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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章 패화강기(覇火剛氣), 천뢰강림(天雷降臨) (29/146)

第六章 패화강기(覇火剛氣), 천뢰강림(天雷降臨)

“지쳤냐?”

익숙한 목소리에 정천은 고개를 들었다.

갈색빛이 감도는 덥수룩한 수염이 보였다. 그 위로는 큼직한 주먹코와 대추알만 한 눈알이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시뻘건 피부의 거한.

지겹도록 익숙한 얼굴이다.

정천은 한숨을 토하며 대답했다.

“안 지쳤으면 사람이 아니죠.”

“난 네가 사람으로 안 보일 때가 많다만.”

“저처럼 인간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거 얼굴에 칠갑을 한 피나 씻어 내고 말하지 그러냐?”

사내의 반문에 정천은 손등으로 얼굴을 쓱 문질렀다. 땀과 범벅이 된 끈적거리는 피가 묻어났다.

그것을 혀로 슬슬 핥았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떫은맛이 났다. 그래도 맛과 별개로 체내에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듯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마수의 피다. 강력한 각성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내력 증진 효과까지 있으니, 천하의 영약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혀가 마비될 정도로 떫다는 단점이 컸지만.

요즘은 다들 반쯤 억지로 놈들의 피를 마시느라 미각을 잃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끙.”

몸을 반쯤 일으킨 정천이 중얼거렸다.

“얼음에 며칠 담가 둔 청엽주(靑葉酒)나 한잔 하고 싶습니다.”

“자식이 군침 돌게 하네.”

“안주로는 기름기 잘잘 흐르는 오리 구이 정도면 괜찮을 듯싶군요. 잘 익은 복숭아를 옆에 두고 단칼에 썰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크으, 정천 이 자식아! 이제 그만 좀 해라. 정말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니까.”

정천은 피식 웃고서 거구의 사내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살아 나가자고요, 대주님.”

거한, 화륜패의 얼굴에 진지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는 손바닥을 쫙 펴선 정천의 등짝을 때렸다.

짜악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토벌대의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으, 젠장…….”

정천이 이를 악물고 침음했다. 악의야 없겠지만, 더럽게 아픈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역발산기개세가 딱 어울리는 완력을 지닌 화륜패였다. 두 차례의 환골탈태로 강력한 근골을 갖춘 정천임에도 그 고통에 뼛속까지 스미는 듯했다.

“건방진 소리 마라. 이 화륜패가 여기서 쓰러질 성싶으냐?”

“쳇. 노인네가 힘만 더럽게 세서는.”

“뭐야? 누가 늙었다는 게냐?”

“여기 노인네가 대주님 말고 누가 있습니까? 이중에 흰머리가 난 사람도 대주님뿐이라고요.”

“흥. 그것이야말로 연륜의 증거이니라. 매일같이 무를 연마하고 협을 행한 증거가 아니겠느냐?”

정천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저기 깽판이나 치고 다닌 게 협행이우?”

“이놈아, 네놈 같은 천둥벌거숭이를 사람 노릇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협행으로 충분하다. 이런저런 사소한 실수쯤은 덮을 정도의 협행이지!”

화륜패도 웃으며 대도를 어깨에 걸쳤다. 서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엔 어느새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돌이 긁히는 듯한 소리가 아래쪽의 공동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가 암벽을 타고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래도 쉴 틈은 주니 다행이로군.”

나직이 중얼거리며 화륜패가 대도에 내력을 주입했다. 강기가 칼날에 씌워짐과 동시에 그 위로 강렬한 열기가 한 꺼풀 덧씌워졌다.

패화강기(覇火剛氣).

화륜패가 진마동의 나락 속에서 깨우친 기운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도강 위에 열기를 지닌 도기를 덧씌운 것.

적을 베는 동시에 불살라 버리는 힘은 화륜패의 무지막지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흐음!”

패화강기의 기운이 한층 강렬해졌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대도를 들어 올린 화륜패가 소리쳤다.

“애송이들, 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와라!”

외마디 외침과 함께 화륜패가 아래쪽의 공동으로 몸을 날렸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재빨리 뒤를 쫓아간 정천이 아래쪽을 보았다.

실제로 그는 빠르게 낙하하고 있었다. 물론 정천은 그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지던 화륜패는 암벽을 타고 올라오는 무리를 보았다.

“흠!”

인간의 상반신 아래로 거미 몸통이 꾸물거리는 괴수들. 그런 것들이 한둘도 아니고 수백이 떼지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지간히 담력 좋은 사람조차 오줌을 지릴 광경.

