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第一章 하늘을 부수려는 자 (24/146)

第一章 하늘을 부수려는 자

공터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장로들은 물론이요, 화연란과 담미화, 장휴와 서윤학 역시 입술을 깨문 채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시선은 정천에게 몰려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흑색의 검으로.

그 검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아는 데엔 초고수의 안목까지도 필요 없었다.

그 와중, 화군장로 백운신은 누구보다도 충격 어린 얼굴이었다.

‘강기로 이루어진 검? 아니, 저 기운은 강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백운신은 의문 가득한 눈을 들어 정천을 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진마동에서 귀환했단 말인가?

다른 용검대원들은 어찌 되었는가?

그 검과 기운은 대체……?

백운신은 무심결에 질문을 꺼낼 뻔했다. 그러나 이내 정천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서 입을 다물었다.

정천은 그들로 하여금 침묵을 종용했다.

모두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을 곁들여서.

그야말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일개 조장 따위가 천무맹의 정점에 위치한 장로들에게 협박을 하다니 말이다.

신중한 성격인 백운신이라 해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평소였다면 필시 놈에게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했으리라.

평소였다면.

“…….”

백운신은 내심으로 가늠했다. 과연 지금, 정천과 자신이 생사투를 벌인다면 승산은 누구에게 있을까?

답은 이내 나왔다. 백운신으로선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답이었다.

백운신은 시선을 돌렸다.

다른 장로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정천이 지금의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대체…….”

무상장로 암중천이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정천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던 것이다.

암중천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새파랗게 젊은 놈의 눈빛 따위에 입을 다문 것이 수치스러웠던 까닭이다.

정천이 피식 웃고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피차 바쁜 입장이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론이라고?”

암중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꿀리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백운신은 내심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천은 암중천을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조력자의 도움으로 십 년 전의 몇몇 기록들을 얻을 수 있었소.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건 여러분께서 참석하셨던 장로회의의 결과지. 그로 인해 우리가 진마동으로 향하게 됐으니까.”

정천이 말하는 조력자가 누군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장로들의 분기 어린 시선이 담미화에게 향했다.

담미화는 일순 흠칫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발을 담근 이상 물러날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진 정천의 말에 장로들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여러분 다섯 사람은 용검대의 투입을 반대했던 분들이더군.”

그랬다. 각자의 이유야 달랐지만, 그들 다섯 명은 분명 용검대 투입을 반대하는 표를 던졌었다.

“그 사실이 여러분의 목숨을 살렸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것도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정천의 말에 장로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건방진 놈!”

장로들 중 한 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섰다. 시원한 민머리와 다혈질적인 얼굴을 지닌 중년인. 열원장로 반진이었다.

“네놈이 무슨 아량이라도 베풀었다는 말이냐? 그 덕에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냐?”

“잘 아시는군.”

정천이 짤막히 대꾸했다. 일말의 비웃음조차 섞이지 않은 얼굴로.

그렇기에 반진을 비롯한 장로들은 더욱 열불이 치솟는 것이었다. 반진은 살기를 확 뿜으며 두 주먹을 부딪쳐 보였다.

“좋다. 네놈이 과연 큰소리를 칠 만한 실력인지 이 두 주먹으로 직접 확인해 주마!”

“반 장로!”

앞으로 나서려는 반진을 백운신이 제지했다.

“기다리시오. 싸우는 것은 조금 더 대화를 해 본 다음도 늦지 않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백 장로! 제자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반진이 반파된 기암절벽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착잡한 표정의 장휴가 도열궁을 힘겹게 끌어내고 있었다.

도열궁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였다.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

백운신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

미운 제자라 하여 안타깝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저런 처참한 몰골이라면.

그러나 백운신은 입술을 곱씹으면서 말했다.

“조금 전의 대결은 비무결전에 따른 정당한 승부였소. 정운장주 도열궁은 상대방의 실력을 간파하지 못해 패배한 것이오.”

“백 장로!”

“비무결전은 결착이 났소. 지금부터의 일은 화륜문이나 정운장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오.”

백운신이 정천을 돌아봤다.

“수긍하는가?”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말했다.

“수긍합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침착하시군요.”

“노부는 천무맹의 장로니까. 일의 경중과 옳고 그름 정도는 알고 있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도 몇 가지 있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스르릉.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백운신의 허리춤에서 한 자루 장검이 뽑혀 나왔다. 그가 잠잘 때조차 곁에 둔다는 명검 태을영신(太乙英身)이었다.

