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화륜문의 개파식
제갈순은 황당한 얼굴로 서신을 보았다.
“초청장이라고?”
화륜문에서 발송된 서신이었다.
개파식을 열 예정이니 찾아와 달라는 내용. 그 자체만으론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방금 어디어디에도 보내졌다고 했나?”
혹여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묻는 제갈순이었다. 그러나 와룡장 무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 신흥십강문과 십이유명세가에 전부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정사백팔고수 중 연락이 닿는 이에겐 모조리 보내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제갈순은 한숨을 쉬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무식한 초청은 처음이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군소 문파에 불과한 화륜문이다. 그런 주제에 감히 태산 같은 문파들을 초청하려 들다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리라.
‘태산북두 같은 이들의 분노를 사지나 않을까 걱정이로군.’
제갈순은 정천이 싫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화륜문엔 약간이지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제갈세연이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그렇지만, 화연란의 인생 역정에 동정심이 생기는 것이 더욱 컸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로서도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비호를 해 줄 마음 역시 더는 없었다.
“운이 좋다면야 무시만 당하고 끝이겠지만.”
아니, 아마도 대부분의 세력들이 초청을 무시할 것이다.
안 그래도 마교 때문에 뒤숭숭한 마당에 그 누가 무명소문(無名小門)의 개파식 따위에 신경을 쓸 것인가?
그러나 만약이란 게 있긴 했다. 화륜문과 원한 관계에 있는 문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고.
‘설마?’
제갈순이 굳은 표정으로 무인에게 물었다.
“혹 화륜문의 초청장이 매화장으로도 갔다던가?”
매화장은 화산파의 천무맹 지부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정운장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었다.
“매화장으로 직접 가진 않았으나, 백운신 장로에게 따로 기별이 닿은 모양입니다.”
“으음.”
제갈순은 침음했다. 이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한 게 아닐까?
“그게 사실이냐? 정말 화륜문 측에서 백 장로에게 초청장을 보냈단 말이냐?”
“속하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으으음!”
제갈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정천과 화륜문 측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백 장로가 평소 진중하고 사리분별이 분명하다고는 하나, 제자가 행방불명된 마당에 침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이내 또 다른 추측이 떠올랐다.
‘비무결전 당일에 무언가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
가능성이 없진 않은 추측이었다. 실제로 무위에서 정운장에 완벽히 밀리는 화륜문이 회생할 방법은 그것뿐이기도 했고.
게다가 정천에겐 이미 한 차례의 전례가 있지 않은가?
‘무공을 담보로 거래를 했다?’
역시 나쁘지 않은 추측이었다. 무인으로서야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무학자로서의 정천의 가치는 여전히 컸으니까.
그에겐 해박한 지식과 어마어마한 경험이 있다.
‘정, 사, 마를 아우르는 그 지식이라면 화산파로서도 탐이 났을지도.’
어쩌면 천무맹의 그 누구보다도 무학자로서는 뛰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인물의 제안이니 보통 것은 아니었을 터.
그렇다면 도열궁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해는 됐다. 어떻게든 비무결전의 결착은 내야 했을 테니.
‘장로 세 명이 함께 사라진 것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지.’
실제로 현 정운장은 백운신의 제자들이 어찌어찌 지탱하고 있었다. 문주와 군사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갈순은 이내 판단을 내렸다.
“내가 부장주와 함께 개파식에 참석해야겠군.”
“총관님께서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곳에서 직접 그자의 꿍꿍이를 알아내는 게 정답일 것이다.”
말을 이으려던 제갈순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 망할 인간이 이상한 풍문을 내지 못하게 입단속도 시켜야겠고.”
* * *
백운신은 서신을 노려봤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평범한 초청장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노기가 치밀었다.
“…….”
그의 두 눈에서 열기가 일렁거렸다. 이윽고 손에 쥐고 있는 서신이 순간적으로 빳빳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파앙!
한순간 수백 갈래로 찢겨져선 흩날리는 서신. 마치 화살에 맞은 학이 깃털을 흩뿌리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후우.”
