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문주의 자질
문을 연 화연란이 깜짝 놀랐다. 곤죽이 된 청년을 등에 업은 채 정천이 서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네 제자.”
“네?”
“차차 설명하지. 그런데 저 녀석은 왜 여기 와 있어?”
정천이 말하는 ‘저 녀석’이란 모용린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정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연란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보다 오라버니, 이런 게 날아왔어요.”
정천은 그녀가 건넨 종이와 화살을 받았다.
화살을 대강 살핀 후 종이를 보았다.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도전장이란 글귀. 그 아래로 몇 마디의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래도 꼴에 명문 정파라 이건가? 한판 붙어 보자는 말을 장황히도 하는군.”
도전장을 보내온 것은 물론 정운장.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들이 화륜문에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면 웃기는 일일 테니.
정천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문파를 닫고 천무맹을 떠나라고? 누가 보면 큰 선심이라도 쓰는 줄 알겠는데?”
화륜문의 위치를 알 정도면 그 속사정도 알고 있을 터. 화륜문의 문도가 없다는 것쯤은 정운장 역시 알 것이다.
‘싸워 이길 자신이야 넘칠 테지.’
결국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 철저하게 짓밟히든지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지든지 선택하라는 의도였다.
내내 침묵하던 모용린이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용봉소회에서 중재해 줄 수 있어요.”
“중재?”
“그래요. 모든 일은 서윤학 공자가 소회에서 쫓겨나며 생긴 일이니,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겠죠. 물론 가장 큰 잘못은 당신에게 있지만.”
“그런 걸 정운장에서 받아들이려 할 것 같진 않은데. 녀석들은 이미 화륜문을 집어삼키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뭐,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거든.”
말로는 그렇게 얼버무리는 동시에, 정천은 화연란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놈들은 흑엽상회와 결탁했어.
“……!”
화연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등을 돌린 채였기에 모용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는 길에 수상쩍은 놈을 만났지. 심문해 보니 술술 불더라고. 뭐, 그런 다음에 기억을 지우고서 돌려보냈지만.
‘그랬군요.’
눈빛으로 대답하는 화연란.
정천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제 와서 용봉소회 애송이들의 중재 따위가 먹힐 리가 없지. 게다가…….”
모용린을 힐끔 본 정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그쪽에 빚을 지고 싶지도 않고.”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얼굴이 움찔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녀석들이 해 보자는데 응해 줘야지 않겠어?”
모용린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냉랭해졌다.
“미쳤군요. 문도 하나 없으면서 어떻게 정운장에 맞서겠다는 거죠?”
“그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런데 이 일로 여길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용무지?”
“용무 따윈 없어요. 아니, 있었지만 이제는 무의미해졌다고 봐야겠죠.”
그녀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정천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럼 그만 돌아가 줬으면 하는데. 이쪽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딱 잘라 축객령을 놓는 정천이었다.
모용린은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러죠! 이깟 문파 따위, 다신 찾아오지 않겠어요!”
그녀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서 장원을 떠났다.
“거 문짝 떨어지겠네.”
혀를 차는 정천에게 화연란이 말했다.
“모용 소저는 오라버니를 세가에 초빙하려고 여길 찾아왔던 거예요.”
“초빙?”
“네. 외부 교관으로 대우하고 싶다더군요.”
“나에 대해 조사해 봤다는 거군. 역시 북쪽의 호랑이인가.”
정천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북쪽의 호랑이와 남쪽의 용, 이는 각각 모용세가와 제갈세가를 이르는 말이었다.
천무맹의 문파와 세가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지략을 지닌 두 가문을 가리키는 표현.
그중 시조 때부터 이름났던 제갈세가와 달리, 맨땅에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 모용세가의 약진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한 성장의 이면에 있는 것은 탐욕스러울 정도의 인재욕.
모용세가는 재능이 있는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받아들였다. 경신술이 뛰어나다면 도둑이라도 받아들였고, 칼질을 잘한다면 백정 출신이라도 중용을 했다.
본디부터 세가 자체가 북방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지만.”
화연란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정천이 심후를 마루에 눕히는 걸 보고 나서야 이마를 찰싹 쳤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디서 약재라도 구해 올까요?”
“응? 아니, 됐어. 그렇게까지 심한 상처는 없으니까.”
“그게 심하지 않다고요?”
