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화륜의 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키지 않아 했던 무당파 도사들도,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돌아가려 했던 모용세가 무인들도 전에 없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자칫하면 화륜문의 개파일이 패망일이 되어 버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누구보다 다급한 이들은 문도들 본인이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칠삼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사람이 적게 올까 걱정이었는데, 이젠 문파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됐다.
단순히 망하는 걸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화연란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지금 장유추가 뿜어내는 기도를 봐선 전혀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누구보다도 화연란 본인이 잘 알 터였다.
‘문주, 문주!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 비시오. 화륜문을 닫겠다고 말하시오!’
들리지 않을 말을 속으로만 뱉으며 전전긍긍하는 칠삼이었다.
안타깝고 속이 타긴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장유추의 기운이 너무나 무시무시했던 까닭이다.
그 순간 화연란의 입이 열렸다.
“선배님께선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음?”
장유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내 원래의 철벽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노부가 무엇을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냐?”
“화륜패…… 아버님께서 본디 검보다 도를 애용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평소엔 패검하시지만 진짜 적수를 만났을 때마다 대도를 꺼내어 드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화륜패는 노부와의 대결할 때마다 대도를 들고 왔었다.”
“하지만 제가 물려받은 것은 도가 아니라 검입니다. 아버님의 패화영신검을 기반으로 세운 문파가 지금의 화륜문입니다.”
“화륜패의 검만을 물려받았다고? 그것이 제대로 된 무공이라 생각하는가? 놈의 본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무기는 검이 아니라 도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버님이 제게 물려주신 것은 도가 아니라 검입니다.”
장유추는 화연란의 두 눈을 유심히 보았다.
‘호오.’
자그만 불안이나 불신조차 느껴지지 않는 맑은 눈동자.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올곧은 시선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없다면 저런 눈을 지닐 수가 없다. 수십 년 무림행을 통해 장유추가 배운 사실이었다.
장유추는 광천뇌도를 슬그머니 땅에 꽂았다. 화연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설명해 보아라. 왜 녀석이 네게 도가 아닌 검을 물려줬다는 거지?”
“아마도 제겐 도보다도 검이 어울릴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요.”
“흐음.”
장유추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알고 있는 화륜패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던 까닭이다.
“제가 대신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장유추는 살짝 짜증이 났다.
“건방진 놈.”
그는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금 놀랐다.
‘탁하구나.’
목소리의 주인, 정천은 능청스럽기까지 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화연란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세파에 찌들고 수많은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자의 눈.
수라의 눈이요, 나락의 시선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정천이라고 합니다.”
장유추의 눈에 다시금 이채가 스쳤다.
“……화륜패에게서 몇 차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
“그렇습니까?”
“거칠기가 들개와 같고 약삭빠르기가 늑대와 같다고 했다. 적일 때 가장 골치 아플 법한 녀석이라고도 말했었다.”
“그렇군요. 그럼 실물을 본 선배님의 감상은 어떻습니까?”
장유추는 약간 뜸을 들이고서 대답했다.
“악밖에 남지 않은 놈 같구나.”
“과찬이십니다.”
정말 고맙다는 듯 목례하는 정천을 보며 장유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은 되었다. 설명할 게 있다면 냉큼 하도록.”
“그러죠.”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리고서 말을 이었다.
“하루는 대주님께서 란아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뼛속까지 무인이신 분답게 자신의 딸을 위한 무공을 만들어 주기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딸을 위한 무공?”
“예. 심법 쪽은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니셨고, 권법은 여자에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보법은 멋이 없고 도법은 너무 무식하다고 생각하셨지요.”
무식하다는 표현에 장유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본 정천이 급히 덧붙였다.
“아, 이건 대주님의 표현을 빌린 겁니다. 본인이 직접 말씀하셨던 거다, 이겁니다.”
“……얘기나 계속해 보라.”
“예. 어쨌든 그 결과 택하시게 된 게 검법입니다. 여아에게도 어울리고, 도법과도 상당 부분이 닮아 있어 만들기도 비교적 수월했지요.”