백운신은 한숨과 함께 노기를 배출시켰다. 그리고 내심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분노를 할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비무결전은 정당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고 읊조렸던 말이었다. 그럼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비무결전에 문제는 없었다.
화륜문은 정당한 무인을 내세워 정운장 측 무인을 격살했다.
살고 죽는 것은 무가지상사(武家之常事). 옛 제자의 죽음에 마음이 아프긴 했으나, 그것이 정당한 결과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정천에겐 반감 아닌 반감이 생겼다.
‘어째서?’
이 역시 몇 번이고 되뇌었던 의문이었다.
팔부혈선에 맞서려 하기 때문에? 아니, 그것이라면 오히려 돕고픈 마음이 더 컸다.
엄백처럼 오랜 시간 웅비의 때를 기다린 정도는 아니나, 그 역시 혈선천하의 종결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천을 생각하면 적의가 피어났다. 복수의 의기나 살의 같은 게 아니라, 단지 그를 쓰러트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백운신은 씁쓸히 그 정체를 중얼거렸다.
“호승심인가?”
그는 강했다.
자신에 비해서도 크게 처지지 않는 세 명의 장로를 단숨에 도륙했을 만큼.
‘그리고…….’
자신이 한순간 굴복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었을 만큼.
백운신은 그 사실 자체가 싫었다. 누군가에게 굴복하고픈 마음이 들었다는 자체를 지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와 검을 겨룰 수밖에 없다.’
백운신은 팔을 뻗었다.
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태을영신을 붙드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내 곁엔 너뿐이로구나.”
검을 허리에 찬 백운신이 창가로 걸어갔다. 나무창을 열으니 선선한 바람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바람을 마주한 채 백운신이 중얼거렸다.
“개파식엔 홀로 참석해야겠군.”
“개파식엔 홀로 참석해야겠군.”
중황장로 엄백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는 백운신과는 다른 이유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날 정천과 약조했던 일 때문이었다.
“허어, 당장 맹주님과 손을 잡는다면 능히 혈선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거늘.”
엄백은 아직 정천에 대해 맹주 남궁운에게 말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몇 번이고 말하고픈 충동이 들었는지 모른다. 맹주를 알현하기 위해 걸음을 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정천의 눈빛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그의 무위가 망막에서 사라지질 않았기에.
“으음.”
엄백은 침음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개봉된 서신의 글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화륜문의 개파식이라.”
들리기로는 정사백팔고수를 비롯, 천무맹 안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세력에만 초청장을 돌렸다고 했다.
물론 그 반응은 하나같았다.
‘미친놈들!’
초청장을 받은 이들은 물론, 받지 못한 이들조차 화륜문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 반응에 대부분은 비웃음과 의문이었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청장을 돌린 거지?’
‘화륜문의 문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인가?’
평소였다면 엄백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만큼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과연 개파식엔 어떠한 인물들이 올 것인가?’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는 게 세간의 중론. 그러나 엄백으로선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야말로 제대로 시류를 읽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백 장로는 무조건 참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이 중요한 열쇠가 되겠군.’
엄백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을 불러들이려는 것인지 기대되는군그래.”
* * *
청화촌, 화륜문의 장원 위로 새하얀 연기들이 모락모락 치솟았다.
고용된 숙수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연기였다.
문도들 역시 바쁘기 그지없었다. 하인들이 딱히 없는 만큼 그들이 하인 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식탁을 세우고 의자들을 각각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완성된 음식들을 각 식탁에 올려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세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백인 분은 너무 많은 것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화연란의 반문은 담담했다. 제갈세연은 달리 꺼낼 말을 생각하다가 어깨만 으쓱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아마 저 음식의 절반 이상은 여기 문도들이 해치워야 할걸요.”
“오라버니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구나. 간만에 문도들이나 호강시켜 주자던걸.”
“말이 좋아 호강이죠. 암만 좋은 음식이래도 배가 터지게 먹게 되면 고문이 따로 없을 걸요?”
“그 얘기도 했어. 문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하던데?”
