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선택 (21/146)

第九章 선택

마루에 드러누운 채 구름을 응시하던 정천이 피식 웃었다.

평소의 빈둥거리는 모양새와 다를 게 없어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지만.

—추황우가 죽었다.

은신한 채 대기하던 담미화는 깜짝 놀랐다. 그가 죽을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누군가에게 당한 건가요?

—아니, 마안심령(魔眼心靈)이 발동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담미화가 주춤했다. 정천은 나직이 덧붙였다.

—네게 걸었던 금제와 비슷한 수법이다. 내 의지대로 행동하고, 그게 완수된 뒤엔 자연사하게 안배해 두었지. 생각보다 일찍 간 걸 보면 정운장 측에서 찾아왔던 모양이군.

—……그렇군요. 마안을 통해 그런 것도 가능했나요?

—마안엔 두 가지 능력이 있어. 하나는 금제의 술, 네게 했던 것처럼 무의식에 강력한 암시를 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어의 술, 무의식에 강한 각인을 남겨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만드는 것이지. 목적을 완수한 뒤엔 자연사(自然死)하게 되고.

담미화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금제를 당하던 때의 기억이 떠오르니 자연히 몸이 반응했다.

—무서운 능력이군요.

—그래, 하지만 만능은 아니지.

—그런가요?

—극성의 마안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의 몸을 휘두를 순 없어. 마안이 통하는 경우는 대상의 내공이 부실하거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을 때뿐이야.

담미화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금역으로 절 유인했던 것도 그럼……?

—그래. 평상시의 너에겐 마안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광륭혈독무 안으로 유인했던 거다.

마안이 펼쳐졌던 경우 중 담미화가 알고 있는 것은 총 세 번이었다.

그녀에게 한 번, 궁멸뇌살기에 당한 군사부 무인들에게 한 번, 그리고 이번에 추황우에게 한 번.

담미화의 경우엔 광륭혈독무에 의해 심신이 약화된 상태였다.

넋이 나갔던 군사부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개 상회주에 불과한 추황우 역시 무력한 상태였다. 정천의 말마따나 만능이라기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어지간한 적들에겐 마안이 통하지 않는단 말씀이군요.

—그러니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거지. 누구에게나 마안이 통했더라면 귀찮게 일을 벌일 필요가 있겠어?

담미화는 새삼 느꼈다. 정천이라 해도 전지전능하진 않다는 것을.

‘하지만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어쨌든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군. ……응?

정천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그답지 않게 진지한 형상이 얼굴에 피어났다 사라졌다.

—담미화, 약재상에 좀 다녀오도록 해.

—약재상에요?

—응. 그곳에 가서…… 흠, 약초 쪽은 잘 모르겠군. 어쨌든 찰과상에 좋은 약초를 좀 구해서 와.

약간은 뜬금없는 명령이었다. 다친 사람도 없는데 약초라니?

담미화는 의문을 느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기척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정천이 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휑한 장원의 모습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냈다.

“집합!”

심후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부엌에 있던 소윤이 식칼을 들고 나왔다.

정천은 그녀를 떨떠름한 눈으로 보았다.

“그 칼은 뭐냐?”

“저녁 준비 좀 하려고요. 암만 식객이어도 날로 먹기만 할 순 없잖아요?”

“식객이 아니라 식충이겠지. 어쨌든 식칼은 잠시 던져두고, 시키는 일이나 하도록 해.”

“뭐 시키려고요?”

“일단 깨끗한 헝겊을 좀 구해 와. 없으면 빨아서라도 가져오고. 그리고 심후는 약절구랑 절굿공이 좀 구해서 오고.”

두 사람은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약절구랑 절굿공이를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헝겊이라고는 마루 닦는 걸레밖에 없는데요?”

“알아서들 구해 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내가 알려 줘야 하나?”

“치, 자기가 하면 덧나나?”

소윤은 구시렁대면서도 재빠르게 집 밖으로 나섰다. 확실히 말대꾸는 자주 해도 야무진 성격의 그녀였다.

반면 심후는 어물거리고만 있을 따름. 그러다 정천의 눈총을 받고서야 헐레벌떡 바깥으로 나섰다.