화아악!

그와 동시에 백운신의 몸에서도 열화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한서불침인 장로들조차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날 정도의 기운이었다.

백운신은 정천을 향해 태을영신의 검신을 겨누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노부와 결착을 내야 할 것일세.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는 일대일의 결판을 말이야.”

“좋습니다.”

정천이 담담히 대꾸했다. 백운신은 태을영신을 거두어 허리에 꽂았다.

덕분에 반진도 더 나설 수 없게 됐다. 지금 백운신은 그 누구도 정천을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십사 장로 중에서도 수위의 무력은 지닌 그다.

게다가 그 뒤엔 화산파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소엔 호수처럼 잔잔한 그였으나, 이렇게까지 나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반발할 수 없었다.

정천은 그럼에도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백운신과 네 장로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섯 장로들에게 묻겠소. 우리가 진마동에 들어가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교현장로 용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괴, 괴인과 마수 무리의 척결을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네.”

“정말 그랬다면 둘 중의 하나만 택했으면 됐을 거요. 토사를 일으켜 입구를 파묻어 버리거나, 우리와 강룡단을 보내거나. 굳이 두 가지를 병행했다는 건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거지.”

장로들의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정천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자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교현장로 용운의 물음에 정천은 피식 웃었다.

“필요한 만큼은 알고 있소. 그걸 함부로 떠벌릴 만큼 멍청하지도 않고.”

“으음.”

“회의 내용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말하십시오. 어째서 우리와 강룡단이 무의미하게 버려져야 했는지.”

장로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십 년 전의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어버렸을 만큼 멍청하진 않은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난감한 것.

회의와 투표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만장일치로 처리해선 뒷맛이 개운치 않기에 형식적으로 소수의 장로들이 반대표를 던졌을 뿐이다.

정천은 그들의 표정만을 보고도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역시 회의 자체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군.”

“…….”

“유군광의 말대로, 결국 당신들은 팔부혈선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군.”

“……!”

장로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이름이 정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까닭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어, 어떻게! 네놈이 어떻게 그들의 이름을!”

“유 장로를 어떻게 한 것이냐!”

각기 다른,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다를 게 없는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정천의 입가에 비웃음 가득한 미소가 각인되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그날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그, 그렇다면 유 장로는……?”

“지금쯤 어느 늑대들의 뱃속에서 소화된 후일 테지.”

“이놈!”

외마디 외침과 동시에 세 명의 장로가 움직였다. 무상장로 암중천과 교현장로 용운, 열원장로 반진이었다.

더 이상 놈의 태도를 참을 수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퍼져선 안 된다!’

‘혈선들이 우리를 추궁하게 둘 순 없다!’

팔부혈선이란 이름은 그들의 뼛속에까지 새겨져 있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만일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 과정에 자신들이 연루되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혈선들의 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죽음보다도 두려운 일이었다.

“타앗!”

“차하앗!”

“죽어랏!”

세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권, 각, 장이 쇄도했다. 놀라우리만치 빠르고 날카로운 합격이었다.

암중천은 율형나선권(聿形螺旋拳)의 절초로 정천의 미간을 노렸다.

동시에 용운의 연환질풍각(連環疾風脚)과 반진의 궁멸장(穹滅掌)의 절초가 정천의 갈빗대와 명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절세의 절초들!

이들과 같은 경지, 즉 극한경(極限境)의 초고수라 해도 쉽사리 방어할 수 없을 합격이었다. 막거나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부상을 줄이느냐는 게 문제일 수준.

화연란과 담미화는 물론, 한발 늦은 백운신조차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정천이 전각을 밟았다. 이내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강룡검!

“하압!”

짧은 기합성과 함께 정천이 강룡검을 떨쳤다.

일초식 열파나락이 폭사되며 세 사람의 기운과 한데 뒤엉켰다. 그리고…….

콰과과과과!

핏빛의 강렬한 열풍이 질풍노도처럼 몰아쳤다. 그 열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정천이 딛고 있는 주변의 땅이 푸석하게 메말라선 갈라질 정도였다.

떨어져 있던 백운신과 엄백이 이를 악물었다. 이걸로 열파나락을 보는 게 두 번째인 화연란 역시 놀란 눈이었다.