“그 결과 만들어진 게 패화영신검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자신의 딸을 위해 창시된 검법이지요.”
“…….”
장유추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다른 이들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그가 나직이 입을 뗐다.
“녀석도 결국은 나약한 아비에 지나지 않았군.”
“나약하지만 훌륭한 아버지셨죠.”
장유추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는 정천을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쳐다봤다.
“쫑알쫑알 대꾸하는 꼴이 놈을 닮았군. 하지만 과연 그 실력까지도 놈을 닮았을까 의문이로다.”
“청출어람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그렇다면 언행에도 조심을 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노부의 심기를 거스르고서 성한 자가 없었으니까.”
“뇌혈도 장유추란 무인은 본디 그 정도 그릇밖에 되지 않습니까?”
쩌저저적!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바닥에 박혔던 광천뇌도 주위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기운의 격발만으로 일어난 일.
좌중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긴장했다. 특히나 제갈세연은 하얗게 질려서 정천과 화연란을 번갈아 보았다.
‘언니! 정천 오빠를 말려야 해요!’
속으로만 소리치는 그녀였다. 주변을 잠식하는 장유추의 기운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 와중, 화연란은 이상하게도 침착해 보였다.
물론 그 사실을 깨달은 이는 거의 없었다. 모두들 긴장한 채 장유추를 보고 있었기에.
장유추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문득 그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군. 단전이 부서진 것인가?”
“비슷합니다.”
“안 됐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부가 봐줄 거라는 생각을 하진 마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안 그래도 댁이 참 속 좁은 양반이란 생각만 들고 있으니까요.”
“놈!”
장유추가 마침내 광천뇌도를 뽑아 들었다. 그 칼날 위에선 시퍼런 불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 바깥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두시게, 뇌혈도.”
“음!”
장유추가 순간적으로 검기를 거뒀다.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던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좌중의 모두가 놀란 표정을 했다.
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 이는 백운신과 엄백, 천무맹 이십사 장로 중 두 사람이었다.
백운신을 본 장유추가 내뱉듯 말했다.
“오랜만이오, 그놈의 명줄은 여전히 질긴가 보군.”
“고슴도치 같은 그 성깔도 여전하군.”
“요 근래 제자 일로 골치가 아플 듯한데 용케 이런 곳에 행차하셨구려.”
“자네야말로 이젠 이런 군소 문파에까지 시비를 걸러 오는 모양이군.”
장유추가 발끈했다.
“말씀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요. 광천뇌도의 칼날은 천무맹 장로라 해서 예우하지 않으니.”
“유의해 두지. 그러나 화산의 검 역시 쉽사리 꺾이지는 않네.”
“흥.”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장유추였다.
그는 엄밀히 말해 사파 쪽의 인물이었다. 당연하게도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백운신과는 사사건건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서로의 가치관 역시 현격하게 다른 두 사람이었다. 백운신이 조직과 단체를 중시하는 반면, 장유추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사실 화륜패는 그나마 장유추와 어울리는 편이었다. 숙적이자 악우(惡友)인 사이였으니.
그러나 백운신과 장유추 사이엔 우정 비슷한 것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서로를 싫어하고 배척했다.
“더 말을 나눌 필요도 없겠군.”
장유추가 몸을 홱 돌렸다.
그래도 떠날 생각은 없는지 마련된 자리 중 한곳으로 향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 것은 당연했다.
“고기와 술을 가져와라!”
장유추의 외침에 정천은 고개를 돌렸다.
“네가 가져오도록 해.”
“……제가요?”
지목당한 사람은 소윤이었다. 그녀는 장유추와 정천을 번갈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저 할아버지, 무섭단 말이에요.”
“어린애를 해코지할 양반은 아냐. 외로움이 절절해서 저런 거니 말상대나 해 줘.”
“그건 더 싫어요!”
소윤이 쪼르르 도망쳐서는 화연란의 뒤에 숨었다. 그것을 본 정천이 혀를 찼다.
