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내가 바로 너의 죽음이다 (19/146)

第七章 내가 바로 너의 죽음이다

장휴는 방으로 들어서려다 잠시 흠칫했다. 제갈순 말고도 다른 청년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은 뭐지?’

의문이 잠시 들었으나 이내 지웠다. 젊은 외관을 보건대 제갈세가의 제자 중 한 명 같았다.

“장 모가 와룡장 총관을 뵙습니다.”

“제갈순입니다. 갑작스런 내방인지라 미처 접대를 준비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시길.”

“괜찮습니다. 그저 만나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휴의 시선이 정천을 훑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신지?”

필요 없는 인물이라면 치워 두고 얘기하자는 의도.

제갈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서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얘기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정천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반갑소. 정천이라고 하오. 청룡문 문지기지.”

“……예?”

“그리고 화륜문의 식객이기도 하고.”

“……!”

장휴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갈순은 식객이란 표현이 너무 단순하지 않나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의 대담을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랬군. 화륜문의 식객이라.”

장휴의 말투가 대번에 변했다.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였다.

“그래, 화륜문 문주께서 부탁이라도 했소? 와룡장에 매달려 자신들을 비호하게 해 달라고 말이오?”

“비호? 무엇으로부터 말이지?”

“당연히 우리 정운장이 아니겠소? 우리 앞에서 화륜문 따위는 산불 앞의 부나방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오.”

정천의 입가가 실소를 머금었다.

“산불 치고는 너무 겁이 많은 것 같은데.”

“뭐라고?”

“흑엽상회와 결탁한 걸로도 모자라, 구태여 와룡장까지 찾아온 게 그 증거 아닌가? 화륜문을 비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이야.”

“그, 그걸 어떻게?”

장휴는 놀란 얼굴로 정천을 보았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간파한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흑엽상회와 결탁한 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장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고 있지? 흑엽상회에 간자라도 심어 두었나? 아니면 추황우 그 늙은이가 딴마음이라도 품은 것인가?”

정천은 내심 웃었다. 대개 사람이란 당황하게 되면 심중의 말을 무의식중에 내뱉기 마련이었다.

“딴사람 머리 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은 댁 하나뿐이 아니라서 말이지.”

“으음.”

미묘한 말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장휴의 의문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지켜보던 제갈순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타부타 말을 했다면 장휴의 의심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정천은 그 대신 미묘한 말로 장휴를 도발했다.

장휴는 그 짤막한 말로 인해 내부의 적을 의심하게 됐다. 아마도 추황우의 의중을 의심하게 될 터. 일종의 격장지계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장휴는 그렇게까지 단순한 자가 아니었다. 의심을 갖기는 하되 거기에 너무 깊게 빠지지도 않았다.

아직까지는.

‘놈의 허세일 가능성도 있다. 어차피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마음을 추스른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곳의 식객이라면 도망칠 궁리나 하는 것이 좋을 거외다. 화륜문의 이름은 이제 곧 사라지게 될 테니 말이오.”

“황룡성 내에서 문파 간 전면전을 치르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충분한 명분만 있다면 집행부도 가만히 있을 테니.”

“뇌물을 먹인 게 아니라?”

장휴는 차갑게 웃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해 보시오.”

“됐어. 그런 걸 허투루 처리했을 리도 없고.”

의외로 싱겁게 손을 터는 정천.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문제라면 당신네가 지닌 명분이 허술하다 못해 한심한 수준이란 거지.”

“뭐라고?”

“지금 서윤학이 비무에서 졌다고 따지려 드는 거잖아? 하지만 그 비무에 큰 문제가 있었던가? 정정당당히 싸워 패배했을 따름인데 문제로 삼으려 하는 게 우습군. 이게 세간에 알려지면 비웃음만 얻을걸.”

“서윤학은 그 패배로 용봉소회에서 축출당했다.”

“그랬지. 하지만 그건 용봉소회 내의 문제지. 따지려면 그쪽에 따져야지 애꿎은 화륜문을 건드려서야 쓰나.”

장휴는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정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 일을 확대시키려 하는 정운장의 의도가 의심스럽군.”

“우리는 빚을 받아 내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그 상대가 잘못됐다니까 그러네.”

장휴는 이를 으득 갈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서윤학의 일은 핑계일 뿐, 실상은 화륜문을 무너트리고 그들이 지닌 재산을 쓸어 담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연히 명분 따위는 생각한 적도 없다.

물론 생각은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단둘이라면 모를까, 바로 옆에 와룡장의 총관이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해도, 정파 무림에 있어 명분이란 게 갖는 의미는 아직도 상당했다.