“좋은 경험이라뇨?”
“천하의 영약도 과하면 극독이나 다름없다는 걸 몸소 느끼게 해 주겠대.”
“에효, 갖다 붙이기는 참 잘하네요…….”
제갈세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려니, 식탁을 닦던 소윤이 털레털레 다가왔다.
“제갈 언니, 언니네 삼촌은 언제 온대요?”
“응? 조금 기다려야 할 거야. 그런데 왜?”
“악귀 아저씨가 말한 게 사실인가 해서요.”
“악귀 아저씨?”
소윤은 슬그머니 한쪽을 가리켰다. 마루에 큰 대자로 누워 드르렁거리는 정천이 보였다.
제갈세연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소윤은 누군가를 제대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없었다.
“저 악귀 아저씨가 뭐랬는데?”
“언니네 삼촌이 오입쟁이래요.”
“…….”
제갈세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화연란 역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그건 사실이 아니야. 이 언니도 잠깐은 그런 오해를 했었지만…….”
“소문 들었어요. 와룡장 하인들이 다 들었대요.”
제갈세연은 할 말을 잃고서 이마를 감쌌다.
그날 외쳐 버린 한마디 덕에 제갈순은 괴이한 오해를 사고 말았다.
하인들의 입단속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결국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버린 뒤였다.
어찌 보면 제갈세연이 그 단초를 제공한지라, 그녀는 지금까지도 제갈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원흉은……!’
제갈세연은 야속한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그의 입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제갈세연이 문득 정천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왜 그러니, 세연아?”
“사과 정도는 받아야겠어요.”
화연란에게 대꾸한 제갈세연이 더욱 걸음걸이를 빨리해서 정천의 앞에 섰다.
“오빠, 일어나 보세요.”
반응은 없었다. 웬 책자로 얼굴을 덮은 채 세상모르듯 자고 있을 따름.
약이 오른 제갈세연이 책자를 휙 치웠다.
“일어나라니까요?”
정천이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일어났다.
“뭐야, 손님이라도 왔나?”
“손님 왔어요, 저요.”
“진짜 손님 오면 깨워.”
다시 드러누워 자려는 정천. 제갈세연은 더 참지 않고서 그의 발치를 콱 밟았다.
“으, 성격 하고는.”
제갈세연은 이맛살을 찌푸리는 정천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잠이 와요?”
“나는 저 녀석들 안 보는 곳에서 훨씬 더 고생하고 있다고.”
“거짓말 좀 그만해요.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책이에요?”
“읽어 보면 알잖아.”
제갈세연은 책 표지를 보았다. 춘화밀담(春花密談)이라는, 제목만 보아선 쉽사리 내용이 연상되지 않는 서적이었다.
결국 내용을 살짝 읽어 보았다.
남녀가 나오고 몸을 맞대는 무공에 대한 대화를 조금 하는가 싶더니…….
“망측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책을 내팽개치는 제갈세연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홍시처럼 붉게 물든 상태였다.
“이, 이, 이런 걸…….”
“명작이지?”
“명작이라고요? 이런 게? 제정신이에요?”
“짝 없는 남녀를 위한 영원한 밤의 친구인데? 아무래도 네가 아직 음양의 조화를 잘 모르는가 보다.”
가볍게 제갈세연을 곯려 준 정천이 태연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데 대체 왜 깨운 거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그러니까 그게…….”
제갈세연이 말을 더듬거렸다. 마음 같아선 크게 따지고 싶은데, 이런 상황이다 보니 말을 꺼내기가 더더욱 난감했다.
“할 말 없으면 난 더 잔다?”
“할게요, 한다고요!”
제갈세연은 애써 숨을 골랐다. 자신의 말이 최대한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면서.
“숙부님 있잖아요.”
“제갈순? 그 인간이 왜?”
“오빠가 전에 했던 말 있잖아요. 그 말 때문에 큰 오해가 생겨 버렸다고요!”