“말 안 들으면 쫓아낸다.”
“누구 맘대로요? 문주 언니가 반대할걸요?”
“마음대로 해. 네가 안 가면 란아를 시키지, 뭐.”
그 말에 화연란이 움찔했다.
그녀 역시 장유추를 힐끔 보고는 소윤을 돌아봤다.
“……같이 가지 않을래, 소윤아?”
“쳇! 됐어요. 내가 그냥 독박 쓰고 말지.”
침을 퉤 뱉은 그녀가 주방으로 향했다. 화연란은 못내 미안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운신이 정천에게 다가와 말했다.
“험한 친구를 불러들였군.”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손님이군요.”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고는 했지. 그 성미는 여전한 모양이군.”
“물의를 일으킨 적이 꽤나 많은 모양입니다.”
백운신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천무맹에 아직 남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일세.”
“그렇습니까?”
정천이 턱을 쓰다듬으며 장유추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유추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쨌든…….”
정천이 고개를 돌려 두 장로를 보았다.
“오늘은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술과 안주를 즐기시길.”
“음. 그러겠네.”
엄백이 흔쾌히 말하며 걸음을 뗐다. 반면 백운신은 뭔가 할 말이 남은 눈치였다.
정천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지.”
백운신은 짤막히 말하고서 곧장 전음을 날렸다. 남들이 들어 좋을 것이 없는 얘기였던 까닭이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이 화륜문이란 곳이 팔부혈선에 대항하는 기지라도 되는 것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이곳은 대주님께 나름대로의 보은을 하려는 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곁에 뜻이 맞는 동료들이 따로 있는가?
—뜻이 맞는 이도, 그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이도 없습니다.
너무 솔직하여 맥이 빠질 정도의 대답이었다. 백운신은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처음부터 홀로 천하에 맞서려 했다는 말이군.
—그래서 두렵습니까?
—그런 것은 아닐세. 굳이 자네가 아니더라도 엄 장로와 남궁 맹주의 준비가 상당했던 듯하니.
—그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지요.
—그들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모양이군.
—제게 있어선 장로들이나 맹주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백운신은 침묵했다. 하기야 정천이라면 그렇게 말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목소리를 내어 짐짓 한가로운 듯이 말했다.
“오늘 날씨는 꽤나 화창하군. 개파식의 일자를 참 잘 잡은 듯하네.”
“하늘도 화륜문을 축하하려는 모양입니다.”
“음.”
백운신은 더 말하지 않고서 엄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로도 몇몇 손님들이 더 찾아왔다. 그 대부분은 용봉소회 쪽의 인맥들이었는데, 본인들이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저, 저분은 백운신 장로님……?”
“중황장로님도 계셔!”
“헉! 저 사람은 뇌혈도 장유추!”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회원들은 놀란 눈으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물론 당사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끔 목소리를 낮춰야만 했다.
그들로선 화연란이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온 건데, 창피한 꼴이 된 것은 오히려 본인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모습이군요.”
“너무 그러지 말거라, 린아. 우리도 저들만큼이나 크게 놀라지 않았더냐?”
“…….”
모용준의 말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그녀였다. 실상은 누구보다도 놀란 상태였던 까닭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군. 용검대 시절에 만들어 놓은 인맥일까?’
장유추를 제외한 두 장로는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군소 문파를 찾아올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는 건 화산파와도 연관이 있다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도열궁이 사라진 것도 이해가 됐다.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백운신이 옛 제자를 쳐내기 위해 신흥 문파와 손을 잡은 것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화륜문의 입지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구파일방의 수위를 차지하는 문파가 뒤를 봐주는 격이니 말이다.
‘모용세가의 강력한 적수가 될지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천을 남몰래 응시했다.
앞으로도 그와는 자주 부딪치게 될 것 같았다.
* * *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제갈순은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륜문의 개파식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인원이 모여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것도 아니었다.
뭔가 일촉즉발의 느낌이랄까?
