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章 꺾일지언정 굽히진 않는다 (22/146)

第十章 꺾일지언정 굽히진 않는다

“흐음.”

화군장로 백운신의 두 눈이 깊은 빛을 냈다.

와룡장으로부터 온 서신.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비무결전이라.”

그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졌다.

어느 문파에나 전설 하나쯤은 존재하는 법이다. 특히나 개조들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물론 그중 실제 있었던 일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천무맹에도 그러한 전설이 있었다.

기록상으로도 남아 있어 실제임이 증명된 전설이.

삼백 년 전, 혼란이 산해를 가로지르던 시기였다.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은 마교의 무인들이 파죽지세로 중원을 유린하던 때였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명문 문파들도 기가 질렸다.

그들은 앞장서서 맞서기는커녕 마교의 눈치만 살필 따름이었다. 당장은 자신들의 안위가 더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진운룡이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정파의 정점인 아홉 문파를 차례로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무위로써 각 문파의 문주들을 무릎 꿇렸다.

오로지 아홉 번의 비무.

한 번. 두 번.

화산과 소림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 번. 네 번.

그는 더 이상 무명소졸이 아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그의 위명은 이미 천지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일곱 번. 여덟 번.

마교가 진운룡의 척살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타 문파에 대한 견제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홉 번.

천무맹이 발족되었다. 초대 맹주 진운룡은 이미 마교의 공포이자 악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교를 물리치고 정파일통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 냈다.’

그 어느 개조전설보다도 위대한 이야기였다.

때문에 천무맹에는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소속된 문파 간의 갈등을 한판의 비무로 결정하는 것. 공인된 장로들이 직접 그 판관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이른바 비무결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백운신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로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일 터였다. 호상장로 유군광의 실종으로 모두들 신경이 날카롭게 변해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이름 모를 문파의 맹랑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겁도 없는 놈들이라면 짜증을 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운신은 그런 점에 도리어 흥미를 느꼈다.

‘제갈세가가 직접 출두 요청을 할 정도라니.’

백운신은 분명하게 적혀 있는 두 문파의 이름을 확인했다. 무척 익숙한 문파 하나와, 반대로 생경하기만 한 문파 하나.

“정운장과 화륜문이라.”

정운장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직계 제자였던 도열궁이 세운 문파였으니 말이다.

도열궁은 성질이 급하고 야심이 강했다. 그 결과 화산에서 축출을 당하게 됐으나, 교류가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교류라 해 봐야 도열궁과 백운신, 두 사제 간의 인연 정도였다. 화산파의 실세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떨었으니.

사실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문파에서 쫓겨난 이가 다른 문파를 세웠는데도 친교를 이룰 수 있다니 말이다.

모든 게 장로인 백운신이 문파에 구속되지 않는 덕이었다.

천무맹 휘하의 평화 때문에 생긴 문제점 아닌 문제점이랄까.

백운신은 낮게 혀를 찼다.

“그 능구렁이 같은 장휴가 또 꾀를 쓴 것인가?”

그에게 있어 도열궁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과거엔 밉지 않은 골칫거리였었다.

야심이 있긴 해도 성정만큼은 올곧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장휴를 만난 이후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수한 무인은 사라지고, 합리와 불리를 따지는 정치꾼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로 인해 정운장이 급성장하긴 했다지만, 오래된 무인인 백운신으로선 역시 마뜩찮은 게 사실이었다.

아마 이번 비무결전도 그러한 모략의 일환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 화륜문이란 곳은 그 희생양이겠군.”

백운신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입속으로 그 이름을 몇 차례 굴려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뭔가 번쩍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나도 늙었는가 보군.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아하니…….”

백운신은 쓴웃음을 짓고서 서신을 고이 접었다.

참석을 하긴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무명 문파의 일이라 해도 전통은 전통이었으니.

제갈세가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구태여 나서서 서신을 돌린 것이 아닐까?

백운신은 서신에 적혀 있던 일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한 달 뒤라…….”

* * *

칠삼은 어이가 없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처자가 문주님이라고?”

