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 귀령과 혈풍 (33/146)

第十章 귀령과 혈풍

“오라버니는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천재였어요.”

촛불이 밝혀진 방 안.

모용린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태어나면서부터 양측의 태양혈이 반개(半開)된 상태였죠. 아버님께선 각각의 태양혈을 만개시키기 위해 각종 영약과 내단을 오라버니에게 먹였어요. 그의 나이가 채 다섯이 안 됐을 때의 일이었죠.”

모용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어요. 왼쪽의 태양혈이 만개한 반면 오른쪽의 태양혈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죠. 때문에 오라버니의 만지신통(萬知神通)의 공능 역시 기묘하게 뒤틀리게 됐죠.”

“부작용이 생겼나 보군.”

촛불 너머로 정천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모용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치명적인 부작용이었죠.”

“말해 봐.”

“오라버니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어요. 말 그대로 상대의 의도를 읽게 된 셈이죠. 한 치의 틀림도 없게 말이에요.”

“그런 것 같더군.”

“네?”

“내가 공격하던 궤도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어. 단순히 순발력이 좋은 것만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지.”

모용린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오라버니를 가지고 놀 듯 상대했다는 것인가요?”

“뭐, 암만 다음을 예측할 수 있어도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헛것이니까.”

“그런…… 당신은 대체 누구죠?”

“정천. 단지 그뿐이다. 일단은 네 오라비에 대해서나 계속 설명하도록 해.”

“아, 네.”

모용린의 얼굴이 다시금 우울해졌다.

“부작용이 일어난 것은 오라버니가 세가의 정식 계승자로 임명되던 날이었어요. 그날부터 오라버니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예언의 경지에까지 드나들게 됐어요.”

“예언?”

“기본적으로 만지신통의 공능은 상대방이 강하게 바라는 바를 읽는 데에 있어요. 때문에 전투 중에 상대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럼 무의식만 갖고 싸우는 이는 예측할 수 없다는 건가?”

“예. 하지만 그런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많지는 않겠죠. 하찮은 동물만 해도 의지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예언에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무슨 소리지?”

모용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는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경지를 확장하게 됐어요. 엄밀히 말해 부작용이 아니라, 본래의 작용이 너무나 잘 일어나게 된 거죠.”

“무의식…….”

“예컨대 이런 식이에요. 그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던 꿈이나 염원, 생각 등을 읽을 수 있는 거죠. 오라버니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시죠?”

“세가를 먹는다거나 하던 말 말인가?”

“그래요. 제게 그런 야망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않겠어요. 하지만 그 꿈은 오라버니가 후계자에 임명되기 이전에 접은 것이었어요. 그저 꿈으로만 남겨 놓으려고 했었던…….”

정천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가. 한마디로 남이 꿈으로만 간직하던 것을 읽게 되어, 그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거군.”

“그래요. 처음엔 염원으로 시작해, 나중엔 별별 생각까지 모두 읽게 되었죠.”

“흠. 생각보다 불쌍한 놈이었네.”

정천은 입맛을 살짝 다셨다.

“미칠 만도 하군. 바라지 않는 것까지 읽을 수 있게 됐으니.”

“그래요. 그리고 그 이후, 오라버니의 기행도 조금씩 잦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소문은 별로 나지 않았군.”

“세가의 자금력으로 입막음을 했으니까요.”

“녀석이 하던 짓을 보자니, 돈으로만 막진 않았을 것 같은데.”

잠시 침묵하던 모용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필요한 경우엔 자객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게 사실이니까요.”

“지저분하군.”

“……부정하진 않겠어요.”

촛불에 비치는 모용린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그녀를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이었다.

원체 그녀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정천으로서도 연민을 느낄 만큼.

“고생했군. 성격이 비뚤어질 만도 해.”

“그래요. 그 누구도 오라버니의 기행을 탓할 순 없을 거예요.”

“응? 내가 말한 건 녀석이 아니라 넌데.”

“…….”

모용린은 말없이 정천을 흘겨봤다. 정천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평소 모습이 나오는군.”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묻고 싶었어요.”

모용린은 자신의 몸을 한 차례 둘러봤다.

“우릴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녀와 모용준은 정천과 함께 방에 갇혀 있었다. 온몸을 결박당한 데다 혈도까지 점해져 밧줄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게 걱정이란 말이지.”

정천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혀를 찼다.

“우리가 목전에 둔 문제는 다음과 같아. 우선은 네 오라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겼으니, 이대로 돌려보냈다간 난리가 날 거란 말이지.”

“…….”

“다음은 너. 네 작은 오라비야 기절해 있었다지만, 너는 고스란히 보고 말았거든.”