심후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얼굴은 퉁퉁 부은 데다 흘린 피도 상당했다. 내상은 없어 보였지만 겉모습은 그야말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는 금세 회복할 수 있어. 대강 조치는 취해 뒀거든.”
“그런가요?”
“응. 일시적으로 자생력을 높여 두었지.”
화연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생력이라니요?”
“상처가 나면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는 법이잖아. 그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지.”
화연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천이 말하는 것은 선술(仙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의심하진 않았다. 정천이라면 정말 선술이라도 익혔을 것 같았다.
“그것도 진마동이란 곳에서 익힌 건가요?”
“응. 강룡단 녀석들 중에 잘 알고 있는 놈이 있었거든. 마교 놈들이 하여간 별별 신기한 것은 많이 알고 있단 말이야.”
대강 설명한 정천이 화연란에게 다가갔다.
“그보다 정운장 말인데.”
“아무래도 화친을 청해야겠죠?”
화연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고 이곳을 버리고 달아날 수도 없다. 그녀로선 청화촌 외의 보금자리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돈으로 화친을 청하는 것뿐이다.
아주 허무맹랑한 방법은 아니었다. 화륜문엔 구천 냥의 거금이 있으니까.
그중 삼분의 일만 있어도 자그만 성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다. 정운장도 그 정도를 받는다면 만족하고서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은 화친하려 들지 않을걸.”
“거금을 안겨 준다고 해도요?”
“흑엽촌과 손을 잡은 시점에서 여기를 완전히 뭉개 버리려 작심했다고 봐도 좋겠지.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돈 조금 받고 물러나느니 다 삼켜 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테고.”
“그럼…….”
“맞서 싸우는 수밖에.”
화연란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어서였다.
정운장의 규모는 상당하다. 어림잡아도 호궁위사대와 동급을 이룰 수준은 될 것이다.
물론 정천에게야 오합지졸일 테지만, 이번만은 그로서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이미 보는 눈이 상당히 많아진 까닭이다.
“오라버니, 그들과 싸울 건가요?”
“싸우는 건 화륜문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돕는 입장만 유지할 거다. 상황이 바뀐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정도 문파에 맞설 수 있을까요?”
“폭뢰검 화륜패의 검을 이은 문파다.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낫겠지.”
화연란의 눈빛이 달라졌다. 불안감이 언뜻 보이던 눈빛이 어느새 결의로 가득 찼다.
“해내 보이겠어요.”
“그래야지.”
정천은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내가 데려온 녀석들이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녀석들이라고요? 하지만 한 명밖에 없는걸요.”
“둘이야.”
정천은 심후를 가리켰다.
“여기 이 녀석 하나에.”
다시 바깥을 가리켰다.
“저기 저 녀석 하나.”
“네?”
화연란은 멍한 표정을 했다. 모용린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기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천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나와. 거기 있는 것 다 아니까.”
약간의 정적 뒤로 한 소녀가 문을 열고서 들어섰다. 심후를 엿 먹였던 아이였다.
화연란이 의아한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저 아이는 누구예요?”
“삼류 소매치기. 시가지에서부터 죽 따라오더군.”
“삼류 아니에요! 지금까지 남한테 걸린 적도 거의 없었다고요.”
“나한테 걸렸잖아. 내가 보기엔 형편없는 삼류야.”
“으……!”
소녀가 발끈했으나 정천에게 더 대들진 못했다. 무섭긴 무서웠던 까닭이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물었다.
“근데 따라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되게 조심하면서 미행했는데.”
“네가 조심해 봤자 삼류 수준이지. 말했잖아,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쳇, 역시 잠행술이랍시고 배웠던 게 엉터리였나 봐.”
소녀가 투덜거렸지만 화연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저 아이의 기척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당히 뛰어난 잠행술을 익혔거나, 그 자질이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정천이 대뜸 물었다.
“무공은 어떤 것들을 익혔지?”
“잘 몰라요. 무슨 형형보인가 하는 거랑 기척 숨기는 걸 배웠어요.”
“이륜형형보(二輪形炯步)로군.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인데. 누가 가르쳤지?”
“아빠가요. 정작 본인은 어느 부잣집을 털다가 걸려서 잡혀갔지만.”
“그렇군. 근데 왜 따라온 거냐?”
소녀가 별안간 눈을 빛냈다.
“아까 보니까 문도를 모으는 것 같던데요? 저 오빠도 문도로 들이려고 데려온 거잖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저한테도 아무 거나 쓸 만한 것 좀 가르쳐 달라고 하게요. 아무래도 서로가 아쉬운 처지 같은데요?”