정천은 그 허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헤집어 열었다.

“실상은 돈이 목적이지?”

“뭐, 뭣?”

“화륜문을 조사했을 테니 본문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자금 역시 알고 있겠지. 까놓고 말해서 그걸 얻고자 일을 벌인 것 아냐?”

“무, 무슨 그런 소리를!”

장휴가 당황해 소리쳤다. 속내야 어떻든 그런 의심을, 그것도 와룡장 총관에게 받는다면 좋을 게 없었다.

정천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걱정하지 마. 그걸 따지려는 게 아니니까. 그저 제갈세가를 적으로 돌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거지.”

“뭐라고?”

“그 자금 전부를 와룡장이 지키고 있거든.”

장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런……!”

제갈세연과 화연란이 친밀하다는 것. 제갈세가와 화륜문의 관계는 그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조사를 해 봐도 그 이상의 뭔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이토록 긴밀한 관계일 줄이야!

장휴가 급히 제갈순을 돌아봤다.

“저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총관?”

“그렇소.”

제갈순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장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그런 사실을 꼭꼭 숨겨 두고 있다니.’

물론 상식적인 처사이긴 했다. 거금을 지니고 있다는 게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꽤 더럽게 됐다는 건 사실이었다.

‘결국 화륜문의 뒤엔 제갈세가가 있다는 것인가.’

어찌 보면 정운장과 화산파의 관계 같기도 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운장주 도열궁과 화군장로 백운신의 관계 같지?”

정천의 말에 장휴의 얼굴이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던 까닭이다.

“그게 무슨……!”

화군장로 백운신은 화산파의 원로 중 하나다. 그리고 도열궁은 그 직계 제자였다. 때문에 도열궁이 화산파를 나와 정운장을 개파한 뒤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장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영악한 놈, 이 상황을 배후 세력 간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심산이구나.’

누가 보아도 화륜문은 정운장을 당해낼 수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 것이다.

놈도 그것을 계산에 뒀을 터.

때문에 상황 자체를 좀 더 큰 규모로 끌고 가려는 것 같았다. 제갈세가와 화산파 사이의 문제로 변모된다면 승산이 있을 테니.

최소한 화륜문을 건사할 수는 있으리라.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하라!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정운장과 화륜문의 문제, 화산파와 화군장로는 아무 관련도 없다!”

“이유 없이 흥분하는군. 찔리는 데라도 있는 건가?”

“이놈!”

장휴가 몸을 부르르 떨며 정천을 노려봤다. 물론 강경하게 반응하는 게 의심을 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부정해야 했다.

그때 정천이 실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확실히 네 말대로 이건 화륜문과 정운장의 문제니까.”

장휴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뭐라고?”

“그러니 두 문파끼리 결판을 내는 것이 정당하겠지. 그렇지 않나?”

장휴는 내심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놈이 왜 패를 거두는 것인가?’

이건 일종의 승부수라고 생각했다. 제갈세가와 화산파로까지 문제가 번지면 정운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으니까.

그런데 금세 그것을 번복한다.

장휴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을 갖기도 전에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두 문파의 세력 차이가 큰 것도 사실이지. 그러니 양 문파의 대표를 엄선해 비무결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비무결전이라고?”

장휴가 눈을 빛냈다.

비무결전은 일종의 즉결심판이었다. 천무맹 내의 문파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최소한의 인원이 모여 대표간의 비무를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었다.

이때 판관의 역할을 맡는 이는 천무맹의 장로들.

고작 문파끼리의 일에 장로가 끼어드는 게 이상할 수 있었으나, 천무맹의 설립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기에 가능했다.

감히 장로들을 부를 배짱이 있는 문주가 적은 까닭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비무결전을 하자고?’

장휴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정천을 보았다.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그들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던 것이다.

전면전이 됐든 비무가 됐든 정운장이 패배할 일은 없다. 화륜문주, 그 계집이 암만 잘나 봐야 도열궁의 삼초지적이 되지 못한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녀석이 흑엽상회에서 심어 놓은 배신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정말 비무결전을 해도 좋단 말이냐?”

“그래. 대신 일시 및 판관 역을 맡는 다섯 장로는 이쪽에서 고르겠다.”

장휴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일시야 그렇다 쳐도, 이 마당에 장로가 누가 됐든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어차피 비무에서 승리하는 쪽이 진리인 것을.

“좋을 대로 해라. 그분들이 과연 나서 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싫어도 올 수밖에 없을걸.”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정천이었다. 그 순간 장휴도 제갈순도 미심쩍은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제갈순은 약간이지만 실망까지 느꼈다.