그러나 화륜패는 호기롭게 웃었다.

“하하하! 이곳에 온 이래로 별별 놈들을 다 구워 먹게 되는군!”

그는 낙하 중인 상태에서 왼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콰악!

딱히 내력을 담지 않았음에도 팔꿈치까지 암벽에 송두리째 박혔다. 물론 관성이 있는 까닭에 바로 멈추지는 않았다.

콰드드득!

마치 밭을 가는 호미처럼 그의 왼팔이 암벽 위로 기다란 고랑을 만들었다. 화륜패는 그렇게 낙하 속도를 줄인 채 자유로운 오른팔을 쫙 뻗었다.

팔 끝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폭(爆)!”

외마디 외침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격발됐다. 공동 안이 시뻘건 빛으로 물들었다.

화르르륵!

강렬한 열기가 몰아쳤다. 좁디좁은 공간에서 열기가 마구 역류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로 인한 열풍이 정천이 있는 곳까지 치솟았다. 한서불침인 정천임에도 살갗이 익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천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화륜패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 * *

장유추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정천의 대도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건 대체……?”

이글거리는 붉은 불꽃이 칼날 위에 있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으리라.

장유추는 금세 그것이 두 겹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검강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니, 조금 다르다.’

두 기운 중 하나는 분명한 강기였다. 그러나 그 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열기를 머금은 검기였다.

독특하다. 그리고 생소하다.

장유추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검기 운용이었다.

“……그게 대체 무엇이냐.”

“패화강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대주님께서 창안하신 무공입니다.”

“화륜패가 그것을 창안했다고?”

“그렇습니다. 비장의 무기로서 말이지요.”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귀환하게 된다면 이걸로 장 선배를 박살 낼 거라고 호언장담하셨었습니다.”

“…….”

장유추는 굳은 표정으로 패화강기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녀석도 잊지 않고 있었나 보군. 우리가 나눴던 마지막 약조에 대해서.”

“마지막 약조라고요?”

“그래. 놈은 용검대 대주 직을 사임할 생각이었다. 진마동 건을 최후의 임무로 택하고서 말이지.”

정천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화륜패는 진마동 안에 있었던 십 년 동안 그런 말은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었다.

“하여, 진마동에서 돌아오게 되면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로 약조했었지. 그 이후 다시는 서로 도를 맞대지 않기로 말이다.”

“그랬었군요.”

“무인을 포기하고 아비가 되려 한 거겠지.”

장유추의 시선이 화륜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장원은 거의 형체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격분했었다. 그 딸이란 것이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서 설친다고 생각했으니.”

“그럼 지금 생각은 어떻습니까?”

“달라진 게 있을 것 같은가?”

정천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대도를 두 손으로 쥐었다.

“앞으로는 달라져야 할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뇨.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네놈이? 화륜패의 무공을 조금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구나.”

“흉내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파앗!

순간 정천의 기운이 한층 강렬해졌다. 장유추의 표정이 다시금 딱딱해졌다.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가?’

정천이 격발하고 있는 내력은 얼핏 봐도 자신과 견줄 만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장유추의 얼굴에 비로소 긴장이 감돌았다.

“영리하군. 자신의 실력을 이렇게까지 숨기고 있었는가? 내력을 상실했다더니, 이제 보니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것이군.”

“그 얘기는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

“술시중을 들던 계집. 네놈에 대해 물어보니 신이 나서 험담을 하더군.”

“소윤 그 녀석…….”

그때 장유추가 광천뇌도로 땅을 쿵 찍었다. 순간적으로 반경 삼 장을 아우르는 뇌전이 번뜩였다.

그 범위 안에 있던 보리들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게야. 시간을 끌게 되면 네게 좋을 것이 없을 게다.”

“확실히 그렇군요.”

장원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그곳엔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시간을 허비하면 시선을 끌게 되리라.

물론 그중 최고수라 할 수 있는 백운신이나 엄백은 침묵할 테지만.

정천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자신과 장유추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정천이 실력을 숨긴 것처럼 장유추 역시 비장의 한 수를 지니고 있으리라.

시작부터 절초로 맞붙는다면 모를까, 웬만해선 쉽사리 끝을 보기 힘들 터였다.

하물며 지금의 정천은 화륜패의 도법만으로 싸워야 한다.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뭐, 일단 해 보는 수밖에.’

어정쩡한 결심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장유추의 무공이 고강했으니 말이다.

정사백팔고수 중에서도 수위로 꼽히는 그였다. 조금만 붙임성이 있었어도 천무맹의 요직을 어렵지 않게 차지했으리라.

