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신생 화륜문
서윤학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에게 적의는 없소. 그저 오라비를 잘못 두었음을 후회하시오.”
“그 말, 그대로 돌려 드리죠.”
대꾸를 한 화연란이 심호흡을 하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정천에게서 받은 이후 항시 곁에 두고 지냈던 검이었다.
서윤학도 검을 뽑았다.
그리고 별안간 몸을 날려 화연란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탓!
그의 몸이 연못의 수면을 살짝 밟고 도약했다. 동그란 파문 하나가 일어나는 동안 삼 장 길이의 연못을 주파해 화연란의 앞으로 짓쳐 들었다.
‘빠르다!’
화연란은 긴장했다. 예상은 했지만 서윤학의 무위는 그녀를 가볍게 넘어서고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새삼스레 의문이 드는 순간.
눈앞으로 쇄도하는 검신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차앙!
아슬아슬하게 검신끼리 충돌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어깻죽지가 찢어졌으리라.
“차앗!”
서윤학이 기합성을 지르며 연격에 나섰다. 이번엔 땅을 디디는 만큼 전력을 담는 것이 가능했다.
그의 검신이 순간 다섯 개로 늘어났다. 각각의 칼끝이 기기묘묘한 궤적을 그리며 화연란을 노렸다.
설중오엽(雪中五葉).
화산의 매화검에서 갈라져 나온 검법이었다.
각각의 칼날들이 그녀의 팔다리와 인중을 노리고서 쇄도했다. 평소의 화연란이라면 당황하여 뒷걸음질만 쳤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활로를 인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파고들어. 놈의 명치를 노린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둘러.
정천이 보내오는 전음!
그녀는 두려움을 버리고서 앞으로 전진했다.
“큭?”
서윤학이 당황했다. 설마 도리어 치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
그의 오검은 화연란이 물러나는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궤적 사이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고, 결과적으로 접근하는 적에겐 취약한 형태였다.
그 맹점을 정확하게 찔린 셈.
“하앗!”
화연란이 검을 빠르게 떨쳤다. 패화영신검의 일초식인 유사화가 펼쳐졌다.
화르르륵!
불꽃을 머금은 칼날이 서윤학의 명치를 노리고 들어갔다. 서윤학은 결국 설중오엽을 거두고서 연못 쪽으로 몸을 날렸다.
화연란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앞섶을 베었다. 물론 무공이 무공인만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악!
서윤학의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크윽!”
그는 당황하여 그대로 연못에 몸을 담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았다.
엉망이 된 채로 일어서는 서윤학.
온몸이 물에 젖은 데다 옷까지 반쯤 타서 그야말로 엉망인 모양새였다.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죽여 버리겠다!”
표독스런 외침에도 화연란은 침착했다. 그녀는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정천의 말에만 집중했다.
—놈은 힘으로 널 제압하려 들 거다. 비무장에서의 너라면 거기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도망치는 게 최선일 테지. 하지만 이곳이라면 다르다.
화연란은 정천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놈이 연못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 물의 저항이 녀석의 움직임을 제약해 줄 거다.
‘알겠어요.’
그녀가 성큼성큼 서윤학에게 다가갔다.
서윤학은 마침 연못에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화연란이 칼끝을 뻗었다.
쉬익!
평범한 찌르기였으나 속도만은 발군이었다. 그 자체만 따졌을 땐 서윤학의 찌르기보다도 위력적인 수준.
미완성의 무공을 익힌 화연란이었다. 때문에 기본기에 그만큼 공을 들여야 했다.
그 기간이 무려 십여 년.
일개 찌르기조차 일가를 이룰 정도의 시간이었다.
“윽!”
서윤학이 찔끔 놀라 물러났다. 그럼에도 완전히 피하지 못해 흉부에 생채기가 생겼다.
그의 몸이 다시 연못에 잠겼다.
“이년이!”
그가 이를 악물고서는 위로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화연란이 한 발 앞서 경공을 펼쳤다.
그녀는 서윤학의 머리 위를 스쳐 가며 검을 내찔렀다. 유사화의 불꽃이 서윤학의 앞에서 터졌다.
“크으!”
서윤학이 다시 물에 처박혔다. 그 와중에 머리까지 그을리고 말았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서윤학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푸른빛의 검기가 그의 칼날에 모여들었다.
서윤학이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부우웅! 부웅!
연달은 기운이 화연란에게 쇄도했다. 하나라도 잘못 맞았다간 몸이 그대로 절단되어 버릴 터.
—침착해. 어떻게 날리든 결국은 일직선의 형태다. 게다가 저렇게 흥분한 상태라면 정확성도 떨어진다.
화연란은 정천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착하게 보법을 밟았다.
콰과과광!