정천이 담백하게 웃었다.

“내 본모습을 말이지.”

“당신…….”

모용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보니 말이 도리어 나오질 않았다.

겨우 진정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간 본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거군요.”

“그래. 필요한 경우엔 힘을 쓰기도 했지만.”

“용케도 걸리지 않았군요.”

“입막음을 했거든. 필요한 경우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도 말이지.”

모용린은 할 말이 없었다. 정천의 말이 마치 자기들을 조롱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너희가 처치 곤란이라는 거지. 이대로 놓아 줬다간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하니까 말이야.”

“그럼 우리를 어떻게 할 거죠?”

“글쎄.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기는 한데.”

모용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릴…… 죽일 건가요?”

“죽는 게 무섭나?”

“나는…….”

모용린은 숨을 고르고서 눈을 감았다. 마치 체념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작은 오라버니는 그냥 풀어 주세요. 일찍 기절한 만큼 이번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세요.”

“푸핫.”

정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의외로 재미있는 구석이 있군.”

“뭐라고요?”

“우선 모용준 혼자만 덩그러니 풀어 줄 수는 없어. 그 역시 이곳까지 왔었던 만큼, 화륜문을 의심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너희를 죽이고자 했으면 이렇게 떠들기 전에 그냥 처리했을 거야.”

모용린은 맥이 풀린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잠시, 이내 정천에게 놀림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을 본 정천이 다시 웃었다.

“아, 진짜 재미있네. 너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구나.”

“사, 사람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요?”

“응. 재미있으니까 놀리지, 재미없는데 놀리겠어?”

모용린은 정천을 노려봤다. 홍조를 띠고 있는 까닭인지 그리 냉랭해 보이진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웃음을 그친 정천이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절충안을 택하도록 하지. 사실 너희 입장에선 오히려 고마운 제안일 거다.”

“그게 무슨 말이죠?”

“간단해. 너희 남매를 풀어 주도록 하지. 네 큰 오라비가 어떻게 된 건지는 네가 적당히 얼버무리도록 해. 화륜문엔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오지 않도록. 그래도 영민하다는 소릴 들은 재녀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

“그건…….”

잠시 생각하던 모용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힘들어요. 저 한 명뿐이라면 모를까, 큰 오라버니가 그냥 입을 다물 리가 없어요.”

“그렇군. 그럼 그냥 없애 버릴까?”

“…….”

“농담이었어. 거 되게 살벌하게 노려보네.”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다니, 제정신인가요?”

모용린의 항의에 정천은 피식 웃었다.

“자주 하는 일인데.”

“…….”

일순 모용린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 사내는, 지옥 같은 수라장을 몇 번이고 헤쳐 나온 무인 중의 무인이었다.

‘능글맞은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실제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죽음을 직면했었으리라. 그런 이가 죽음을 가지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천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오라비의 정신에 금제를 하겠다.”

“금제라고요?”

“그래. 두 가지의 금제를 할 거다. 우선은 만지신통의 공능을 억제할 것이며, 다음으로 광인 같은 성정을 억누를 것이다.”

모용린의 두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그게…… 가능한가요?”

“한 가지 조건이 수반된다면.”

“그게 뭐죠?”

“내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상태여야 한다.”

“예?”

“당장은 내가 몸을 박살 내놨으니 금제가 통할 거야. 하지만 몸이 회복되면서 금제 역시 서서히 약해지게 될 거다.”

모용린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면 금제란 것도 무의미한 일 아닌가요?”

“무의미하진 않지. 금제가 걸려 있는 동안에 다음 방법을 찾아내면 되는 거니까.”

“그렇군요.”

얘기를 듣고 보니 나쁜 제안은 결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대로 된다면, 최소한 희망이란 게 생기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공짜일 리는 없겠지.’

속으로 중얼거린 모용린이 물었다.

“그 대가로 우리에게서 뭘 원하죠?”

“간단해. 우선은 이번 일과 나에 대해 완전히 함구하도록 해.”

“그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아니, 어려워해야 할 걸. 사람은 무의식중이거나 방심했을 때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니까.”

정천은 모용린의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만일 나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그로 인해 화륜문에 피해가 간다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모용세가를 의심할 거다.”

“…….”

“그로 인해 너의 가문이 겁화에 휩싸이게 된다면 실컷 후회해라. 너네 네 오라비의 부주의로 생기는 일일 테니까.”

“……알겠어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하는 모용린이었다. 정천은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치웠다.

그는 모용린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밧줄은 알아서 풀 수 있겠지? 모용준도 네가 풀어 준 다음 이곳에서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거죠?”

“뻔하잖아.”

방문을 나서며 정천이 덧붙였다.

