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일제자 심후 (17/146)

第五章 일제자 심후

정천을 본 칠삼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자네, 대체 그동안 뭘 하다가 온 건가?”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대체 무슨 일이…… 아니, 됐네. 물어봐야 실망할 할 테지.”

피식 웃는 정천에게 칠삼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엔 왜 왔나?”

“왜라니? 내 직장 내가 찾아오는 데 문제라도 있어?”

“직장이라고?”

“응. 아니면 혹시, 그사이에 내가 잘리기라도 했나?”

칠삼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 정천은 여전히 청룡문의 문지기였다. 출근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지만 말이다.

뇌물의 힘은 아직까지도 유효했고, 윗사람들도 정천의 비리를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 아마 전 용검대 출신인 만큼 우대해 주는 것이리라.

정천은 청룡문의 전경을 한차례 둘러보고서 칠삼에게 다가갔다.

다른 문지기들이 그를 쳐다봤으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무시했다.

“혹시 요 근래에 이상한 징후 못 느꼈어?”

“응? 징후라니?”

“그러니까, 평소엔 보지 못했던 짐이나 물건들이 성에 들어왔다거나, 인상이 수상쩍은 무리가 지나갔다거나.”

칠삼이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사방천지에서 무수한 물건들이 매일같이 황룡성으로 들어오네. 갖가지 인간군상이 몰려들기도 하고. 항상 새것과 새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특별히 수상할 것이 뭐가 있겠나?”

“그런가? 하긴 그만큼 허술한 녀석들도 아닐 테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것도 아냐. 그럼 혹시 천무맹 장로가 청룡문을 지나간 적 없어?”

“장로 말인가?”

칠삼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몇몇 장로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워낙 대단한 인물들이니 한두 차례만 봤음에도 기억을 해 뒀던 것이다.

게다가 장로들이 지나갈 때는 으레 휘황찬란한 호위들이 뒤를 따랐다. 워낙 인상적인 광경이다 보니 기억에도 쉽게 각인됐다.

“그러고 보니…….”

칠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확실하진 않네만, 얼마 전 호화로운 마차들 여럿이 이곳을 빠져나갔네.”

정천의 눈이 순간 빛났다.

“몇 대였지?”

“그, 글쎄? 확실히 세어 보지 않아 모르겠네만, 어림잡아도 스무 대는 넘어 보였네만.”

“그렇군. 뒤따르던 호위들은 무슨 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

“각양각색이었네. 흑색에 자색에 적색에 청색에…… 그런데 이런 건 왜 묻는 건가?”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칠삼이 짐짓 너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항상 그런 식이군. 뭔가 하는 것은 같고 나한테도 이것저것 귀띔하네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군.”

“당연하지. 우리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정천의 한마디에 칠삼은 주춤했다.

“으음,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야. 남은 생애 편하게 살고 싶다면.”

칠삼은 미심쩍은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지금의 정천에게선 처음 느꼈던 인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딱지처럼 얹혀 있는 태평함이나 시큰둥함만은 여전했지만.

몸에는 혈색이 완연하고, 속물스럽던 느낌도 어느 정도는 사라졌다.

확실히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느낌.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그러나 정천이 속한 세계가 여전히 무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내공을 잃었음에도, 동료들을 잃고서 겨우 살아 돌아왔음에도.

애초부터 문지기인 칠삼과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서류상으로야 똑같은 문지기라지만, 정천은 그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비단 뇌물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내가 편하게 사는 것으로 보이나?”

칠삼의 물음.

정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동시에 열심히 사는 것으로도 보여. 최소한 이름 한 번 떨치려다 허무하게 죽는 멍청이들보단 낫다고 생각해.”

“하지만 자랑스러운 삶은 아니지.”

“글쎄. 손에 피를 많이 묻히는 삶 역시 자랑스럽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내겐 꿈이 있었네. 그 바보 같은 무명(武名) 한 번 떨쳐 보고 싶다는 꿈이.”

칠삼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험난하더군. 꿈에 부풀었던 청년이 순식간에 좌절해 버릴 만큼.”

그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힘을 뺐다.

“자네 말대로일세. 바보 같은 일이지. 이런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진정으로 큰 행복이겠지. 하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하네.”

“무엇을 말이지?”

“모든 걸 제쳐 두고 그 바보짓을 해 보고 싶다고. 나도 무인이라고 당당하게 외쳐 보고 싶다고.”

“선배도 당당한 한 사람의 무인이야. 정파일통 천무맹의 동문을 지키는.”