꽤나 자유분방한 분위기이긴 했으나, 형언하기 힘든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건 저들 때문인 모양이군.’
빠르게 장내를 훑은 그가 결론을 내렸다.
세 사람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필이면 앉아 있는 위치 역시 교묘하게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둘은 물론 장유추와 백운신.
‘설마 저 두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견원지간조차 혀를 내두르고 갈 사이라던가? 그러한 세간의 평답게 그들은 양 극단에 앉은 채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다.
백운신 주변엔 젊은 무인들이 몰려들어 배움을 청하고자 하고 있었다. 백운신은 군자의 표본답게 후배들의 청학(請學)에 일일이 답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장유추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휑한 바람만이 을씨년스럽게 스쳐 갈 뿐.
아니, 누군가 있기는 했다. 장유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지.
‘저건 웬 여자애지?’
꼬마 아이 하나가 연신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장유추는 일말의 흥미도 동하지 않는지 술잔만 기울일 따름이었지만.
제갈순은 저 꼬마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가 싶어 집중해 보았다. 꼬마, 소윤의 목소리가 이내 귓속으로 들려왔다.
“그래서 문지기 아저씨랑 병든 오빠가 이곳의 둘뿐인 문도예요. 되게 웃기지 않아요?”
“…….”
“더 웃긴 건 악귀 아저씨예요. 사람이 적으면 어떻게든 받아야 할 텐데 그냥 빈둥거리기만 한다니까요? 누가 봐도 이곳의 실질적인 문주는 본인인데도 말이에요. 문주 언니한텐 좀 미안한 일이지만요.”
“…….”
장유추는 그저 침묵으로만 일관하는데도 소윤은 괜찮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참 당돌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을 살핀 제갈순이 마지막 한 사람을 돌아봤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팍 구겨졌다.
‘망할 놈!’
장내의 균형을 이루는 마지막 한 사람은 정천이었다. 제갈순으로서는 그리 내키지 않는 결론이었지만 말이다.
소윤의 말대로였다.
화륜문의 문주는 화연란이지만, 진정한 실세는 정천이라 봐야 했다.
실제로 백운신과 장유추의 시선은 정천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용린이나 윤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게 모르게 장내의 분위기를 조율하고 있구나.’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긴 해도, 정천의 존재감만은 인정해야 할 듯했다.
그새 화연란이 제갈순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갈 총관님.”
제갈순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말씀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화륜문주.”
“저희가 감사할 따름이죠. 항상 도움엔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 있어요.”
제갈순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
“마음껏 즐기세요. 술과 안주는 양껏 마련해 두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갈순은 대강 목례를 하고서 빈자리를 찾았다. 가능한 정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처음엔 놈을 만나 한껏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두 장로에 뇌혈도 장유추까지 나타난 것이 어째 심상찮았던 것이다.
‘저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제갈순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정천을 피하고 싶은 건지, 어째 필사적이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정천은 피식 웃었다. 제갈세연이 곧바로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숙부님은 오빠 때문에 풍문에 시달리시는데.”
“내 잘못만은 아니지 않아? 네가 떳떳하다면 지금 당장 숙부한테로 가야지 않겠어?”
“그, 그건…….”
제갈세연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녀 역시 약간이지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난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네?”
정천은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장유추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소리 없는 걸음 뒤로 수많은 시선들이 따랐다. 개파식의 분위기가 급변하는 순간이었다.
정천을 발견한 장유추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기도가 심상찮게 변하는 것을 느낀 소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무슨 일인가.”
장유추의 말에 정천이 픽 웃었다.
“얘기나 좀 할까 해서 말입니다.”
“할 얘기 따위는 없다. 술맛이 나빠지니 썩 꺼져라.”
정천은 꺼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도리어 소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 걸터앉은 채 장유추를 응시했다.
탁상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이 대치했다.
장내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어, 어, 어떡하죠, 언니?”