화연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대놓고 실망하는지라 그녀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정천만 홀로 담담했다.

“응.”

“응이라니. 응이라니. 이 친구야, 자네 말만 믿고 사직서까지 내고 온 나는 어쩌란 말인가?”

“어쩌긴 뭘 어째? 화륜문의 이제자가 되는 거지.”

칠삼은 턱 하니 한숨을 토했다. 사기꾼 놈에게 걸려 제대로 패가망신하는구나 싶었다.

“되돌아보면 그리 나쁜 삶은 아니었지…….”

“이 양반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정천이 화연란을 돌아봤다.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예?”

“나이가 들어 기경팔맥(奇經八脈) 대부분이 굳어 버렸지. 어찌 보면 심후보다 좋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너라면 이런 제자에게 어떻게 무공을 가르치겠냐?”

화연란은 잠시 어물거렸다.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정천의 눈빛은 분명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만년삼이라도 먹여야 될까요?”

“좋군. 와룡장에 맡긴 금전의 절반이면 어찌어찌 구할 수 있겠어.”

바보가 아니어도 비아냥거리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화연란은 약간 야속한 심정에 토라진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오라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답을 내는 사람은 내가 아냐. 문주인 너지.”

화연란이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한 달 뒤를 위한 숙제인가요?”

“그래. 나아가 그 뒤를 위한 숙제이기도 하지. 화륜문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비겁해요. 항상 문파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를 하시잖아요.”

“그래서, 따르지 않을 거야?”

장난스럽게 묻는 정천. 물론 화연란으로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화연란은 진지한 얼굴로 칠삼의 몸 곳곳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칠삼은 뭔가 껄끄러운 느낌에 움찔했다.

그녀가 이내 칠삼에게 다가갔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응?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녀는 칠삼의 몸 곳곳을 손으로 짚기 시작했다. 부드럽다기보다는 우악스런 손길이었으나, 칠삼의 얼굴은 자연히 뻘게졌다.

정천이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나한테 고맙지? 덕분에 말년에 이런 복도 누리고.”

“우, 웃기는 소리 말게! 그리고 대체 누가 말년이라는 건가?”

“어쨌든 싫지는 않잖아.”

칠삼은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는 그냥 입을 다물고서 정천을 째려봤다.

그사이 화연란은 칠삼의 몸 곳곳에 위치한 경락을 살펴보았다. 처음엔 아리송했으나 계속해서 살펴보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경맥(硬脈)보다 연맥(軟脈)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혈압에 의한 긴장이 강한 맥을 경맥이라 하고, 반대로 긴장이 약한 맥을 연맥이라 한다.

칠삼의 몸은 전체적으로 그러한 긴장의 강도가 낮았다. 나이에 비해 신체가 발달할 여지가 상당히 많다는 의미였다.

살짝 물러난 화연란이 물었다.

“과거에 무공을 익혔었나요?”

“응? 소싯적에 약간 익히긴 했소만…….”

“그렇군요. 꽤 오랜 기간이 지났을 텐데도 몸의 상태가 괜찮은 걸 보면 그 후에도 수련을 했었나 봐요.”

칠삼이 헛기침을 뱉었다.

“흠흠. 그냥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좀 한 게 전부요.”

“꽤 체계적으로 하신 것 같아요. 덕분에 체내의 기맥이 아주 닫히진 않았어요.”

“…….”

칠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얼굴에 드러나는 희열을 보이지 않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경팔맥이 꽉 막혔지.”

정천의 한마디였다. 칠삼은 이내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꼭 그렇게 초를 칠 필요가 있나?”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딱 잘라 말한 정천이 화연란을 돌아봤다. 계속 말해 보라는 의미.

잠시 생각하던 화연란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막힌 기경팔맥을 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칠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이오?”

“완벽하게 개통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열어젖히는 정도라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긴 했다. 물론 성공했을 때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칠삼은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정도만이라도 좋소. 나도 한 사람의 무인으로 당당히 설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내 자신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만족하오.”

