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그는 모두 알고 있다 (20/146)

第八章 그는 모두 알고 있다

화연란은 버들잎을 꺾어 초적(草笛)을 만들었다.

거기에 입술을 가져가 불기 시작했다.

피리리 흘러나오는 소리에 여인들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한 거죠? 음공을 펼친 건가요?”

“지금 내공을 쓰지 않고 소리를 낸 거예요?”

화연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하니 풀피리를 모를 줄이야.

용봉소회의 일원들은 선택받은 인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폐관과 각종 수련을 거듭했고, 휴식을 갖더라도 세가나 문파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때문에 여느 아이들이 갖는 추억과는 다른 종류의 추억을 지니고 있었다.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 대신 대련의 기억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것이 도리어 신기함을 느꼈다.

“여기를 지그시 누르고서 불어 주면 돼요.”

화연란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여인들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설명을 경청했다.

모용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평소와 같은 냉랭함 대신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그녀는 정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그 인간은 뭐지?’

정천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면도 해 보았다. 그럴수록 그녀의 머릿속에선 괴리감이 커질 뿐이었다.

기록상의 정천과 실제로 본 정천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에.

‘고작 내공을 잃은 것만으로도 그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가 겪었던 경험 때문인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알기 힘들 듯했고.

그녀는 애써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이용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야.’

그랬다. 그녀는 모용세가를 천하일가로 도약시킬 것이었다.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왔고, 남들의 배 이상의 노력을 했다.

덕분에 오라비들과의 후계자 다툼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실낱같은 우위인 것도 사실.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모두 그만 휴식하고 정렬하세요.”

모용린의 말에 여인들이 수다를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도열했다.

용봉소회는 윤평이 주도하는 소룡회와 모용린이 주도하는 소봉회로 나뉜다.

각기 남녀를 구분해 놓은 두 집단은,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하게 수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격과 식에서 멀어졌을 때 새로운 깨달음이 떠오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있기는 했는데, 지금의 경우도 그러했다.

“여러분 중 한 명과 대련을 갖도록 하겠어요.”

모용린의 말에 여인들의 눈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기실 이것이야말로 그녀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모용린의 실력은 용봉소회 내에서도 절대적.

남녀를 통틀어 그녀에게 우위를 점하는 이는 윤평 한 명뿐이었다.

때문에 그녀와 대련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실력이 실력인지라 대부분 모용린의 가르침을 받는 형태이기도 했고.

“…….”

모용린의 시선이 여인들을 훑었다. 그중 특히나 전의를 불사르고 있는 눈빛이 있었다.

제갈세연이었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그녀만은 모용린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요즘이야 덜해졌다지만, 그녀의 주도로 괴롭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작 모용린은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뒤였지만.

그녀를 괴롭히지 않게 된 것도 오직 그 때문이었다. 화연란이 인망을 얻은 것도 컸지만.

모용린은 시선을 옮겨 화연란을 응시했다.

되돌아오는 것은 맑디맑은 청순한 눈빛. 그리고 그 안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호승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 소저, 나오도록 하세요.”

화연란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여인들이 아쉬운 탄성을 뱉으며 두 사람의 주위로 원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한 채 섰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몸매들이 절로 탄성을 자아낼 지경. 한쪽의 부드러운 인상과 다른 쪽의 날카로운 인상도 절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연인검(燕刃劍)을 뽑아 든 모용린이 말했다.

“십초를 양보하죠. 마음껏 덤벼 보세요.”

“알겠어요.”

화연란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천에게서 받은, 열랑(熱浪)이라 이름 붙인 검을 뽑아 들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칼날에 맺혔다.

화연란은 처음부터 전력을 쏟기로 했다.

“핫!”

외마디 기합성과 함께 일초식 유사화를 찔러 들어갔다. 유리 같은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용린이 별안간 연인검을 뻗었다.

두 칼날이 충돌하는가 싶은 순간, 연인검의 칼날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그 반발로 인해 열랑의 칼날 역시 비틀렸다.

차르릉!

어깨를 찔러 들어가던 검의 궤도가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화연란은 애꿎은 허공만 찌르고는 신음을 삼켰다.

“큭!”

