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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章 강룡이 눈을 뜰 때 (23/146)

第十一章 강룡이 눈을 뜰 때

“강룡수라마공이다.”

정천은 피로 속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한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눈가를 지나 턱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 그런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별명을 지닌 사내.

“그건 또 뭔 소리냐, 제갈 마두.”

사내는 대뜸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제갈가의 사내가 아니다.”

“현원천단검을 쓰는 주제에?”

“…….”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천은 그가 제갈가와 관련해선 그 어떤 얘기도 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 전의 그 얘긴 무슨 소리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심공. 그 이름을 말한 것이다.”

“네가 지은 이름이냐?”

“그래.”

“누가 마교 놈 아니랄까 봐 수라니 마공이니 하는 건 꼭 갖다 붙이는군. 거기다 자기네 이름까지 갖다 붙여? 그 심공의 기반이 태극무량공(太極無量功)에 있다는 건 잊었냐?”

“절천마령공(絶天魔靈功) 역시 기반이 되었다는 걸 잊지 마라.”

“어쨌든 그 이름은 안 돼. 마교 놈들만 다해 먹는 것도 아니고.”

“그럼 뭔가 생각해 둔 거라도 있나?”

정천은 잠시 침묵했다.

“……용검무적신공(龍劍無敵神功)?”

사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왜?”

“이름이 멋없으니까.”

정천은 멍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진지한 얼굴 어디에도 장난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욱 황당했다.

“미친놈. 강룡수라마공은 괜찮고?”

“물론. 나의 미적 감각은 네 것보다 뛰어나니까.”

“…….”

“게다가 나는 다른 무공과 초식들에도 각각의 이름을 붙여 두었다. 너는 이 정도의 성의를 지니고 있나?”

“그거야…….”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제 죽어 자빠질지도 모르는 판국에 누가 그런 것을 짓고 앉았을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천은 어색함을 벗어나고자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가 구태여 자신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붙였는지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이제 서른 명도 되지 않는 토벌대 중, 그나마 떠들 힘이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럴 테지만 정신적으론 더더욱 한계에 몰려 있을 터.

사내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굳이 말을 붙인 것이리라. 아직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기 위해서.

‘오지랖도 넓은 놈.’

속으로 중얼거리는 정천에게 그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뭐가?”

“우리 중 먼저 죽는 사람의 이름을 심공에 남기는 것이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강룡수라마공의 이름을, 네가 죽는다면 용검 어쩌고 하는 신공을.”

“용검무적신공이다. 그리고 너 죽느니 어쩌니 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준 게 몇 번인지나 알고 있냐?”

“총 열아홉 번. 애매한 게 두세 개가 있긴 하지만 모두 포함하도록 하지.”

“…….”

정천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사내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네 목숨을 열아홉 번 구해 주었다. 너와는 달리 애매한 부분도 없지.”

“흥.”

정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군. 누가 제갈 마두 아니랄까 봐.”

“나는 제갈가와는…….”

사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정천 역시 그 이유를 알고는 서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들이 위치한 공동 아래에서 시퍼런 안광들이 번뜩였다. 어둠마저 꿰뚫어 보는 그들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기기묘묘한 각종 마수들.

죽음이 다시 그들에게 손짓한다.

“친절하기도 한 놈들이군. 슬슬 떠드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인데 말이야.”

“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원래 쓰던 검은 박살이 나 버린 지 오래. 먼저 죽어간 동료들의 것을 대신 사용한 게 몇 차례였고, 나중엔 그마저 부러져서 마수들의 것을 빼앗아 쓰게 됐다.

이미 무기에 구애받지 않는 그들인 만큼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다. 놈들의 무기로 놈들의 내장을 찢어발길 수 있으니.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에 조각처럼 새겨진 피로. 그렇기에 정천은 더더욱 기세를 올렸다. 약간이라도 여유가 있는 그가 더욱 활약해야 했다.

“와라……!”

정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지간한 절정 고수라도 대호 앞의 쥐처럼 얼어붙을 법한 기세.

그러나 놈들은 위축되지 않는다.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물러나는 일도 없다.