정천이 먼저 움직였다.

“그럼 갑니다.”

“음.”

탓!

정천은 천마보를 밟아 삽시간에 장유추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그것이 마교의 절세 보법임을 안 장유추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쓸데없는 잔재주는 필요 없다!’

정천은 속으로 되뇌며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최단의 거리를 최고의 속도로 치고 들어가는, 지극히 화륜패스러운 방식이었다.

장유추가 침착하게 광천뇌도를 뻗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인 칼날. 정천의 대도를 흘려내고서 반격을 가하려는 심산이었다.

그것을 본 정천의 보법이 바뀌었다.

천마보에서 유성일유보(流星一柳步)로 발놀림이 변환됐다.

치고 들어가던 정천의 칼날은 광천뇌도의 칼날과 부딪쳐 미끄러졌다. 그러나 장유추가 유인한 방향으로는 아니었다.

미끄러진 칼날은 장유추의 왼쪽 어깨를 노렸다.

장유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잔재주를!”

화륜패처럼 공격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변초를 펼친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유추는 급히 광천뇌도를 회수, 이번엔 정면으로 정천의 대도를 쳐냈다.

카아앙!

두 자루의 검이 제대로 충돌했다. 그 반동으로 생긴 열파에 주변의 보리들이 원형으로 눕혀졌다.

정천은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반면 장유추는 한 걸음만 살짝 물러났을 따름이었다.

‘대단하군.’

정천은 내심 감탄했다. 무기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공격한 쪽이 더 밀릴 줄이야.

‘강룡검 없이 싸운다면 어려울지도.’

이런 생각을 품은 것은 귀환한 이래 처음이었다. 십 년 동안 스스로를 갈고닦은 것은 비단 용검대나 화륜패뿐만이 아니었다.

장유추는 장유추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귀찮은 싸움이 되겠군.’

정천의 방식은 그가 가장 대처하기 어려운 형태였다. 성격이 전혀 다른 무공들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나,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방식이나.

‘이것은 화륜패의 싸움이 아니다.’

장유추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재미는 있겠군.’

그의 입가에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이번엔 내가 간다.”

광천뇌도가 지르르 울었다. 강렬한 뇌기가 도신을 감싸 푸른빛을 내뿜었다.

“하압!”

뇌천일척(雷天一擲)의 초식이 펼쳐졌다. 장유추의 몸은 한 자루의 창이 되어서 정천을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액!

정천은 물러서지 않았다.

장유추와 같은 이들은 한 번 틈을 내주면 더더욱 공세가 맹렬해지기 마련이었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정면으로 맞서는 편이 좋았다.

정천 역시 대도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패화강기의 힘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정직한 방어였다.

콰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가는 정천.

그는 겨우 자세를 잡고 착지하고선 혀를 찼다.

‘들렸을지도.’

거리가 상당하긴 했으나, 이 정도의 굉음이라면 화륜문까지도 들렸을지 모른다.

‘최소한 백운신이나 엄백은 들었겠군.’

그들까지는 일단 괜찮았지만, 다른 이들도 눈치를 챈다면 조금 문제였다.

장유추는 다섯 걸음가량 물러난 상태였다. 물론 정천에 비하면 그리 멀리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막아 냈는가.’

살심을 담아 있는 힘껏 펼친 초식이었다. 죽진 않더라도 내상을 피할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천은 생각보다도 쌩쌩했다. 내상은커녕 가벼운 선혈조차 흘리지 않았다.

“상당히 고강한 내공을 익힌 모양이군.”

장유추가 입을 열었다. 정천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뭐, 남들한테 쉽게 지지 않을 정도는 될 겁니다.”

“자네는 알 수 없는 부류로군. 자랑을 하는 건지 겸손을 떠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내키는 쪽으로 생각하십쇼.”

“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장유추는 언제 말을 꺼냈냐는 듯 다시금 정천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선수를 잡는군.’

예상대로의 움직임. 그러나 예상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천은 찰나의 시간 동안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반격해야 할까?’

짤막한 공방이었으나 알아낸 것은 많았다. 무엇보다 장유추의 전투 방식이 화륜패와 상당히 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숙적은 서로 닮아 간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처 역시…….

정천은 대도를 땅에 꽂았다. 순간 장유추의 눈에 이채가 흘렀으나 쇄도해 오는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그 순간 정천이 대도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그런 다음 집중된 기운을 땅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대도를 중심으로 기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그리 위력적인 기운은 아니었다. 실제로 퍼져 나간 파장은 장유추의 몸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의아해하는 장유추. 그의 표정이 이내 일그러졌다.

