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서신을 보낸 자 (26/146)

第三章 서신을 보낸 자

모용린의 뒤로는 비슷한 복색을 한 사내들이 서 있었다. 북방의 호방한 기색을 당당히 드러내는 그 모습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모용세가 사람들이군.’

정천은 사내들을 한차례 훑어보며 생각했다.

그러던 중 모용린과 시선을 마주쳤다.

찌릿.

안 그래도 기껍다고는 못할 표정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로 인해 빼어난 미색이 더욱 두드러졌으나, 정천으로선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건 뭐, 날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군. 대체 왜 저렇게 눈깔 뒤집어지게 노려보는 거야?’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딱히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정천에게 있어 모용린은 그저 기분 나쁜 꼬마 계집에 불과했다. 이팔청춘의 그녀라지만 정천이 보기엔 제갈세연이나 화연란과 다를 것 없는 어린애였으니까.

모용린은 정천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화연란에게 말을 건넸다.

“축하해요. 운이 좋았군요.”

“네?”

“정운장주 도열궁이 예기치 못하게 사라져 버렸으니, 화륜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넘긴 셈이군요. 거듭된 행운에 감사해야겠어요.”

화연란은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비무결전까진 모르더라도, 모용린은 화륜문과 정운장의 대립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화륜문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나친 불안에 불과했다.

모용린으로서도 화륜문이 정운장을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다른 이들 이상으로 화륜문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그녀였다. 냉정 침착한 성미를 생각한다면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 모용린의 뒤쪽에 있던 기골 장대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하하! 누이의 말은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소문의 화륜문주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이것도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모용린과 달리 붙임성 좋아 보이는 사내였다. 사실 북부인의 호방한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쪽이 모용세가의 성격에 걸맞았다.

시원시원한 말투도 그렇고, 구태여 숨기지 않는 화색도 그렇고 말이다.

뒤편에서 소윤과 칠삼, 심후이 수군거렸다.

“저 느끼한 아저씨, 우리 문주 언니한테 꽂힌 거 같죠?”

“그래 보이는구먼. 하기야 우리 문주님 미모가 빼어나긴 하지. 안 그런가, 사형?”

“예? 아. 그, 그렇겠지요? 칠삼 아저씨, 아니, 사제님.”

“허, 그놈의 사제 소리는 좀 빼게나.”

“본인부터 그 사형 소리를 좀 관두세요…….”

굳이 소리를 줄이지 않았기에 모용세가 사람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비웃음이 떠올랐다.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판으로 보이겠군.’

못해도 쉰은 되어 보이는 퇴물이 척 봐도 얼뜨기인 녀석에게 사형이라고 부르는 꼴이나, 건방진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꼬마 여자애나.

소위 명문정파의 그들이 보기엔 우스꽝스럽기만 할 터였다.

“재미있는 제자들을 두셨구려.”

청년 역시 우습다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느끼하단 말 때문인지 미소의 일면에서 딱딱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화연란은 부끄러움 하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나같이 제 소중한 문도들입니다.”

“그렇소? 흠. 데리고 있어 봐야 쓸 데도 없어 뵈는 제자들 같소만.”

“스승에게 있어 제자는 소모품이 아닌 소중한 사람. 쓸모가 있고 없고를 가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 싶군요.”

가시가 박힌 화연란의 대꾸에 청년이 잠시 당황했다.

“흠흠. 본 공자가 소저에게 실례를 한 모양이군.”

“제가 아닌 제 사람들에게 실례를 하신 거지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일이니 더 책망하진 않겠어요.”

“흠흠…….”

헛기침만 뱉는 청년이었다.

내심으로 피식 웃던 정천은 모용린의 얼굴을 보고서 의아함을 느꼈다. 얼음장 같은 표정 일면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은 화연란이나 다른 이들이 아닌 자신의 오라비였다.

그 의미야 간단했다.

제 혈육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

‘어지간한 콩가루 집안이 아닌 모양이군. 오라비는 가족이 아니라 그저 가주직의 경쟁 상대란 건가?’

그제야 철옹성 같던 모용세가의 균열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모용린과 그 오라비를 따르는 무인들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모용린 뒤편의 무인들의 입가는 조금씩 치켜진 상태였다. 크게 내색하진 않았으나 비웃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반면 청년 뒤편의 무인들은 그런 이들을 은근히 노려보고 있었다.

