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파장(罷場) (30/146)

第七章 파장(罷場)

정천은 자신과 장유추의 상태를 가늠했다.

서로가 입은 피해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천뢰강림의 기운과 패화강기가 서로의 힘을 거의 상쇄시켰던 까닭이다.

내상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정도였다.

장유추 역시 다르진 않을 터.

‘반면에…….’

정천은 시선을 내렸다.

죄다 녹아 버려 칼자루밖에 남지 않은 대도가 보였다. 패화강기의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녹아 버린 것이었다.

반면 광천뇌도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하다.

그 시점에서 정천의 패배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장유추는 선언했다. 자신이 패배했노라고.

때문에 패배를 시인하려던 정천이 멍한 표정을 짓게 됐다.

“봐주는 겁니까?”

정천의 입이 열렸다. 장유추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이 대결 말입니다. 패배한 쪽은 저인데 왜 선배가 패배를 선언하느냔 말입니다.”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이 대결은 노부의 패배다.”

“아니, 그러니까…….”

정천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러는 동안 장유추가 설명했다.

“노부의 광천뇌도는 천하의 신물. 반면 자네의 무기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도였네. 자네는 시작부터 한 수 접고 들어간 셈이지.”

“…….”

“그런데도 무승부를 이루어 냈어. 이 대결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노부의 패배야.”

정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기의 차이도 결국은 실력입니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누가 적의 무기를 신경이나 쓴답니까?”

“생사투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싸움이 아니잖나?”

“애들 장난도 아니죠. 무기의 차이는 어차피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간 겁니다.”

장유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그런 차이를 두고도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말이렷다?”

“예.”

황당하리만치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장유추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는 이내 헛웃음을 짓고서 말했다.

“건방지기가 하늘 끝까지 찌를 기세로군. 화륜패 놈의 말이 사실이었어.”

“어쨌든…….”

정천은 반쯤 녹은 칼자루를 휙 던졌다.

“적당히 절충해서 무승부라고 하죠. 그 정도면 선배께서도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음.”

“내기 역시 무효가 되겠군요. 그럼 이만 작별하지요. 견식을 넓혀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천은 할 말만 하고서 몸을 돌렸다.

처음엔 장유추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홀로 독야청청한데다 천무맹에 상당한 불만 역시 지니고 있으니, 힘을 빌리기엔 제격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장유추는 누군가와 손을 잡거나 하는 데엔 어울리지 않았다.

‘백운신과 으르렁거리던 것만 봐도…….’

홀로 강대하긴 하나 조직 안에선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정천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적당히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정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조금 전의 대결이 재미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정쩡한 결착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싸움이란 모름지기 이겨야 재미있는 법이니 말이다.

‘뭐, 언젠가는 기회가 생기겠지.’

정천이 내심 웃고 있으려니, 장유추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 듯 말을 꺼냈다.

“그렇군. 무승부라고 해야겠군.”

“……?”

“결착을 내지 않고선 자네도 답답할 테지? 이대로 끝내고 싶진 않으리라 믿네.”

“예?”

정천이 뒤로 돌아섰다. 장유추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같은 시선과는 반대로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조만간 찾아감세. 다음번에야말로 제대로 결착을 내 보세나.”

“잠시만, 잠시만요.”

정천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설마 결판을 낼 때까지 싸우자는 겁니까? 예전에 대주님과 그랬던 것처럼?”

“자네도 찝찝한 결착은 싫을 것 아닌가?”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장유추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실력을 갈고닦고서 기다리게. 적당한 때를 봐서 내가 찾아갈 테니.”

“아니, 선배님.”

장유추가 몸을 날렸다. 처음부터 정천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었던 듯했다.

“으음.”

정천은 난감한 얼굴로 장유추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혹시, 단순히 놀아 줄 상대를 바랐던 게 아닐까?”