정천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기다렸다. 그 와중에 약재상으로 떠났던 담미화가 돌아왔다.

그녀는 두 사람이 없는 걸 알고서 정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꽃잎이 달린 자그마한 약초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거야?”

“예. 삼백초(三白草)를 가져왔습니다. 달여 먹기도 하지만 상처 부위에 문지르면 지혈을 하는 효과도 지니고 있습니다.”

“알겠어. 거기에 놓아 둬.”

삼백초를 마루에 올려놓은 담미화가 모습을 감췄다. 정천이 조금 더 기다리니 소윤이 헉헉거리며 돌아왔다.

“자요.”

용케 새하얀 면포를 구해온 소윤이었다. 정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훔쳐 온 거냐?”

“아뇨, 문주 언니가 더 이상 도둑질은 하지 말랬어요.”

“그럼 사 온 거라고?”

“네, 돈이야 좀 모아 둔 게 있어서요. 근데 이걸 갑자기 왜 가져오라고 한 거예요?”

“곧 알게 될 거야.”

소윤은 의아한 얼굴로 정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말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화연란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다리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눈에 띌 정도.

“언니!”

소윤이 걱정스러운 듯 다가가 화연란을 부축했다.

정천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비무라도 하다 다친 거야?”

“네, 모용린 소저와 대련을 했어요.”

“역시 그랬군. 일단 상처부터 확인하자.”

성큼성큼 다가간 정천이 대뜸 화연란을 안아 마루에 앉혔다. 그러고는 약간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끌어 올렸다.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두 다리가 드러났다.

화연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오, 오라버니.”

“네 똥 기저귀도 갈았던 나야. 이런 걸 가지고 뭘 창피하게 여겨?”

“오라버니!”

안 그래도 붉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눈처럼 새하얀 허벅지 위로 아로새겨진 피멍.

시퍼렇다 못해 거멓게 변한 그 위로 핏방울이 아롱져 있었다.

“제갈세가 애송이가 용케도 난리치지 않았군. 이 정도 상처면 치료하겠다고 쫄래쫄래 따라왔을 텐데.”

“그럴 것 같아서 세연이 앞에선 괜찮은 척했어요.”

“바보짓을 했군. 가만히 있었으면 제갈세가의 각종 영약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화연란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선 미안하잖아요.”

“미안해하는 데에 돈 들진 않잖아. 양심에 조금 가책받는 대신 얻는 게 무궁무진하다고.”

“그건 그래요.”

소윤이 정천의 말에 동조했다. 의외로 생각하는 데 있어 죽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화연란은 여전히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하는 게 좋았을걸. 한 달 내로 성과를 보이려면 영약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필요할 텐데.”

“한 달이라니요?”

정천은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정운장 측에 비무결전을 신청했거든. 그 일시가 한 달 뒤야.”

화연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녀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비무결전이라면…… 화륜문과 정운장이?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인가요?”

“응. 아마도 놈들 쪽에선 정운장주가 나오겠지. 약소 문파가 상대라도 허투루 임할 놈들이 아니니까.”

화연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정말 제갈세연을 졸라서라도 영약들을 먹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가 한 달 내로 그자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네가 하기에 따라 달렸지.”

정천은 상처의 피를 대강 닦아 내고는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왜 이리 늦는 거야?”

“지금 왔습니다!”

심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약절구와 절굿공이를 손에 든 채로.

“어디서 구해 왔냐?”

“옆 마을까지 뛰어갔다 왔습니다.”

과연 심후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없는 내공 쥐어짜서 다녀왔다는 게 느껴질 만큼.

정천은 그에게서 기구들을 받아 들고는 가지고 있던 삼백초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그때 소윤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문주 언니가 다쳐서 돌아오리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모용가 애송이의 기세가 심상찮았으니까. 조만간 란아를 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정천이었다. 왠지 그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소윤은 뭔가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그냥 넘어갔고, 심후 역시 그냥 그렇구나 하고 감탄했다. 하지만 화연란은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담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파악하신 건가요?

—그래, 평소와 달리 절뚝거리며 돌아오더군. 제갈가 꼬마 앞에서 괜찮은 척하려고 더 무리를 했을 거야.

