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전조(前兆)
화르륵!
멸혼겁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장로들과 도열궁, 장휴의 시체가 불길에 삼켜져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하늘 높이 연기가 치솟았지만 정천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전투를 벌여도 될 만큼 외진 곳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불길이 사라진 자리엔 약간의 재와 먼지만이 남았다.
정천은 그제야 나머지 두 사람을 돌아봤다.
담미화는 평소와 같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화연란 역시 별다른 게 없는 모습. 그러나 떨리는 눈빛들만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녀들로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근원적인 공포는 적아(敵我)를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애써 내색하지 않는 것은 정천을 배려하려기 위한 노력이리라.
정천으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이로써 정운장도 흑엽촌도 더 화륜문을 핍박할 수는 없겠지.”
정천의 말에 그녀들은 꿈에서 깨어난 표정을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담미화의 물음이었다. 조금 뒤늦게 화연란의 얼굴에도 걱정의 기색이 드리워졌다.
비무결전에선 승리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정말 화륜문의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보다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딘 것일지도 몰랐다.
“흠.”
정천은 팔짱을 꼈다. 그의 표정은 평소의 한가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를 잃은 정운장은 백운신 장로가 어떻게든 관리하겠지. 문제라면 역시 와룡장의 제갈순이로군.”
당사자들을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비무결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
그가 장로들과 도열궁의 실종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리 없었다.
다행한 것은 그와의 관계가 적대적이진 않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정천은 담미화를 돌아봤다.
“제갈순은 아마 빠르든 늦든 간에 이번 일을 군사에게 얘기할 거다. 우선적으로 의심받는 건 나를 제외한다면 너겠지. 앞으로 행동에 거듭 주의해.”
“네.”
“란아, 당분간 문도로 들어오겠다는 자는 모두 거부하도록 해. 대부분 다른 문파의 염탐꾼일 테니까.”
“염탐꾼이라고요?”
“그래. 비무결전에 대해선 모르더라도 화륜문과 정운장이 적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으니까. 화륜문을 감시하려는 이들 역시 있을 테지.”
정천의 설명에도 화연란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화륜문을 직접 찾아온 사람은 없었잖아요. 이제 와서 사람이 늘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날 믿어.”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한숨을 토했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군. 이번 사태가 놈들을 자극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놈들이라면, 역시 팔부혈선이란 자들 말인가요?”
화연란의 물음이었다. 그녀들 역시 정천과 두 장로의 대화를 들었던 터였다.
사실 지금도 믿기 어려웠다. 이십사 장로만 해도 까마득히 높은 이들이거늘, 그들이 두려워하는 배후가 존재한다니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야말로 정천의 적이라는 것.
“그들은 대체 누구죠?”
“몰라.”
짤막하고 간단해 농담처럼 들리는 대답. 하지만 정천이 진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화연란이었다.
“그들이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나아가 용검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들이죠?”
“아마도.”
“대체 어째서 그런 거죠?”
“……나도 모른다.”
그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정천으로서도 아직은 의문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천은 그런 이들과 홀로 맞서야 한다.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화연란은 근심 어린 얼굴로 정천을 보았다.
경악스러운 그의 실력이야 몇 번이고 목도했다. 비록 무재보다도 상징성으로 얻는 자리라지만, 천무맹의 정점인 장로들을 압도하는 그 무위는 그야말로 무신의 위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그는 혼자다.
그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천무맹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어서도 정천은 지금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바보. 누구보다 오라버니를 믿어야 할 너잖아.’
화연란은 애써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쳤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정천의 곁에 남아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화연란은 정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돌아가요, 화륜문으로.”
“그래. 힘을 쓴 뒤라 그런지 배가 고프네.”
여느 때와 같은 천연덕스러운 말에 화연란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반면 담미화는 걸음을 떼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버릇처럼 은신을 하고서 전음을 날렸다.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지?
—걱정되는 점이 많습니다. 백운신이나 엄백이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팔부혈선이란 자들이 눈치를 챌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자들의 힘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평소라면 그랬을 테지.
—평소라면?
—지금 그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따로 있어. 자그만 문파들 사이의 일보다도 말이지.
—그게 대체…… 설마?
담미화가 흠칫했다. 정천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이내 알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정천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답했다.
—마교가 움직이고 있어.
스스스슥!
감숙성. 백은(白銀).
일련의 무리가 숲을 헤치고 있었다.
흑의인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그 숫자는 대략 십여 명. 어찌나 경공이 뛰어난지 숲 속으로 흑색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추풍(秋風)처럼 은밀하고 곡풍(谷風)처럼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잠시 전진이 멈추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복면 너머로 눈빛을 교환했다.