끝없는 적개심으로 무장한 채 덤벼들 뿐.

생물의 한계마저 넘어선 듯한 놈들을 상대하려면 정천 역시 마수가 되어야 한다. 어둠 속에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야수. 인간의 탈을 벗어던진 야수가.

“와라!”

정천은 격한 살기를 내뿜으며 몸을 날리려 했다. 눈앞의 모든 것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그때 새된 외침이 그의 귀를 붙들었다.

“눈을 떠요, 오라버니!”

“……?”

“정천 오라버니!”

“……!”

정천은 눈을 떴다.

“…….”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반쯤 덮은 머리칼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 몸을 살며시 끌어안고 있는 포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순간 그의 정신은 나락 깊은 곳에서 중원으로 되돌아왔다.

“란아?”

화연란이 그를 감싸 안고 있었다. 정천은 뒤늦게 자신의 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든 그녀가 걱정스런 눈으로 정천을 내려다봤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서 들어와 보니 오라버니가 신음하고 계셨어요.”

“……그랬군.”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아. 그것보다 일단 좀 비켰으면 하는데.”

그제야 화연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정천의 위에 몸을 포개고 있었던 것이다.

화들짝 물러난 그녀가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물었다.

“악몽을 꾸셨던 건가요?”

“그래.”

정천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다가 그냥 웃었다.

“소중한 악몽이지.”

“소중하다고요?”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 두 단어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정천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로선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선 안 될 악몽이야. 이 악몽과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에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확신……?”

“내 길이 옳다는 확신. 의협도 합리도 침범하지 못할 나의 성역이 존재한다는 확신.”

화연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시달리니까 악몽인 거잖아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결국 꿈은 꿈일 뿐이야.”

어깨를 으쓱거리는 정천의 모습은 평소의 그와 다를 게 없었다.

“그나저나 아침은?”

화연란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준비해 뒀어요. 오랜만에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잘됐군. 소매치기 꼬마가 만드는 밥은 개죽인지 사람 죽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래도 소윤이가 열심히 만든 거잖아요.”

“그 녀석, 너랑 자기가 먹는 것만 제대로 만들어. 나랑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건 대충 만든다고.”

화연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턴 다시 제가 만들 테니 괜찮아요.”

‘오늘만 넘길 수 있다면.’

그녀는 이어질 말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오늘이 바로 비무결전의 그날이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은 말없이 밖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 * *

비무결전은 은밀히 이루어진다. 더불어 그 자리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당사자들, 그리고 대결의 승패를 판단할 이들만 있으면 된다는 것.

그것이 초대 맹주 진운룡의 생각이었다.

결국 단출하게 다섯 장로와 양 문파의 문주만 참석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래도 삼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약간의 융통성이 가미되었다.

문주는 재량껏 선별한 사람을 참석시킬 수 있었다.

그 숫자의 한계는 두 명이 최대.

참석자는 경우에 한해 문주를 대신해 비무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여기엔 해당 문파의 인물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외부 고수를 초빙해 싸움을 붙이는 경우가 생길 테니까.

화연란은 그중 한 명으로 정천을 택했다. 문제는 나머지 한 명으로 누굴 붙이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제가 가야죠!”

제갈세연이 소리쳤다. 자기 말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말이지.”

“오빠는 됐어요. 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언니의 몫이잖아요?”

뭔가 말하려던 정천을 제갈세연이 막았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화연란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언니, 저를 데려갈 거죠? 마지막 한 사람은 저죠?”

화연란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갈세연이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미안.”

“……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오라버니와 함께 데려갈 사람은 미리 정해 두었어. 아무래도 그걸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아.”

화연란이 정해 놓은 또 다른 사람은 담미화였다. 사실 마음 약한 제갈세연에겐 자신이 패할 수도 있는 싸움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모용 소저와의 대련 때에도 그 정도였는데.’

도열궁이 상대라면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제갈세연은 시무룩해졌다.

‘지난번엔 약초도 직접 건네주지 못했는데.’