“실망스럽군요. 이게 전부인가요?”

화연란은 모용린의 도발에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아직 공격의 기회는 얼마든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착실하게 모용린을 견제해 들어갔다. 좌우로 검격을 교차하며 그녀의 눈을 교란하다가 이때다 싶을 때 깊숙이 찔러 넣었다.

모용린에겐 무의미했지만.

차차차창!

그녀의 연인검은 열랑의 모든 검격을 정확하게 튕겨 내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제비 같은 날램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검로를 알고 있는 듯한 모습.

모용세가의 칠연구화검(七燕具華劍)이 완벽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구나.’

화연란은 감탄했다. 왜 소봉회의 여인들이 모용린을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도 반할 것만 같았으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감상을 찢으며 들려왔다.

“십초 끝났어요.”

“웃!”

한마디와 동시에 기세가 돌변했다. 제비처럼 날래기만 하던 모용린의 검이 폭풍을 등에 얹은 듯 맹렬한 기운을 뿜었다.

‘온다!’

모용린이 왼발을 축으로 삼아 검을 떨쳤다. 그 순간 연인검의 칼날은 다섯 개로 나뉘며 화연란의 양팔과 미간을 노리고 들어왔다.

일초식인 폭풍익(暴風翼)!

칠성에 이른 칠연구화검이었다. 대성하면 일곱 개의 검이 제비처럼 쇄도한다는데, 다섯 마리만으로도 그 위력은 대단했다.

휘리릭!

다섯 마리 제비가 폭풍을 등에 업고서 날아든다.

화연란은 어렵사리 양팔과 미간을 노리는 세 마리 제비를 막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마리는 그녀의 허벅지를 때리고 지나갔다.

“윽!”

불에 덴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칼날이 아닌 칼등으로 쳤기에 망정이지, 실전이었다면 두 다리가 잘려 나갔으리라.

비틀거리던 화연란이 이를 악물고 자세를 취했다. 모용린은 아직 공격을 마친 것이 아니었다.

연인검의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져서 날아들었다. 이초식인 수렵익(狩獵翼)이었다. 척 봐도 변화무쌍한 찌르기임을 알 수 있는 모습.

어설프게 피하려다간 피해만 커질 터였다.

‘그렇다면!’

화연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활로는 후방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검을 끌어당겼다가 앞으로 내뻗었다. 칼날 위로 검기가 모여들며 연인검을 향해 나아갔다.

패화영신검의 이초식인 세류화(細流火).

열기가 칼끝으로 집중되어서는 칼날을 발갛게 달구었다. 그것을 떨쳐 들어가니 가느다란 붉은빛 실선이 허공에 펼쳐졌다.

깨달음은 아직 부족하지만 패화영신검 자체는 칠연구화검에도 밀리지 않았다. 화연란은 믿음을 갖고서 내딛는 걸음에 힘을 주었다.

소봉회의 여인들은 놀란 얼굴로 둘의 격돌이 지켜봤다. 이 정도면 이미 대련의 수준이 아니었다.

자칫 누군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녀들의 뇌리를 스쳤다.

카아앙!

두 개의 칼끝이 정확히 충돌했다. 그 반발로 인해 두 사람의 다리가 바닥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튕겨 나가는 사람은 화연란이었다.

“큭!”

그녀는 열랑을 놓친 채 땅을 굴렀다.

무언가 목구멍으로 치솟았지만 애써 가라앉혔다. 시큼한 맛으로 보아 핏물인 듯했다.

“언니!”

제갈세연이 다가오려 했다. 화연란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내심 씁쓸함이 느껴졌다.

‘겨우 이초 만에 패했구나.’

양보했던 십초를 제외한다면 단 두 번의 공방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패배했다. 둘 사이의 실력의 격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

“…….”

모용린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였다.

세류화의 열기 때문인지 연인검의 칼날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위험했어.’

그녀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초 만의 승부였다. 그러나 전력을 다한 이초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모용린은 보통 이런 식으로 대련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우위에 선 채 상대를 가르치는 식으로 검을 펼치는 게 기본이었다.

소봉회에서 칠성의 칠연구화검을 펼친 것은 처음.

그러지 않고선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방심했다면 당했을지 모른다고? 내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 것이었으니.