“아니, 그저 문지기일 뿐이지. 흑기단 놈들이 우릴 무시하던 것, 자네도 봤지? 놈들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도 아닐세. 문지기는 그저 문지기일 뿐이야.”

“뭐, 생각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나도 더 할 말은 없지.”

남의 일이라는 투로 말하는 정천이었다. 칠삼은 괜한 말을 했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때 그의 앞으로 종이 한 장이 내밀어졌다.

“……이게 뭔가?”

“뭘로 보여?”

“오줌 웅덩이에서 헤엄치는 지렁이?”

정천이 혀를 찼다.

“지도라고, 지도. 거기에 글씨가 쓰여 있는 거 보이잖아.”

“이게 글씨라고? 아니, 그보다도 이게 대체 어디 지도란 말인가?”

“화륜문.”

칠삼이 놀란 눈을 했다. 그 역시 요사이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언뜻 들었던 것이다.

정운장의 서윤학을 쓰러트린 여검객. 그녀가 속해 있는 문파가 바로 화륜문이라고, 더불어 도무지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노라고.

“이게 정말 그곳의 약도란 말인가?”

“그래. 아는 동생이 그곳의 문주거든.”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처음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으니까. 무인의 꿈을 아직 품고 있다는 것을.”

칠삼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자네…….”

“애초에 나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잖아? 그걸 생각하니 가만히 보고 있기가 좀 그렇더라고.”

칠삼은 약간이지만 감명을 받았다. 설마 정천의 마음씀씀이가 이렇게나 깊을 줄은…….

“게다가 지금 문도가 한 명도 모이지 않았거든.”

“……?”

“이대로 있다간 동생이 너무 상심할 것 같아서. 일단 선배라도 문도로 받아들이면 괜찮겠다 싶더라고.”

칠삼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게 목적이었구먼.”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칠삼은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약도를 고이 접어 옷섶에 집어넣었다. 아마도 찾아갈 일은 없으리라 생각됐지만.

“이 약도도 별 의미는 없겠군. 난 무공을 익히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그렇진 않을걸.”

“그게 무슨 소린가?”

“늦은 나이에 무공을 시작한 강자들도 많았어. 더군다나 선배는 어릴 적에 경락을 열어 놓은 덕에 체내의 기혈도 정순하지.”

“내게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건 아니고 말인가?”

“그럴 의도가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어깨를 으쓱한 정천이 말했다.

“어쨌든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선택은 온전히 선배의 몫이지만.”

“……왜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건가?”

“간단해.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생에게 있어 좋은 제자가 될 것 같기도 해서.”

“중년의 문지기 따위가 말인가?”

“그렇기에 더욱 빛나는 것도 있는 법이거든.”

정천은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칠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서 물었다.

“그 얘기를 하려고 날 찾아온 거였나?”

“겸사겸사. 그보단 놈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게 큰 목적이었지만.”

“놈들이라니?”

정천은 대답하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손을 대강 흔들며 멀어져 갔다.

눈치를 보던 동료 문지기들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겐가?”

“둘이서 뭔가 수군거리던데.”

칠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목소리로 대화를 했었던 까닭이다.

“듣지 못했나?”

“못 들었네. 뭔 얘기를 하는 건지 꼭 모기 소리만 같았거든.”

“그랬단 말인가?”

칠삼은 멍한 얼굴로 정천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언젠가 음파 자체를 차단하거나 왜곡하여 목소리를 흘러나가지 않게 하는 음공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 순간 칠삼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치는 생각.

그는 반사적으로 품을 뒤졌다. 정천이 주었던 약도의 질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칠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설마, 맹주와 군사를 속였던 것인가?’

* * *

‘눈치를 챘을 테지?’

정천은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통찰력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고, 머리도 제법 돌아가는 편이니. 위화감을 느꼈을 테지. 아마 나에 대해서도 의심할 테고.’

칠삼은 스스로가 비하하는 것만큼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사람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게다가 무공에 대한 열망 역시 상당했다.

그것이 열등감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힐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게 흠이긴 했지만, 화연란에게 맡길 만큼 괜찮은 재목이었다. 이른바 문주를 성장시킬 수 있는 제자랄까?

‘이제 다른 녀석들도 찾아봐야 할 텐데.’

정천이 담미화까지 두고서 홀로 밖에 나온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우선은 장로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화연란에게 어울릴 법한 제자를 찾는 것.

칠삼의 증언도 그렇고 요사이 이십각의 동향도 그렇고, 장로들은 황룡성을 비운 것으로 보였다.

‘둘 중의 하나겠지. 적이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거나, 바깥에 다른 용무가 있거나.’

주의를 기울일 일이긴 했으나 당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때문에 정천은 또 하나의 일에 더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고른 사람이 칠삼.