직접 딴 약초를 들고 화륜문을 찾아가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 화연란은 이미 방에 틀어박힌 상태였기에 만날 수 없었다.

중요한 무공 공부 중이라는 설명. 결국 약초만 전해 주라 하고는 돌아서야 했다.

그걸 알기라도 한 듯 화연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져다 준 약초, 고마워. 직접 산에서 캤다면서?”

제갈세연은 울먹이는 얼굴이 되었다.

“흐윽! 언니,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그럴 거야. 반드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화연란이었다.

정천은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약속된 정오까진 꽤나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조금 늦어도 괜찮았다.

심후와 소윤, 칠삼이 화연란에게 한마디씩 했다.

“승패보다는 스스로의 몸을 더 생각하세요, 스승님.”

“문주 언니, 그냥 도망치면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싸움입니다.”

화연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다 부정적인 이야기네요.”

“아직 제자들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거겠지.”

정천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가 모두의 눈총을 받았다.

“스승님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보단 백배는 낫거든요?”

“자네 정말 사람이 안 됐군.”

“정천 오빠, 실망이에요.”

정천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여간 이것들이, 너희들 보기엔 나만 나쁜 놈이지?”

“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네 사람이었다. 할 말을 잃은 정천을 화연란이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가요, 오라버니.”

두 사람이 화륜문을 나섰다.

나머지 네 사람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그들을 따라나서질 못했다.

비무결전의 규칙은 절대적이다. 천무맹 장로가 다섯씩이나 동원되는 만큼 잘못 밉보였다간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연란 언니, 괜찮을까요?”

제갈세연의 물음에 칠삼이 탄식했다.

“도열궁에게 자비란 게 남아 있기만을 바라야지요.”

* * *

도열궁은 아침부터 입이 귓가에 걸려 있었다.

“후후후후.”

얼마나 기다리던 날이던가? 지난 한 달은 그야말론 일 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결실은 바로 오늘 맺히게 될 것이다.

“화륜문도, 그곳의 계집도 끝장이군.”

장휴의 보고에 의하면 구천 냥의 금전은 결국 빼돌려지지 않았다.

비무결전에 승리해 화륜문을 흡수한다면, 그 돈 전부가 그의 것이 되는 셈이었다.

물론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나마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다른 쪽에 있었다.

“끙. 스승님 뵙기가 좀 그런데.”

그는 스승인 화군장로 백운신이 껄끄러웠다.

전형적인 협객이자 성인군자였던 까닭이다.

도열궁과는 전혀 반대의 성격. 그 덕에 어릴 적부터 혼나기도 무지하게 혼났다.

일문의 주인이 된 지금까지도 생각하자면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구천 냥의 거금을 위해서는 감내하셔야 합니다.”

바로 옆에 있던 장휴가 말했다. 도열궁 역시 그 말에 수긍했다.

“그렇겠지. 하긴 스승님이라 하여도 이제 와서 나를 닦달하시진 못할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음. 어쨌든 약속 장소로 가 봅시다.”

도열궁 역시 두 사람을 대동한 채 정운장을 나섰다. 그 두 사람이란 각각 장휴와 서윤학이었다.

서윤학은 그때까지도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도열궁에게 두들겨 맞은 게 채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도열궁으로선 그 점에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다. 팰 때야 천하의 쌍놈이 따로 없었지만, 지금 와서는 서윤학 덕에 거금을 쥘 수 있게 되었으니.

“흠흠. 네 복수는 내가 충분히 해 줄 것이다. 네 앞에서 그 계집을 철저히 박살을 내 주마.”

“예, 예.”

움찔거리며 대답하는 서윤학이었다.

정신적 상처가 큰 까닭인지 그는 예전과 달리 너무나 위축된 모습이었다. 아마 무인으로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도열궁도 장휴도 그것에 아쉬움을 느끼진 않았다. 서윤학 정도의 제자야 거금만 있으면 얼마든 새로 길러 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황룡성은 드넓고, 그만큼 세간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장소도 많았다.

그러한 비밀스런 지역 중 한 곳이 비무결전의 무대였다.