‘옷만 바꿔 두면 같은 집안의 일원들이라 보기도 힘들겠군.’

정파일문을 넘보는 대가문이라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니 그저 내분의 씨앗을 품은 집안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작은 문파라 해도 화륜문 쪽이 백배는 화목할 터였다.

“근데 사형, 자네가 보기엔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 것 같은가?”

“예? 우위라니요?”

“모르는 척 말게. 저 모용세가 아가씨와 우리 문주님 말이지. 혈기왕성한 자네가 보기엔 어느 쪽의 미모가 빼어난 듯싶은가?”

“그, 글쎄요. 저는 잘…….”

“당연히 우리 문주 언니 승리죠! 문주 언니라면 세상에서 저 다음으로 예쁠걸요?”

“소윤이 얘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누?”

“흥. 문지기 아저씨가 미모 볼 줄 모르는 거예요! 안 그래요, 병든 오빠?”

“벼, 병든 오빠라고?”

“몸 어디가 막혀서 아프다면서요? 실제로 수련할 때마다 골골거리잖아요.”

백배까진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정천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화연란 역시 이번만은 어쩔 수 없는 듯 얼굴을 붉혔다.

청년이 다시금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문파로구려! 혹시 광대패 쪽으로 나가 볼 생각은 없소? 사람 웃기는 재주 하나는 확실할 듯하오만.”

당황한 화연란이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초면인데 통성명부터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

“흠. 그건 그렇군.”

그제야 청년이 자신을 소개했다. 얼굴 가득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은 채.

“본 공자는 모용세가의 삼남인 모용준이오. 아마도 소저 역시 북풍검협(北風劍俠)의 이름을 들어 봤으리라 생각하오만?”

“죄송하지만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들어 본 일이 없군요.”

“…….”

청년, 모용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연란은 그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화륜문주 화연란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용준 공자.”

“흠흠…….”

모용준은 하릴없이 헛기침만 했다. 이렇게 나오는데 쪼잔하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을 택했다. 화연란 옆의 멍청해 보이는 사내를 지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협은 누구요? 아무래도 화륜문도는 아닌 것 같소만.”

그냥 말을 돌리기 위해 대충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그는 전 용검대의 조장이었던 정천 대협이세요.”

대답을 꺼낸 사람은 모용린이었다.

“용검대, 용검대라고?”

잠시 그 말을 곱씹던 모용준이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설마……?”

모용준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문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녀석이?’

용검대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몇 차례 걸친 마교와의 격돌만으로도 그들의 전공은 전설이 되어 있었으니까.

십 년 전의 일이라 해도 퇴색되진 않은 전공이었다. 오히려 지난 십 년의 평화가 과거의 전적을 더욱 빛내 주었다.

하물며 모용준 또래의, 어린 시절을 용검대의 위명과 함께해 왔던 이들이라면.

‘그런 용검대의 조장이라고?’

모용준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용검대의 각 대원의 무위는 일류에 준했다. 그리고 조장 급의 대원은 못해도 그 다섯 배 이상.

문자 그대로 초일류의 무인인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어딜 봐도 그런 전설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눈빛부터가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썩은 동태 눈알이 저러할까?

의욕도 의기도 없어 보이는 무기력한 눈이라니, 보고 있는 모용준이 다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누이의 말인 이상 거짓이진 않을 터.’

귀염성 없고 꺼리침하긴 했으나, 모용린은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가족들에게라면 더더욱.

모용준이 내키지 않은 듯 포권을 취했다.

“모용세가의 삼남 모용준이 강호의 선배를 뵙습니다.”

정천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마주 예를 취하려 했다. 그래도 후배랍시고 먼저 인사를 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모용린의 매몰찬 목소리가 그보다 빨랐다.

“예를 차릴 것 없어요, 오라버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정천보다도 화연란이 발끈했다.

“말이 심하군요, 모용 소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화 소저의 자유겠죠.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내 자유이듯이.”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무례를 범하겠다는 건가요?”

“그럴 거라면?”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화연란이야 그렇다 쳐도 항시 냉정 침착한 모용린치고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답지 않은 반응에 모용준은 당황했다.

“린아야,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

모용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화연란만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모용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평소 자신과 형제들을 깔보는 것이야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무시하다니.