“내가 그 인간 관련해서 했던 말이 한둘이어야지. 그리고 말이란 원래 받아들이는 쪽에서 적당히 거를 건 걸러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전 정말 숙부님을 걱정했다고요!”
“기특하군.”
태연히 말하면서 제갈세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정천이었다. 제갈세연은 뭔가를 더 말하지 못하고서 입만 웅얼거렸다.
‘이, 이게 아닌데……?’
본래는 정천에게서 사과를 듣고 말 생각이었다. 평소였다면 정천이 얼렁뚱땅 넘어가지 못하게 논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저놈의 책이 문제였다. 말을 하기도 전에 얼굴부터 화끈해지니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뗀 정천이 물었다.
“더 할 말 없지?”
“그, 그게…….”
“그럼 없는 걸로 알지. 물러가 봐.”
결국 하릴없이 물러나는 제갈세연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인 채 돌아오자 소윤이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요, 언니. 저 인간은 나도 말로 못 당해내요.”
“크게 위로가 되진 않는 말이구나…….”
“그래도 뜬소문은 대개 금방 가라앉지 않아요? 그냥 며칠 내버려 두면 자연히 사라질 것 같은데요.”
“그럴까?”
화연란이 제갈세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럴 거야. 총관님의 평소 평판도 좋은 편이니 나쁜 소문은 금세 자취를 감추게 될걸?”
“그럼 다행이고요. 숙부님이 괜한 짓을 하지 마셔야 할 텐데…….”
그때 장원의 문이 열리며 일련의 무리가 들어섰다. 화연란과 제갈세연으로서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아!”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용봉소회의 일룡(一龍), 윤평과 무당파의 젊은 도사들이었다.
화연란이 밝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와 주셨군요.”
“무량수불.”
윤평이 예를 취했다. 그러나 그리 밝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화연란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윤평을 제외한 도사들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서신은 보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윤평의 말에 화연란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이유로 약하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 말이 실수였노라고 깨닫는 날이 올 거예요.”
무당파 도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정작 윤평은 그제야 씩 웃음을 지었다.
“신생 화륜문의 개파를 축하합니다.”
“감사해요.”
화연란이 도사들을 한쪽의 자리로 안내했다. 도사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면서도 안내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손님들이 찾아왔다. 화연란에게 있어선 상당히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모용린을 비롯한 모용세가의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
“…….”
두 여인은 서로를 본 채 대치했다. 누이를 따라온 모용준이 어색한 침묵 앞에 헛기침만 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화연란이었다.
“오셨군요.”
“그래요.”
“분명 오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지난번 저잣거리에서의 만남을 말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번은 그녀가 처음 화륜문을 찾아왔을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용린은 뻔뻔하기까지 한 말투로 답했다.
“동정심을 갖기로 했어요. 마침 여유가 있기도 했고.”
“동정심이라고요?”
“우리마저 참석하지 않으면 파리만 풀풀 날릴 게 뻔하니까요. 그럼 너무 불쌍하니 마음을 쓴 거예요.”
화연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군요. 그렇게까지 안하무인일 수도 없을 텐데요.”
“대접을 바란다면 스스로의 실력부터 갈고닦는 게 좋겠군요.”
두 여인의 시선이 매서운 기세로 재격돌했다. 그런 그녀들의 사이로 모용준과 심후가 끼어들었다.
“자자,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싸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그래요, 문주님. 애써 찾아오신 손님들을 홀대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홀대라고요? 내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경사스럽다니요? 창피스러운 날을 잘못 말한 거겠죠, 오라버니.”
바람을 탄 산불처럼 도리어 거세지는 두 여인이었다. 모용준과 심후는 그 와중에 서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는군.’
‘그쪽도 마찬가지군요.’
그때 담담한 목소리가 두 여인의 귀를 붙들었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하도 시끄러우니 귀가 따가워 견딜 수가 없군.”
정천이었다. 그가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서 그녀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화연란의 기세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반면 모용린은 기름 부은 불마냥 더욱 거세졌다.
“시끄러우니 나가라고요? 화륜문은 손님 대접을 그 모양으로 하는가 보죠?”