사실 그는 큰 꿈을 품고 온 것이 아니었다. 무인의 길을 접기 직전의 자신, 그나마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의 자신을 넘어서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것만 해낼 수 있다면 여한은 없을 듯했다.

‘나에게도 무의 그릇이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화연란 역시 그런 칠삼의 의도를 읽었다.

그녀는 확신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심 불안한 점이 없지 않다고는 해도 지금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문주가 문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이니.

“절 믿어 주세요.”

“알겠소. 처자를 믿어 보리다.”

칠삼은 그 즉시 구배의 예를 올렸다. 화연란은 아직 다리가 불편했기에 적당히 허리만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천이 중얼거렸다.

“그럼 난 낮잠이나 자고 와야겠군. 한숨 잘 테니 깨우지 마라, 란아야.”

칠삼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여기서도 잠만 자는가?”

“근래에 두뇌 노동을 하느라 피로가 쌓였거든.”

“옆에서 한두 마디 조언을 해 주는 게 그리도 어렵던가?”

“지혜야말로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잖아, 선배.”

칠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말이야 옳은 말이었으니까. 그걸 정천이 한다는 게 황당할 뿐이지.

“그건 그렇고 난 더 이상 자네 선배가 아닐세. 이젠 청룡문 문지기 자리도 때려 쳤으니까. 부르려거든 이름으로 부르게.”

“음. 이름이라…….“

정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이름이 뭐였지?”

“칠삼! 그것도 기억 못하나?”

“쓸데없는 건 기억하지 말자는 주의라서. 안 그래도 머릿속에 기억해야 할 게 너무 많거든.”

칠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화연란이 급히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가서 주무세요. 칠삼 아저씨, 일단은 여장부터 풀고 계세요. 후에 제가 호출할 때까지 자유롭게 지내셔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젠 제자이니 말씀을 놓으시지요.”

“제 아버지뻘이신데 그럴 순 없어요.”

“스승님께서 그러시면 이 제자가 부담스럽습니다.”

화연란은 잠시 고민했다. 예의 바른 그녀로선 무공의 창시보다도 지금 상황이 더 곤란했다.

“말을 놓는 건 천천히 하도록 할게요.”

결국 반말을 하진 못하는 그녀였다. 칠삼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화연란은 곧장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지금도 비급 공부를 하던 중에 잠시 나온 것이었다.

절뚝거리는 그녀를 보자니 칠삼으로선 걱정스러웠다.

“정말 괜찮은 건가? 아무래도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 같네만.”

“곧 나을 상처야. 그보단 선배도 일 좀 해야겠어.”

“응? 일이라니?”

정천이 칠삼을 빤히 보았다. 그때 장원의 문이 끼익 열리며 심후가 들어왔다. 등으론 소윤을 업고 두 손으론 물동이를 든 채로.

물동이의 물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온몸이 축 젖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당장이라도 거품을 쏟을 지경.

정천이 나직이 물었다.

“이게 몇 번째지?”

“스, 스무 번째…….”

“절반 채웠군. 좀 쉬다가 나머지 스무 번도 끝마치도록 해.”

꼬르륵 소리를 내며 심후가 엎어졌다. 소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서 일어났다.

“꼬맹이, 이리 와 봐.”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쪼르르 달려왔다. 정천은 그녀를 슬쩍 들어서는 칠삼의 눈앞에다 내밀었다.

“선배는 나이가 있으니 일단 열다섯 번으로 하지. 얘를 업고서 물을 길어다 와.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기초 체력 정도는 단련해야지?”

칠삼은 질린 표정으로 심후 쪽을 돌아봤다. 단잠을 자듯 쓰러진 그의 곁에 널브러져 있는 물동이라니.

“이게 자네가 말하는 일이란 건가? 물을 길어 와서 바닥에다 버리는 게?”

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칠삼에게는 악귀의 미소로 보이는 듯했다.

“애꿎은 땅에 물을 버려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 더군다나 체력 단련을 할 수 있다면.”