‘지난번의 것과는 비교 되지 않아!’

유군광을 상대했을 때는 칠성의 공력만 쏟았을 뿐. 때문에 열웅진천세를 파훼하는 정도에 그쳤다.

반면 십이성 공력을 쏟은 지금의 것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랐다. 중원천하에 저 공세를 막아 낼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물론 당사자인 세 장로만큼 경악스러운 이들도 없을 터였다.

‘우리의 합격을……!’

‘이리도 간단히?’

열파나락의 열풍은 우선으로 정면에서 짓쳐 들어오던 암중천의 율형나선권을 깨트렸다. 동시에 사방으로 퍼지며 나머지 두 장로의 공세 역시 상쇄해 버렸다.

흩어지는 기운만으로 두 장로의 절초를 상쇄할 정도. 그렇다면 정면으로 기운을 받은 암중천은?

해답은 이내 나왔다.

“크아아악!”

암중천이 열기의 한가운데에서 튕겨져 나갔다.

강룡검에 의해 베어진 가슴팍에서 용암처럼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큭!”

백운신이 열기를 잠재우려고 몸을 날렸으나, 이미 암중천의 몸은 반 이상이 불살라진 뒤였다. 게다가 이젠 가슴팍의 검흔으로 모자라 칠공에서까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절명!

화염은 이내 암중천의 몸을 완전히 먹어 치웠다.

“……!”

백운신을 비롯한 장로들은 경악 어린 눈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정천은 그들의 시선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에게 차가운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첫 수는 백 장로에게 양보하기로 했던 것 아닌가?”

원초적인 도발. 그럼에도 장로들은 화를 낼 여력이 없었다. 경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무맹, 나아가 온 무림을 통틀어 팔부혈선들의 실력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그들이 내리는 명령을 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중원의 그 누구도 그들에게 대적할 수 없기에.

천무맹주 남궁운, 혹은 천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오랜 선입관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실력이라면…… 어쩌면……?’

그러나 그 존재는 장로들에 비해 까마득히 아래라 할 수 있는 용검대의 조장이다.

천무맹 최강의 타격대였다고는 하나, 어찌 일개 조장 따위가 그들을 상회하는 실력을 지니게 됐다는 말인가?

반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사술이다. 이건 사술이 분명해! 네놈이 요망한 사술로 우리의 눈을 속이는구나!”

“시험해 볼 텐가?”

정천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 다음 순간 그는 반진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큭!”

반진은 이를 악물었다. 놈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란 것은 이미 처절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는 체내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동시에 호신강기와 방격지공에 전심전력을 쏟았다.

그가 앞으로 내뻗은 두 팔 사이로 원형의 푸르스름한 기막이 생성되었다.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호신공이었다.

그사이 지척까지 쇄도한 정천이 강룡검을 내뻗었다. 순간적으로 강룡검은 본래의 두 배 길이로 늘어나서는 나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제이검(第二劍), 나선수라(螺旋修羅)!

흑색 나선이 반진이 펼친 기막과 충돌했다. 그리고.

콰드드득!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것 같던 푸른빛 기막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반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퍼어억!

기막을 뚫고 들어간 강룡검이 반진의 흉부를 꿰뚫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꿰뚫린 흉부를 중심으로 갈가리 찢겨졌다.

자욱하게 퍼지는 혈향.

몇 걸음 거리에서 그것을 본 용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으아아!”

그는 실성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이성을 잠식당한 까닭인지 기괴한 비명을 토하면서 말이다.

정천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본 백운신이 황급히 땅을 박찼다.

“멈춰라!”

태을영신을 뽑아 든 백운신이 정천의 등을 노렸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비겁함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태을영신의 칼끝은 정천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경공이 백운신을 웃돌고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의 둘의 거리가 벌어졌다. 백운신은 그 순간 아득한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럴 수가……!’

그사이 정천은 용운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강룡검을 내뻗었다.

또 한 번의 나선수라가 용운의 등을 꿰뚫었다. 용운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졌다.

코끝을 찌르며 빠르게 퍼지는 혈향.

그 한가운데에서 홀가분하게 몸을 돌리는 정천.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백운신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역시 뼛속까지 무인이다. 죽음이야말로 반려자와 같은 것이며, 언제 어느 때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비록 외진 곳이라 해도 황룡성 내에서 지고의 존재인 장로들이 참살당할 줄을 말이다.