“눈치는 제법 있군. 하지만 너 같은 좀도둑을 들였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소녀가 당당히 대답했다.
“까놓고 말해서 여기서 훔쳐 갈 만한 건 저 언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걸요?”
화연란이 살포시 웃고서 말했다.
“우리 장원이 좀 휑하긴 해. 그럼 문도로 들어오겠다는 말이니?”
“일단은요. 별것 없는 것 같으면 내뺄 거지만.”
당당하기까지 한 대답에 화연란은 다시 웃었다.
“이름이 뭐니?”
“소윤이에요. 아빠가 대충 지어 준 이름이에요.”
“그런데 부친께선 지금 어디 계시니?”
“글쎄요? 잡혀갈 때 본 게 마지막이에요. 어디 감옥에라도 갇혔든지 이미 죽었겠죠.”
슬픈 기색 없이 말하는 소윤을 보며 화연란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볼살도 채 빠지지 않은 아이가 너무 세파에 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천은 그저 시큰둥했지만.
“어쨌든 문도가 되고 싶다는 거군. 그럼 문주에게 구배의 예를 올려라.”
소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예요?”
“아홉 번 절하라고.”
“아, 그거요? 좀 쉽게 말하지.”
소윤은 투덜거리면서 정천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정천이 픽 웃고서 말했다.
“내가 아냐.”
“네?”
“문주는 저 아이다.”
정천이 가리킨 쪽을 본 소윤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화연란을 보았다.
“네에에? 말도 안 돼! 저 언니가요?”
“언니가 아니라 문주님.”
“그럼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인데요?”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인데요?”
맹랑한 녀석이다. 정천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말했다.
“나? 굳이 말하자면 조언자쯤 되겠지.”
소윤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싫어요. 아저씨한테 무공을 배울래요.”
“나도 싫어. 란아한테 무공을 배워라.”
“그렇게 말하면 그냥 돌아갈래요.”
“누구 맘대로? 올 땐 네 맘대로 왔지만 갈 땐 네 맘대로 못 간다.”
“으…….”
소윤이 신음을 흘렸다.
잘은 몰라도 정천에게서 도망칠 수 없으리란 게 어렴풋이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때 누군가 소윤을 뒤에서부터 살며시 안았다.
화연란이었다.
“오라버니, 어린아이에게 너무 매몰차세요.”
“란아, 애들이라고 오냐오냐 하기만 해서는 안 돼.”
“그래도요. 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붙들어 봐야 의미는 없잖아요? 의욕이 없는데 진전이 있을 리도 없고요.”
“죽을 지경까지 몰아붙이면 돼. 살려달라고 애원할 만큼 굴리면 싫어도 강해지게 되어 있어.”
소윤이 움찔했다. 정천의 말투는 담담하기에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화연란은 고개를 저었다.
“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정천은 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성품이 부드럽긴 해도 화륜패의 딸인 만큼, 화연란 역시 고집만큼은 알아주는 성미였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떠나든 남아 있든 그 녀석더러 알아서 하라고 해.”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천은 들은 체 만 체 하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화연란은 소윤을 내려다보고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니?”
소윤은 당황했다.
“네? 아, 그러니까…….”
“그냥 이곳에서 며칠 지내보는 건 어때? 나와 화륜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나서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아.”
“그런 거라면…….”
“그래. 그럼 잘 지내보자. 꽤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 같은데, 우선은 좀 씻는 게 좋겠지?”
소윤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란은 부드럽게 웃고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에게 너무 무르신 것 같습니다.
방으로 들어서는 정천에게 전음이 들려왔다. 담미화의 목소리였다.
정천은 픽 웃었다.
—그래 보여?
—그녀를 싫어하진 않습니다만, 일문의 문주가 될 자질은 없어 보입니다. 필요할 땐 단호해야 하는 법인데, 너무 부드럽기만 해요.
—그럴지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도움이 될걸.
—네?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런 뒷골목 출신은 대개 끈기가 없고 쓸데없이 영악해. 조금만 힘들거나 소득이 없으면 미련 없이 도망쳐 버리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 방식대로 억누르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자리만 비워도 도망칠 궁리부터 하게 될걸. 의욕도 없으니 진전도 더딜 테고. 정말 죽도록 굴리면 되겠지만 그럴 여유도 생각도 없고.