그가 앞으로 나서려 했다. 작은 일이라 해도 오라비의 위엄을 세워 둬야 했다. 그러지 않고선 후에 몇 배의 비웃음과 무시를 당하게 될 터.

그때 그보다 앞서 모용린에게로 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그렇게 날 싫어하지?”

정천의 질문이었다.

모용린의 얼굴이 한층 냉랭해졌다.

“싫다니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내가 감정 따위를 둘 것 같은가요?”

“뭐, 그럼 그렇다고 치지. 왠지 설득력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을 이으려던 모용린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정천의 시선을 마주한 것이다.

짧은 순간 그녀는 경직됐다. 그리고 이내 당황했다.

‘내가 왜? 저런 자의 눈에……?’

살기도 투지도 없었다. 그런데 눈을 마주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것인 양.

썩어도 준치라는 것일까? 어쩌면 노련한 무인의 잔재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당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은 자기 할 말만 이어 갈 따름이었다.

“날 싫어하든 말든 신경은 안 써. 좋을 대로 하라고. 어쨌든 그렇다면 초대를 받게 될 사람은 네 오라비나 모용가의 다른 사람이 되겠군.”

정천이 지칭한 ‘오라비’란 물론 모용준을 가리키는 것. 모용준이 멍한 표정을 했다.

모용린이 급히 입을 열었다.

“초대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야. 오기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 일도 없이 초대를 하겠다고요?”

“없을 리가 있나.”

정천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만간 개파식을 할 셈이거든. 일단은 어지간한 문파나 가문엔 초청 서신을 돌려야지.”

모용린은 그제야 아 하는 표정을 했다. 화연란이나 화륜문의 다른 이들 역시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모용린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가 군소 문파의 개파식에 참가할 만큼 한가해 보이는가요?”

“그러니까 오기 싫으면 오지 말란 거야. 어쨌든 미리 말해 뒀으니 서신은 따로 보내지 않아도 되겠지?”

“종이 낭비예요. 보내지 마요.”

“그러지.”

간단히 대꾸한 정천이 화연란을 돌아봤다.

“가자꾸나, 란아. 여기서 시간이나 축내고 있을 틈이 없지.”

“예? 아, 예.”

그녀는 모용린의 표정을 힐끔 살피고는 걸음을 옮겼다. 세 화륜문도가 그 뒤를 따랐다.

모용린은 그들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찌나 기세가 흉흉한지 모용준이 말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대체 저자가 어떤 자이기에 그리도 신경을 쓰는 것이냐?”

모용준의 물음에 모용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신경 쓰다니요? 제가 그럴 리가 있나요?”

모용준은 한숨을 쉬었다.

“네 옛 모습이 약간은 보이는 것 같구나.”

“옛 모습이라니요?”

“어릴 적부터 그랬지. 자기가 갖지 못하는 장난감 같은 게 있으면 온종일 따라다니며 노려보고는 했어. 그 서슬에 형님들이나 나도 결국은 네게 양보를 하게 됐고 말이다.”

“…….”

모용린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모용준은 지금, 그들 형제자매가 가주 쟁탈이란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그들은 여느 가문의 형제자매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자에게 감사해야겠구나. 잠시나마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다니.”

“지나간 일엔 아무 의미도 없어요.”

냉랭하게 말하며 돌아서는 모용린이었다. 모용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 야심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은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아직 너에 대한 지지는 큰형님의 그것에 비하면 미력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

“나 역시 큰형님을 지지하는 쪽이다만, 너에 대한 기대 역시 완전히 철회하진 않았다. 똑똑한 너라면 그 속내도 꿰뚫어 보고 있을 테지?”

그랬다. 모용린이 요사이 모용준과 자주 동행하는 이유부터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그녀의 성격상 진심을 내비치진 않았다. 설득보단 협상이 그녀에게 어울리기도 했고.

“날이 선 네 반응은 지지자들의 불안과 반감만 부추기게 될 거다. 이건 가주 경쟁자가 아니라 네 오라비로서 하는 말이다.”

“……알겠어요. 어려운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모용린은 모용준의 조언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 봐도 조금 전의 태도는 너무 고압적이고 차가웠다.

‘내가 대체 왜 그런 거지?’

이 모든 게 그 남자 때문이다.