“자, 자네는 문주도 아니잖나. 그런데 우리를 단련시키려 하는 것은 지나친 참견 아닌가?”

“이 정도를 단련이라 생각한다면 너무 무른 생각인데. 이건 기초를 쌓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정천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 정도로 포기할 정도로 무인의 꿈이 얕았던 건가?”

“끄응.”

이런 말을 듣고서도 물러나면 사내도 아니다. 칠삼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소윤에게 등을 내밀었다.

“자, 업히려무나.”

“아, 씨! 온종일 땀내 나는 등짝에만 달라붙어 있어야 하네.”

짜증을 내는 소윤을 보며 칠삼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왠지 그녀에게 미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정작 당사자인 정천은…….

“그럼 난 정말로 낮잠이나 자 볼까?”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은 칠삼도 소윤도 한마음 한뜻으로 정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화연란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심후와 소윤, 칠삼이 온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동안 그들과 얘기도 몇 번 나눠 보지 못했다.

다른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까닭에 잡일은 모조리 나머지 네 사람의 차지였다.

정확히는 정천을 제외한 세 사람이었지만.

소윤이 식사를 도맡았다. 그 외의 자잘한 일은 경험 많은 칠삼의 몫이었다.

정천 역시 그들의 단련을 맡고 있었으니 아주 놀고만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왠지 단련 자체보단 그저 괴롭히는 게 좋아서 그러는 듯했지만.

화연란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용봉소회에 나가거나 제갈세연을 만나는 것 역시 할 수 없었다.

‘문주 자격 실격이구나.’

그녀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럴 여유조차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천이 받아 온 무공은 모두 다섯 개였다.

권법인 신장선천수, 신법인 유성신법, 심공인 태을심공, 각법인 진운각법, 장법인 여래운우장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리고 검법인 패화영신검.

본디 패화영신검엔 그에 연계되는 심법인 화륜심공(火輪心功)이 존재했다.

하지만 완전히 전수받은 것이 아니었던 만큼 군데군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화연란은 우선 태을심공을 통해 그 허점들을 메우는 작업에 나섰다. 모름지기 모든 무공의 기본은 심법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쉬운 작업은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아직 패화영신검의 성취도 높지 않은 그녀에겐.

결국 화연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계속 심법을 붙들고 있어 봐야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 내 능력으론 심법을 다듬는 것은 불가능해.’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비교적 개정의 여지가 있는 무공들부터 살피기로 했다.

그제야 그녀는 제자들에게 주목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오라버니가 허투루 말을 했을 리 없어.’

우선은 심후를 떠올렸다.

그의 구혈난맥을 치료할 수는 없다. 최소한 지금 그녀의 힘으론 무리였다.

억지로 치료 방도를 찾는다는 건 사방이 황무지인 땅에서 교어(鮫魚)를 잡아 요리상에 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

결국 주어진 재료들로만 요리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침착하게 각 무공들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중 가장 내력의 소모가 적은 것은?’

답은 이내 떠올랐다. 진운각법.

약간 난항이 생겼다. 발놀림을 주로 쓰는 진운각법이 패화영신검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집중했다. 그나마 이번엔 실존하는 재료를 찾아 올리는 일.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진장 어렵기야 하겠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녀가 구결을 떠올리고 되뇌는 것도 수십, 수백 번 반복되었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패화영신검에 대한 깨달음이 보다 깊어지고 있었다는 건 그녀 본인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사고의 바닷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무공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진운패화각검(進雲覇火脚劍).’

검격과 각격의 연계로 변화무쌍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내력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수법이었다.

물론 무공 행세를 하기엔 초라했다. 기껏해야 한두 개의 초식만을 완성할 수 있었을 따름이니.

게다가 이론만이 존재한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렇다면.’

화연란은 두 눈을 떴다. 요리법과 재료가 갖춰져 있는 이상 직접 만들어 보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바깥으로 향했다.

녹초가 되어 뻗어 있던 심후와 뭔가를 업고 문으로 들어서던 칠삼이 놀란 얼굴을 했다.

“화 소저, 아니 스승님.”

