 손아귀에 잡혔다.
여차하면 던질 기세. 그러나 정면으로 대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비도술이라면 귀도신마 정도의 고수라 해도 한순간 정도는 발을 묶어 둘 수 있었다.
반준은 조심스럽게 전음을 날렸다.
—내가 저자의 발을 묶겠다. 그사이 최대한 뿔뿔이 흩어져 생로를 뚫고 달아나라. 어떻게든 이 사실을 맹에 전해야 한다.
비영대원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괜한 눈치를 주지 않기 위해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 그들이었다.
반준은 내심 기회를 찾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시간을 최대한 버는 것이 중요했기에.
“대체 그대들의 목적은 뭐요? 무슨 일로 천무맹의 바로 앞까지 왔었다는 말이오?”
귀도신마는 내심 웃었다. 시간을 벌려는 수작임이 뻔히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사실 그 역시 몇 가지 석연찮은 부분을 느끼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참에 생각을 정리해 봄도 좋겠지.’
이윽고 귀도신마가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번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이번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거요? 그대들이 이곳까지 온 것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거의 모른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소.”
“우습군.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결과물에 불과해.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지.”
“그러니까 그 원인이 뭐냐고 묻는 거요.”
귀도신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옛 동지의 부름이 있었다. 우리밖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연락을 취해 왔지. 그 동지는 자신이 황룡성에 있다고 했네.”
“그게 무슨……?”
반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교의 간자들이 황룡성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그러한 간자들을 뿌리뽑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러나 간자 얘기는 아닐 것이다. 고작 간자의 부름 정도로 이들이 올 리도 없거니와…….
‘저자는 분명 옛 동지라고 했다.’
반준은 더욱 의문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대화를 듣는 여타 비영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사람, 담미화를 빼고.
‘저들을 부른 것은 정천, 그 사람이었어.’
정천은 강룡단을 사칭하여 연락, 마교를 움직였다. 연락 방법이 강룡단만의 것이었던 만큼, 마교 측에서도 당연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문제는 그 다음.
‘대체 그는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 거지?’
담미화는 다른 의미로 의문이 깊어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그녀 역시 동료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됐다.
귀도신마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준하는 답변을 남겼다. 자네들도 아마 봤으리라 생각되는군.”
“백호문…….”
반준이 침음하듯 대답했다. 귀도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 시점에 이미 천무맹 겁쟁이들이 엽견(獵犬)을 풀 거란 예상 정도는 했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우리가 그들과 접선할 곳에 사냥개들을 위한 자리 따위는 없다네.”
“…….”
“대신 이곳에 자네들 사냥개들을 잡는 함정이 마련되었지.”
우우우웅.
귀령도가 희미한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전의가 빠져나가는 듯한 검명(劍鳴)이었다.
그 위에 귀도신마의 살기가 덧씌워지자, 땅 위에 명부(冥府)가 강림하는 듯했다.
“크…….”
반준이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기습적으로 비도를 날린대도 과연 귀도신마를 일순이나마 주춤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계획 자체를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기니 자연히 불안감이 피어났다. 그 결과 반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뛰어난 편이라 해도 결국은 염탐꾼.
비영대의 한계란 결국 이 정도였다.
귀도신마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럼 수다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지. 어서 자네들을 처리하고 약속된 장소로 향해야겠네.”
“처, 천무맹과의 전쟁도 불사할 생각이오?”
“글쎄? 뭐, 일단은 자네들을 처리하고서 시신도 찾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네. 반박의 여지가 없는 행방불명 상태로 만들 거란 말일세.”
“…….”
“그 연후의 선택은 천무맹에 달려 있지. 평화를 위해 그냥 넘어가든지, 휴전 결렬의 오명을 각오하고서라도 맞불을 놓든지.”
“큭.”
반준은 이를 악물었다.
단순한 미치광이 칼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귀도신마는 최소한 한두 수 뒤의 일까지를 넘겨보고 있었다.
그 방식이란 게 참 무지막지했지만, 아무것도 마련한 게 없는 자신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우리도 여기서 끝인가?’
반준은 비도를 콱 움켜쥐었다. 이제는 죽음을 각오하고 발악할 일만 남았다.