제갈세연이 당황해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장유추의 위명대로라면 정천의 목이 달아나는 것도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화연란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만 정천이 큰일 날까 봐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목 때문이었다.
‘지금 본 실력을 드러내서 오라버니에게 좋을 게 없을 텐데……?’
정천이 장유추를 도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를 건드리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장유추가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지금 이건 축객령인가? 노부더러 지금 이곳을 떠나라 말하려는 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말했을 텐데, 내키지 않는다고.”
장유추는 광천뇌도의 칼자루를 가볍게 흔들었다. 찌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의 울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노부는 똑같은 말을 세 번 이상 하는 법이 없다.”
“그렇군요.”
웃으며 대꾸하는 정천. 그 순간 장유추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음성이 있었다.
—나 역시 쓸데없이 수다를 떨고픈 마음은 없소.
“……!”
장유추의 두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정천의 몸에 가려져 다른 이들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금, 놈이 전음을 펼친 것인가?’
장유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내공을 잃은 것이 분명한데, 어찌 전음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선배께서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대강은 짐작이 갑니다. 영영 소실된 줄 알았던 대주님의 도법이 부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닙니까?
정천을 유심히 보던 장유추가 전음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역시. 선배의 독문무공인 뇌혈천섬도법(雷血天閃刀法)과 대주님의 도법 사이의 승부를 내고 싶었던 겁니까?
—……그래.
—그렇다는 건, 란아를 가르칠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얘기군요.
장유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대결이란 어느 정도 서로의 무위가 비슷할 때에 가능한 법이었으니까.
정천은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 소원을 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문자 그대로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제안을 따르시겠다면 이곳 북쪽의 들판에서 기다리십시오.
장유추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정천을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물론 한마디 남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노부를 실망시킨다면 팔이나 다리 한쪽이 잘리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장유추는 문지방을 넘어 사라졌다.
몸을 돌린 정천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자, 방해꾼이 떠났으니 이제 즐기도록 하죠.”
사람들은 별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하나같이 보다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내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구석에 앉아 우중충한 분위기를 빚던 장유추가 사라진 까닭이었다.
분위기가 금세 무르익었다. 취기가 오르니 사람들의 입에서도 별별 농담이 쏟아져 나왔다.
정천 역시 거기에 어울려 웃음을 터트리거나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취하는군. 소피 좀 보고 와야겠다.”
“오빠! 그런 얘기는 좀 남들 없는 데서 하세요.”
제갈세연의 핀잔을 한 귀로 흘린 정천이 바깥으로 향했다.
문 바깥에선 기척을 죽인 담미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천에게 날 선 도를 한 자루 내밀었다.
도를 받아 든 정천이 곧장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바람이 되어 들판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보리가 바람에 쓸려 한 방향으로 드러눕는 한가운데에 장유추가 서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압박감을 내뿜으며.
기세 자체만을 보자면 장로들조차 상회할 정도였다. 과연 화륜패의 숙적을 자처할 만했다.
“노부에게 했던 말을 네 스스로가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장유추는 광천뇌도로 정천을 겨냥했다.
“살아 돌아가고 싶다면 말이다.”
정천은 픽 웃고서 되물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음?”
“내가 증명해 낸다면, 선배께선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장유추가 주춤했다. 워낙 맹랑한 반응이다 보니 살짝 당황한 것이다.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놈에게 별다른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유추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화륜패의 도법을 다시 볼 순 없으리라고.
그럼에도 놈의 제의에 따른 이유는 간단했다. 적당히 밖으로 나올 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적당히 놈에게 겁을 준 후 다시는 허풍을 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돌하게도 자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말이다.
장유추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네놈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마!”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좋아할 것 없다. 지금 네놈은 마지막 남아 있던 노부의 자비심을 바닥냈으니 말이다.”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건방진……!”
장유추가 이를 악무는 동안 정천이 담미화에게서 받았던 도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급변했다.
“……!”
장유추는 솔직하게 놀랐다. 은은하긴 해도 정천에게서 상당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운은 분명 화륜패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