이젠 나머지 인재들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사람이 득실거리는 곳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자주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

정천은 주루가 즐비한 거리로 향했다. 아직 대낮이었지만 중추절이 코앞인 까닭에 거리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흠. 그럼 어떻게 한다?”

잠시 생각하던 정천은 적당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싸구려 소면을 시킨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확장됐다.

반경 수십 장의 모든 것이 그의 기감에 파악되었다. 세세한 움직임부터 호흡에 이르기까지.

그중 쓸데없는 것들엔 신경을 껐다. 정천은 크게 두 가지에 집중했다.

살기와 적의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차례 소란이 감지됐다. 그러나 대부분 별것 없는 다툼이었기에 정천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음?’

약간은 특이한 형태의 싸움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살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대단한 싸움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중 한쪽의 투지가 그야말로 굉장했다.

꼭 일생일대의 일전을 앞에 둔 것만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정천이 소면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꽤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청년 하나와 건달 여럿이 대치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청년의 뒤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소녀가 하나.

놀라울 정도의 투지는 청년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가련한 소녀를 핍박하려 들다니!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뭐? 가련이 어째?”

건달들 중 하나가 침을 탁 뱉었다.

“고 가련한 년이 우리 형님의 옷에 이렇게나 큰 얼룩을 남겼단 말이다. 앙? 이래서야 빨아도 얼룩이 빠지지 않을 테니 배상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과연 형님이란 작자의 바짓단엔 시뻘건 국물이 큼지막하게 얼룩져 있었다. 청년도 그것을 보았지만 이내 항변했다.

“그렇다고 장정 셋이서 어린 소녀를 협박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협박은 무슨. 옷값을 내놓으라는 게 협박이냐!”

청년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녀가 한마디 했다.

“하지만 은전을 닷 냥이나 내놓으라고 했잖아요!”

“그야 그만큼 비싼 옷이니 그렇지!”

“거짓말! 척 봐도 싸구려 옷 같은데.”

“싸구려라니. 산동산 명주로 만든 고급 비단옷을 보고 싸구려라니!”

정말 산동산 비단이라면 은전 다섯 냥이란 고가가 이해됐다. 문제는 볼품없는 사내가 입다 보니 옷도 볼품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지만.

청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렇게 비싸 보이지는 않소. 게다가 굳이 옷값을 받지 않더라도 빨아서 다시 입으면 되는 것 아니오?”

건달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됐다. 그냥 네놈을 두들기고 저 계집앨 잡고 말지.”

“할 테면 해 보시오!”

청년이 전각을 내딛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상당한 박력에 건달들이 움찔했다.

“뭐, 뭐야.”

“이 새끼, 혹시 한가락 하는 놈 아냐?”

그리고 정천은 청년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거, 바보네.”

청년의 자세는 그럴싸했다. 체격 역시 탄탄한 걸 보아 상당한 수련을 했다는 게 느껴졌다.

문제는 내공.

정천이 지녔던 내공을 모두 소실했다면, 청년은 원래의 그릇 자체가 턱없이 작았다. 선천적인 것인지 병이라도 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면 건달들은 의외로 외공과 내공 모두가 건실했다. 하기야 이곳은 황룡성. 비렁뱅이 거지조차 삼류 무공 하나쯤은 익히고 있는 곳이었다.

청년의 투지가 대단했던 것도 이해가 됐다.

‘실력이 별로니 기세라도 좋아야겠지.’

정천이 피식 웃는 가운데, 청년이 건달들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차앗!”

정천은 새삼 감탄했다.

“와, 너 진짜 약하구나.”

“으으, 으으으…….”

청년은 정천의 발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하긴 골병이 들도록 얻어맞았으니 정신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청년은 당당히 건달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삼 초가 지나기 전에 몰매를 맞기 시작했다.

처음엔 청년을 응원하던 구경꾼들도 이내 흥미를 잃었다. 청년의 실력이 예상보다 형편없었던 게 컸다.

그사이 정작 청년이 구하려던 소녀는 어딘가로 도망쳐 버린 상황.

열 받은 건달들은 애꿎은 청년만 죽도록 팼다.

“으으으.”

신음하던 청년이 겨우 실눈을 떴다.

“그, 그 소녀는 어찌 되었습니까?”

“내뺐어. 쏜살같던데.”

“다, 다행이군요.”

정천은 다시금 감탄했다. 청년의 우둔함에.

“너 진짜 멍청하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계집애가 아마 나쁜 년일걸. 널 두들겨 팬 놈들이 아마 피해자였을 거야.”