—그럼 일부러 지는 척을 하신 건가요?
—저런 애들이 가장 약한 게 애정이란 거거든. 자기 아버지를 대놓고 깎아내리는 것 봤지? 애정을 받지 못한 데 대한 반발 때문이야.
담미화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영대원이 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가족도 친구도 버려야 했던 그녀기에.
정천 역시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정천 님 역시……?
—그래.
쓴웃음을 지은 정천이 말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었거든.
* * *
소윤은 화륜문에 남았다. 문도가 아닌 식객의 형태로. 정천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를 슬쩍 흘릴 따름이었다.
“저 녀석이 뭐 안 훔쳐 가나 잘 감시해, 란아야.”
“됐네요. 이런 거지꼴의 문파에선 가져갈 만한 것도 없어요.”
대뜸 대꾸하는 소윤을 보며 정천이 웃었다.
“너, 너무 기어오른다?”
“……!”
찔끔 놀란 소윤의 화연란의 등 뒤로 숨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낀 화연란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 심후가 정신을 차렸다.
정천이 그에게 다가갔다.
“으으, 여기는?”
“화륜문. 네가 지낼 곳이다.”
정천이 심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설 수 있겠냐?”
“해, 해 보겠습니다.”
심후는 정천의 손을 잡고서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딱히 치료를 받지 않았을 텐데도 생각보다 움직이는 게 수월했다.
“어?”
그러고 보니 쑤실 듯한 격통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멍한 얼굴의 심후를 보며 정천이 웃었다.
“많이 좋아졌지?”
“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가 기절한 사이에 오십년삼(五十年蔘) 하나를 달여서 먹였거든.”
얘기를 엿듣던 화연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도라지 탕 하나를 끓여 먹이긴 했지만…….
심후는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귀한 것을……!”
“그래. 송구스러워 죽겠지? 너 같은 녀석에게 귀한 약을 써 준 우리가 고마워 못 견디겠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생색을 내시는군요.”
“생색내려고 먹인 거니까. 어쨌든.”
정천이 화연란을 가리켰다.
“앞으로 네 스승이 될 사람이다.”
“예에?”
심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정천이 가리킨 사람은 암만 봐도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보다 어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눈이 빠지도록 아름다웠고.
“저 소저가 제 스승님이라고요?”
“그렇다니까. 그렇게 뻣뻣하게만 있을 거냐?”
아차 싶었던 심후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심후라고 합니다.”
“아, 네. 화연란이라고 해요.”
마주 고개를 숙여 보이는 화연란. 덕분에 심후는 더욱 당황했고 소윤은 킥킥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이런 상황은 화연란으로서도 갑작스러울 것이다.
‘뭐, 차차 나아지겠지.’
정천은 심후에 대해서 화연란에게 설명했다.
“이 녀석은 구혈난맥이야. 체내의 아홉 기혈이 뒤틀린 까닭에 단전의 그릇이 턱없이 작지.”
“구혈난맥이라고요?”
“그래. 하여간 이런 녀석을 무인으로 키운다면 방법은 두 가지겠지? 구혈난맥을 치료하거나, 이런 몸에 맞는 무공을 가르치거나.”
화연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전 그 어느 쪽도 할 능력이 안 되는걸요.”
“예?”
놀란 사람은 심후였다. 정천의 말만 믿고 이곳으로 온 그였던 것이다.
정작 정천은 태평한 표정이었다.
“방법은 네가 알아내야지.”
“예? 하지만…….”
“패화영신검에 그 답이 있다.”
화연란이 흠칫했다.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정천은 심후를 돌아봤다.
“이 아이가 네게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믿음을 갖고 기다려.”
“대협께선 이미 그 해답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뭐, 그렇지.”
“그럼 그냥 그 답을 지금 제시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심후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당황하던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거야, 대협께서 강해지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응. 하지만 날로 먹는 꼴은 못 보지. 설마 기연을 얻었다고 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강해지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할 말 없어진 심후가 침묵했다. 그의 생각으로도 너무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정천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이 아이에게 너를 성장시키는 일을 맡길 거다. 싫다면 떠나도 좋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것만은 죽어도 싫은 심후였다. 하지만 화연란이 미덥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 아가씨, 아니, 문주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지금은 그렇지. 성장해야 할 것은 너희들만이 아니니까.”
정천은 화연란을 돌아봤다.