‘좋았던 상황을 스스로 망치는군.’

두 문파의 일을 제갈세가와 화산파의 것으로 확장하려던 시도는 좋았다.

졸지에 제갈세가가 화산파와 척을 질 수도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래도 책사로서의 면모만 따진다면 높이 평가할 만했다.

그런데 몇 마디가 지나기도 전에 그 계책을 본인이 끝장냈다.

장휴와 정운장이 고마워할 일이었다.

‘역전의 무사라 해 봐야 결국 일개 무인일 따름인가. 심모원려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제갈순은 내심 씁쓸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화연란의 성장세에 기대를 거는 듯했는데,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이 말을 이어갔다.

“일시는 한 달 뒤가 좋을 것 같군.”

“좋다!”

장휴가 곧바로 밀어붙였다.

일단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정천이 말을 바꾸기 전에 약조를 받아 내려는 것이었다.

본래는 차후 일주일 안으로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한 달 뒤로 미뤄지긴 했으나, 깔끔하게 끝맺을 수 있다면 나쁘진 않았다.

“좋아.”

정천의 대답.

장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좀 찝찝한 면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제갈순을 돌아봤다.

“그럼 총관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면 되겠군요.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제갈순은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정천은 별다른 내색도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좋을 대로 하라는 의미.

“알겠소.”

제갈순이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화륜문과 정천을 두둔하려다간 오해만 살 수 있었다.

장휴는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잘 되었군. 남은 일은 한 달 후 결착을 내는 것뿐이니 간결해서 좋구려.”

그는 정천을 보며 미소까지 지었다.

“현명한 판단에 거듭 감사하외다.”

정천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천은 미묘한 미소만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장휴는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합리는 이쪽에 있다. 조금 특이한 놈이 상대라 하여 두려울 것이 무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더 이상 여기서 미적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소, 총관.”

장휴는 그 말만 남기고서 와룡장을 떠났다.

제갈순은 정천을 책망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정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로들을 호출하는 일 정도는 부탁해도 되겠지? 기왕 빚을 만드는 김에 조금만 더 부탁합시다.”

“불러야 할 장로들을 벌써 정했소?”

“물론. 다음의 다섯 장로에게 기별을 넣어 주시오. 무상장로 암중천, 중황장로 엄백, 교현장로 용운, 화군장로 백운신, 열원장로 반진.”

미리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이름이 쏟아졌다. 제갈순은 미심쩍은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그들 중에 인맥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 좋은 머리로 한번 추측해 보시오.”

정천은 털어 내듯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순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먼저 가 보지. 비급들은 사람을 통해 보내시오.”

정천은 그 말을 남긴 채 방을 나섰다.

“…….”

제갈순은 그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정천의 의중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알 수가 없구나. 그는 정녕 화륜문의 파멸을 바라는 것인가?’

전면전보단 조금 나을 수도 있지만 승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 화연란 개인에게 있어선 더 나쁜 상황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제갈순은 다른 이들보다도 정천을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제갈순은 생각을 거두고서 한숨을 토했다.

‘세연이가 많이 슬퍼하겠구나.’

그 역시 제갈현과 같은 부류였다. 눈앞의 정보를 조합해 최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부류. 그런 그의 결론은 화륜문의 절대 패배였다.

결국 그 시점에서 경악하고 있는 인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담미화는 경악했다.

오직 그녀만이 정천의 의중을 꿰뚫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로들을 끌어들이는구나!’

정천이 언급한 장로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제갈순은 미처 그걸 몰랐지만,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사정을 모른다면 신경 쓸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그들 모두가 십 년 전의 장로들!’

현 이십사 인의 장로 중 십 년 전에도 장로였던 이들은 총 열여섯.

그중 죽은 유군광을 제외하면 열다섯이다.

그리고 정천은 그중의 다섯 명을 지목했다. 그 이유야 분명한 것이었다.

‘사냥하기 위해서!’

그녀는 정천이 복수를 잠시 접어 두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시간을 둔 채 장로들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요사이 화륜문의 일에만 신경 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운장의 문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천의 사냥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오히려 그의 목적에 화륜문을 이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생각해 보면 유군광을 처리할 때에도 그는 청화촌을 미끼로 사용했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셨던 건가요?

와룡장을 나서는 정천에게 담미화가 전음을 보냈다.

피식 웃은 정천이 되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을 대충 고른 것은 아니야. 하나같이 성장의 여지가 있는 녀석들을 골랐거든.