“예? 그게 무슨…….”

청년이 퉁퉁 부은 눈을 떴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리고서 말했다.

“그 바지가 정말 산동산 비단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이더군. 그 계집애가 일부러 국물을 엎질렀다는 것.”

“일부러요? 하지만 어째서……?”

“돈 때문이지. 소매치기의 흔한 수법이야.”

“그, 그런…….”

청년은 정말 실망한 표정이었다.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군요.”

“그렇지, 뭐. 계집애는 돈을 먹었고 건달 놈들은 사람이라도 팼지만, 넌 죽도록 얻어맞은 게 전부니까.”

“으,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협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

정천이 빙긋 웃었다.

“네 필생의 은인.”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뭐, 조만간 알게 될 거야. 그것보다도.”

정천이 고개를 슬쩍 들어 골목 쪽을 바라봤다.

“그래도 아주 양심이 없지는 않군.”

“……?”

“나올 거면 얼른 나오지, 소매치기 꼬마.”

청년이 의아하게 쳐다보려니,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조금 전의 그 소녀였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청년에게 다가와서는 은전을 하나 내밀었다.

“이거, 약값에라도 써요. 씨,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너무 불쌍해서 그러지 못하겠더라고요.”

청년은 멍하니 은전만 바라봤다. 소녀가 은전을 흔들어 보였다.

“안 받을 거예요? 그냥 나 가질까요?”

청년이 물었다.

“그거, 방금 전에 훔친 거니?”

“네. 그 병신들, 거들먹거리더니만 주머니엔 푼돈만 가지고 있더라고요. 뭐, 그래도 아주 없는 것보단 낫지만요. 어쨌든 줄 때 받아요. 나 그다지 마음씨 고운 여자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받을 수 없다.”

“네?”

청년이 딱 잘라 말했다.

“올바르지 않은 돈이야. 그런 돈은 받을 수 없다.”

“허.”

정천이 또다시 감탄했다.

“이거 완전 정파 협객이 따로 없군.”

소녀가 정천을 돌아봤다.

“꼭 아저씨는 정파 사람이 아니라는 듯 말하네요.”

“협객은 아니지. 요즘에도 그런 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건 그러네요.”

의협이란 단어가 농담처럼 쓰이는 시대였다. 무인의 협객행이 옛이야기로나 치부되는 시대였다. 협을 말하는 이는 비웃음을 당하고 합리를 따지는 이가 득세하는 세상이었다.

정파나 사파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

다 같은 사람인데 정파인이라고 정의롭고 당당하기만 할 리 없고, 사파인이라고 비겁하고 사악하기만 할 리도 없었다.

현재 정, 사의 구분은 해당 문파가 지닌 무공의 성질에 따라 나뉠 뿐이었다.

때문에 정파와 사파라고 해서 항시 충돌하기만 하진 않았다. 필요에 따르면 협동을 하기도, 동맹을 맺기도 했다.

마교만은 여전히 공공의 적이었지만.

어쨌든 의협심만으로 남을 돕는 무인은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특히나 황룡성 내에서는.

“이거 완전 천연기념물이군.”

“그러게요.”

청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을 신기한 장난감 보듯 하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 그게 잘못입니까? 약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게 잘못이냐고요.”

“그건 아니지. 매우 훌륭한 일이지.”

정천이 웃었다.

“문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지 못할 때 일어나지. 네가 한 일은 협행이 아니야. 옳은 쪽은 건달들이고 그른 쪽은 이 녀석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청년은 시무룩해졌다. 차갑게 식은 머리로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저 도둑을 잡지 못하게 한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천이 순간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소녀의 팔을 붙드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뒤로 꺾었다.

“꺄악!”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청년이 기겁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런 짓.”

소녀의 팔이 더욱 꺾였다. 그녀는 완전히 제압당해서는 버둥거렸다.

“흐윽! 아, 아파요!”

“그러게 상대를 잘 골랐어야지. 너, 이번에는 내 돈을 훔치려고 했지?”

소녀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정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이 녀석에게 대뜸 은전을 내민 것도 그 때문이겠지. 시선을 끄는 동안 내 돈을 훔쳐 가려고 말이야. 하지만 상대가 안 좋았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사람이거든.”

정천이 소녀의 팔을 풀어 주었다. 겨우 풀려난 소녀가 잡혔던 팔을 문질렀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쁜 새끼!”

“미쳤군. 나처럼 나쁜 놈한테 함부로 욕을 해서야 쓰겠어? 지금도 내 사정권 안인데.”

소녀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애는 애인지 얼굴 가득 두려움이 나타났다.