검기가 건물 벽에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위력적인 모습.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화연란의 살을 베거나 뼈를 가르진 못했다.
“헉헉! 헉헉……!”
서윤학이 숨을 헐떡였다. 쓸데없이 검기를 남발한 탓에 기력의 소모가 컸던 까닭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 화연란이 덤벼들었다.
“으으, 비겁하다!”
수세에 몰린 서윤학이 소리쳤다. 장내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파바바밧! 팟!
화연란은 연못 위를 가로지르며 검격을 퍼부었다. 되도록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방팔방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바쁘게 발을 놀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물의 저항이 서윤학의 체력을 앗아 갔다. 처음엔 별것 아닌 수준이었으나, 검격이 십여 차례를 넘어서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서윤학의 움직임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악!
그의 왼쪽 어깨가 찢어지며 피를 뿌렸다. 화연란이 검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크으으윽!”
서윤학이 비틀거렸다. 화연란은 연못가의 바위에 착지한 다음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까?”
“웃기지 마라!”
독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서윤학.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 순간 화연란은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실감했다.
—방심하지 마!
정천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서윤학이 검을 내뻗었다.
“죽어라!”
설중오엽의 검기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회심의 일격인 듯 몰아치는 다섯 발의 검기!
화연란은 유사화를 펼침과 동시에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검기들이 충돌하며 폭발했다.
콰과과광!
“……!”
그녀가 서 있던 바위는 절반가량이 날아가 버린 뒤였다. 화연란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녀는 내심 반성했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고 해도 그녀의 실력은 서윤학의 아래였다.
정천의 외침이 없었다면 조금 전 검기 다발에 난도질을 당했으리라.
‘더 방심하진 않아.’
그녀는 마음을 다지고서 반격에 나섰다.
화연란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서윤학을 견제해 들어갔다.
파밧! 팟!
사방에서 쇄도하는 검격.
서윤학의 얼굴이 차츰 하얗게 질려 갔다.
이미 몇 차례의 검기 출수로 기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런데다 물의 저항까지 받으며 움직이느라 체력도 바닥나 버렸다.
게다가, 미처 몰랐지만 체온까지 차가운 물에 빼앗기고 있었다.
결국은 그의 몸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화연란이 다시 연못가에 착지했다. 이제 서윤학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패화영신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젠 마지막 일격을 먹여도 되겠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때 서윤학이 입을 열었다.
“패, 패배를 인정하겠소.”
“……정말인가요?”
“패배를 인정하겠소. 내가…… 졌소.”
그 말을 끝으로 서윤학이 뒤로 널브러졌다. 첨벙 하는 소리가 정적 속에 울렸다.
화연란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검을 회수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 *
“언니, 정말 대단했어요!”
제갈세연이 달려와서는 화연란에게 안겼다. 그녀 역시 기력 소모가 컸던지라 잠깐 휘청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는 그녀를 안았다.
“운이 좋았어.”
“운이 아니라 실력이죠! 누가 봐도 서윤학을 압도했는걸요?”
“아냐. 그는 정말 강했어. 만약 다른 곳에서 싸웠다면 내가 이길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오라버니의 조언이 없었다면…….’
아찔한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그야말로 미세한 차이였을 뿐이다.
“뭐, 확실히 운이 좀 따랐지.”
정천의 목소리였다. 그가 화연란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뻔했어. 알고 있지?”
“네…….”
풀이 죽은 목소리로 화연란이 대답했다. 확실히 그때, 정천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오빠는 좀 잘했다고 칭찬해 줄 순 없어요? 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면서.”
“구경만 하다니? 나도 란아와 함께 싸웠다고.”
정천이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속으로 말이야.”
“어휴, 그러시겠죠.”
제갈세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화연란은 그만 쿡 하고 웃고 말았다.
정천이 그녀를 돌아봤다.
“네게 축하해 줄 사람들이 더 있어.”
“네?”
정천이 고개를 돌렸다. 화연란이 그쪽을 보니 용봉소회의 회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떨떠름해하는 사람부터 두 눈 가득 이채를 띤 사람까지. 모용린은 전자였고 윤평은 후자였다.
윤평이 그들을 대표하여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화연란 소저. 소저는 오늘 부로 용봉소회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네?”
화연란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그저 서윤학을 상대로 승리했을 뿐인데 용봉소회의 일원이 되다니?
“그리고.”
모용린이 말을 받았다.
“오늘 부로 서윤학은 용봉소회에서 축출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우리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고작 비무 한판을 진 것뿐인데.”
정천의 말에 모용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는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패배했습니다. 그것이 실력이든 운이든 간에…….”
모용린의 시선이 화연란을 날카롭게 훑었다.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 못해 꼴사납게 지는 일 따위, 용봉소회에선 용납할 수 없습니다.”