“응. 그러니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모용린은 할 말을 잃었다. 정천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용준과 심후에게 손짓을 해 물러나게 했다.
“아니면 그냥 여기서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다른 손님들도 힘겨운 걸음을 하셨는데 여흥거리로는 제법 괜찮지 않겠어?”
“여흥이라니, 누굴 무희 나부랭이로 아는 건가요?”
“별 차이가 있나? 검무 역시 충분히 멋진 춤이 될 수 있는데.”
정천이 어느새 가져왔는지 목검 두 자루를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이런 날에 피 보는 짓은 좀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하라고.”
모용린과 화연란은 각기 목검들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기세는 어느새 꺾인 지 오래였다.
“오라버니, 저는…….”
화연란이 싸울 수 없다고 말하려 할 때, 모용린이 먼저 목검을 내팽개쳤다.
“누가 하라는 대로 할 줄 아나요? 이런 장난에 넘어갈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에요.”
그녀는 홱 몸을 돌리고는 적당한 자리로 향했다.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모용준이 정천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선배.”
“선배?”
“용검대의 조장이셨으니, 제게 있어선 타격대의 선배님이나 마찬가지지요.”
모용준의 외관을 잠시 살펴본 정천이 물었다.
“타격대 소속인가?”
“예. 혈풍대 소속입니다. 아직 뚜렷한 지위에 있지는 않습니다만.”
혈풍대라면 용검대의 바로 아래 서열이라 할 수 있는 세 개의 타격대 중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용검대가 사라진 이후로는 그 빈자리를 메우며 천무맹 제일의 타격대라는 간판을 차지하게 되었다.
“재미있군.”
모용준의 근골을 대강 가늠해 본 정천이 웃었다.
“나에 대해선 누이에게서 들었나?”
“예? 아, 예. 내공을 잃은 것에 대해선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됐어. 난 지금 상태에도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으니까.”
모용준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저, 원하신다면 우리 모용세가에서 선배의 회생을 도와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공짜는 아닐 테지. 역시 외부 교관직을 맡아 달라는 조건인가?”
“아뇨. 이미 누이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럼 뭔가 다른 조건을 내걸려는 건가?”
“흠흠. 그것이 말입니다.”
모용준이 목소리를 낮췄다.
“제 논검 상대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논검?”
“예. 듣자하니 선배께선 실전 전투의 달인이라고 하더군요. 과연 제가 익힌 모용가의 검이 실전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정천이 의외라는 눈으로 모용준을 보았다.
솔직히 예상외의 부탁이었다. 첫인상만 봤을 때의 모용준은 난봉꾼이나 파락호의 느낌이 더 컸던 것이다.
사실 그건 개방적인 북방의 기질 때문이 컸다. 모용준이란 청년의 실상은 그러한 기질 안에 무인의 열망을 담고 있는 진지한 사내였다.
‘나쁘지 않군.’
내심 웃으며 생각하는 정천이었다. 모용준을 딱히 후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무에 대한 진지한 자세 자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누이보다는 생각이 얕군.’
굳이 정천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소실된 내공을 회복하는 방법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물론 모용세가의 막대한 재력과 인맥이라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그러나 분명 엄청난 규모의 노력이 필요할 터.
고작 몇 차례의 논검과 바꾸기엔 손해가 컸다.
정천은 머리 하나는 더 큰 모용준의 가슴팍을 툭 쳤다.
“내공 회생에 대한 얘기는 못 들은 걸로 치지. 그래도 논검 한두 번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 심심하면 찾아오라고.”
“예? 하지만…….”
“그게 미안하면 추후에 이쪽 부탁이나 몇 번 들어 주면 돼. 그리 어려운 일은 없을 거다.”
잠시 생각하던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좋습니다.”
“그래. 다음 얘기는 후에 하도록 하지.”
모용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막 다음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손님은 혼자였다. 그리고 화연란이나 정천으로서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들어선 이는 칠척장신의 거한이었다. 모용준도 상당히 거구인 편이었으나 이자에 비하면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홍안백발을 한 거구의 노인.