정천은 그녀를 더 놀리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그만 가라. 오늘 일은 교훈으로 삼고. 그리고 웬만하면 눈에 띄는 식으로 접근하지 마. 지금은 어리니 괜찮지만 조금만 커도 금세 눈치채일 거다.”

“…….”

“차라리 인파 속을 노려라. 발자국이 얕게 파이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인상만 갖고 목표를 정하지도 마라. 고수들은 양의 얼굴 안에 범의 이빨을 숨겨 두고 있으니까.”

소녀는 쭈뼛거리며 말을 들었다. 욕을 하긴 했어도 정천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듣는 자세는 제법 되어 있군. 어쨌든 이제 가라. 녀석들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

쭈뼛거리던 소녀가 도망치듯 멀어졌다.

정천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청년을 내려다봤다.

“근데 너 진짜 약하더라.”

“……거듭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가 약한 건 알고 있으니까요.”

“좋군. 자기가 약한 줄도 모른다면 정말 구제불능일 텐데.”

“절 놀리려고 남으셨습니까?”

“반쯤은.”

청년은 한숨을 쉬었다. 소녀처럼 욕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러진 않는 게 좋을 듯했다. 그는 소녀와 달리 도망칠 처지가 안 됐으니.

정천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널 데려가기 위해서다.”

“예?”

“강해지고 싶지 않나?”

청년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이윽고 미심쩍은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어째 못 믿겠다는 눈인데.”

“지금까지 저한테 그런 얘길 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니, 하지만 모두들 실패했다는 건 알겠군.”

청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파서 곧장 관뒀지만.

그는 푸념하듯 정천에게 말했다.

“어느 의원이 제게 말하더군요. 너는 육혈난맥(六穴難脈)을 타고나서 내공을 제대로 갈고닦을 수가 없다고요. 실제로 제 단전의 그릇은 다른 이들에 비해 턱없이 작습니다.”

정천은 잠시 청년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그 의원이 돌팔이로군.”

“예?”

“육혈난맥이 아니라 구혈난맥(九穴難脈)이야. 상반신의 여섯, 하반신의 세 기혈이 엉망이군.”

“……더 나쁜 거지요?”

“응.”

청년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정천은 피식 웃고서는 청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걱정 마. 내공을 모두 잃고도 잘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별로 위로는 되지 않는데요.”

“그거야 네 사정이지. 어쨌든 어때,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대체 어디를 말입니까?”

“화륜문.”

청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렇다면 소문의 그……?”

“응. 대강은 들은 모양이군.”

“물론이죠. 요즘 그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겠지. 문파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몇 없지만 말이야.”

그의 말대로였다.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화륜문의 위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어떻게 할래? 아마 사문도 따로 없을 테지? 화륜문에 입문하면 후회는 하지 않을 거야.”

청년의 얼굴에 기대감이 나타났다.

“제 육혈, 아니, 구혈난맥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힘들걸.”

딱 잘라 말하는 정천. 청년은 바로 실망했다.

“그럼 강해지는 것도 힘들잖습니까.”

“그렇지는 않지.”

“네?”

정천은 담담히 말했다.

“내공이 부족하면 그에 맞는 무공을 익히면 그만이야. 고쳐지지도 않을 몸뚱이만 붙들고 있느니 그쪽이 차라리 낫지.”

“그건…….”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정천의 말이 그럴싸했던 까닭이다.

열 살 때의 그는 소문난 기재였다. 타고난 감각과 성실성은 다른 아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공의 증진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기재는 이내 범재가 되고, 범재는 다시 둔재가 되었다.

그는 어느새 문파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끝없는 노력도 재능의 부재 앞에선 바보짓이 되었다.

그걸 실감한 후, 사흘 밤낮을 울고서 문파를 뛰쳐나왔다.

그는 용하다는 의원들을 찾아 중원을 헤맸다. 어느 의원은 약을 팔았고, 어느 의원은 침을 놓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몸을 치료하진 못했다.

그렇게 흘러들어 온 곳이 황룡성.

무림의 중심인 이곳에마저 희망이 없다면, 조용한 산촌으로 가 농사나 지으며 살려고 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나타났다.

“제가 정말 강해질 수 있을까요?”

“노력한다면.”

청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정천이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심후…… 입니다.”

“좋다, 심후.”

정천이 손을 내밀었다.

“강해지고 싶다면 내 손을 잡아. 화륜문의 문주에게로 안내해 주지.”

청년, 심후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애써 일으켰다.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몸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참아 냈다.

심후가 정천의 손을 기어코 쥐었다. 정천은 미소를 지은 채 혼절해 쓰러지는 그를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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