“네게 은혜를 베풀러 간다.”

* * *

땅거미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황룡성의 서쪽을 담당하는 백호문의 위로도 노을빛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백호문은 한산했다. 슬슬 문지기들도 일을 마칠 시간이었기에 몇 없는 사람들도 잰걸음으로 바삐 사라지고 있었다.

그 와중.

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밤의 어둠이 평소보다 이르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흑의를 입은 사내의 뒤로도 기다란 어둠이 이어지는 듯했기에.

평소라면 하품이나 찍찍 뱉었을 문지기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살기는 없으나 풍겨 내는 위압감이 결코 보통이 아니었다.

문지기 중 담력이 큰 이가 떨리는 입으로 물었다.

“저, 정지! 존장께선 뉘시오?”

흑의 중년인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허, 그놈 참 예의도 바르군. 존장이라. 교단에 있을 때엔 그런 소릴 하는 놈이 하나도 없었지.”

“교단이라 했소?”

“그렇다. 어쨌든 비키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네?”

휙.

중년인의 팔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나섰던 이는 물론이고 다른 문지기들도 기겁을 하고서 움찔거렸다.

카앙!

철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지기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쿠르르르!

성문을 연결하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백호문의 거대한 두 문짝을 양측에서 당기고 있던 쇠사슬이었다.

끼기기긱.

쇳소리를 내며 백호문이 안으로 닫혔다. 졸지에 바깥쪽에 남겨진 문지기들이 새하얗게 질렸다.

“우아아악!”

버둥거리던 문지기들이 육모곤을 내던지고 사방으로 혼비백산했다. 중년인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찰 따름이었다.

“칠칠치 못한 녀석들이로군. 예의는 있는데 강단이 없구나.”

난리가 난 건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문지기들은 기겁을 해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적습이다! 적이야!”

“집행부에 알려! 아니, 군사부에 알려야 하나?”

“아무에게나 일단 알려! 윗사람에게 무조건 알려라!”

소란스러운 안쪽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던 중년인이 픽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이 정말 재미있어지겠구먼.”

그러나 시간을 낭비해선 곤란했다. 하물며 여기서 미행을 붙여서도 좋지 않았다.

“네게 피 맛을 못 보여줘서 미안하구나, 귀령아.”

중년인, 귀도신마가 애병 귀령도를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문지기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적습이 시작된다!”

“끌끌. 이런 건 적습이라 부르는 게 아니지.”

귀도신마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휘이이이이!

그의 끝자락을 따르던 어둠이 칼날 위로 뭉쳐 들어갔다. 귀령도의 칼날은 어둠을 끌어들여 기괴한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귀신이 곡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문지기들의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으으으!”

“으악!”

사방에서 터지는 비명에 귀도신마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구, 몇 년 안 놀았다고 이렇게나 허약해졌단 말인가? 이래서 정파 놈들이란.”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는 귀령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쐐애액!

흑색 검기가 쏘아졌다.

귀도신마는 검기의 궤적을 중도에 몇 차례 바꾸며 유려한 필체로 흔적을 남겨 나갔다.

파파파파팍!

검기에 격타당한 백호문의 문짝이 파여 나갔다. 혼이 빠져 있던 문지기들도 뒤늦게 귀도신마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짝에다 글귀를 새기고 있었다.

이윽고 검기의 발출이 끝났다. 귀도신마는 자신의 작품을 흡족한 듯 바라보며 웃었다.

“명필이로고.”

그는 홀가분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걸음을 떼기 전,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천상천하 유일존 천마신교의 귀도신마가 물러난다! 천무맹의 겁쟁이들은 실컷 두려워하고 벌벌 떨어라!”

사자후와 같은 굉음이 삽시간에 백호문 근방을 휩쓸었다.

비교적 가까이에서 그 말을 들은 문지기들도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귀가 먹먹해서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못 들은 것이다.

귀도신마는 홀가분하게 웃고는 몸을 날렸다. 문지기들은 그제야 악몽에서 깨는 기분을 느끼며 안도했다.

어딘가에서 오줌 냄새가 났다.

문지기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갖고 놀릴 생각을 품지 못했다.

‘음?’

숲을 내달리던 귀도신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쳐졌다.

후방에서부터 빠르게 다가오는 신형을 느낀 것이다.

‘역시 맹물만 있는 것은 아니로군. 이래야 우리의 영원한 숙적답지.’

귀도신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반격을 할까. 우선은 첫 공격을 받아 줘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이내 지워졌다.

후방에서부터 강렬한 기운이 몰아쳤던 것이다.

“허?”

귀도신마는 황당함을 느끼며 귀령도를 뽑았다. 동시에 거의 반사적으로 후방을 향해 일섬을 날렸다.