그 위치를 정하는 사람은 다섯 장로. 자연히 위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참가자들과 장로들뿐이다.

도열궁은 황룡성의 북쪽 숲으로 향했다. 장로들이 보내온 지도를 참조하고서.

지도를 봐 가며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가 탄성을 뱉었다.

“호오.”

성내의 전경이라 보기 힘든 곳이었다.

거대한 기암절벽이 있고 그 위에선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숲 속에 갑자기 나타난 것인 만큼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천무맹 삼대 맹주이셨던 무한권(無限拳) 제월관 선배께서 손수 옮겼다는 전설이 있지. 숭산의 절경이 마음에 들어 그러셨다고 하더구나.”

도열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여전히 강녕하신 것 같아 마음이 편합니다, 스승님.”

“너는 여전히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이 넘치는구나.”

화군장로 백운신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꼭 이런 일을 꾸며야 했느냐?”

“…….”

“화륜문이란 곳에 대해선 대충 들어 보았다. 정운장에 비견할 가치도 없는 자그만 문파더구나. 굳이 그런 곳을 상대로 비무결전을 제시할 필요까지 있었더냐?”

“스승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도열궁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비무결전을 제시한 쪽은 놈들입니다.”

“…….”

“저 역시 최대한 좋은 쪽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저들이 싫다는 걸 어쩌겠습니까? 모쪼록 노여움을 푸시길 바랍니다.”

“으음.”

백운신은 도열궁을 더 책망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최소한 비무결전 자체에 있어 도열궁의 잘못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화륜문이란 녀석들에게 짜증이 일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겁도 없이 비무결전을 청한 것인가?’

불편함을 느끼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의 반응은 장로들 중에선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을 내시게, 도 장주.”

“우린 이런 애들 장난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다네.”

장로들은 일방적으로 도열궁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는 듯한 태도.

도열궁 역시 호방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에게 일일이 화답했다.

“하하하! 여러 선배님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 도열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때 수풀 한쪽을 헤치며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열궁은 그중 한가운데의 미인을 보고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저 계집이 화륜문주인가 보군.’

도열궁의 입에서 자연스레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상보단 조금 나은 듯했지만 그의 상대로는 너무나 부족해 보였다.

옆의 두 녀석들에겐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인상적인 쪽은 흑의를 입은 여인이었는데, 별 볼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백운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영대원의 흑의로군. 화륜문에 비영대와 관련된 이가 있었던가?”

우선 예를 표한 화연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의자매입니다.”

“화륜문과는 관련이 없다는 소리로군.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화연란. 백운신의 주름이 한결 깊어졌다.

그때 도열궁이 호탕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괜찮지 않겠습니까, 스승님? 이 정도의 실수야 얼마든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지요.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보게끔 배려 정도는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

“괜찮지 않겠소, 백 장로?”

“별문제는 없을 듯하니 그냥 넘어가십시다.”

다른 장로들도 도열궁을 두둔했다. 그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들 같았다.

백운신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잘한 사항의 조절은 장로 모두가 합의해야 한다. 그 혼자 반대해 봐야 의미는 없었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두 사람은 비무장의 가운데에 서도록 하게.”

공터 자체가 비무장이었다. 도열궁이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공터 중앙에 섰다.

“…….”

화연란은 그의 기도를 살펴보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성장한 자신과 도열궁의 실력을 대강이나마 가늠해 보았다.

그 결론은…….

“어때? 그를 이길 수 있겠어?”

정천의 목소리였다. 화연란은 그를 돌아봤다.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이 그녀를 맞았다.

“저는…….”

그녀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훌륭해. 객관적으로 적과 자신을 보았군.”

훌륭하다고? 화연란은 정천이 평소처럼 짓궂게 말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서 본 그의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웃음이나 냉소가 아닌, 따스한 미소를.

“오라버니?”

“최선을 다해 성장하는 것도, 스스로의 재량을 인정하는 것도 무인의 자세지. 너는 지난 한 달 동안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 줬어.”

멍한 얼굴이던 화연란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선 안 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떠올랐다.

