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 용봉소회 (14/146)

第二章 용봉소회

“휴, 겨우 살았네.”

제갈세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연란이 난처하게 웃으며 물었다.

“붙잡히면 꽤 곤혹스럽게 되나 보구나.”

“어휴, 말도 마세요. 반나절은 유모 잔소리를 들어야 할걸요? 유모는 다 좋은데 잔소리나 훈계하는 게 너무 심해요.”

“다 너를 아끼니까 그러는 걸 거야.”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누구보다 유모에게 고마워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도 용봉소회 같은 데는 꺼려지는걸요?”

듣고 있던 정천이 한마디 했다.

“제갈세가의 미래가 어둡군.”

찌릿!

제갈세연이 정천을 흘겨봤다. 그런다고 눈썹 하나 꿈쩍할 정천이 아니었지만.

“뭐가 어둡다는 거예요?”

“응? 방금 듣지 않았나?”

“오빠도 용봉소회를 못마땅해 했잖아요!”

“그거랑 이건 별개의 문제지.”

정천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용봉소회란 것은 일종의 인맥 형성용 모임인 것 같더군. 아마 어릴 적부터 서로를 눈에 익게 해서 필요할 때 쉽게 작당할 수 있게끔 하려는 목적일 거다. 참석하는 건 애송이들이지만 그 뒤엔 어른들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요?”

“너는 호불호를 떠나 가문의 대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네 일거수일투족이 제갈세가의 명망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세가의 명성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제갈세연의 표정이 순간 경직됐다.

“그런…….”

“뭐, 제갈세가의 경우야 군사나 비영대가 뒤에 있으니 함부로 떠들어대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건 피하지 못할걸.”

“…….”

제갈세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가기 싫었다. 자신이 가문의 부속품으로 취급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쩌면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천은 그거야말로 유치한 바람이란 것을 꼬집었다. 냉정한 말투와 설명으로.

“그나저나 진짜 배고프네. 제갈순 그 인간은 이런 쪽으론 눈치가 없단 말이야.”

정천이 한가하게 중얼거렸다. 제갈세연의 고민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진짜 미워.”

나직이 중얼거리는 제갈세연.

화연란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오라버니, 말씀이 너무 심했어요.”

“……란아야, 자꾸 그렇게 오냐오냐 하기만 해서는 애 버릇 나빠진다.”

“오라버니 말마따나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면 좀 보듬어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정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긴 남의 집 자식 버릇을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겠군. 그냥 네 좋을 대로 해라. 군사 이마의 주름은 깊어지겠지만.”

“흥, 농땡이나 피우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네요!”

“너도 그럼 뇌물 먹이든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황룡성의 중심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디부터 갈까요?”

“우선 배부터 채워야지. 밥 먹자고 나온 건데.”

화연란의 물음에 정천이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제갈세연이 말을 돌렸다.

“언니, 옷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요?”

“응?”

“옷이요. 제가 괜찮은 가게를 한 곳 봐 두었거든요?”

“야, 옷은 무슨 놈의 옷…….”

정천의 말끝이 흐려졌다. 화연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서 중얼거렸다.

“옷 구경이라고……?”

지난 십 년 동안 즐길 것 못 즐기고 마을을 지켜야 했던 그녀다. 또래 여인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도 차마 누릴 수 없었다.

당장 입고 있는 옷가지부터가 오래 입어 군데군데 헤진 상태.

크게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화연란이 정천을 돌아봤다.

“오라버니, 옷 가게부터 들렀다 가면 안 될까요?”

“그건 싫…….”

“안 될까요?”

재차 묻는 화연란.

갈구하는 눈빛까지 보내오는데, 차마 싫다는 말이 안 나왔다.

“그냥 너희끼리 다녀오면 안 되겠냐?”

“오빠도 같이 가요. 짐 들어 줘야죠.”

정천이 어이가 없어 제갈세연을 돌아봤다.

“바위도 번쩍 들어 올리는 주제에 짐은 무슨 짐? 내공만 좀 돌리면 네 완력이 나보다 셀 텐데.”

제갈세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빠, 돈은 가져왔어요?”

“…….”

바지춤을 뒤적거려 본 정천이 침묵했다.

성과급으로 받았던 돈은 다른 금전과 함께 와룡장에 맡겼다. 최근 돈 쓸 일이 거의 없었던 까닭에 그냥 처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와룡장에서 받은 백지 전표를 쥐고 있는 사람은…….

화연란이 미안한 듯 웃었다.