정천은 그야말로 무법과 혼돈 자체처럼 보였다. 물론 그보다도 그를 표현하는 데 있어 적당한 단어는 따로 존재했다.

마인(魔人). 그러고 보면 정천과 함께 진마동에 갇혔던 이들의 절반은 마인이었다.

‘그들의 성정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가? 정녕 그는 마인이 되었단 말인가?’

그사이 정천은 지척까지 걸어온 상태였다.

백운신은 태을영신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앞서 죽은 세 장로의 뒤를 따르게 된대도 물러날 수는 없다.

그리 달가운 사이는 아니라지만 어쨌든 자신과 같은 천무맹의 장로들이었다. 목숨을 잃진 않았다지만 처참하게 패배한 제자 역시 있었다.

그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정천은 앞서와 달리 백운신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게다가 숨 막히게 주위를 잠식하던 살기 역시 어느 정도 거둔 뒤였다.

정천은 강룡검을 쥔 손을 폈다. 강룡검은 마치 거짓말처럼 흑색의 연기로 화해선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백운신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와 멈출 생각은 아닐 테지? 노부는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는 계교 따윈 부릴 것 없네.”

“계교를 부릴 생각도 없고 싸울 생각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장로께서도 동의하실 때의 일이지만.”

“이런 살육을 벌여 놓고서…… 이제 와서 싸우지 않겠다는 말인가?”

“예.”

너무나 담담한 대답에 백운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의문을 토했다.

“어째서? 세 장로를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도륙했으면서 왜 우리만 특별 취급을 하겠단 말인가?”

“다른 세 사람과 달리, 두 분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서 반대표를 던졌었으니까요.”

백운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뒤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엄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 년 전, 그들은 팔부혈선의 지시가 내려오기 이전에 반대표를 던졌었다. 지시 이후에야 형식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던 세 사람과 달리 말이다.

그로 인해 한동안 다른 장로들과의 사이가 급격히 냉각되기도 했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사표(死票)나마 던져 항거하고 싶었을 뿐이다. 엄백의 속내는 모르지만 최소한 백운신은 그러했다.

그야말로 미비한 저항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 그 사실을 어떻게……?’

잠시 놀라던 백운신은 이내 알 수 있었다. 필경 비영각에 있는 비록을 통해 알아냈으리라. 제갈현과 비영대는 그야말로 자그마한 것조차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정보력으로도 팔부혈선의 그림자나마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백운신은 씁쓸한 표정으로 정천을 응시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물러날 수는 없다. 이미 세 명의 장로가 유명을 달리했어. 그들을 참살한 자네를 천무맹 장로로서 그냥 두고 볼 것 같은가?”

“그것이 옳지 않은 길임에도 말입니까?”

“장로들을 참살할 자네가 옳고 그름을 논하려는 것인가?”

“제 등과 양 어깨엔 이백 형제들과 대주님의 목숨이 얹혀 있습니다.”

백운신은 입을 다물었다.

유군광이나 반진이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깟 타격대 이백 명의 목숨과 장로들의 목숨을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정천의 말을 듣고 있는 이는 화군장로 백운신이었다.

장로이기에 앞서 화산의 무인이기도 한 그로선 정천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불망지원(不忘之怨)인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 자신이 뿌렸던 원한의 결과 때문에, 그러한 보복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입장 때문에.

천무맹의 장로회의는 썩었다. 그 사실은 장로의 일인인 백운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장로회의의 타락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하물며 진정한 천무맹의 실세인 팔부혈선에게 대들 힘이라면 더더욱.

때문일 것이다. 무참한 살육을 벌인 정천의 말에 솔깃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의 실력 역시 큰 이유였고.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인가?”

백운신의 물음에 정천은 웃었다.

“황룡성은 거대하고 천무맹은 그보다도 거대합니다. 그 정수(精髓)를 헤아리려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헤집어 놓아야겠지요.”

“천무맹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려는 생각이로군.”

“환부가 썩어 간다면 도려내는 수밖에요.”

썩은 환부란 물론 장로회의를 빗댄 것일 터. 팔부혈선의 수족 노릇을 하는 그들을 비웃는 것이라 볼 수도 있었다.