* * *

정천이 돌아왔을 때, 개파식은 거의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한쪽에선 사람들을 불러 모은 엄백이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본인 나름대로 훈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훈화란 게 본디 그렇듯 듣는 사람들은 짜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 천무맹의 젊은 기재들인 자네들이 더더욱 정진을 해야 한다는 것일세. 물론 지난 십 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져 오긴 했으나, 그러한 평화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평화란 본디 전쟁과 전쟁 사이의 짧은 휴식일 뿐이니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훌륭한 말.

그러나 뻔하디 뻔해 졸음만 유발하고 있었다.

물론 하늘같은 장로 앞이니 대놓고 조는 사람은 없었지만.

“쿨쿨…… 음냐.”

한 명 있긴 했다. 화연란의 품에서 곤히 졸고 있는 소윤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윤에게 향했다.

엄백도 상대가 어린아이이다 보니 뭐라고는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흠흠. 그러니까 본 장로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일세.”

“물론 훌륭하고 좋은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천하의 명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자신들을 졸음의 마수에서 구해 준 이에게로.

정천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엄백이 머쓱한 듯 말했다.

“왔구먼. 그냥 후배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얘기나 좀 해 주고 있었네.”

“그랬군요. 과연 훌륭하십니다.”

“뭘 이 정도를 갖고 그러나. 허허. 이 자리의 주인인 자네가 자리를 비웠으니, 조연인 나라도 대신 나서야지 않겠나.”

말과 함께 노골적인 미소를 보내는 엄백이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어 줬으니 고마워하라는 의미.

정천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가면 같은 미소였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한 가지 정정할 게 있군요.”

“음?”

“이 자리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화륜문의 문주이지요. 저 역시 그저 주변인에 불과합니다.”

정천은 화연란을 가리켰다. 졸지에 주목을 받게 된 화연란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앞으로는 장로님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 큰 마음 씀씀이에 죄송스러워지니까요.”

“으음. 그, 그런가? 미안하구먼.”

졸지에 사과를 하는 엄백이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냥 보고 넘겼다. 정천의 말투도 무척 공손했고 엄백의 반응도 익살스럽기 그지없었던 까닭이다.

기분 좋은 자리에서 으레 일어날 수 있는 단순한 대화. 사람들의 생각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만은 생각이 달랐다.

모용린과 제갈순이었다.

‘천하의 천무맹 장로가 왜 저리 쩔쩔매는 거지?’

‘그가 엄 장로의 약점이라도 쥐고 있는 건가?’

약간 취하긴 했다지만 특유의 견지(見地)마저 바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천과 엄백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역시…….’

‘그에겐 뭔가 숨기는 게 있다.’

문제라면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두 사람은 머릿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어. 아직 정천, 저자에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일단은 형님에게 말씀을 드려 보는 편이 낫겠다. 장로들과도 밀접하다면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그러는 사이 개파식은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모두들 이제야 해방됐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윤평과 무당파 도사들이 정천에게 다가왔다. 정천 스스로가 주인공은 화연란이라 못 박아 두었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후에 다시 뵙지요.”

“글쎄. 볼 일이 그리 자주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시큰둥한 정천의 말에도 윤평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곧 뵙게 될 겁니다.”

“…….”

“그럼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서 떠나는 윤평이었다.

도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천은 볼을 긁었다.

‘무당파 역시 낌새를 챈 건가?’

모용세가나 제갈세가만큼 깊이 파고들진 않았으리라. 그저 화륜문과 장로 둘이 밀접한 관계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터.

정천이 나직이 전음을 펼쳤다.

—담미화, 윤평이 주로 누구를 관찰하는 것 같았지?

—백운신 장로를 자주 쳐다보았습니다.

—역시 그런가?

정천은 담미화에게 명령을 내려 몇 사람을 관찰하게 했다.

가장 중요한 소수의 몇 명만을 유심히 바라보게 한 것이다. 물론 윤평 역시 그 소수에 포함되어 있었고.

—요사이 화산파와 무당파 사이의 관계가 어떻지?

—표면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파 자체보다도 하위의 지부들 사이에 잡음이 좀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군. 그런 마당에 백운신까지 개파식에 나타났으니 관심이 동할 수밖에.

그녀의 보고대로라면 윤평은 역시 화산파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모용린이 정천에게로 다가왔다.