장유추는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동안 숨을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사술이 아닙니다. 엄밀한 무공이죠.”

“무공이라고? 이런 기이한 수법을 무공이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역설하는 장유추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체내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별것 아닌 파장이라 생각하고 방심했다. 그런데 그 별것 아닌 파장이 장유추의 몸속에서 기묘한 조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가 이것.

타격 자체는 별것 아니지만, 피해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자존심을 뭉개는 일이었다.

정천은 담담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수법을 창안하신 분은 대주님이십니다.”

“화륜패가? 화륜패가 이런 비열한 수법을 만들었단 말이냐?”

“마교 쪽에는 내격파쇄장(內擊破碎場)이란 수법이 있지요. 그걸 자기화한 것이 이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골머리를 쓴 결과죠.”

“…….”

“단순히 칼날에 불을 붙이는 것만이 대주님의 무공이라 생각했습니까?”

장유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천의 말이 일견 옳아 보였던 까닭이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전의 발언은 사과하지. 일대일의 승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한 것인데, 비겁하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뭐, 딱히 신경 쓰지도 않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상대방에게 그런 소리 듣는 걸 싫어하지도 않으니.”

“…….”

“그보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정천이 다시 땅을 박찼다. 이어지는 천마보에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처음 펼쳤던 일격과 같은 속전속결의 일섬!

정천은 장유추의 가슴팍을 가르고 들어갔다. 장유추는 선공을 막는 동시에 왼팔을 뻗어 정천의 미간을 격타해 들어갔다.

정천은 몸을 한껏 낮춰 왼팔을 피했다.

동시에 자신이 왼팔을 뻗어 훤히 빈 장유추의 옆구리를 노렸다.

빠악!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튕겨졌다.

찰나의 순간, 장유추가 무릎을 올려 정천의 복부를 격타했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대주님을 닮았군.’

‘임기응변이 대단히 뛰어나다.’

두 사람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스쳐 간 생각들이었다.

도와 도가 부딪치는 정석적인 공방이 십 합가량 이어졌다.

물론 그것이 서로의 틈을 노리는 전초전임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먼저 필살의 일격을 펼치는 게 좋을 것인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서 틈을 노리는 게 좋을 것인가.

수많은 계산들이 무의식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 먼저 결판에 나선 사람은 장유추였다.

“훌륭하다!”

칭찬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가 광천뇌도를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뇌전이 떨어져 광천뇌도의 칼날에 꽂혔다.

정천의 두 눈이 경이로 물들었다.

‘천뢰강림(天雷降臨)!’

뇌혈도 장유추가 전력을 다할 때 펼친다는 뇌기의 극의(極意)!

언젠가 화륜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패화강기를 연마한 것은 놈의 천뢰강림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그 망할 수법에 애를 먹었거든.”

당시를 회상하던 화륜패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었다.

“내가 녀석보다 외공이 뛰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공 자체만으로는 장유추를 당할 수 없다는 시인.

화륜패가 인정할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다손 쳐도 정천은 실감할 수 있었다. 눈앞의 천뢰강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이다.

빠지지직.

장유추는 마치 온몸이 뇌전으로 화한 것만 같았다. 그는 벼락처럼 작렬하는 눈으로 정천을 응시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연신 칭찬의 말을 뱉는 장유추.

“노부가 천뢰를 불러오게 만들다니. 네놈이 승리할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훌륭하기 짝이 없다. 격찬의 의미로 목숨만은 빼앗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마.”

정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패할 일은 결코 없다는 겁니까?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이 마당에도 승리를 그리는가?”

“그게 바로 무인 아닙니까?”

장유추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겠다.”

“좋을 대로!”

정천은 외침과 동시에 대도를 쥔 두 손에 전력을 담았다.

심장이 요동치며 엄청난 양의 내력을 내뿜었다. 정천의 몸은 그 내력 전부를 양손으로 밀어 넣어선 대도에 집중시켰다.

부르르르.

엄청난 양의 내기를 먹게 된 대도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벌써 산산이 조각이 났어야 정상이다. 그렇게 대단한 명품이라 할 수 없는 대도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당장 터져 나가려는 대도를 강기로 둘러싸선 억지로 억누르는 형국이었다.

그래도 강룡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화륜패의 도법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보통의 패화강기로는 부족하다.’

화륜패의 패화강기는 도강 위에 열기를 머금은 도기를 씌운 쌍겹의 기운.

그러나 이것 자체가 궁극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정말 제대로 된 형태는 두 겹의 도강을 덧씌우는 것!’