그녀는 문득 화연란의 눈을 보았다.

패배를 인정하되 꺾이진 않은 눈빛. 다음번엔 이번과 다르리라는 다짐이 느껴지는 듯하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을 찔러 드는 속도에 비해 걸음이 너무 무겁더군요. 보법이 검법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어요. 좀 더 체계적으로 보법 수련을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호불호와 별개로 조언이 흘러나왔다. 평상시의 버릇이 나와 버린 것이다.

화연란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말씀 감사해요.”

“고마워할 것 없어요. 그 정도 실력으로 문주를 자처하는 게 답답해서 말한 것뿐이니.”

냉랭하게 말한 모용린이 몸을 돌렸다.

화연란은 쓴웃음을 짓고서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의 격통이 다시 느껴져 절로 신음이 나왔다.

여인들이 그런 화연란에게로 다가왔다.

평상시 모용린에게 달라붙어 호들갑을 떨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굉장했어요. 고작 이초의 대결이었지만요.”

“그래요. 모용 소저가 저렇게까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마지막엔 어떻게 한 거죠?”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화연란은 난처함을 느꼈다. 이런 폭발적인 반응은 예상도 못했던 까닭이다.

그녀들에게 있어 모용린은 절대적인 존재. 지금껏 그 누구도 그녀의 본 실력을 일부나마 펼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을 화연란이 해냈으니 자연히 관심이 쏠리는 것이었다.

“흥.”

모용린은 코웃음을 치고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문득 자신의 오른팔이 저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

검을 쥐었던 오른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상당한 반발을 받았다는 의미.

‘서윤학을 이긴 것이 우연은 아니었어.’

화연란은 강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건대 강한 것은 검법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경험이 적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런 그녀를 이 정도까지 이끈 사람은 아마도…….

‘그 남자인가?’

모용린은 정천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를 외부 교관으로 들이는 건 생각해 봄직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뭣 같은 성격 때문에 힘들겠지만.

‘흥. 그깟 남자 따위.’

모용린은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까닭인지 걸음걸이가 거칠어졌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한 게 이상하기만 했다.

그 건방진 남자가 싫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 * *

정운장주 도열궁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장휴가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화륜문 측에서 비무결전을 신청했다는 것.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겠지만 도열궁으로선 오히려 더 좋기만 했다.

“흐흐흐, 그놈이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하구려.”

“예, 너무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좀 불안하긴 합니다만.”

“장 군사는 너무 걱정이 많은 게 탈이오. 제깟 것들이 시간이나 벌어들이겠다는 수작이 아니겠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걱정 마시구려. 아마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내빼려고나 할 것이니 잘 감시하도록 하시오.”

“안 그래도 사람을 풀어놓았습니다.”

장휴 역시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한 달의 말미를 벌어 금전을 모두 빼돌리고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때문에 와룡장과 화륜문 양측에 감시자를 두었다. 물론 와룡장의 경우엔 함부로 감시하기 어려운 만큼 거리를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도열궁은 이미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지만.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으면 흑엽상회 놈들과는 손을 잡지 말걸 그랬소. 어차피 내버려 두면 자멸할 놈들일 텐데.”

“상황이 이리 쉽게 풀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흑엽상회는 화륜문 건이 아니더라도 이용할 구석이 많습니다.”

“그건 그렇긴 하오만…….”

도열궁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탐탁찮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화륜문을 집어삼킬 경우 흑엽상회와 수익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흑엽상회도 돈을 날로 먹는 것은 아니다. 남들의 눈총을 사지 않게 돈세탁 및 관리를 맡는 역할을 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언젠가 손에 넣게 될 곳이기도 했고.

그러나 도열궁은 당장의 손해가 아쉬웠다. 수익이 좀 줄어드는 정도니 손해라 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그때 제자 중 하나가 방으로 들어섰다.

“스승님, 흑엽상회주 추황우가 이런 것을 보내 왔습니다.”

“음?”

도열궁이 받아든 것은 서신이었다.

그는 즉시 서신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직접 보시오, 군사.”

장휴가 서신을 받아들였다. 그의 표정 역시 도열궁의 그것과 비슷해졌다.