담미화는 감탄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녀는 화연란이 온다는 것을 약재상에서 돌아올 때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반면 정천은 그 이전에 수백 장 거리에 있던 그녀의 기척을 파악한 것이다.

‘괴물.’

담미화는 속으로만 작게 중얼거렸다. 금제가 풀린 것이 내심 안도하면서.

정천은 으깬 약초를 화연란의 상처에 발랐다. 따끔거리는지 그녀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냥 오라버니의 선술로 치료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

심후의 상처를 낫게 할 정도면 그녀의 찰과상 정도야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약초를 쓰는 것이 의아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천이 전음을 보냈다.

—내가 익힌 회기영술(回氣英術)도 만능은 아니야. 상처 자체야 빨리 아물지만 생기까지 회복하진 못해. 이런 상처라면 차라리 천천히 시간을 들여 확실히 아물게 하는 게 나아.

‘그렇군요.’

그녀는 정천에게 보이게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헝겊으로 상처를 감아 치료를 끝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앞으로 상처가 나을 동안엔 어디 나갈 수도 없을 테니 무공에만 전념할 수 있겠어.”

“저 몸으로 어떻게 무공을 익혀요?”

소윤의 질문에 정천은 딱 잘라 말했다.

“몸뚱이 투덕거리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지.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저 녀석에게 맞는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

정천이 말한 저 녀석이란 물론 심후였다.

화연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 소협의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한 달 뒤의 비무결전이 더 큰 문제 아닌가요?”

“결국은 같은 문제야. 녀석에게 맞는 무공을 만드는 것이 비무결전의 해답이 될 거다.”

“무공을 만드는 것…….”

작게 중얼거리는 화연란. 정천은 피식 웃고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열심히 해 봐.”

“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소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주 언니, 괜찮을까요?”

“뭐, 무공 창시는 몸이 고달픈 일은 아니니까. 대신 머리깨나 깨져야겠지. 란아에겐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생경할 테니.”

“그런 걸 알면서 시켜요?”

“날로 먹는 일은 세상에 없어. 도둑질 빼고.”

소윤이 즉각 반발했다.

“도둑질도 날로 먹는 거 아니거든요? 바보들 꾀어서 주머니 가로채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나도 알아.”

정천은 피식 웃었다.

“이래봬도 경험자거든.”

“그래요? 그래 놓고 나더러는 삼류 소매치기라고 한 거예요?”

“넌 삼류 맞다니까.”

“으……!”

“어쨌든 중요한 건 날로 먹는 일이라는 게 그만큼 흔하지 않다는 거다.”

“아까 제갈세가의 영약을 날로 먹느니 어쩌느니 했었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란아가 만일 그랬더라면 추후에 이래저래 와룡장에 휘둘렸을 거다. 총관 제갈순은 교활한 작자니까.”

소윤은 입맛을 다셨다.

“이야기책 같은 거 보면 기연 얘기가 참 많던데요.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만년삼이 있다거나, 영물을 만나 신기한 힘을 얻는다거나 하는 거요.”

“그런 경우가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흔하지 않으니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 아니겠어?”

“그건 그럴지도…….”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뿐이야. 강한 힘이란 결국 거대한 희생의 부산물이라는 것.”

“어, 어쨌든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괜찮은 장사 아니에요?”

“매일 동료들의 망령에 시달리는 것도 좋다면 나쁘진 않겠지. 그거 좋아할 인간은 아마 없을 것 같지만.”

은신한 채 대화를 듣던 담미화는 알 수 있었다. 정천이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소윤이나 심후로선 이해 못할 이야기일 따름이었지만.

“동료의 망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 그런 게 있다.”

짤막히만 대꾸한 정천이 심후를 돌아봤다.

“어쨌든 란아는 네게 필요한 무공을 완성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그전까지 놀고만 있어선 안 되겠지?”

“예? 아, 예. 그렇겠…… 지요?”

“이해를 하고 있으니 다행이군. 그럼 일단 물부터 길어 오도록 해.”

심후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잡일이야 지금껏 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정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얘를 없고서.”

“엑?”

“예?”