“같이 가도록 해요, 오라버니.”

“…….”

여인과 소녀는 어린아이처럼 가게를 휘저었다. 그녀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에 정천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단 거적때기가 그렇게 좋나?”

가릴 곳 가릴 수만 있으면 좋은 옷이라는 게 정천의 지론이었다. 원체 겉치레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대체 뭐야, 이 경망스러운 곳은?”

이곳 자체였다.

그들이 와 있는 곳은 화옥점(花鈺店)이란 이름의 가게.

척 봐도 여성들만을 위한 옷 가게라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선 단순히 옷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형형색색의 연지와 분을 비롯한 갖가지 화장품 역시 판매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예 자리까지 따로 두어 화장대를 진열해 놓았다. 직접 화장해 보시라는 의도였다. 덕분에 가게 전체에 여성들이 쉴 새도 없이 득실거렸다.

“어머나, 이게 서역에서 건너온 백분이라면서요? 진주를 갈아 만들었다는……?”

“정말요? 그럼 어디 한 번?”

“꺄아! 저 비단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쉴 새 없이 귀를 찌르는 여성들의 수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분 냄새.

만독불침과 평정지심에 통달한 정천으로서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거야 원. 차라리 금역 한가운데에 있는 게 더 편하겠군.

—…….

—근데 너도 이런 것 좋아하냐?

정천이 전음을 날리는 대상은 담미화였다. 그녀라면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옷보다는 장신구 쪽이 좋습니다.

—얼씨구. 여기에도 꽃다운 처녀가 있었군.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여자는 다들 똑같은가 보네. 얼굴에 분칠하는 게 그렇게 좋나?

정천이 탄식하고 있을 때 옷을 고른 화연란과 제갈세연이 돌아왔다.

“오라버니, 저희 어때요?”

그녀들을 돌아본 정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엷게 화장을 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꽃이 만개한 것 같아, 주변 여성들이 빛을 잃는 듯했다.

실제로 가게의 여성들 대부분이 그녀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동경과 질투를 두 눈에 가득 담고서.

정천은 솔직하게 소감을 말했다.

“너희들, 역용술이라도 쓴 거냐?”

“역용술이라뇨. 가볍게 화장을 한 것뿐이에요.”

“여자 화장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 것 같군.”

“피, 그래도 보기는 좋죠?”

제갈세연의 물음에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젊은 놈들은 좋아하겠어.”

“오빠는 안 그렇고요?”

“애들한테 흑심 품으면 그건 나쁜 놈이지.”

“피이.”

제갈세연은 혀를 샐쭉 내밀었다. 화연란도 장난스럽게 정천을 흘겨봤다.

“오라버니도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젊은걸요. 사실 우리하고도 몇 살 차이 나지 않아 보일 거예요.”

“그렇겠지. 그래도 난 네 기저귀도 갈았던 몸이란다, 란아야. 너도 얘도 내 관점에선 충분히 어려.”

화연란의 표정이 살짝 붉어졌다.

“그, 그 얘기는 왜 하고 그래요? 어쨌든 저 짐이나 좀 들어 주세요.”

“짐?”

그제야 그녀들의 뒤쪽을 본 정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벌의 옷가지가 그곳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예요, 옷이지.”

“평생 입어도 다 못 입겠는데?”

“어휴, 그만 툴툴대고 좀 들어 주세요.”

정천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청화촌 재산 탕진되는 것도 순식간이겠군.”

“오늘만 좀 쓸게요. 봐주세요, 오라버니.”

화연란의 말에 정천은 더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간 그녀가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 사치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 이러면 곤란하겠지만.’

* * *

그녀들은 정천에게도 옷가지를 사 주려 했다. 정천 본인이 극구 거부해서 수포로 돌아갔지만.

제발 밥 좀 먹자는 정천의 말에 제갈세연이 물었다.

“그럼 제가 자주 가는 곳으로 갈까요?”

“……자주 가는 곳 아니라도 좋으니 아무 데나 가자.”

“알았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좀.”

제갈세연이 두 사람을 안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첫눈에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주루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긴 주루잖아? 지금은 술보다 음식이 고픈데.”

“이곳은 음식도 맛있어요. 따라오세요.”

칠성루(七星樓)라는 이름의 주루였다. 척 봐도 배경깨나 좋은 사람들이 드나들 만한 곳으로 보였다.

그들은 곧바로 경치 좋은 곳으로 안내되었다. 정천이 들고 온 대량의 옷가지는 점소이가 맡아 두겠다며 가져갔다.