푸드드득.
흑의인들 중 한 명의 손에서 전서응이 치솟았다. 전서응은 빠르게 그들이 온 길을 더듬어 배후로 날아갔다.
후방. 전서응이 다다른 곳엔 앞선 흑의인들의 몇 곱절에 달하는 이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중년인이 팔을 뻗었다.
전서응이 그의 팔 위로 내려앉았다. 발치에 묶인 짤막한 서신을 읽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홉을 추살하고 하나를 놓쳤다는군. 변명할 거리가 있는가, 일흑령(一黑靈)?”
바로 뒤에 선 흑의인 사내가 부복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뭐 됐네. 천무맹의 멍청이들도 깡그리 전멸이나 당할 만큼 멍청한 놈들을 감시로 보낼 리 없겠지. 어쨌든 움직이기나 하세.”
“예, 신마님.”
중년인, 귀도신마(鬼刀神魔)가 몸을 날리자 백 명을 넘는 인원이 한데 경공을 펼쳤다. 그들 역시 바람처럼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선두에서 내달리는 귀도신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설마 그들이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귀암산(鬼巖山)으로 서신 하나가 날아든 것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보통의 서신이 아닌, 피로 칠갑이라도 한 듯 붉디붉은 서신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이러한 서신을 사용하는 집단은 하나뿐. 또한 그 점을 알고 있는 이 역시 지극히 극소수였다.
“분명하다. 그것은 강룡단 전용의 서신이었어.”
귀도신마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서신의 내용을 생각했다.
말없이 뒤를 따르던 일흑령이 입을 열었다. 기실 그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신의 내용은 이상했습니다. ‘나는 황룡성에 있다.’라는 한마디뿐이라니요.”
“천무맹 바보들의 유인책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 멍청이들이 이렇게 구구한 방식을 사용할 리가 없지. 사용할 이유도 없고.”
“우리에게 모함을 덧씌워 신교 공격의 빌미를 삼으려는 것은 아닐지…….”
“그렇게 되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우리는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네.”
귀도신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일흑령은 그 바위 같은 목소리에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구나.’
무인은 싸우는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마인들은 특히나 싸움을 갈구했다. 강해지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물며 지난 십 년 전, 몇 번이고 천무맹과 혈전을 벌였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귀도신마는 그중에서도 역전의 노병.
정파인들의 칼 맛이 그립노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하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일흑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색대인 흑령대의 입장에선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다른 마교도와 달리 적을 만날 때 싸움보다 도주를 택할 일이 잦았으니까.
이번에 정파 측 감시자들을 추살하긴 했다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였다.
실력의 고하(高下)를 떠나, 정보를 본대에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목적이었다. 만만한 이들이 상대라 해도 되도록 싸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마교도.
굳이 따지자면 전쟁을 기꺼워하는 입장이었다. 자신이 주축이 되어 싸울 일은 없더라도 말이다.
일흑령은 다시 서신의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그자, 아직 강룡단의 생환자인지 확인되지 않은 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황룡성에 있다고 했다. 어째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마교 수뇌부의 추측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천무맹에 의해 구금되어 있다는 주장이 가장 득세했다. 얼핏 봤을 때 가장 타당해 보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서신을 날릴 여유가 있을까? 여유가 있었다고 친다면 좀 더 자세히 사정을 써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갈수록 의심만 쌓여 가는 일.
그러나 일흑령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이것은 내 임무가 아니다.’
그는 흑령대의 일원이다. 정보를 캐내어 전달하는 것이 그의 임무. 직접 생각하고 분석하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사이 마교도들은 백은산을 반 이상 넘어간 상태였다.
그들은 똑바로 황룡성을 향하고 있었다. 은밀하지만 당당하게, 고요하지만 질풍 같은 기세로.
* * *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군.”
집행부주 군월중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유군광에 이어 암중천과 반진, 용운의 세 장로가 행방불명됐다.
유군광 때와 마찬가지로 쓸 만한 증언이나 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무결전은 그야말로 극비리에 이루어지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뿐이랴.
근래에 들어선 거의 벌어지지 않았기에 군월중으로서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하물며 따로 의심이 갈 법한 정보까지 있다면.
군월중은 몇 번이고 읽었던 보고를 다시 노려보았다. 비영대 측에서 보내 온 것이었다.
일군의 마교 유격대가 감숙성 백은에서 목격됨.
유격대의 이동 방향은 동쪽으로 추정됨.
엄밀히 말해 마교 측 행보 자체는 집행부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이번 행방불명 사태가 관련이 있을지 모르니…….’