“몇 가지 비급을 가져다주겠어. 그것들과 네가 알고 있는 패화영신검을 연구해.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이 녀석이 강해질 방법도 깨달을 수 있을 거다.”
“제게 시험을 주시는 거군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네겐 아직 문주의 자질이 부족하니까.”
여느 때처럼 냉정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화연란은 씁쓸함이 아닌 의욕을 느꼈다.
“해 보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정천은 심후를 돌아봤다.
“너는 어떻게 할 테냐?”
“저는…….”
“오십년삼 지금 토해 낼래?”
“……믿고 따르겠습니다.”
“좋아.”
만족스럽게 웃은 정천이 걸음을 떼었다.
“잠시 좀 나갔다 오지.”
“어디 가시려고요, 오라버니?”
“비급이나 지금 받아 오려고. 가장 효과적인 것들을 엄선해서 돌아오마.”
“비급을 받아 온다고요? 어디서요?”
걸음을 떼지 않은 채 정천이 대답했다.
“와룡장.”
모용세가에 인재욕이 있다면 제갈세가엔 수집욕이 있었다. 특히나 중원 곳곳의 무공비급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전자가 인재욕을 통해 크게 도약했다면, 후자는 수집욕을 통해 명가(名家)를 지탱해 왔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한 수집욕은 천무맹 안에서도 유효했다. 천무맹은 그야말로 정파 무림의 거의 모든 무공이 모여 있는 장소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와룡장 안에는 비급들만을 따로 모아 놓은 서고가 있었다.
그 규모는 물론 본가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질적인 면에선 더욱 뛰어났다.
정천이 필요로 하는 비급들을 찾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정작 제갈순으로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소?”
“왜 만날 같은 질문을 하는 거요? 두 귀로 똑똑히 들어 놓고서.”
“말이 너무 황당해서 그렇소. 혹 제갈세가에 무공비급이라도 맡겨 뒀소?”
“당연히 없지.”
“그런데 무슨 염치로 서고를 보고 싶다는 거요?”
“필요한 비급이 몇 개 있어서.”
제갈순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기껏 만나 줬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라니.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소. 그만 돌아가시오.”
정천은 실소를 지었다.
“내가 뭐 대단한 거라도 훔쳐 갈까 봐서 그렇소? 암만 대단한 무공이라도 내겐 의미가 없다는 걸 알 텐데?”
“하지만 화륜문의 아가씨에겐 다르지.”
“패화영신검 수준의 검법은 제갈세가 서고에도 몇 없소. 게다가 란아는 다른 검법을 배울 생각도 없고.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보법과 경신술, 권법과 각법, 심공 몇 가지 정도요.”
제갈순은 의문을 느꼈다.
“무슨 의도로 그것들을 가져가겠다는 거요?”
“화륜문에 맞는 무공을 엄선해 내게 하려고.”
“그냥 그대가 가르쳐 주면 되는 것 아니오? 상당히 뛰어난 무공들을 알고 있을 터인데.”
“내가 그냥 가르쳐 줘서야 공부가 되지 않지. 본인이 직접 머리 싸매고 익히게 해야 비로소 화륜문만의 무공이 될 거요.”
“음.”
제갈순은 턱을 쓰다듬었다. 정천의 말이 상당 부분 옳았던 것이다.
“기존의 무공을 본문의 검법에 맞게 탈바꿈한다는 것이군. 하지만 그리 녹록한 작업은 아닐 텐데?”
“그래도 해내야지.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해선 일문의 주인 자격이 없소.”
“의외로 가까운 이에게 냉정하시군.”
“가까우니 더 냉정해야 하는 거요. 당신네 형제와 달리 말이지.”
제갈세연에 대해 말하는 것이리라.
제갈순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은 마시오. 우리가 유하게 대하는 만큼 유모가 더욱 닦달을 하니.”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안 보이는군. 어디 갔소?”
“유모에게 붙들려 공부 중이오. 당분간 방에서 나오긴 힘들 거요.”
“흠.”
정천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서고를 보여 줄 거요, 말 거요?”
“역시 힘들겠소. 그곳은 제갈세가의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오. 규정이 그러하니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는 일이오.”
“원하는 비급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면?”
“필요한 게 어떤 것들이오?”
정천이 대뜸 말했다.
“소림의 신장선천수(神將先天手), 무당의 유성신법(流星身法), 화산의 태을심공(太乙心功), 그 외 진운각법(進雲脚法)과 여래운우장(如來雲雨掌) 정도만 가져다주면 될 것 같소만.”