모용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흠. 그나저나 화 소저의 미모는 정말 대단하더구나. 사귀는 자가 없으려나?”

모용준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용린을 돌아보며 언뜻 묻는 것이었다.

“린아야, 화륜문의 개파식엔 내가 가도 되겠지?”

“그럴…… 순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냐? 분명 아까 전엔 거들떠도 보지 않겠다고 했잖느냐.”

“그들, 아니, 화륜문이란 문파 자체가 수상해요.”

“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모용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직 어린 까닭에 별것 아닌 일로 쉽게 흥분하고는 했지만, 그녀는 모용가 역사상 최초의 여가주를 노리는 기재 중의 기재였다.

남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정운장은 화륜문을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이었어. 정말 마교와 내통한 거라면 굳이 그런 일을 벌였을까?’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어쩌면 화륜문에 있는 것일지도 몰라.’

만일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빨리 비밀을 알아내는 편이 좋을 터.

어느 쪽으로든 그녀에게 있어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화륜문의 개파식엔 제가 대표로서 참석하겠어요. 오라버니께서도 참석하시겠다면 따라오셔도 좋아요.”

“으음.”

모용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모용린이 물었다.

“큰 오라버니 때문인가요?”

“으음, 그게 아니라 말이다.”

모용준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거였으면 대체 왜 가지 않겠다느니 낭비라느니 하는 말을 한 게냐?”

“그, 그건.”

모용린이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감정이 동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으니까.

그녀는 당혹감을 치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그 일은 일단 나중에 하도록 해요.”

“그러마.”

빙긋 웃음 모용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오라버니, 정말 개파식을 할 생각인가요?”

“네가 허락한다면. 화륜문의 문주는 어디까지나 란아 너잖아.”

물론 화연란으로선 얼마든지 하고 싶었다. 상징적인 의미뿐이라고는 해도 화륜문의 시작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라면 역시나 인지도였다.

“과연 유명 세가의 무인들이 초대에 응할까요?”

“머리가 있는 녀석들이라면 응할 테지. 예컨대 조금 전의 애송이처럼.”

“네? 애송이라뇨?”

“모용세가 애송이 말이야.”

화연란은 조금 뒤에야 그게 모용린을 가리키는 단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모용 소저는 절대 초대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머리가 있다면 결국 오게 될걸. 뭐, 만약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큰 상관은 없고.”

그때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소윤이 끼어들었다.

“저기요, 개파식이라면 문파를 연 기념으로 잔치를 크게 벌이는 거죠?”

“응. 그렇단다.”

“히히, 그럼 맛난 것도 많이 먹을 수 있겠네요, 문주 언니?”

화연란은 미소를 지으며 소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면 정천은 혀를 쯧쯧 찼다.

“너 먹으라고 하는 음식 아니다. 혹여나 먹을 생각은 않는 게 좋을걸.”

소윤이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치, 쩨쩨하게 그러지 마요. 속 좁은 인간이라고 사람들이 욕해요.”

“알아. 그랬던 놈들 중에 제명에 못 죽은 놈들이 대다수라는 것도 알지.”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 좀 하지 말아 줄래요?”

“왜, 꿈에 나타날까 무섭냐?”

한가로운 정천의 대꾸에 소윤은 혀를 비죽 내밀었다. 화연란이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정천에게 질문했다.

“초청 서신을 보낸다면 누구누구에게 보내는 게 좋을까요?”

“구파일방 및 신흥십강문(新興十强門)의 문주 급 인사들, 오대세가 및 십이유명세가(十二有名勢家)의 가주 급 인사들, 정사백팔고수(正邪百八高手)급 무인들 정도면 되겠지.”

소윤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신흥십강문과 십이유명세가라 하면 전통적인 면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비해 떨어질 뿐, 실질적인 세력은 그에 크게 밀리지 않는 거대 세력이었다.

그뿐인가?

정사백팔고수라 함은 칠 년 주기로 천무맹 군사부에서 지정하는 인명록으로, 마교를 배제한 현 무림 최고위 실력자 백팔 명을 지칭했다.

말 그대로 천무맹 최고의 존재들.

일개 문파인 화륜문에서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농담이 과하구먼, 자네.”

칠삼이 끼어들었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화연란에게 재차 말했다.

“그들 전원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해. 그 외엔 따로 초대를 할 필요까진 없을 듯하군.”