그사이 중황장로 엄백이 그들에게 다가와서는 정천에게 질문했다.

“간단히 하세. 우리에게서 무얼 원하는가?”

백운신이 엄백을 돌아봤다.

“엄 장로?”

“악명 높은 극독이라 해도 경우에 따라 약에 쓰일 수도 있는 법이지요. 더군다나 그 독이 없이는 회생의 기미가 전혀 없는 환자라면, 차라리 독기가 일으키는 조화에 기대하는 수밖에요.”

“지금 천무맹이 그렇게까지 썩었노라고 말하려는 것이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입니다.”

엄백이 정천을 돌아보고서 물었다.

“우리가 만일 자네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아직 제가 지닌 본연의 실력이 외부에 드러나선 곤란합니다.”

“살인멸구해서 은폐하겠다는 말이군.”

정천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엄백은 생각보다도 담담한 얼굴로 백운신을 돌아봤다.

“그렇다는군요.”

“엄 장로, 죽음이 두려워 그에게 협력하겠단 것이오?”

“그런 의미가 아님은 누구보다도 백 장로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엄백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친구가 말했던 대로입니다. 장로회의는 비정한 결정으로 용검대의 백 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배후엔 팔부혈선들이 있었고요. 그 업보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그로 인해 천무맹 전체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오?”

“그것을 막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질문과 함께 엄백의 입가에 그려지는 희미한 미소.

백운신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평소 엄백은 장로들 중에서도 그리 전면에 드러나는 인물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부드러운 인상의 인물. 백운신이 엄백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엄백은 마치 모략을 꾸미는 군사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백운신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본인 역시 팔부혈선의 천하를 마뜩찮게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엄백은 회유하는 시선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또 한 분 계시네. 혈선천하의 종언을 천명하신 분이 말이야.”

정천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엄백은 그럼에도 괜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바로 맹주님일세.”

“맹주께서?”

경악을 한 사람은 백운신이었다. 엄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그분과 손을 잡은 것도 어언 열다섯 해를 바라보고 있소. 그리고 그분의 의지는 지금까지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고 말이오.”

“그럼 장로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졌던 것은……?”

“본래는 그대, 백 장로와 연을 트기 위한 수였소. 뭐, 그 이후로 번번이 허탕만 쳤지만 말이오.”

백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로회의 자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까닭에 엄백이 넌지시 보내는 회유를 모두 거절했었다.

“하지만…….”

엄백은 밝아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덕에 오늘날 이런 기연을 만나게 되는군.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연을 말이지.”

“…….”

“어떤가, 정천. 우리들과, 맹주님과 손을 잡아 혈선의 천하를 끝맺지 않겠는가?”

정천은 대답하지 않은 채 엄백을 응시했다. 그다지 동하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엄백은 내심 불안해졌다.

“왜 그러나?”

“미안하지만 난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제안에 대해서도 바로 가타부타 말할 수 없습니다.”

“으음.”

정천은 두 장로를 한 눈에 담고서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늘의 일을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며, 둘은 이후에 있을 호출에 응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운신이 미심쩍은 눈으로 되물었다.

“고작 그 정도면 된다는 말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내가 두 분에게서 원하는 것은 신뢰니까요.”

“신뢰라…….”

씁쓸히 중얼거린 백운신이 물었다.

“세 장로들의 시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될 겁니다.”

백운신은 정천이 말하는 신뢰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유군광에 이어 세 장로마저 행방불명된다면 혈선들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터.

하물며 비무결전에 참가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남은 두 사람을 추궁할 것이다.

그들은 팔부혈선, 그 압도적인 존재들 앞에서도 과연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군.”

백운신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릴 때, 엄백은 다른 질문을 꺼내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니, 맹주께도 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오늘의 일과 나에 대한 기억은 홀로 지니고 계셔야 할 겁니다. 차후 제가 호출할 때까지 말입니다.”

“으으음.”

“만약 이를 어길 시엔…….”

정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차라리 앞서 죽은 세 장로가 부럽게 될 겁니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다. 그러나 백운신도 엄백도 그게 허풍이나 허세가 아니란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지.”

엄백이 먼저 대답했다. 정천은 백운신을 돌아봤고, 백운신은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한숨을 뱉듯 대답했다.

“알겠네.”

“두 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정천이 예를 취하며 말했다. 엄백도 마주 포권했으나, 백운신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 따름이었다.