—화 소저를 위해서인가요?

—그래.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담미화는 조금 주저하다가 물었다.

—장로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정천은 피식 웃었다. 순간 담미화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날 느꼈던 공포, 죽음이 춤사위를 추는 듯한 그 느낌이었다.

—예상해 봐.

그녀로선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 * *

정천이 말했던 비급들은 이튿날 화륜문에 도착했다. 제갈세연의 손에 들려서.

그녀는 늘어난 식구를 보고는 놀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문도를 받았어.”

화연란이 웃으며 말했다. 그 뒤로 정천이 나직이 덧붙였다.

“아직은 한 명뿐이지만.”

화연란 금세 시무룩해졌다. 마루에서 당과를 빨던 소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연이 정천을 돌아봤다.

“그 문도가 누군데요?”

“저 녀석. 내가 데려왔지.”

정천이 가리킨 곳에는 장작을 패고 있는 심후가 있었다. 도로 보나 모로 보나 정상적인 청년인지라 제갈세연은 놀랐다.

“오빠가 웬일이에요? 평범한 사람을 다 데려오고.”

“글쎄.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을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천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제갈세연은 더 물으려다 말았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래서 이번엔 소윤을 가리켰다.

“그럼 저 애는요? 쟤도 화륜문 문도예요?”

“아니, 식충이.”

그 말에 소윤이 정천을 찌릿 흘겨봤다.

“문주 언니가 여기 있어도 좋다고 했거든요?”

“당과나 먹고 놀기만 하라고는 안 했지. 오래 붙어 있고 싶으면 잡일이라도 해.”

“흥!”

소윤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젖은 행주를 가져와 마루를 닦기 시작했다.

제갈세연은 감탄했다.

“와! 이제 좀 사람 사는 느낌이 나네요, 언니.”

“그러니?”

“네. 지금까진 그래도 너무 적적했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자주 찾아왔던 거기도 하고…….”

“놀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정천의 한마디에 제갈세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 누가 놀러 온다고 그래요?”

“네 양심은 잘 알겠지. 어쨌든 그거나 내놔 봐.”

“예?”

“비급들 말이야.”

제갈세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비급들을 넘겼다. 그것을 확인한 정천이 곧장 화연란에게 건넸다.

“연구해 봐. 여기서 답을 끌어내는 게 문주로서의 첫 번째 과제가 될 거야.”

화연란은 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문에 항의하는 것은 이번에도 제갈세연의 몫이었다.

“아니, 덩그러니 책자 몇 개 주고서 연구하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아, 너 시끄럽다. 그냥 좀 가면 안 되냐?”

“혼자는 안 가요. 연란 언니랑 같이 갈 거예요.”

“란아는 지금부터 무공 연구에 들어가야 되는데?”

“오늘 용봉소회 모임이 있어요.”

정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너희들, 거기 가서 무공을 연마하기는 하는 거냐?”

“그렇게 못미더우면 왜 언니를 가입시켰어요?”

“인맥 만들어 두라고. 귀하신 분들 잘 사귀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제갈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어휴, 역시 오빠는 속물이야.”

“과찬이다.”

빙긋 웃은 정천이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요즘은 별로 따돌림당하지는 않나 보다?”

“아, 그거요?”

제갈세연이 헤헤 웃었다.

“연란 언니 덕분이죠. 거기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거든요. 그래선지 저도 이젠 괴롭히지 않아요.”

“흠.”

정천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설명과 달리 그냥 모용린이 흥미를 잃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말이다.

“그럼 나도 잠깐 나가 봐야겠군.”

“청룡문에 나가시는 거예요?”

“아니.”

제갈세연의 물음에 딱 잘라 대답하는 정천이었다. 의문을 느낀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를 가시는데요?”

정천은 피식 웃고서 말했다.

“뒤처리를 좀 할 게 있어서.”

* * *

추황우는 기분이 좋았다.

화륜문과 정운장 양쪽을 먹어치울 기회가 눈앞에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정운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배후엔 화산파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무식하게 야욕을 드러냈다간 반대로 먹히기 딱 좋았다.

‘안에서부터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수밖에.’

반면 화륜문은 그야말로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먹기 좋게 가시를 발라 놓은 생선이랄까, 양념이 잘 배어진 갈비랄까.

물론 그 첫 숟갈을 뜨는 쪽은 정운장이다. 하지만 가장 맛난 부위를 먹는 쪽은 흑엽상회가 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상인의 싸움이란 것이지. 멍청한 무인 놈들은 눈치채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이미 대략적인 계획까지 짜 두었다. 정운장을 돕는 척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빼돌릴 생각이었다. 정운장주도, 그 군사도 모르게.