그의 각오를 느낀 귀도신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은 자세로구나. 그래야 죽이는 재미가 있겠지.”
“…….”
“흘흘, 웃으며 죽여주겠네.”
귀령도에 살기가 휘감겼다. 시커먼 검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포위한 흑령대가 전의를 드러냈다.
차르르릉.
흑령대원들이 질서정연하게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비영대원들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서 무기를 들었다.
그 순간 움직인 사람은 반준이었다.
“흡!”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양팔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두 자루 비도가 섬전처럼 귀도신마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귀도신마가 웃었다. 그의 손이 한 첩의 화폭인 양 귀령도를 떨쳤다.
터엉!
허공을 가르던 비도들이 힘을 잃고 튕겨졌다. 그와 함께 반준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단 일도로 공방 모두를 해치워 버린 것이다.
귀도신마의 절초 중 하나인 흑무령섬(黑霧令閃)이었다. 그 일격은 안 그래도 바닥을 기던 비영대원들의 전의를 꺾기에 충분했다.
“모조리 해치워라!”
귀도신마의 외침과 함께 흑령대원들이 움직였다. 살기 가득한 그들의 병기가 비영대원들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퍼퍽!
“크으윽!”
“으악!”
첫 공격에 두 명의 비영대원이 중상을 입었다. 반준이 당한 충격 때문에 얼어붙어 있다가 당하고 만 것이었다.
흑령대원들은 그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부상당한 비영대원들에게 주변의 흑령대원 모두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영대원을 말 그대로 도륙해 버렸다.
변변한 반격조차 못한 채 숨통이 끊어진 두 비영대원.
나머지 대원들은 딱딱하게 굳은 채 어떻게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차원이 다르다!’
‘악귀들!’
정정당당한 무인의 대결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상 입은 적을 표독스럽게 노리는 모습은 사람보다도 들개나 늑대를 닮아 있었다.
분명 효과적인 전술이긴 하나, 소름이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얼 이 정도로 놀라는가? 이대로 가다간 일방적으로 사냥당하고 말겠군.”
귀도신마는 아예 팔짱을 낀 채 떠들고 있었다.
애초에 비영대원들 정도는 그에게 있어 흥밋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저번의 그 녀석이라면 모를까. 쩝, 그 녀석이 쫓아오기를 못내 기대했는데 말이지.’
장유추와의 대결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는 귀도신마였다.
그사이 비영대원들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애초에 숫자도 적은 데다 기세에서마저 밀리는 판국이었다.
그중 반격이나마 하는 대원은 극히 소수.
놀랍게도 담미화 역시 그 소수에 포함되어 있었다.
쉭!
머리를 노리는 검격을 피하고는 두 자루 비도를 전방으로 날린다. 예상외의 반격에 주춤하는 적의 품으로 파고들어 세 번째 비도를 내지른다.
부욱!
비도는 아슬아슬하게 옷깃만 찢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달려들던 혈풍대원의 기세를 죽이는 데엔 충분했다.
“…….”
혈풍대원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놀라고 있는 것은 담미화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나, 예전보다 강해진 건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정천 곁에서 지내면서 별다른 수련을 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의 심부름이나 하던 게 전부.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실력이 상당히 상승한 것 같았다.
사실 그녀의 무공 자체가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과거에 비해 담이 세지고 보다 침착해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실전에선 상당한 이점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세에서 눌리는 싸움에선 더더욱.
‘어쨌든……!’
담미화는 도리어 본인 쪽에서 치고 나갔다.
여덟 자루의 비도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졌다가 사방으로 떨쳐졌다.
파파팟!
엽도비산(葉刀飛散)의 수법에 정면의 혈풍대원뿐 아니라 근방의 적들 역시 주춤했다. 의외의 사각에서 반격이 펼쳐졌던 까닭이다.
그녀의 분투로 인해 다른 비영대원들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시점에서 그들은 또 한 가지 천우가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 반준을 죽인 것 외엔 귀도신마가 끼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서는 순간 상황이 악화되리란 건 분명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숨통이 트인 셈.
“모두 담미화를 중심으로 모여!”