“거 무서운 모임일세. 뭐, 너희들 모임이니 알아서들 하라고.”
몇몇 시선들이 정천의 얼굴에 비수처럼 꽂혔다. 정천은 픽 웃으며 담담하게 넘길 따름이었지만.
모용린은 제갈세연과 화연란을 돌아봤다.
“두 사람 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용봉소회의 일원이 된 이상 그만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누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
제갈세연이 항변했지만 모용린은 싹 무시했다. 제갈세연은 얄미운 듯 이를 갈았다.
모용린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용봉소회의 여성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윤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정천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꼭 곤륜산 얼음고드름 같은 계집앨세. 같이 다니려니 힘들겠군.”
윤평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긴 합니다만 좋은 사람입니다.”
“굳이 옹호해 줄 필요 없어. 험담한다고 해서 일러바치진 않을 테니.”
“아뇨,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뭐,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고. 그나저나 괜찮겠나?”
“예?”
“서윤학 말이야. 그냥 저렇게 잘라 버리면 정운장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나아가 그 뒤에 있는 화산파도 그렇고.”
윤평이 의외라는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놀랍군요. 그런 것까지 걱정하실 분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요.”
“난 언제나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거든.”
“……확실히 그 자신감만은 그런 것 같군요. 뻔뻔하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윤평이 정천에게 말했다.
“아마 용봉소회엔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겁니다. 근래 정운장이 급성장을 했다고는 해도, 소회의 문파들을 건드릴 정도는 되지 않으니까요. 저는 도리어 화륜문이 걱정입니다만.”
“뭐, 우리도 자기 몸 건사할 정도는 되니까.”
윤평은 태연히 대꾸하는 정천에게 흥미를 느꼈다. 정말 자신이 있지 않고선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례지만 문파의 구성에 대해 물어도 될는지?”
“구성이라?”
“예. 문도의 숫자라거나 문주 되시는 분의 무공 성취가 어떠한지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 정말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물음이었다. 듣는 이에 따라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평이 조심스러워 한 것이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문파의 문도 숫자는…… 일단 아무도 없다고 해 둬야겠군. 그리고 문주의 실력은 방금 봤잖아?”
“예?”
윤평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있던 용봉소회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천이 다시 말했다.
“화륜문의 문도, 즉 제자는 아직 한 명도 없어. 그리고 문주는 조금 전 서윤학을 쓰러트린 그 아이지.”
“그럼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난 그냥 그 아이를 돕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윤평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따름이었다.
“혹시 모르나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정운장의 문도는 대략 이백 명에 이릅니다. 그중 서윤학 정도의 고수도 족히 열 명은 되고요.”
“그래? 생각보단 괜찮은 문파였네.”
“그 괜찮은 문파가 화륜문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십중팔구 원한을 가질 겁니다.”
“재미있겠군.”
윤평은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말을 나눌수록 이 사내에 대해 알 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분명 멍청이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의도적으로 서윤학을 도발하고 자신들로 하여금 내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기를 결국 승리로 이끌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윤평도 잘 몰랐다. 화연란이 본 실력을 숨긴 것인지,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승리했고 용봉소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 모두를 처음부터 의도한 거라면, 그는 정말 천재인 셈이었다.
‘혹시 신분을 숨긴 제갈세가의 사람인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제갈세연과 동행한 것만 봐도 그랬고.
‘관심을 둘 필요가 있겠구나.’
윤평이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자는 무당파의 도약에 있어 꼭 필요한 인재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운장의 움직임에 주의하시길.”
윤평은 예를 취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화연란이 정천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왜 그러셨어요?”
“응?”
“용봉소회 말이에요. 굳이 제가 거기에 가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해 둬서 나쁠 건 없을걸. 무엇보다 견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잖아. 일문의 문주라면 많은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지.”
“하지만…….”
화연란이 머뭇거렸다. 그녀 역시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었다.
정운장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걸.
정천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화륜문은 정운장보다, 아니, 다른 어떤 문파보다도 강해질 거다. 대주님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만큼의 문파가 될 거다.”
“오라버니…….”
“게다가 정 위험하다 싶으면 와룡장에다 보호해 달라고 하면 되고.”
“오빠!”
옆에 있던 제갈세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정천은 두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래 봐야 들릴 건 다 들렸지만.
“그나저나, 너희 둘은 괜찮겠어?”
“또 뭐가 말이에요?”
정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 걔. 모용린인가 하는 계집애.”
“그 재수 없는 여자가 왜요?”
“보아하니 다른 여자애들을 이끄는 입장 같던데? 윤평은 아마 남자들의 대표인 것 같고. 용은 용대로, 봉은 봉대로 행동한다는 거겠지.”