소윤과 심후가 동시에 경악했다. 정천은 뭐 그리 놀라느냐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왜? 그럼 설마 수련을 하는데 이 정도 제약도 두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큰 의미가 있을지…….”

“의미가 있고 없고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 너는 그저 둘 중의 하나만 택하면 된다. 해내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심후는 소윤을 돌아봤다. 그 키가 허리를 넘지 못하는 꼬마지만, 일일이 업고 돌아다니려면 상당히 힘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그는 속으로만 한숨을 작게 쉬고서 대답했다.

“해 보겠습니다.”

“정말 무인 노릇을 하고 싶다면 해 보겠다느니 노력하겠다느니 하는 어정쩡한 대답은 하지 마라.”

“하겠습니다. 해내겠다고요!”

약간 반발심을 담아 심후가 소리쳤다. 그러고 나서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의외로 정천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어차피 고생하는 사람은 심후였으니.

“열심히 해라.”

정천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드러누웠다. 심후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소윤을 돌아봤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윤의 잔소리.

“나도 별로 기분 안 좋거든요? 치, 한 떨기 꽃 같은 내가 땀내 나고 찐득거리는 사내 등짝에 고통받아야 하다니. 현실은 숙녀에게 너무 가혹해.”

심후는 그냥 말을 말자고 생각했다.

* * *

칠삼은 어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홀로 식사를 마쳤다.

새벽 어스름을 등으로 받으며 숙소를 나섰고, 문지기의 복색을 차려입고서 청룡문 앞에 섰다.

늘 그래왔듯 그곳을 가만히 지켰다. 자신들을 비웃고 지나가는 무인들 앞에서도 침묵했고, 쓸데없는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끼어들지 말지부터 생각했다.

둘 중의 하나다. 잘난 놈들 싸움이면 절대 끼어들지 않고, 못난 놈들 싸움이면 육모곤으로 누구 할 것 없이 두들겨 버린다.

기실 천무맹의 모든 것이 그랬다.

무력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강한 자는 대접받고 약자는 멸시받는다. 그러한 먹이사슬에 가장 밑에 있는 것이 그들 문지기였다.

벌써 이십 년도 넘게 계속해 온 일이다.

운이 없어서인지 배필조차 못 만나 아직까지 총각이었지만, 어쨌든 칠삼은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해 왔었다.

강호의 중심, 무림의 심장과도 같은 곳을 수호한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가끔씩은 자기 신세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한 모금 술에 훌훌 털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런 삶에 파문이 일었다.

지금껏 거울처럼 평평하던 호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수면에 던져진 돌멩이의 이름은 정천이었다.

칠삼은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평화가 문제라고, 십여 년간 이어진 평화가 천무맹을 시들게 하고 있다고.

실제로 천무맹의 모습은 어떠한가?

비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돈이 그것을 가린다. 부정이 벌어져도 힘이 있으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마교에 맞서 하나로 뭉쳤던 정파 무림은 그곳에 없었다.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암중비약하는 정치 세력만이 존재할 뿐.

이십 년 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분연히 마교에 맞서던 그 시기와는…….

하늘을 찌를 듯한 황룡성의 내성도, 바람에 나부끼는 황룡기도 더 이상 경의로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시간이 지나면 괜찮으려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지닌 의문이 더더욱 커져 가는 것만 느껴졌다.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삶인가?’

어쩌면 그냥 헛된 망상뿐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인생에 끼어든 얼치기 하나의 말 때문에 안정된 삶을 포기하는 게 말이나 될 일인가?

‘나더러 문파에 입문하라고?’

생각할수록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무시하려 해도 그 생각은 결코 떨쳐지질 않는 것이었다.

“젠장.”

결국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욕설이 칠삼의 버릇이 되고 말았다.

동료들은 저게 미쳤나 보다고 수군거리며 가까이 가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째.

생각에 잠겨 있던 칠삼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그런 그의 귀에 부드러운 옥음이 들려왔다.

“뭐라고 하셨죠?”

“……!”

화들짝 놀란 칠삼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까무러치게 놀랐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아가씨였다.