화연란과 제갈세연의 뒤로 수많은 시선들이 따랐다. 그녀들의 미색은 칠성루 안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이다.

그 시선들이 싫지 않은지 두 사람이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곳곳에서 남성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어!”

“오오…….”

정천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여자들도 그렇지만 사내들도 생각하는 건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칠성루는 기이하게도 한가운데가 비어 있는 형태였다. 누각과 연못 등이 놓인 정원을 건물이 둥그렇게 에워싸는 모양새로, 어느 층의 어느 자리에서건 그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식단을 보며 제갈세연이 물었다.

“어느 것 먼저 드실래요?”

“양 많고 맛있는 것.”

“……단순해서 좋네요. 알아서 골라드리면 되죠?”

“양은 무조건 많이.”

“휴, 알았어요.”

제갈세연이 음식을 주문했다.

얼마 되지 않아 홍삼이 들어간 오리탕과 완두가 곁들여진 돼지 구이, 복숭아 즙을 얹은 농어 찜 등이 푸짐하게 나왔다.

“와아.”

화연란은 감격까지 한 표정으로 음식들을 바라봤다. 그녀로선 생애를 통틀어 구경도 못 해 본 음식들뿐이었던 것이다.

정천은 별다른 감탄 없이 고기부터 들어 뜯기 시작했다.

제갈세연도 음식을 그릇에 덜기 시작했지만 화연란은 그때까지도 어쩌질 못하는 기미였다.

“왜 그러세요, 언니?”

“응? 아, 왠지 먹기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

그녀의 대답에 제갈세연이 웃었다.

“앞으로는 이런 음식도 자주 드세요. 언니는 조금 더 즐기셔도 돼요.”

“하지만…….”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퉁명스럽게 말한 정천이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좀 더 즐기는 편이 대주님으로서도 기쁠 테고.”

“……그렇겠네요.”

아련한 미소를 지은 화연란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제갈세연은 두 사람의 대화에 의문을 느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왠지 두 사람만의 유대 같은 게 있어 보였기에.

‘조금 배 아프네.’

부러운 것을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질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은 샘이 났다.

그때 그들 사이로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연꽃 두 송이가 청초하게 피어 있군. 이곳엔 두 분이서 오셨소?”

훤칠한 키의 청년이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얼굴 가득 자신감이 넘치는 게, 이름깨나 있는 문파의 일원인 듯했다.

제갈세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이렇게 되는구나.’

칠성루의 몇 안 되는 단점 중 하나였다.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기에 그만큼 제 잘난 줄 아는 사람도 많다는 것.

“보면 아실 텐데요. 세 사람이 왔어요.”

그녀의 대꾸에 청년이 피식 웃었다.

“저 친구는 하인 같아 보이는데.”

그가 가리키는 이는 물론 정천이었다. 정작 본인은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제갈세연이 급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일행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요.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

“방해해선 곤란하겠군. 그럼 이름만이라도 알 수 없겠소, 소저?”

제갈세연을 보던 청년이 화연란에게도 시선을 옮겼다.

“두 분 모두 말이오.”

“…….”

화연란이 곤란한 얼굴로 제갈세연을 보았다. 추파를 받는 거야 익숙했지만 이런 상황은 낯선 것이었다.

제갈세연이 체념한 듯 말했다.

“제갈세연.”

“화연란입니다.”

청년의 눈빛이 빛났다. 후자는 처음 듣지만 전자는 무척이나 유명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럼 군사 제갈현의……?”

“그래요. 이름을 알았으니 이젠 물러가 주시겠죠?”

대놓고 물러가라는 말과 다름없는 말. 그러나 청년은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하하. 본인은 정운장의 서윤학이라 하오. 오늘 이렇게 두 귀인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소.”

정운장(鄭雲場)은 근래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문파였다.

여기엔 화산파라는 배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컸다.

서윤학은 그중에서도 장주인 도열궁의 수제자. 제갈세연 역시 몇 차례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의 신성(新星)이었다.

서윤학이 노골적으로 말했다.

“합석해도 되겠소?”

제갈세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조금 곤란하겠군요. 말했다시피 일행끼리 나눌 얘기가 있어서요.”

“그렇군. 아마 용봉소회를 빠져야 했을 만큼 중요한 일인가 보오?”

제갈세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서윤학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필 오늘 모임의 장소가 이곳, 칠성루라서 말이오. 다른 참석자들 모두가 이곳에 와 있소.”