어느 비영대원의 외침으로 인해 그녀를 중심으로 한 방원진(方圓陣)이 짜여졌다.
혈풍대원들 역시 이번만큼은 섣불리 치고 들어가지 못했다. 생각 외로 비영대원들의 단결력이 상당했던 까닭이다.
귀도신마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개 염탐꾼이라지만 최고 수준쯤 되니 임기응변이 제법이로군.”
“감탄만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일흑령의 말에 귀도신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자네들만으로는 힘들겠나?”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귀찮은 게 사실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신마님.”
“미안하네만 그럴 순 없겠군.”
“……예?”
귀도신마는 딱 잘라 말했다.
“약자를 괴롭히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그리고 딱 잘라 말해 저들은 자네들의 반의반도 안 되잖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런 적을 상대로 내 힘까지 빌려서야 마인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자네들 선에서 해결하게.”
일흑령은 입을 벌린 채 귀도신마를 보았다. 하지만 귀도신마는 할 말 다했다는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일 따름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겁쟁이마냥 꼬리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
일흑령은 항의할 생각을 접고서 적을 돌아봤다.
귀도신마의 말이 옳았다. 저들의 방원진은 그저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그것에 겁먹고 힘을 빌려서야 창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기껏해야 은신이나 추적 따위나 하는 놈들이다.’
속으로 되뇐 일흑령이 주변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좌우에서 순차로 놈들을 두들긴다. 저 어설픈 방원진을 박살 내 버려라!”
“예!”
두 무리로 나누어진 흑령대가 양쪽에서 방원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에 걸린 솥을 양쪽에서 흔드는 모양새. 흔드는 수준이 강하면 강할수록 솥에 든 물은 점차 넘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넘친 물이 때로는 흔든 사람을 적시는 법.
곧바로 비영대원들이 비도를 날리기 시작했다. 거의 일흑령에게 집중된 형태였다.
파바바밧!
“큭!”
당황한 일흑령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설마 놈들이 이 악물고 자신만 노릴 줄은 몰랐다.
왼팔이 시큰했다. 시선을 내려 보니 큼직한 비도 한 자루가 팔뚝에 박혀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일흑령이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제법이로군. 그러나 발악에 불과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실제로 비영대원들이 다시 쓰러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방원진을 양측에서 흔드는 방법이 주효한 것이다.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라!”
일흑령의 명령에 따라 공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애초에 진형이라는 것 자체가 균열이 한 번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최후까지 버티던 비영대원들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남은 사람은 한 명뿐.
체형을 보아하니 묘령의 여인이 분명했다.
일흑령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왼팔에 비도를 꽂아 넣은 장본인임을.
의외로 분노가 치밀진 않았다. 여인의 상태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몸 곳곳에 상처가 나서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둬도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상황.
일흑령은 손을 들어 대원들을 물렀다.
그리고 선심 쓰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법이었다. 정파 놈들이라고 해서 모두들 맹물은 아닌 것 같군.”
“…….”
“하지만 여기까지다.”
일흑령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 관뒀다. 어차피 죽을 상대에게 찬사를 하든 협박을 하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자신의 왼팔에 박힌 비도를 뽑아 든 일흑령이 그녀를 겨냥했다.
그리고 별안간 던졌다.
고통 없이 단번에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도는 그녀에게 닿기 전에 허공에서 튕겨졌다.
“뭣……?”
일흑령은 당황했다. 그녀가 움직인 기색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쓰러진 여타 비영대원들에게서 기색이 느껴졌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흑령을 무의식중에 귀도신마를 돌아봤다. 이 정도 신기를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그러나 귀도신마는 아니었다. 그 역시 일흑령처럼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그럼 대체 누가……?’
의문은 이내 벗겨졌다.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존재가 일순 그들의 기감에 느껴졌던 것이다.
마교도들은 당황했다. 혈풍대가 온 것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느껴지는 존재는 분명 한 명뿐이었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한 사람, 여인만이 복면 너머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야 나서시는군요.”
나직한 한마디를 꺼낸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일흑령과 흑령대원들, 귀도신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의 몸은 땅에 닿지 않았다. 그 전에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았던 것이다.
여인, 담미화를 부축한 정천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