정운장과의 협약을 무효로 돌리자는 얘기였다.

일정량의 위약금을 지불하겠다는 것, 자신은 흑엽상회를 처분하고서 황룡성을 떠날 것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도열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추황우 이 늙은이가 미친 것일까?”

“교활한 작자입니다. 무언가 술수를 꾸미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소?”

“한 가지 있긴 합니다.”

그 순간 장휴의 머릿속에선 깨어진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정천이란 놈.’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만만한 놈이었다. 그리고 의문 가는 점 역시 여럿을 지니고 있었다.

흑엽상회와의 결탁을 알고 있었던 점.

비무결전을 청해 시간을 벌었다는 점.

그리고 확실한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화륜문이 정운장을 능가할 점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비무결전이 됐든 무엇이 됐든 정운장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

‘그렇다면 놈들이 택할 행동이야 뻔한 일!’

지금껏 그 모든 게 미심쩍었지만, 한 가지 사실을 끼워 넣는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자금을 챙기고서 도망칠 생각이었군. 자신만만해 하더니 겨우 그런 속셈이었나?’

와룡장에 돈을 맡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감시하기가 어려운 만큼 돈을 몰래 빼내 달아나는 것도 쉬울 터였다.

‘제법 머리를 썼구나.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장휴는 내심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정천이 그의 추측마저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건 미처 모른 채.

장휴는 생각을 마치고서 말했다.

“화륜문과 흑엽상회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도열궁의 얼굴에 미심쩍은 기색이 스쳤다.

“그게 가능한 얘기요? 흑엽상회와 화륜문은 말 그대로 견원지간일 텐데?”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얘기가 다르지요. 화륜문은 그 목숨이 경각에 달했고, 흑엽상회는 화륜문의 재산을 홀로 삼키고 싶어 합니다.”

“음…….”

“제게 비무결전을 제안했던 놈은 우리가 흑엽상회와 결탁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놈이 안다면 화륜문도 안다는 겁니다. 그게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추황우가 먼저 접근했다는 것이오?”

“예, 아마도 우리에 대해 알렸을 테지요.”

“그럼 추황우가 원하는 것은……?”

장휴가 확신 어린 표정을 지었다.

“분명합니다. 이 한 달 동안 상회를 처분하는 척하며 화륜문의 자금을 빼돌리려는 것이겠지요.”

“음!”

장휴의 추리는 그럴싸했다. 어차피 상회란 자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 자금이 수천 냥의 금전이라면.

“능구렁이 같은 상인 놈. 역시 숫자놀음을 하는 녀석들은 믿을 수가 없군.”

으드득 이를 간 도열궁이 물었다.

“그렇다면 추황우와 흑엽상회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군사?”

잠시 생각하던 장휴가 말했다.

“정면으로 담판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면으로? 그놈을 찾아가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직접 대면한다면 좋든 싫든 본인의 의중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장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능구렁이에게 본때를 보여 주시지요.”

과연 흑엽상회는 한산했다. 호위무사들도 모두 해고한데다 장사까지 관두는 듯 물건이나 인부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열궁과 장휴는 곧장 회주실로 향했다. 그리고 대뜸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대체 무슨……?”

장휴의 얼굴을 본 추황우가 흠칫 놀랐다. 그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소, 장 군사?”

도열궁이 대뜸 앞으로 나섰다.

“반갑소, 나 도열궁이오.”

“정운장주? 이, 이곳에는 어쩐 일로…….”

장휴가 차갑게 웃었다.

“상업을 관두시겠다고요?”

“그, 그렇소. 분명 서신에 그렇게 적어 보낸 것으로 기억하오만. 나는 회주 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에 들어갈 생각이오.”

“화륜문의 막대한 자금과 함께 말이지요?”

“……!”

추황우가 흠칫 놀랐다. 마치 심중을 간파당한 양.

도열궁이 쿵 하고 전각을 밟았다. 그 한 걸음만으로도 흑엽상회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다.

“네놈이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모를 줄 알았는가!”

“큭!”

다급해진 추황우가 천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놈들을 쳐라!”

천장을 부수며 흑의인들이 내려섰다. 그러나 도열궁의 얼굴엔 비웃음만 깊어질 따름이었다.