“우선은 자네의 제안을 따르지.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노부는 자네에게 결투를 청할 것이네.”

“백 장로!”

엄백이 기겁한 얼굴을 했으나 백운신은 결의를 다지고서 정천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무인의 오기이자 의지였다.

이것만은 정천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백운신은 몸을 돌려 공터를 빠져나갔다. 엄백 역시 장로들의 시체와 정천을 번갈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군.’

정천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형언하기 힘든 표정의 화연란과 담미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혼절한 도열궁. 서 있기만 할 뿐 상태는 도열궁보다 심각해 보이는 서윤학.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정천을 노려보고 있는 장휴였다.

정천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서윤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몽을 꾸는 아이처럼.

마침내 그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서윤학은 결국 기괴한 비명을 뱉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제발 살려 주세요! 아아악!”

서윤학은 얼마 못가 제풀에 넘어졌다. 흙더미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헐레벌떡 일어나 다시 달아났다.

정천은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 뒤쫓지는 않았다.

“쫓지 않는가? 그가 네 비밀을 떠벌릴지도 모르는데?”

장휴의 말이었다. 정천은 그저 피식 웃었다.

“저런 상태로?”

장휴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서윤학의 이성이 완전히 붕괴됐다는 것을 느꼈던 까닭이다.

화연란에 의해 자존심이 무너졌고 도열궁에 의해 몸이 상했다.

거기에 더해진 정천으로 인한 공포는 그의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가기에 충분했을 터.

서윤학은 다시는 무인 노릇을 할 수 없으리라. 여생을 공포에 쫓기듯 살아갈 테지.

“남은 문제는 너 하나뿐이군.”

정천의 말에 장휴가 움찔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 정천의 무위에 뼛속까지 질린 상태였다.

그 공포를 쫓기라도 하듯 장휴가 입을 열었다.

“나의 완패이며 정운장의 완패로군. 지모에 있어서도 무재에 있어서도.”

“상대가 좀 안 좋았지?”

장난 같은 물음에도 장휴는 웃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제거할 생각인가? 장주님 역시?”

정천은 힐끔 시선을 내려 도열궁을 보았다.

솔직히 그가 살아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섬권(一閃拳)을 뻗는 데에 있어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도열궁은 그 주먹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비록 온몸의 뼈가 박살 나고 대부분의 내장이 찢겨진 치명상을 입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겨우 목숨만 건진 셈.

어찌 보면 죽은 것만 못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를 치료할 생각인가?”

장휴는 씁쓸한 표정으로 도열궁의 내려다보았다.

“목숨을 보전해 봐야 지옥보다 험한 여생만이 남아 있을 테지. 장주님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차라리 죽음을 바라실 거다.”

대답과 함께 비수를 빼어 드는 장휴. 정천은 굳이 그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순수한 충심의 발로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백운신 역시 이렇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난 것일 터.

장휴는 도열궁의 목에 검을 박았다.

짧은 경련에 이어 도열궁의 호흡이 완전히 사라졌다.

“미련은 없다. 이제 끝을 내라.”

장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천은 강룡검을 불러냈으나 그의 목을 바로 치진 않았다.

“내가 협력을 제안한대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

“어리석은 소리.”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장휴였다. 정천은 강룡검을 들어 올리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정운장주와 군사가 사라지고 세 명의 장로 역시 사라진다.

풍문은 삽시간에 황룡성 전역을 강타할 것이다.

물론 그 사실에서 화륜문의 존재를 끌어낼 이들은 많지 않았다. 비무결전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당연히 이번 일 자체를 아는 사람은 천무맹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손에 꼽을 정도의 극소수 인물들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니란 점.

물론 이 역시 정천이 의도한 바였다. 이 정도 모험도 하지 않고선 팔부혈선의 존재에 접근하기 힘들 터였으니까.

문제는 혈선을 제외한 이들이었다.

‘제갈세가 쪽에서 꼬리를 물게 될지도.’

정천도 나름대로 방비는 세워 두었다. 그러나 만약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장휴는 상당히 탐나는 인재였다.

비록 정천에게 휘둘렸다고는 하나, 그거야 정천이 이들의 상식 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이자가 마음을 바꾸진 않을 테지.’

장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을 가진 사내의 뜻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정천은 강룡검을 휘둘렀다.

장휴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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