“아무도 응하지 않을 거예요. 서신은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버려질걸요.”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끼리라도 배 터지게 먹어야지.”

가만히 대화를 듣던 소윤이 눈을 빛냈다. 그것을 본 정천이 미소를 지었다.

“식충이, 넌 빼고.”

“으으, 비겁하게 그러기예요?”

“그러니까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면 입문을 하라고. 언제까지고 밥만 축낼 생각이냐?”

“그, 그건…….”

소윤이 머뭇거렸다.

그녀라고 화륜문의 진짜 식구가 되고픈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누구보다도 화연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그럼에도 섣불리 문도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 당신 때문이잖아, 이 악귀!’

정천을 향해 속으로 소리치는 소윤이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심후와 칠삼의 지옥 같은 수련을 지켜본 그녀였다. 아무리 화연란이 좋더라도 그것만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은 그저 몸을 돌리며 한마디를 툭 뱉을 따름이었다.

“되도록 빨리 정하는 게 좋을걸. 재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네?”

소윤의 반문에도 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담미화.

—네, 정천 님.

담벼락 뒤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마교 측 부대의 움직임은?

—최신 보고에 의하면 백은산을 주파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전서구를 통한 보고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쯤이면 섬서성에 들어섰겠군.

담미화는 내심 놀랐다.

정천의 말대로라면 군사부가 예견한 이동 속도보다도 오 할가량 빨랐다.

—어째서 그리 예상하시죠?

—강룡단의 경공술이 용검대의 경공술보다 뛰어났었으니까. 마교도란 놈들의 특성상 전체적인 경공 자체가 정파의 것을 뛰어넘고 있을 거야. 단련을 위해서라면 뭐든 받아들이는 독종들이니.

—…….

—보고할 내용이 더 있나?

—아, 네. 그들과 조우했던 대원 십인 중 아홉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담미화의 어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실상 같은 대원들이라 해도 그다지 큰 유대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천은 보고 내용을 곱씹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추격당했군. 놈들의 경공이 비영대마저 가볍게 웃돈다는 의미야. 군사의 열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겠어. 나름대로 정예를 보낸 것일 텐데 호되게 당했으니 말이야.

—…….

—수장의 정체는 어떻게 되지?

—아직 불명입니다. 생존자의 말로는 한 번에 열 갈래로 나눠지는 특이한 도초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내 한 가지 무공이 정천의 머릿속을 스쳤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귀령십살도(鬼靈十殺刀)일 가능성이 높아.

—귀령십살도라면……?

마교 칠절(七絶)의 한 명인 소살도(笑殺刀) 귀도신마의 무공이었다.

삼십 년 전의 태허산 대전에서 세 자릿수에 이르는 정파 무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절정의 살공.

설마 그 주인이 직접 황룡성으로 오고 있을 줄이야!

—강룡단 칼쟁이 중에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내는 녀석이 있었지. 공부가 부족해 허초 셋과 진초 둘을 섞는 수준이었지만, 진짜라면 허초와 진초의 배합이 자유로울 테지.

—그 정도의 인물이 황룡성을 향해 오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서신을 봤을걸.

—서신이라니요?

—오라고 보냈거든.

태연한 정천의 대답에 담미화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설마…… 정천 님이?

—응. 그럼 혹시 아무 연유도 없이 마교 놈들이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어?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담미화가 말을 더듬거렸다.

너무 시기가 절묘하다는 생각은 했다. 정천이 의심받을 만한 시점에 마교 측이 움직임으로써 천무맹 전체의 관심을 돌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지나치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약간이지만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설마 그들의 행동 자체를 정천이 유발시킨 것이었다니.

—대,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신 거죠?

—요술이나 환술 따윈 없었어. 그저 서신 하나를 보냈을 뿐이지.

—그 서신에 엄청난 내용이라도 적혀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게 전부다.

—이곳에…… 있다고요?

—피 칠갑을 한 듯한 붉은 서신을 보내는 게 강룡단의 방식이었지.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야. 물론 강룡단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표현과 암시를 남겨 두기도 했고.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천은 무려 십 년 동안 진마동의 어둠 속에서 그들과 살아남았으니까.

문제라면 그 의도였다.

—마교도들을 황룡성으로 불러들여 무엇을 할 생각이시죠?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정천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천무맹을 바깥에서부터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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