“밖에 나오셔도 됩니까?”

두 사람은 정말 걱정하는 눈치였다. 보름 넘도록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사람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연란은 쓴웃음을 짓고서 물었다.

“정천 오라버니는요?”

“난 여기 있어.”

정천이 칠삼의 등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화연란은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뭐하시는 거예요?”

“선배 등에 업혀 있지. 이젠 꼬맹이 얹어 놓는 걸로는 수련이 되지 않아서 말이야.”

화연란은 뭐라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 이내 포기했다. 정천의 생각 전부를 이해한다는 건 그녀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정천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심지열상(心地熱想)을 마쳤다는 건, 뭔가 성과가 있다는 것이겠지?”

화연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에게 보여 드리고 싶어요.”

“좋아. 여기서 펼쳐 봐.”

정천이 마당을 가리켰다.

화연란은 그곳으로 내려서려다 잠시 주춤했다. 그녀의 찰과상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칠삼의 등에서 내려선 정천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화연란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얇은 치맛자락으로는 그 감촉을 완전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오, 오라버니?”

“지금이라면 생기도 완전히 회복됐겠지. 상처를 바로 회복시켜도 괜찮을 거다.”

과연 상처 자리의 저릿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회기영술이 찰상을 완전히 아물게 한 것이다.

그녀는 곧장 열랑검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 있는 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짤막한 심호흡 한 번.

“지금부터 진운패화각검을 펼쳐 보이겠어요.”

심후와 칠삼, 소윤이 눈을 빛냈다. 반면 정천은 속을 알 듯 모를 듯한 무표정한 얼굴일 따름.

그녀는 마음을 편안히 갖고서 걸음을 내딛었다.

스륵.

처음은 간단히 검격과 각격이 번갈아 이뤄지는 형태였다. 그러던 게 어느 순간부터 두 공격의 속도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번 찰 때 한 번 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 두 번 찰 때 세 번 베고, 네 번 찰 때 다섯 번 베기 시작했다.

실로 변화무쌍한 공세. 더군다나 그 속도가 오르기 시작하니 공격의 효과 역시 배가됐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변초로군. 막는 입장에선 꽤나 까다롭겠어.’

정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화연란이 구축해 낸 무공은 그 장점이 무척이나 뚜렷했다.

‘문제는 단점도 뚜렷하단 것이지만.’

그 순간이었다.

“앗?”

화연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없게도 걸음이 꼬여 자신의 발에 다른 발이 걸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볼썽사납게 마당에 철퍼덕 엎어졌다.

정천이 어깨를 으쓱거리고서 말했다.

“변화의 기세를 본인이 따라가지 못하면 자멸하게 된다는 것. 그게 그 무공의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겠지.”

“아…….”

화연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난 보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장점이 뛰어난 무공이긴 해. 웬만큼 변초에 익숙하지 않다면 삽시간에 연격일 허용하겠지.”

“……!”

화연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런 면에선 냉정한 정천인만큼, 그가 칭찬했다는 건 그만큼의 장점이 있다는 의미였다.

정천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 더 보완할 여지가 있겠군. 손과 허리, 다리의 움직임이 좀 더 빠르고 부드러워야 해.”

화연란이 머뭇거리자 정천이 덧붙였다.

“네가 알고 있는 가장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떠올려 봐.”

‘가장 빠르고 부드러운?’

그 순간 화연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사람이었다.

‘모용 소저.’

속도 자체만으론 정천이 최고였다. 사실 눈으로 채 쫓을 수도 없었으니까. 결국 너무 빠르기에 떠올릴 수가 없었고, 더불어 너무 강맹해서 부드러움을 찾기도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최적의 무인은 모용린.

직접 대적해 본 그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한 마리 제비와 같았다.

정천이 넌지시 물었다.

“떠올렸어?”

“네, 오라버니.”

“좋아. 그럼 이번엔 최대한 그 움직임을 재현하려 노력해 봐. 네가 만들어 낸 무공에 그 움직임을 담는다는 생각으로.”