그 작업을 마치고 나니 그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황룡성 삼대주루 중 하나라는 낙봉루(樂峰樓)를 찾아가 흥청망청 즐겼다. 기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거나하게 취했다.

그러고서 상회로 돌아온 것인데…….

“네놈은 대체 뭐냐?”

시뻘건 얼굴로 추황우가 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사내는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추황우는 주름진 미간을 찡그렸다. 자기가 취해서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곳은 분명 그의 방이었다.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무 무르게 생각했어.”

“뭐야?”

“무기를 쥘 수 있는 놈들만 쓸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무기가 없어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 있더군.”

추황우는 게슴츠레한 두 눈만 껌뻑거렸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란 말인가?

사내, 정천의 미소가 깊어졌다.

“너희는 화륜문을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뭣……?”

“하지만 유군광과 같은 실수를 했지. 그게 스스로의 목을 죄게 되리란 것은 몰랐을 거야.”

추황우는 취기가 싹 가시는 걸 느꼈다.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해 보였다.

“네, 네놈. 유 장로님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냐?”

“물론. 지금쯤이면 소화되어 버렸겠지.”

“뭐야? 그게 무슨 말이냐?”

“놈은 죽었다.”

정천의 나직한 말에 추황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분께서 그리 쉽게 죽었을 리가 없다! 흑기단과 호궁위사대가 그분을…….”

“놈들도 모두 죽었지.”

스산한 목소리에 추황우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저 미친놈의 말이라 넘기기엔 녀석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정천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추황우는 그 순간 자신에게 집중되는 무시무시할 살기를 느꼈다.

“바, 밖에 아무도 없느냐!”

“듣지 못할걸. 소리를 모두 차단해 두었거든.”

“큭!”

추황우는 비대한 몸을 돌려 문을 박차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정천이 한발 빨랐다.

삽시간에 그의 앞으로 달라붙은 정천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육 척 거구인 추황우의 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커억! 커어어…….”

목을 붙들린 채 추황우가 버둥거렸다. 그의 다리는 바닥에서 세 치쯤 띄워진 상태였다.

정천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운장과 잘도 결탁했더군. 화륜문 정도는 간단히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아마 뒤로는 정운장을 갉아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겠지.”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추황우는 흠칫했다. 놈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뿐.

놈이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

추황우는 겨우 목소리를 내어 소리쳤다.

“나, 날 죽이면 너도 결코 안전할 수 없다! 내가 죽는다면 정운장의 의심을 살 것이다. 그뿐 아니라 흑엽상회와 관련된 모든 곳이 네놈을 쫓을 것이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네놈은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죽음? 진정한 죽음을 모르는 건 너희겠지.”

파아앗!

순간 정천의 두 눈이 붉은 기광을 뿜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추황우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갔다.

지금까지의 살기와는 달랐다.

조금 전까지의 살기가 가슴을 옥죄고 피부를 저릿하게 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의 살기는 그의 이지(理智)를 난도질하고 영혼을 파헤치는 것만 같았다.

“커억, 어어억……!”

핏빛 기광을 두 눈 가득 내뿜으며, 정천이 나직이 말했다.

“내가 바로 너희의 죽음이다.”

그 한마디가 추황우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순간 추황우는 그것이 진실이란 것을 실감했다.

정천은 마안을 개방한 채 말을 이었다.

“지금 죽이진 않는다. 너와 흑엽상회는 놈들을 끌어내기 위해 쓰일 것이다. 죽음이 너를 찾아오는 것은 그 직후가 될 것이다.”

“으, 으으으……!”

추황우의 입이 거품을 물었다.

‘놈들’이 누구인지, 자신과 흑엽상회가 어떻게 쓰인다는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리란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 춤춰라. 그리고 죽어라.”

극성의 마안이 폭발했다. 핏빛의 섬광이 추황우의 두 눈으로 무서운 기세로 쇄도했다.

그 순간 추황우의 이성은 어둠의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

정천은 손을 놓았다.

쿵 하고 쓰러진 추황우가 토사물을 게워냈다. 정천은 그가 토사물에 질식해 죽지 않도록 들어 올려선 의자에 비스듬히 얹었다.

‘써먹지도 못하고 죽게 할 수는 없지.’

추황우의 두 눈은 빛을 잃었다. 들끓던 탐욕도 솟구치던 야망도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이제 그는 이지를 잃은 채 정천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다.

‘이제 준비는 다되었다.’

속으로 중얼거린 정천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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