서윤학이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그쪽을 보니 스무 명가량의 남녀가 큰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

서윤학이 말했다.

“불참의 이유를 듣고 싶소만.”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하겠는데요.”

“그건 곤란하오. 용봉소회는 나오기 싫다고 마음대로 불참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말이오.”

제갈세연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좋게 해결하자는 얘기요. 소저께서 원한다면 본인이 잘 중재해 줄 수도 있으니 말이오.”

“미안하지만 중재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저들이 날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무슨 말을 나누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서윤학이 낮게 혀를 찼다.

“생각이 얕으시군. 평판이 나빠서는 세가에도 좋지 않을 터인데?”

“남들이 수군대는 소리 따위에 흔들릴 제갈세가라고 생각하나요?”

“소저야말로 용봉소회를 무시하고 있군. 우리야말로 장래 천무맹을 이끌어갈 인재들이란 것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이제 보니 천무맹의 미래도 어둡군.”

짤막한 한마디가 끼어들었다. 내내 음식을 먹고 있던 정천이었다.

서윤학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정천은 이제 깨끗이 그릇을 비우고서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무시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서윤학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너도 귀 먹었냐? 다 듣고서도 되묻는 녀석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천이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우스운 일이군. 어린것들이 모여 서로의 실력을 갈고닦는 게 취지라더니, 그 모임 장소라는 것부터가 주루여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인데.”

“이놈!”

“그 용봉소회란 이름은 누가 지은 거냐? 어떤 놈인지 몰라도 제정신이 아니군.”

스르릉!

서윤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됐다.

제갈세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죠? 당장 검을 거두세요!”

“그럴 순 없겠소. 내 명예가, 나아가 용봉소회의 명예가 훼손당한 이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소.”

서윤학이 차가운 눈으로 정천을 노려봤다.

“넌 대체 어느 문파 소속이기에 이토록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이냐?”

“나?”

정천이 픽 웃었다.

“화륜문.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둬야겠군.”

“……뭐야?”

서윤학이 멍한 표정을 했다. 제갈세연과 화연란은 기겁을 한 표정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정천은 여전히 태평한 얼굴이었다.

“화륜문이라고? 그런 문파 이름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럴 테지. 정식으로 문을 여는 건 며칠 뒤가 될 예정이니까.”

“뭣이?”

서윤학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잡놈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정천은 화연란을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란아야, 이걸로 문파 홍보는 제대로 됐지?”

“……네?”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은 화륜문의 이름을 똑똑히 각인하게 되었을걸. 이 정도면 홍보로는 최고 아니겠어?”

화연란은 미묘한 표정으로 정천을 응시했다. 이걸 칭찬해야 하는 건지 타박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천은 서윤학을 슬쩍 가리켰다.

“특히 이 멍청이는 영영 잊지 못할 테고.”

콰악!

식탁 위에 칼날이 꽂혔다. 서윤학은 검을 내리찍은 자세 그대로 정천을 노려봤다.

“네놈에게 결투를 청한다. 다시는 이죽거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마.”

“좋다.”

정천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갈세연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오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지만 싸우는 건 내가 아니다.”

정천이 화연란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얘지.”

장내의 모두가 순간 같은 표정을 했다. 하나같이 황당한 얼굴로 정천을 바라봤던 것이다.

서윤학이 이를 악물었다.

“네놈이 미쳤구나. 내가 그런 짓 따위를 받아들일 것 같나?”

“왜? 여자한테 질까 봐서 두렵냐?”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에도 정천의 얼굴에선 비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화륜문의 대표는 내가 아니라 이 아이거든. 네가 말하길 자신과 용봉소회의 명예를 위해 결투하자고 했으니, 이쪽도 응당 문파의 명예를 걸고서 싸워야겠지.”

“비열한 놈! 지껄이기는 잘하는구나!”

“그런 말은 이기고 나서나 하라고.”

가볍게 무시를 한 정천이 화연란을 돌아봤다.

“할 수 있겠지, 란아?”

화연란은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좋은 생각.”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설명했다.

“문파를 이루려면 응당 문도가 필요한 법이지. 하지만 청화촌 같은 구석진 마을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사람을, 나아가 인재를 모으려면 문파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게 최선이지.”

“그건 그렇지만…….”

“보아하니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한가락 하는 인물들 같더군. 저 녀석도 이름깨나 떨치는 녀석인 것 같고. 보기 좋게 쓰러트린다면 동전 하나 들이지 않고 문파의 이름을 알리게 되겠지.”