정천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나?”

“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어요.”

“뭐가?”

“이곳 말이에요. 화륜문이 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정천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까지 일관성 있게 싸가지가 없을 수도 있군. 너 정말 대단하다.”

“……뭐라고요?”

“뭐, 어쨌든 얘기는 잘 새겨 두지. 저주 몇 마디에 망할 문파라면 망해도 싸다고 생각되지만 말이야.”

“딱히 저주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나 그녀가 못미덥다는 얘기니까요.”

“오지랖도 넓군. 남의 문파에 참견하기 전에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지 그래?”

모용린이 입을 다문 채 정천을 노려봤다. 정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이윽고 한숨을 쉬는 모용린.

정천은 몰랐지만, 그녀는 내심으로 자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보같이. 왜 그렇게 말을 한 거지?’

나름대로 화륜문을 걱정해 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정천에게 뭔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굳이 그에게 시비를 걸 이유는 없었으니까.

도리어 환심을 사면 샀지.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저런 말을 하고 말았다.

그게 실수인 걸 아는데, 정천이 또 까칠하게 나오니 다시금 쏘아붙이고 말았다.

‘왜 이 인간만 보면 화가 나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모용린이었다.

정천은 그 동안에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할 말 다했으면 그만 가 보지?”

“네?”

정천은 말없이 뒤를 가리켰다. 모용준을 비롯한 세가의 무인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모용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얘기 다 끝나지 않았어요.”

“이를 어쩌지. 나는 더 할 얘기가 없는데.”

“잠깐만요.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 모용세가가 화륜문의 뒤를 봐줄 수도 있어요.”

그녀 나름대로 강수를 던진 것이었다. 가주 후계자 중 한 명이라 해도 상의도 없이 이런 약조를 할 순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용준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눈치였다.

모용린 역시 말을 뱉고서 금세 후회했지만, 정천은 그저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미안하지만 신생 문파 주제에 벌써부터 든든한 배후나 둘 생각을 하는 건 별로인 것 같군. 뭐, 내가 문주인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죠? 모용세가 같은 대세력을 등에 업으면 분명 화륜문에 이익일 텐데요?”

“세가댁 도련님 취급이나 당하겠지. 누군가와 싸울 일도 없이 곱게 키워질 거다.”

“남들은 그러고 싶어서 안달이에요.”

“화륜문은 아냐. 보살핌 받고 자라난 울보가 되느니 맨손으로 거칠게 크는 편이 낫다.”

모용린으로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정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큰 제안에 부응할 만한 조건도 이쪽엔 구비되어 있지 않아.”

“나는 그저…….”

“화륜문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 거지?”

모용린은 입을 닫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몇 가지의 답이 나왔다. 장로들과의 관계라거나 정천이 숨기고 있는 것이라거나.

엄밀히 말해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 바보같이 무슨 말을 한 거야?’

모용린은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정천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서.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건 가주 직이야.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진 다른 어느 것에도 눈을 줘선 안 돼.’

잠시 후 그녀의 눈빛은 평소의 냉랭하고 이지적인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실언을 했어요. 조금 전의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해 줬으면 좋겠군요.”

“뭐, 그러지. 들어서 좋을 것도 없는 말이었으니.”

“기분 나쁜 사람.”

짤막히 말한 모용린이 몸을 돌렸다. 정천은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걸음을 떼기 전,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까 그 말, 사과하죠.”

“응?”

정천이 반문했지만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멀어졌다. 그녀와 정천을 번갈아 본 모용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선배. 워낙 성격이 드센 아이라서.”

“그건 나도 잘 알지. 신경 쓰지 마.”

“고맙습니다. 그리고 논검 건 말입니다만…….”

“아무 때나 찾아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하하. 예!”

호탕하게 웃은 모용준이 걸음을 뗐다.

정천은 그들에게서 눈을 뗐다.

제갈순은 인사도 없이 가 버린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그가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정천이 손님들의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백운신과 엄백.