“흥. 매복 따위를 간파 못할 줄 알았나?”

도열궁이 앞으로 내달리며 쌍장을 뻗었다. 막 자세를 잡던 흑의인 두 명이 흉부를 강타당했다.

콰드득!

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흑의인들이 벽에 부딪쳐 축 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흑의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못해도 절정 고수!’

그들은 이내 마음속으로 추황우를 욕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분명 이급 이하라고 장담하더니!’

그들의 동요를 느낀 도열궁이 씩 웃었다.

“파산검객(破山劍客) 도열궁이 바로 이 몸이시다.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테지?”

“……!”

흑의인들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이름이었다.

‘이런 시팔! 설마 정운장주 도열궁일 줄이야.’

‘추황우 저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했군.’

흑의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도열궁은 그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강한 고수였다.

도열궁 역시 그들의 반응을 감지했다. 그는 짐짓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가라.”

“……?”

“본 장주는 오늘 기분이 좋다.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꺼져라. 그리고 오늘의 일을 입에 담지 말도록.”

슬금슬금 반응을 보던 흑의인들이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

살기 어린 미소를 지은 도열궁이 추황우를 노려봤다.

“역시 네놈은 화륜문과 손을 잡았던 것이군. 감히 본 장주와 정운장을 농락하려 했단 말이냐?”

“도, 도 장주. 우리, 말로 풉시다.”

“말? 말 좋지. 하지만 이미 그럴 시기는 지나갔다.”

도열궁이 성큼성큼 걸어가 추황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추황우는 켁 소리를 뱉음과 동시에 허공에 들렸다.

도열궁의 두 눈에서 살기가 요동쳤다.

“이제부터 네놈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얇게 저며 포를 떠 줄까? 주먹으로 두들겨 떡을 만들어 줄까? 검을 주로 쓰긴 하지만, 나는 칼질하는 것보다 주먹질을 선호하는 편이거든.”

“…….”

“어느 쪽이 좋은지는 네놈이 골라 봐라. 어느 쪽이 되었든…… 응?”

도열궁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추황우가 어느새 눈자위를 까뒤집고 거품을 물고 있었던 것이다.

장휴가 급히 다가와 추황우의 상태를 살폈다.

“……죽은 것 같습니다.”

“이런 개 같은!”

도열궁이 추황우의 몸을 휙 내던졌다. 추황우의 시체는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벽 한편에 틀어박혔다.

“빌어먹을 놈이 분풀이를 하기도 전에 뒈지다니!”

도열궁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장휴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어찌 됐든 추황우의 반응을 통해 그의 추측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추황우는 화륜문과 손을 잡았던 게 분명합니다.”

“그래 보이는구려. 뭐, 낙향하여 은거를 해? 입에 침이나 바르고 지껄일 것이지.”

“어쨌든 이것으로 놈들의 계획은 파탄이 난 셈입니다. 남은 일은 흑엽상회의 찌꺼기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음. 그리고 한 달 뒤만 기다리면 되겠군.”

도열궁의 얼굴 가득 희열이 빛이 떠올랐다.

“화륜문도, 구천 냥의 황금도 모두 내 것이 된다.”

장휴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느끼는 기쁨은 도열궁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물욕이 없었다. 때문에 거금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 자체로는 희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니, 바로 승리의 기쁨이란 것이었다.

‘네놈의 얄팍한 생각은 이미 간파되었다.’

장휴는 정천을 향해 중얼거렸다.

추황우의 죽음으로 모든 게 확실해졌다. 화륜문은 흑엽상회와 손을 잡고 거금을 챙긴 채 달아나려 했고, 결국 그것을 간파당했다.

그러나 추황우는 죽었다. 아마 그가 돈을 빼돌리는 역할이었겠지만, 이제는 그 역할을 시행할 자가 없게 되었다.

남은 일은 한 달을 기다리는 것뿐. 그동안 화륜문을 견제하고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우리의, 나의 승리다!’

장휴는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도 도열궁도 모르고 있었다.

추황우의 행동이 마안에 지배당해 벌어진 것이라는 것을. 그의 숨이 별안간 끊어진 것도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란 것을.

정천이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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