“그래서요?”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금지옥엽으로 자란 그녀답게, 파벌의 무서움을 전혀 몰랐다.
그것은 화연란 역시 마찬가지. 그녀 역시 또래의 여성들을 만나 볼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정천은 좀 더 쉽게 설명했다.
“간단해. 모용린이 마음만 먹으면, 거기 여자애들 전부가 너희랑은 말도 붙이려 들지 않을 거야.”
“잘됐네요. 그런 애들이랑은 상종도 하기 싫으니까.”
“글쎄. 매번 봐야 하는 사이라면 얘기가 다를걸.”
“됐어요. 저야 언니만 곁에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화연란을 꼭 붙드는 제갈세연이었다.
그것을 본 정천도 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알아서 잘해 봐라.”
* * *
얼마 후.
화륜문의 장원이 그 모습을 완성해 갈 때쯤, 제갈세연이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울상 일색이었다.
“언니! 왜 걔들이랑 어울리는 거예요?”
“으, 으응?”
“오늘요! 아미파 계집애가 준 당과를 먹었잖아요!”
“그거야…… 기왕 받은 거니 예의상 그냥 먹었어.”
“고것이 나만 쏙 빼놓고 사람들한테 당과를 돌렸단 말이에요. 다들 먹었는데 나만 못 먹었어요!”
“그, 그랬니?”
“오늘뿐만이 아니에요. 언니, 어제도 걔들이 나눠 주는 면경을 받았죠?”
“그, 그건 가입 선물이래서…….”
“나한텐 주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화연란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주는 거라기에 그냥 받았던 것이다.
덜컹.
방 안에서 낮잠을 자던 정천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말했잖아, 조심하라고. 아마 그것도 모용가 계집애가 꾸민 짓일걸.”
“정말요? 모용린 그것이 꾸민 짓이라고요?”
제갈세연이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정천은 바깥으로 나와 마루에 앉았다.
“친한 사이를 반으로 갈라놓는 거야 간단한 일이지. 한 명만 잘 대해 주면 나머지 하나는 소외감을 느끼고, 나아가 배신감을 느끼게 되거든.”
제갈세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의 그녀가 딱 그러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화연란도 놀란 얼굴이었다. 정천은 그녀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뭐, 사람 사는 세상이야 지금이나 십 년 전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내가 잘 아는 게 아니라 너희가 너무 모르는 거야. 세상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 그렇겠지만.”
제갈세연은 최근까지 융중산의 본가를 떠난 적이 없었고, 화연란 역시 마을을 지키느라 바깥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반면 모용린은 노련했다. 아마도 사람 다루는 일도 여러 번 해 본 모양이었다.
‘그래 봐야 애들 수준이지만.’
제갈세연이 정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모용린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이럴 텐데!”
“둘 중의 하나지. 걔한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거나.”
살짝 뜸을 들인 정천이 말했다.
“걔가 지니고 있는 권력을 쟁취하거나.”
“어떻게요?”
“방법이야 여럿이지. 무력으로 누르거나 다른 애들의 마음을 얻거나.”
“우우…….”
제갈세연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도 쉬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화연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굽히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앞으로 잘 지내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그건 싫어요. 누가 뭐래도 모용린 고 계집애한텐 지지 않겠어요.”
“이기고 지고의 문제 같진 않은데.”
정천이 한마디 했다가 제갈세연의 눈총만 받았다.
“뭐, 하여간 알아서들 잘해 봐라.”
“정천 오빠는 여기서 낮잠만 즐기고 있을 건가요?”
제갈세연이 말을 돌렸다. 사실 그녀는 용봉소회보다도 화륜문에 관심이 많던 차였다.
옛 청화촌은 완전히 모습을 달리했다. 거대한 장원과 그에 딸린 숙소와 건물들이 지어진 상태였다.
건축 작업이 아직 채 끝나진 않았으나 장원만은 그럭저럭 형태를 갖춘 상황.
그러나 찾아오는 이는 아직 없었다.
“소문이 돌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입문을 청하는 이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게.”
“그러게가 아니죠. 궁금증에라도 사람이 찾아와야 정상인데 아무도 오질 않잖아요.”
“어중이떠중이가 몰려오는 것보단 낫지. 기왕 올 거라면 키워서 도움이 될 법한 놈이 오는 게 낫다.”
“그런 사람이 오기는 오겠어요?”
“영리한 놈이라면 반드시 올걸.”
정천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슬슬 소문이 효과를 낼 때가 됐으니까.”
“……정말로요?”
“아마도?”
“그럼 그렇지.”
제갈세연이 한숨을 쉬었다. 화연란은 반면 난처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정천의 본모습을 모르는 이와 아는 이의 차이는 그렇게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