쐐애액!

귀령혈섬(鬼靈血閃)의 기운이 날아들던 뇌기와 충돌했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면 주변의 나무들의 뿌리를 뽑아 버렸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큼직한 인영이 나타났다.

귀도신마가 미소를 짓고서 물었다.

“네놈은 뭐냐?”

“뇌혈도 장유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귀도신마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구의 중년인, 장유추가 턱짓으로 귀령도를 가리켰다.

“그 대도, 꽤나 좋아 보이는군.”

“귀령이 말이냐? 절세의 명도지!”

“잘됐군. 그 명도, 노부가 받아야겠다.”

“허허!”

귀도신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구나. 이 몸이 귀도신마임을 알면서 애병을 가져가겠노라 선언하는 것인가?”

“신마고 마귀고 알 바 아니지. 지금 내겐 쓸 만한 대도가 필요하고, 마침 네놈이 나타나 설쳐 댔다. 그것이면 이유는 충분하다.”

“어이가 없는 놈이군.”

귀도신마의 시선이 장유추의 광천뇌도를 훑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의 대도도 우리 귀령이만큼은 될 것 같은데?”

“훨씬 더 뛰어나지. 노부의 광천뇌도야말로 절세의 대도로다.”

“웃기는 놈이구나. 그 잘난 대도를 가진 놈이 무어 욕심이 그리 많아 남의 애병을 탐하느냐?”

장유추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교의 입만 산 떠벌이 녀석아.”

“필요하면 가져가 보란 말이다. 천무맹의 날강도 같은 얼간이야!”

“그러마!”

“와랏!”

두 사람의 대도가 거의 동시에 휘둘러졌다. 푸른빛의 뇌광과 칠흑 같은 흑색 기운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거대한 폭발과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대도가 수차례 충돌했다.

카카카캉!

서로의 칼날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미끄러졌다. 두 자루의 대도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품인지라 이빨 하나 상하지 않았다.

“허허허, 날강도 주제에 제법이구나!”

“흠. 네놈이야말로 떠벌이치고는 실력이 상당하군.”

“허! 마교의 칠절을 두고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건 네놈뿐일 거다.”

“칠절이라고? 나는 정사백팔고수다.”

“사람이 백팔 명이나 된단 말이냐?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였겠군.”

“노부는 그중에서도 최강자다. 네놈은 보아하니 칠절 중에 여섯 번째 아니면 일곱 번째겠군.”

“웃기는 소리! 본좌야말로 칠절의 으뜸이니라!”

바삐 대도를 놀리는 와중에도 말싸움 또한 뒤지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카캉! 카가강!

공방이 오십 합을 넘어갔을 때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양방향에서 두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한쪽은 천무맹 소속 타격대인 혈풍대. 다른 한쪽은 마교의 흑령대였다.

귀도신마가 입맛을 다시며 귀령도를 회수했다.

“쩝. 아깝구나. 조금만 더 있으면 네놈 목을 뎅강 따는 것인데.”

“끝까지 입만 살았구나. 상대하기 귀찮으니 다음엔 곧장 목부터 내놓거라.”

“허허! 재미있어. 네놈 같은 놈이 천무맹에 많다면 정말로 즐거울 것 같구나.”

귀도신마가 순간 손을 크게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공터에 몰아쳤다.

화아악!

엄청난 풍압에 다가서던 혈풍대가 위축됐다. 물론 장유추는 그 와중에도 꿈쩍도 없었다.

씩 웃은 귀도신마가 몸을 돌렸다.

“후에 보자꾸나. 피바람이 중원을 강타할 때.”

귀도신마가 흑령대 사이로 사라졌다. 흑령대는 더 싸울 생각을 않고서 곧장 뒤로 후퇴하여 멀어졌다.

혈풍대가 그 뒤를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유추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서라. 너희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게 무슨……!”

항의하려던 혈풍대원의 입이 틀어막아졌다. 혈풍대주 유자서의 행동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뇌혈도 대주님.”

“유자서로군. 그세 혈풍대주가 된 것인가?”

“운이 좋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유추가 몸을 돌렸다.

“놈들을 쫓고픈 마음은 알겠는데 오늘은 포기하게. 그 수다쟁이는 자네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대주님은 돌아가시는 겁니까?”

“이틀 새에 일생에 남을 강자를 둘이나 만났어. 축배나 들러 갈 생각이네.”

“살펴 가십시오.”

장유추의 모습이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입을 틀어막혔던 혈풍대원이 의아한 얼굴로 유자서를 보았다.

“대주님, 저자는 누구입니까?”

“뇌혈도 장유추.”

유자서가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대 혈풍대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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