“오라버니, 설마……?”

“지금부터는 내게 맡겨.”

정천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화연란은 그를 쫓아가려 했지만 담미화가 그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놓아주세요, 언니. 오라버니를 말려야 해요!”

“그는 괜찮아.”

“하지만 이곳엔…….”

도열궁과 장휴, 서윤학이야 그렇다 쳐도 이곳엔 다섯 장로들이 있었다.

그들 앞에서 본 실력을 드러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천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화연란과 달리 담미화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정천의 의도대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건 바로 우리들이야.”

“네?”

“그의 진짜 실력, 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해?”

화연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물음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으며.

정천은 도열궁의 앞에 섰다.

도열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넌 뭐하는 놈이냐? 왜 저 계집 대신 네놈이 나온 것이냐?”

정천은 가만히 웃었다. 그러나 도열궁에게 대답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백운신에게 물었다.

“내가 그녀 대신 결전에 임하겠소. 문제는 없겠지?”

“뭐라고?”

백운신은 의문 어린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분명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얼굴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였는지, 언제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신경질적인 외관의 노인이 대신 소리쳤다. 무상장로 암중천이었다.

“상대방이 허용한다면 상관없다.”

“허용하겠다!”

도열궁이 즉각 소리쳤다. 그는 두 주먹을 부딪쳐 보이고서 으르렁거렸다.

“일초를 양보해 주지. 네놈이 생전에 펼칠 수 있는 마지막 공격, 어디 한 번 전력을 다해서 펼쳐 봐라.”

“그러지.”

정천은 나직이 대답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

“응?”

도열궁은 문득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피부를 넘어 심장을 찌르는 듯한, 이성과 감성 모두에 위험신호가 번뜩이는 듯한 느낌.

정천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전을 잃고 용심을 얻었다. 기존에 내공을 쓰던 것과 같은 식으로 기운을 사용하긴 했으나, 그럴 때마다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는 했다.

육체라는 감옥에서, 가슴에 박힌 심장에서부터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기분.

정천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 힘을 펼치는 데에 어떤 거리낌도 두지 않았다.

그 순간.

강룡이 눈을 떴다.

파아앗!

흑색의 기운이 정천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사위를 잠식하는 무지막지한 압력!

“……!”

“이럴 수가!”

장로들 모두가 기겁했다. 장휴나 서윤학은 물론이요, 정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화연란과 담미화조차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정천이 눈을 떴다.

눈자위를 흑색으로 물들인 기운이 그에 그치지 않고 공기 중으로 흘러나왔다.

“크윽!”

도열궁은 무의식중에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일초를 양보하겠다던 말은 기억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 그는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온다. 괴물이…… 온다!’

정천이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흑색의 일선이 되어 도열궁을 향해 쏘아졌다. 꽉 쥐어진 그의 주먹에서 푸른색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정천은 섬광이 되었다.

쾅!!!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눈에 담지 못했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공터에 홀로 남은 정천, 그리고 수십 장을 날아가 기암절벽에 처박혀 버린 도열궁의 모습뿐이었다.

도열궁의 몸은 바위 깊숙이 처박혀 보이지도 않았다.

“……기억났다.”

모두가 입만 벌린 채 침묵하는 가운데, 백운신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검대주 화륜패가 애지중지하던 조장이 있었지. 몇 차례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지. 유난히 건방지던 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러나 그 역시 진마동으로 사라졌었다. 다른 용검대원들이 그러했듯이.”

정천이 백운신을 돌아봤다.

백운신은 떨리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

“기억하고 계셨군요.”

“돌아온 것인가. 대체 어떻게……? 그리고 그 무공은 도대체……?”

“강룡수라마공. 내 목숨을 스무 번 구해 주었던 형제가 지은 이름이오.”

“형제라고?”

정천은 대답 대신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흑색 기운이 검의 형상으로 화했다.

강룡검을 쥔 정천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질문을 할 사람은 납니다. 그리고 장로 여러분께서는 대답에 앞서 몇 번이고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겁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그의 두 눈에서 지옥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모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강룡검제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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