“알겠어요.”

화연란은 다시 일어나 섰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모용린을 그렸다. 감탄이 나올 만큼 부드러운 그 움직임을, 허공을 수놓던 유려한 검격의 곡선을.

그리고 다시 힘을 뺐다.

너무 힘이 들어가서는 비슷하기는커녕 괴이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내가 따라할 수 있을 만큼만!’

화연란이 발을 떼었다. 그녀의 팔다리가 물 흐르듯 허공을 노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폭포처럼 맹렬한 기세를 머금기 시작했다.

검격과 각격이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로 쏘아졌다.

파바밧!

조금 전보다 확실히 연결이 매끄러웠다. 완벽하다곤 할 수 없지만 보다 나아졌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 정도.

“와…….”

소윤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그만큼 화연란의 진운패화각검은 아름다웠다.

심후는 주먹을 꾹 쥐었다. 칠삼은 자신이 그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뛰어난 아가씨로구나.’

화연란은 공세에 도취되어 있었다. 보름간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구결들이 몸을 통해 체현(體現)되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정천이 물동이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리고 공세가 펼쳐지고 있는 화연란의 앞으로 던졌다.

화연란의 시야가 물동이를 담았다. 정천이 약간의 살기를 담아 던졌던 만큼 그녀는 무의식적이 거기에 반응했다.

쉭!

그녀의 몸이 활처럼 뒤로 당겨졌다. 이윽고 쏜살처럼 정면으로 튀어 나갔다.

불규칙적이던 검격과 각격의 타격점이 그 순간 거의 일치했다. 곧게 뻗은 열랑검과 다리가 물동이를 향해 쇄도했다.

먼저 닿은 것은 다리.

콰직!

물동이가 산산이 깨어졌다. 그 순간 바로 뒤이어진 검격이 깨어진 물동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콰아앙!

불꽃이 격발했다. 물동이는 깨어진 상태 그대로 허공에서 불타 증발했다.

아직 이름조차 짓지 않은 초식.

화연란은 조금 멍한 얼굴로 자신의 검과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어.”

정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고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쓸 만할까요?”

“마지막의 초식을 제외하면 내공의 소모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군. 그만큼 몸의 부담이 크겠지만, 심후가 익히기엔 최적이겠어.”

심후가 놀란 눈을 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러라고 만들게 한 거니까.”

정천은 화연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수고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화연란의 몸이 순간 허물어졌다. 정천이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은 건가?”

칠삼의 질문에 정천이 대답했다.

“그간 계속 무리해 왔으니까. 육체보다도 정신적인 피로가 크겠지. 뭐,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나아질 거야.”

“그런가. 다행이구먼.”

정천은 심후를 돌아봤다.

“내일부터 란아에게서 진운패화각검을 배우도록 해. 더 이상은 물 길어 오는 것도 시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심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좋긴 좋은데 대놓고 좋아했다간 혼이 날 것 같았다.

“어, 음…….”

“그냥 좋아하려면 좋아해. 나도 네가 고생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옙. 아하하, 만세!”

정말 말 그대로 기쁨을 표출하는 심후였다. 정천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란아더러 독하게 가르치라고 해야겠군.”

“…….”

심후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후의 보름 동안은 비슷한 일상이 이어졌다.

화연란은 새 무공의 창시보다는 기존의 것을 갈고닦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심후에게 진운패화각검을 가르치는 동시에 본인 역시 그 공부를 이어 나갔다. 더불어 패화영신검의 기반을 닦는 데에도.

그사이 깨달은 것은 패화영신검의 성취가 육성에 달했다는 것.

기존에 삼성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물론 정말 어려운 부분은 정작 지금부터였지만.

게다가 아직은 도열궁에 비할 바가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꺾일지언정 굽히진 않는다.

폭뢰검 화륜패의 유훈이기도 했고, 나아가 화륜문의 신조이기도 했다. 화연란으로선 그저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녀가 새삼 그 사실을 느꼈을 때는, 어느새 약조한 기일이 다가와 있었다.

비무결전의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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