칠삼과 심후가 의아한 눈으로 두 장로를 보고 있었다. 소윤이야 곤잠에 빠져 있었고, 화연란의 경우엔 대강 상황을 짐작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정천이 돌아보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빠른 화연란이 두 문도를 물러나게 했다.

“꽤나 긴 서두였구먼.”

엄백의 말이었다.

“서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어차피 본론은 지금부터가 아니겠나? 이 때문에 우리를 초대한 것일 테고 말일세.”

“서두도 본론도 없습니다. 오늘은 말 그대로 개파식의 일로 두 분을 초청한 겁니다.”

“허허, 농담도 잘하는군!”

웃는 낯으로 말하는 엄백이었으나 백운신도 정천도 무표정했다.

결국 머쓱해진 엄백이 웃음기를 지웠다.

“그럼 정말 개파식의 일로만 우릴 불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기치 못한 손님이 왔던 걸 보셨으니 아실 텐데요.”

예기치 못한 손님이란 물론 장유추를 말하는 것일 터. 엄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럼…… 정사백팔고수들과 천무맹 내 거대 세력들에 일일이 서신을 보낸 게 사실이란 말인가?”

“예.”

“대체 그런 멍청한 짓은 왜 한 건가?”

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백은 언제 웃었냐는 듯 책망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이야. 자넨 자네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 너무나 모르네.”

“글쎄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바로 오만이고 실책이란 말이네. 자넨 너무 생각이 얕아. 최고 수위의 강자들에게만 초청장을 보냈다고? 그런 장난 같은 일을 벌여서 대체 얻은 것이 무언가?”

“허명을 얻었지요.”

“응?”

엄백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내내 침묵하고 있던 백운신이 입을 열었다.

“허장성세인가?”

“비슷합니다.”

“그렇군. 한심한 허명으로 본모습을 숨긴다. 지금껏 자네가 해 온 일의 확대로군.”

“그렇지요. 그나저나 저에 대해 조사를 따로 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그래 봐야 문지기로 취직한 이유부터지만.”

엄백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좌우로 돌려댔다. 그 모습에 백운신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오, 엄 장로. 이번 일로 세간에서 화륜문을 어떻게 보겠소?”

“예? 그야…….”

정천의 눈치를 살짝 살핀 엄백이 말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멍청한 문파라고 생각하겠지요.”

화연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백운신에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바로 정천이 바란 바요.”

“네?”

엄백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런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남들의 눈 밖으로 벗어난다, 그것을 의도했다는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화륜문의 본모습을 알았겠지. 최소한 비장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느꼈을 것이오. 동시에 그것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을 만큼 영리하기도 하고.”

“그, 그렇군.”

엄백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명을 만들어 두되 실속을 챙길 수 있는 부분에선 챙긴다. 아무 힘없는 문파로 펼칠 수 있는 방법 중에선 상책이었다.

“그러나…….”

백운신의 말이 이어졌다.

“위험 요소가 상당히 큰 방법이기도 하지.”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오늘 일로 화륜문에 대해 깊이 조사하는 이들이 있을 걸세. 그들로 인해 자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그게 가치란 게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나?”

정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우선은 화륜문의 실체를 아는 이들로 하여금 추측을 유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생긴 거짓 정보는 추후에도 유효하게 작용할 겁니다.”

“거짓 정보라?”

“오늘 이 자리에 온 이들 중 어느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내가 네 명의 장로와 도열궁을 처치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

“으음.”

백운신도 엄백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당사자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화륜문이나 정천에 대한 추측이란, 기껏해야 화산파나 두 장로와 연관이 있다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정천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그에 대한 거짓 정보와 풍문이 많을수록 행동하기가 편할 테니까.

‘장유추 정도라면 내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장유추의 경우엔 다른 의미로 위험 요소가 없었다. 애초에 천무맹과 장로들 따위는 그의 관심 밖이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던 정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개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닌 일이었습니다. 대주님의 무공이 정식으로 대를 잇게 됐으니까요.”

“으음.”

“그렇겠지.”

두 장로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문주 앞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도 없었고.

화연란은 복잡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오라버니…….’

이미 정천에겐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까지도 화연란과 화륜문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다.