화륜패는 그 경지까진 이루지 못했다. 소모되는 내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나라면…….’

가능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정천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도의 빛이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엄청난 열기.

정천의 옷소매가 화르륵 불타 버릴 정도였다.

“으음.”

장유추가 나직이 침음했다. 설마 이 정도의 한 수를 남겨 두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천뢰강림을 당해낼 순 없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길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자신의 칼과 무공을 믿는 것뿐!

두 사람은 정직하기까지 한 자세로 대치했다. 어차피 전력을 담은 최강의 절초에 쓸데없는 군더더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로, 가장 강렬한 힘을 담아 휘두르면 그만일 뿐.

팟!

한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를 뻗었다.

* * *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연신 하늘을 두드렸다. 거나하게 취해 있던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비가 오려나?”

“하늘이 흐리기는 한데…….”

거무칙칙한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소나기가 내릴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날씨가 참 변덕스럽네요.”

제갈세연이 말을 꺼냈다. 칠삼이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날씨의 변덕스러움은 천하에 따를 것이 없지요. 뭐, 지금은 저리 용틀임을 해대도 곧 쨍쨍한 햇살을 내놓을 겝니다.”

“그렇겠죠?”

“문지기 노릇을 하다 보니 가장 자주 보는 게 하늘이더군요. 그러는 동안 깨달은 게, 세상에 하늘이랑 도박꾼만큼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도박꾼은 왜요?”

“몇 배로 불려 주겠노라고 돈 빌려간 놈들 중에 원금이나마 갚는 놈이 없더군요.”

“그런 사람들한테 여러 번 당하셨나 봐요?”

“당하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했습죠.”

“그럼 재미있는 일도 많았겠네요?”

“재미라고 할 것까지야…….”

그때 제갈순이 헛기침을 몇 차례 했다.

“그리 들을 만한 얘기 같지는 않습니다, 부장주.”

“네?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이롭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부장주.”

제갈세연이 찔끔해서는 칠삼에게만 나직이 속삭였다.

“나중에 들려주세요.”

“흠흠. 그러지요.”

제갈순은 거나하게 취한 얼굴이었다.

문제는 이럴 때의 그가 평소의 몇 배 이상으로 까칠하다는 것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차갑기 그지없는 독설을 퍼붓는데, 돌부처마저 울분을 터트리게 할 정도란 얘기가 있었다.

“그나저나 정천 오빠가 돌아오지 않네요.”

제갈세연의 나직한 말에 몇몇 사람이 움찔거렸다. 왁자지껄한 와중에도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물론 백운신과 엄백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론 긴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해 보이지요?

—그렇소.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북쪽을 훑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뇌성이 들려왔던 방향이었다.

—뇌혈도의 천뢰강림…… 분명해 보이오.

—장유추가 전력을 쏟고 있다는 소리로군. 그 상대방이야 역시 뻔한 것이겠지요?

—그럴 테지. 그가 자리를 비운 것도 그렇고.

백운신은 장내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서 전투 자체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둘뿐일 거요. 하지만 미묘한 괴리감을 느끼는 이들은 대여섯 정도 더 있을 테지.

—생각보다 많구려. 과연 미래의 실세들이 화륜문을 주목하고 있는 모양이오.

—어쨌든 되도록 그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끄는 것이 좋겠소.

—옳지, 정천에게 빚을 만들어 두자는 것이구려.

백운신은 미묘한 표정으로 엄백을 돌아봤다.

—딱히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소.

—그래도 정천의 생각은 다를 거요. 우리의 배려에 내심 감사를 할 테지.

‘반대로 꺼려할지도 모르지.’

백운신은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도움이란 건 어디까지나 사시사욕이 없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특히나 서로가 신뢰를 얻어야 하는 사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엄백의 태도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백운신의 생각대로라면, 정천은 고마움보다도 짜증을 느낄 터였다.

‘그를 상대로 거래를 하려 들어선 안 되오, 엄 장로.’

백운신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왠지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가 꺼려졌다.

아마도 백운신 자신부터가 엄백에게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일 터였다.

‘예전부터 느껴 온 것이나, 마치 장사꾼이나 협잡꾼의 태도와 같구나.’

장로들이라 해서 인격적으로 완벽하란 법은 없다. 그러나 본색을 드러낸 엄백의 태도는 너무 노골적이고 계산적이었다.

‘그렇다고 뭐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어쨌든 일단은 서로가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사이.

괜한 내분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백운신은 그래서 다른 쪽으로 생각을 옮기기로 했다. 물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 대결,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 * *

장유추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 패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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