군월중은 마교 무리에 대해 생각했다.
유격대가 움직인다는 건 본대 역시 존재한다는 것.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못해도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으로 잡아야 할 터였다.
‘망할 놈들이 꽃 나들이나 나온 것은 아닐 테고…….’
군월중은 내심 가늠해 보았다.
‘지난 십 년 동안 마교가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던가?’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선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이동 방향의 일직선상에 황룡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군월중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의심이란 마른 겨울의 산불과도 같다. 적당한 불씨와 장작만 있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기세로 급격히 퍼지는 법.
이때의 불씨는 정보 자체요, 장작이라면 역시 상상력일 터였다.
군월중은 평균 수준의 상상력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마교의 움직임과 작금의 상황을 한데 몰아넣어 보았다. 이윽고 그럴싸한 추측 하나가 완성되었다.
‘설마 그들 네 장로가 마교와 내통했던 것일까? 정운장의 도 장주 역시 연관되어 있고?’
군월중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로들과 도열궁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는데다, 마교가 십 년의 침묵을 깨고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행방불명된 이들이 마교 측과 만나기 위해 사라진 거라면? 마교 무리의 이동이 그들을 마중 나가기 위한 거라면?
실제로 황룡성 내의 상당수 인물들이 이러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물론 확실한 물증 없인 추측에만 그칠 일이었다. 하물며 공명정대가 신조인 그라면.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군.”
군월중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군월중과 비슷한 탄식을 뱉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제갈순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대체 비무결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황룡성 전체가 이번 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여는 이들의 대부분은 마교의 이름을 당연하다는 듯 꺼내곤 했다.
제갈순은 그들과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함을 비웃을 순 없었다.
그 역시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으니까.
제갈순은 다른 이들보다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웠다. 비무결전이 있었다는 것을, 나아가 그곳에서 무언가 벌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
그 일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정천, 그자가 무언가 술수를 꾸민 것이 분명하긴 한데…….”
제갈순은 정천을 떠올렸다.
이제야 그가 장휴와의 대면에서 당당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핏 봐선 패배가 확실한 제의를 했던 이유 역시도.
“역시 숨겨 놓은 것이 있었는가.”
본 실력의 일부는 만약을 위해 숨겨라! 그 신중함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네 목숨을 구할 것이다.
강호행의 길 위에 선 자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철칙이었다. 그 실력이란 게 무위가 되었든 계교가 되었든 말이다.
정천은 그 철칙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제갈순으로서도 설마 그가 장로들을 해하였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기재라고는 하나 그 역시 상식에 속박된 이였기에.
“장로들을 회유한 것일까? 실제로 도열궁과 긴밀한 사이인 백 장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수상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열궁은 왜 사라졌으며, 백 장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비무결전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세간의 눈은 백운신을 피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갈순으로선 의문일 따름이었다.
“형님께 도움을 청해야 할까? 아니, 아니다.”
제갈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군사 제갈현과 비영대는 마교의 움직임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또 다른 골칫거리까지 떠넘길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냐, 정천.”
제갈순은 입술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갈순은 매무새를 바로 하고서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방으로 들어선 이는 제갈세연이었다.
“부르셨어요? 숙부…… 아니, 총관님.”
“둘뿐이니 편하게 부르십시오.”
“헤헤. 네, 숙부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 제갈세연. 그 모습에 제갈순도 한순간이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팔불출 소리를 듣는 제갈현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질녀인 제갈세연을 내심 귀여워하고 있었다. 단지 위치가 위치인지라 보다 엄하게 대할 뿐.
그것을 아는 것인지는 몰라도, 제갈세연은 자신을 가장 자주 혼내는 제갈순에게 가장 자주 애교를 부리는 편이었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이렇게 불렀습니다.”
“부탁할 것이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조금 껄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제갈순이 구태여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와 화륜문 사이의 유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제갈순은 마음을 다잡고서 말했다.
“정천, 그자를 관찰해 주십시오.”
“예?”
제갈세연이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제갈순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의 버릇이 무엇인지, 무엇을 자주 하고 좋아하는지, 무엇을 꺼리고 피하는지. 시시콜콜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작은 것 하나까지 관찰해서 제게 알려 주십시오.”
“숙부님…….”
제갈세연이 말끝을 흐렸다. 당황한 눈치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대를 관찰, 감시한다는 것은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본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제갈순은 그녀의 표정에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오해가.
제갈세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숙부님께서 정말 그런 취향이실 줄이야……!”
“……예?”
“우리의 잘못이에요. 제갈세가 모두의 잘못이에요. 불혹이 되도록 숙부님을 홀로 두는 게 아니었어요.”