백운신이 알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따지지는 않겠네. 그럼 다른 질문을 좀 해도 되겠나?”

“하십시오.”

“아까 장유추와 일전을 벌인 것 같더군.”

화연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리를 길게 비운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한판 벌이고 왔을 줄이야.

정천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강하더군요.”

“노부보다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차이가 상당한가?”

“전력으로 싸운다면, 장로님은 그의 백초지적도 될 수 없을 겁니다.”

백운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엄백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정사백팔고수의 수위라고는 하나, 화산일검이라 불렸던 백 장로를 가볍게 상회한단 말인가?”

“화산일검이란 별호 자체가 그저 상징에 불과하니까요. 애초에 오랜 예전에나 불렸던 별호 아닙니까?”

독하리만치 차가운 한마디였다.

엄백이 깜짝 놀라 백운신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백운신은 쓴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싸울 일이 없었지. 그러는 동안 무뎌진 것이 칼끝만은 아니더군.”

“이해합니다. 장로 직이란 게 원체 다른 일을 하기 어려운 자리였겠지요.”

딱딱한 표정으로 말하는 정천이었다.

얼핏 들어선 위로의 말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장로들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연무(硏武)란 곧 호흡과도 같은 것. 무인이라면 응당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거늘.’

정천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백운신은 눈을 감았다.

이런 실력으로 정천에게 호승심을 품었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는 정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엄백은 물론이고 정천도 약간은 놀랐다.

“깨달음을 주어 고맙군.”

“……딱히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노부에겐 큰 도움이 되었지. 설령 자네가 조롱의 의미만을 담았더래도 노부로선 무척 고마운 일이라네.”

“그렇습니까?”

“그렇네.”

담담한 두 사람의 대화에 엄백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들었던 까닭이다.

백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돌아가 보겠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잊고 있던 본분을 일깨우는 게 먼저일 듯싶군.”

“알겠습니다. 배웅하진 않겠습니다.”

“그러게나. 수고하게.”

백운신은 홀연히 몸을 돌렸다. 엄백은 당황해선 그와 정천을 번갈아 보았다.

“이, 이런.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한 것인가?”

“잘 모르겠으면 굳이 알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천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엄백은 내심 낭패감을 느꼈다.

‘이런, 이래서야 반(反)혈선 연맹에 대해서는 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지 않은가.’

그는 잠시 고심했다. 억지로라도 정천에게 동맹 수락을 받아내야 할까?

그러나 정천의 눈을 본 순간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천은 무언의 시선만으로 엄백에게 물러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젠장.’

엄백은 하릴없이 몸을 돌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었다.

껄끄러운 얘기라면 그나마 얘기가 통하는 쪽과 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는 밖으로 나섰다.

멀찌감치 떠나가고 있는 백운신의 모습이 보였다.

“백 장로, 백 장로! 잠깐 기다리시구려!”

헐레벌떡 뛰어간 엄백이 백운신과 나란히 걸었다.

“대체 뭐가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구려. 반혈선 연맹의 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엄 장로.”

백운신이 나직이 엄백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닌 것 같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오랫동안 품어 온 숙원이라 하지 않으셨소?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요. 조금은 더 인내심을 기르는 편이 낫지 않겠소?”

“그, 그러나…….”

“먼저 가겠소. 추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백운신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경공을 펼쳐 멀어졌다.

“이런.”

엄백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정파 일통 천무맹의 장로가 체통을 잃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멍청히 앉아만 있을 때가 아니잖은가!’

마교가 움직이고 있다.

팔부혈선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맹주 남궁운에게 종용한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흐르는 기류.

남궁운은 혈선의 고압적인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혈선들 역시 남궁운의 반발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남궁운은 혈선에 대적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힘을 길러 왔다.

그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 온 엄백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맹주님께선 이제 혈선과 붙어도 밀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계시다.’

일촉즉발.

언제 상황이 터지게 될지 몰랐다. 엄백으로선 그전에 정천이란 우군을 남궁운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엄백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스쳤다.

“일이 이렇게 됐다면 차라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