분명 정천과 문답을 나눴던, 아마도 귀한 집안의 자제로 보이는 아가씨였다. 그때와 달리 엷게 화장을 하여 더욱 성숙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특색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갈세연이 칠삼의 눈앞에 있었다.

“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욕하셨는데요. 젠장이라고요.”

짤막하면서도 분명한 한마디였다. 칠삼의 얼굴에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그냥 사과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일개 문지기가 함부로 대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지난번의 허름한 복색도 아니다.

제갈세연은 누워 있는 용이 수놓아져 있는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를 모를 칠삼이 아니었다.

‘제갈세가!’

칠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했지만 이렇게 높은 인물일 줄이야.

하지만 제갈세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뭔가 고민하시고 계셨나 봐요.”

“예? 그,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방해를 한 건가 보네요.”

“방해라니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가 방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황급히 대답한 칠삼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아, 그냥 지나가던 길에 아저씨 모습이 보여서 정천 오빠랑 자주 얘기하시던 게 생각나서 들렀어요.”

칠삼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녹색으로 물든 손아귀에 약초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칠삼이 알고 있는 약초였다.

“어성초(魚腥草)로군요. 직접 캐 오신 겁니까?”

“네? 아, 네. 다친 사람이 있어서요.”

칠삼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냥 약재상에서 샀으면 됐을 텐데요.”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제 도움을 부담스러워 하거든요. 약초를 사 왔다고 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캐 봤어요.”

칠삼은 더욱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눈앞의 소녀는 그가 알고 있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갈세연이 말했다.

“그나저나,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물어볼 거라니요?”

“정천 오빠 말이에요. 요즘도 이곳에 나오지 않나요?”

“예? 아,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왜 오빠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건가요?”

칠삼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거렸다. 말단부터 상관에 이르기까지 죄다 뇌물을 먹어서 그렇다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그의 반응에 제갈세연이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괜한 걸 물어봤나 보네요.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죠?”

“아, 예.”

“정천 오빠도 정천 오빠네요. 아무리 화륜문의 일이 바빠도 그렇지, 자기 직장은 그냥 팽개쳐 두고 있다니.”

잠시 머뭇거리던 칠삼이 되물었다.

“정천 그 친구는 어떻게 지냅니까?”

“음, 글쎄요. 그냥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것 같아요. 정말 바쁜 사람은 연란 언니 같고…….”

역시 그런가. 칠삼은 내심 쓴맛을 느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말썽을 일으키는 것 같긴 해도 어쨌든 일은 잘 풀리거든요. 보고 있으면 좀 신기해요.”

“으음.”

“어쨌든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 가 볼게요. 그럼 열심히 일하세요.”

목례를 한 제갈세연이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

칠삼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뿐 아니라 청룡문의 문지기 대부분이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된 상태였다.

며칠 동안 그를 회피하던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칠삼과 달리 제갈세연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야, 대체 무슨 일이냐?”

“저 미인은 대체 누구야?”

“저 소저 때문에 며칠 동안 끙끙 앓았던 거냐?”

갖은 질문들이 칠삼에게 쏟아졌다. 정작 당사자인 칠삼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지만.

칠삼은 생각했다.

‘그 친구에겐 뭔가가 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한때는 정천에게서 실망스런 모습만을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정천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명의 바보 같은 꿈이 남아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나는…….’

칠삼은 그 순간 결심했다.

멍청히 서 있던 그가 갑자기 육모곤을 들어 올렸다. 꼭 한 대 후려치려는 자세인지라 깜짝 놀란 문지기 동료들이 뒤로 물러났다.

칠삼은 육모곤을 그대로 내던졌다.

동료들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

“너, 뭐하는 거야?”

멍청히 묻는 동료들에게 칠삼이 말했다.

“황룡성 문지기 노릇도 이젠 그만두련다. 이십 년이면 오래도 해 먹었지.”

“뭐야? 너 미쳤어?”

“이 짓 관두고 대체 뭘 해서 먹고살려고?”

동료들이 물을 때 칠삼은 이미 황룡성 행정 지부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당장 퇴직금을 되찾아 청화촌으로 향하려는 것이었다.

“까짓것, 재능이 없으면 문파 문지기로라도 써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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