“그 정도면 되는 거요?”
제갈순이 되물었다. 의외로 대단한 무공들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제갈세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이긴 했다. 하나같이 유서가 깊은 무공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급수를 따지자면 평균 아래에 위치한 것들이기도 했다.
정천은 간단히 대답했다.
“오래된 것일수록 개정의 여지가 크지. 쓸데없는 개식(改式)과 교정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 말엔 동의하오. 최신의 무공일수록 군더더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니.”
“어쨌든 가져다줄 수 있겠소?”
제갈순은 잠시 생각했다.
구태여 준다면 못 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공짜로 퍼주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가져다준다면 무엇을 제시하겠소?”
정천은 혀를 찼다.
“거 서로 남남도 아니고 너무하는군. 그깟 종이쪼가리 좀 가져다주면 덧나쇼?”
“언제부터 친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깟 종이쪼가리 다른 데서 구하면 되는 일 아니오?”
“그래서 돈이라도 달라는 거요?”
“아니, 돈은 굳이 바라지 않소.”
제갈순은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대신 사람을 바라지.”
“음?”
“그대를 곁에 두고 싶소만.”
“…….”
잠시 침묵하던 정천이 미친놈 보는 눈으로 제갈순을 쳐다봤다.
“이런 미친. 그런 취향이었나? 왠지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갔다 싶더라니.”
잠시 멍한 얼굴이던 제갈순이 이내 당황했다.
“뭐, 뭣?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오! 나도 건전한 사내란 말이오. 남색 따위엔 취미 없소!”
“취향이 어떻게 되는데?”
“굳이 따지자면 이지적이고 훤칠한 미인이 좋소. 나도 남자란 말이오. 거듭 말하지만 그쪽엔 취미 없소!”
정천이 피식 웃었다.
“그런 취향이셨군.”
“……!”
제갈순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까닭이다.
그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항의했다.
“젠장. 이런 장난질을 쳐 놓고 거래를 하겠다는 거요?”
“이런 장난질에 거래를 때려치울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아니까. 어쨌든 대강 무슨 말인지 알겠소. 확실히 극과 극은 통하나 보네.”
“그게 무슨 말이오?”
“모용세가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해 왔었거든.”
제갈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쪽에서도 무학자의 일을 제안해 왔소?”
“아니, 그쪽은 외부 교관의 일이었소.”
“그랬군. 그들다운 판단이로군.”
여기서도 두 세가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같은 재능을 두고도 한쪽은 사람을 키우는 일을, 다른 쪽은 무학을 발전시키는 일을 떠올린 것이다.
“어쨌든…….”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어렵겠소. 우선은 화륜문과 내 일이 최우선이라서.”
“나중이라면 가능하단 말이오?”
“여유가 생긴다면.”
제갈순은 잠시 생각하고서 말했다.
“알겠소. 좋소. 그대가 원하는 비급들을 지금 가져오도록 하지.”
“웬일이쇼? 수지 안 맞는 짓은 안 하는 인간이.”
“그대는 거짓말을 할 인물이 아니니까. 나중이라도 가능하다면 정말 그런 거겠지. 그리고 이참에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고.”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잠시 기다리시오. 곧 서고에 다녀오도록 하지.”
제갈순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방을 곧바로 나서지는 못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총관님, 총관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라고 하던가?”
“정운장의 군사라고 합니다.”
정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제갈순 역시 그것을 느끼고는 그를 돌아봤다.
“정운장이라면…….”
“익숙한 이름이군. 안 그렇소?”
제갈순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나, 그들이 화륜문과 척을 지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좀 기다리라고 해야겠군. 아니면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소. 비급은 후에 사람을 보내 전하면 될 테니.”
“아니면 그자를 바로 이곳으로 불러들이거나.”
제갈순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 좋은 생각 같진 않소만.”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아마 그자가 온 것은 화륜문의 일 때문일 거요.”
“화륜문의 일로 왜 제갈세가를 찾아온단 말이오?”
“란아가 당신네 조카딸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돕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는 거겠지.”
“음.”
제갈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자를 한번 불러들여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정천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했던 까닭이다.
누가 봐도 화륜문은 정운장을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제갈순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붙기엔 규모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천이 자신만만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 속내를 파악하고 싶었다.
생각을 마친 제갈순이 밖에 대고 말했다.
“이리로 들라 이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