“그, 그게 무슨?”
제갈순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제갈세연은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놀리는 기색조차 전혀 없기에 제갈순으로선 더욱 착잡한 일이었다.
“이래선 안 돼요, 숙부님. 외도(外道)에 빠진 걸로 모자라, 그 상대가 하필이면 정천 오빠라니요.”
“외, 외도?”
“숙부님께 설마 남색의 기질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헉! 그게 무슨!”
제갈순이 두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경악했다. 언어를 무공에 비유한다면, 그는 지금 오장육부가 모조리 박살 나는 치명타를 입은 거나 다름없었다.
제갈순은 애써 경악을 진정시키려 했다. 당황한 까닭인지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제갈세연을 보았다.
“대,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갈세연이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정천 오빠가 그랬어요. 요즘 이상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숙부님의 시선이 꺼림칙하다고요. 혹시 숙부님의 취향이 이상하진 않느냐고요.”
“……이런 개자식을 봤나!”
시뻘게진 얼굴로 제갈순이 노호를 토했다.
그 노호의 대상이 눈앞에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에 불과했지만.
제갈순은 자기도 모르게 창가로 달려가서는 소리쳤다.
“내가 언제 네놈이 좋다더냐! 정천, 이 개자식아!”
그리 크지는 않으나 절절한 분노가 담겨 있는 외침이었다.
물론 이날 이후로 한동안 제갈순을 보는 와룡장 사람들의 눈빛이 묘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거참. 귀 따갑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천의 대답에 화연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화륜문 식구들 전부가 나선 외출이었다. 비무결전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오랜만에 황룡성 거리로 구경을 가는 길이었다.
두 제자와 식충이 하나, 즉 심후와 칠삼, 그리고 소윤을 데리고 나선 길.
정천과 화연란이 돌아왔을 때, 세 사람의 반응은 그야말로 극명하게 달랐다.
심후와 소윤은 순수하게 화연란을 축하하고 존경하게 된 입장이었다. 단순하게 화연란이 도열궁을 이겼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반면 칠삼은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눈치.
하기야 실력을 떠나 가장 눈치 빠르고 경험이 많은 그였으니 당연했다. 석연찮은 구석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천이 설명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칠삼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것을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마침 와룡장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화연란이 정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와룡장에 들렀다 갈까요? 세연이도 총관님도 무척 걱정하고 있을 텐데요.”
화륜문이 승리했다는 것이야 알고 있겠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서 알리진 않은 차였다.
정천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관두는 게 좋을걸. 와룡장이랑 척지고 싶지 않다면.”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음. 그러니까…….”
잠시 생각하던 정천은 이내 설명하길 관뒀다.
조금 전 어렴풋이 들었던 외침을 보니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랬기에 설명하기도 난감했고 말이다.
얼굴을 보자마자 사달이 단단히 날 터. 제갈순으로선 정천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것이었다.
“그런 게 있어. 하여간 그쪽 사람들 얼굴 보는 일은 조금 뒤로 미뤄 둬.”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어요.”
화연란은 생각보다 간단히 포기했다.
일행이 저잣거리에 들어섰을 때, 마침내 칠삼이 슬금슬금 정천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손을 쓴 거지?”
정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칠삼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문지기 짬밥만 이십 년인 나일세. 실력이야 이 모양이지만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절세 고수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네. 내가 보기에 화 소저의 무공은 도열궁의 십초지적이 되지 못해. 각검을 스스로 창안하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말이야.”
“소저가 아니라 사부겠지.”
“사부든 소저든 문주든 말일세. 설마 그녀가 정말 도열궁을 이겼노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화륜문은 비무결전에서 정운장에 승리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칠삼은 답답한 듯 가슴을 툭툭 쳤다.
“그러니 의문이란 것이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한번 추측해 봐.”
“그건…….”
칠삼의 말문이 막혔다. 의문이 있긴 하다지만 그게 전부. 그 이상으로 파고들기엔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적었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칠삼의 어깨를 툭 쳤다.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선배.”
“자네…….”
“그러니 어디 가서 술이라도 먹고 떠들지 말라고. 미친 사람 취급이나 당하게 될 테니까.”
“끙.”
정천의 말대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무결전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잊고 있었다. 아니, 화륜문과 정운장이 대립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런 마당에 화륜문이 정운장에 승리했다고 떠들어 봐야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행이 계속 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화연란의 걸음을 붙들었다.
“오랜만이군요.”
흠칫한 화연란이 고개를 돌렸다.
청색 무복을 맞춰 입은 일련의 무리였다.
그중 가장 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용봉소회의 일봉(一鳳), 모용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