오른쪽 어깨엔 큼직한 대도 한 자루를 걸쳤고 왼손에는 반쯤 구겨진 서신을 쥐고 있었다.
“…….”
한 차례 좌중을 둘러본 노인이 별안간 서신을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우웅—!
걸쳐져 있던 대도가 별안간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서신이 떨어지는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나풀나풀 떨어지던 서신이 대도에 닿은 순간.
화르륵!
서신은 푸른 불꽃에 휩싸여 삽시간에 증발했다.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노인이 보인 무위 자체는 별것 없었으나, 그가 일으킨 푸른 불꽃만으로도 정체를 알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정천은 힐끔 옆을 보았다. 화연란은 놀랐는지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결국 그가 대신 앞으로 나섰다.
“무명소졸이 뇌혈도(雷血刀) 장유추 선배를 뵙습니다.”
거구의 노고수, 장유추는 정천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게 당연히 보일 정도의 기백이 그에게서 느껴지니 황당한 일이었다.
뇌혈도 장유추.
정사백팔고수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인물이자, 폭뢰검 화륜패와는 엄청난 악연이었다.
‘만날 때마다 다투지 않는 날이 없었다던가.’
정천 자신이 만나 본 적은 없었으나, 화륜패의 술주정을 통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런 인물이 화륜문을 찾아왔다는 것.
다른 손님들뿐 아니라 정천으로서도 약간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장유추는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노부는 화륜문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왔다.”
마치 화륜문 자체에게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게 더 놀라웠다.
‘시대의 거인이란 이런 사람이구나.’
모용린은 장유추의 모습을 눈에 담은 채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엔 장내의 모두가 장유추에게 압도당한 듯했다.
물론 그것은 윤평이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대를 이끌 일룡과 일봉이라 해도, 그들 역시 장유추에게 있어선 어린애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다만 그 와중에도 웃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저 인간이 정말 미친 걸까?’
모용린은 정천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장유추 역시 정천의 미소를 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시했다. 코끼리가 개미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화륜문주는 어디 있는가?”
그의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기운 하나 담지 않았는데도 워낙 성량이 커서인지 듣는 이들의 귀가 울리는 듯했다.
“제가 화륜문의 문주입니다.”
화연란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그녀를 힐끔 본 장유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륜패의 여식인가?”
“그렇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계집이군.”
화연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직접 찾아뵙고 왕림(枉臨)을 청하지 못한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부는 이 알량하기 짝이 없는 초청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아비의 이름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말한 것이지.”
화연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몰라서 묻는 것인가?”
“제가 불민하기 짝이 없어 즉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흥. 입으로 떠벌리는 소리는 제법이구나.”
장유추가 손을 뻗었다.
서신을 불살랐던 그의 독문병기 광천뇌도(狂天雷刀)의 칼끝이 화연란을 겨냥했다.
“노부는 화륜패를 잘 안다. 놈은 개자식 중의 개자식이지만 능히 일가를 이룰 실력과 패기를 지니고 있었다.”
“…….”
“그러나 너는 대체 무엇이냐? 네게 감히 화륜패의 이름을 딴 문파를, 녀석의 검을 이을 만한 역량과 무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화연란은 그 순간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처럼 무언가 도움을 바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정천은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홀로 헤쳐 나가라는 의미.
“저는…….”
장유추가 쿵 하고 전각을 밟았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이 살짝 진동했다.
화연란은 꺼내려던 말을 주워 삼키고서 이를 악물었다. 장유추는 그런 화연란을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폭뢰검이란 별호를 갖긴 했으나 놈의 본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무기는 이 광천뇌도와 같은 대도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쓰는 무기를 보아하니 검인 듯하군. 그 점에서부터 이미 너는 놈의 무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장유추의 표정이 돌연 살벌해졌다.
“지금부터 아무 변명이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장 한 다경 안에 노부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화르르륵!
광천뇌도의 검신이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화륜문이란 알량한 문파는 오늘 여기서 사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