합리만을 따졌을 때 정천의 말은 얼추 옳아 보였다.

화연란 역시 최대한 많은 이들이 아버지의 검을 알아주었으면 했고.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도 제가 이겼을 때의 얘기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간단히 인정하는 정천.

그 태도가 너무 솔직해서인지 쓴웃음만 나왔다.

화연란은 힐끔 시선을 들어 연못 건너의 서윤학을 보았다.

그들은 칠성루 중앙의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건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곳인 만큼 결투의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서윤학은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천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시선엔 살기가 가득했다.

화연란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 강해.’

제갈세연은 그들이 식사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화연란을 내려다보며.

‘언니…….’

마음 같아선 당장 내려가 화연란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당사자들 외엔 결투에 끼어들지 말아야 했던 만큼 자리를 지켜야 했다.

‘으, 대체 어쩌다 일이 꼬인 거지?’

그녀는 힐끔 시선을 움직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용봉소회의 일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남 구경을 하듯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 여기서 저들을 만나다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실수였다. 칠성루가 황룡성에서도 귀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곳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저 화연란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는데, 도리어 그녀를 일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물론 제갈세연보단 정천의 잘못이 컸지만.

‘대체 오빠는 무슨 생각이지?’

칠성루의 사람들 대부분은 정천이 미쳤다고 수군대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화연란과 서윤학의 실력을 파악할 안목을 지녔던 것이다.

제갈세연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저자의 실력은 언니를 웃돌고 있어.’

정운장은 화산파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 중 하나였다. 그런 만큼 상당히 탄탄한 내공과 검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의 수제자가 서윤학.

그 실력은 본파인 화산파에서도 중견에는 들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천 오빠가 그것도 모르진 않을 텐데.’

정천은 바보가 아니다. 하물며 미치지도 않았다. 가끔 제정신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 정천이 괜히 일을 벌였을 것 같진 않았다.

화연란 역시 제갈세연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자와 제 실력을 비교하면 어떻죠?”

“그냥 붙으면 네가 이십 초 이내에 패배할걸.”

냉정한 평가에도 화연란은 당황하지 않았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요?”

정천은 그녀의 두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열심히 해 봐.”

“……네?”

화연란이 살짝 당황하려 할 때.

—우리 대화를 엿듣는 녀석들이 있어. 지금부터는 전음으로 말할게.

‘아.’

화연란은 눈빛으로 알았다는 의사를 보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놈의 약점과 버릇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너는 최대한 그것에 따라 검초를 펼치면 돼. 할 수 있겠어?

‘해내겠어요!’

화연란은 이번에도 눈빛으로만 말했다. 보는 눈이 많은 만큼 고개를 끄덕이기도 수월찮았다.

정천은 미소를 짓고서 소리 내어 말했다.

“너만 믿는다, 란아야!”

“맡겨 주세요.”

화연란이 결의를 다지며 대답했다.

정천은 최대한 연못에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린 틈을 타 점소이에게 다가갔다.

“이봐, 점소이.”

점소이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연못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정천이 부르자 멍한 얼굴로 돌아봤다.

“부르셨습니까요?”

“응. 여기 뒷문이 어디 있지?”

점소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망치려는 겁니까요?”

“쉿.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아니 지금, 일을 벌여 놓고는 몰래 도망치겠다는 겁니까요?”

점소이가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정천에게 집중됐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눈빛들이었다. 예상한 것보다도 열성적은 반응에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게 둘 수는 없지.”

몇몇 사람들이 정천에게 다가왔다.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용봉소회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정천을 둥글게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같이 적의를 담아서 그를 노려봤다.

그중 정면의 청년이 비난하듯 말했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 혼자 빠져나가려고 했습니까?”

그를 살펴본 정천이 내심 감탄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기운이 정갈하군. 이 느낌은 무당의 소청태극공(少淸太極功) 같은데.’

소청태극공. 무당파에서 엄선한 기재들에게만 전수된다는 절대심공 중의 하나였다. 용검대의 동료들 중에도 이를 익힌 이가 몇 명 있었다.

정천이 대뜸 물었다.

“이름이 뭐지?”

“윤평입니다. 무당의 제자이지요.”

“네가 용봉소회의 수장인가?”

윤평이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수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용봉소회의 일원 모두는 대등한 입장입니다.”

정천이 픽 웃었다.

“핑계 대기엔 딱 좋은 구성이군.”

“예?”

“그렇지 않나? 너희도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봤다면 알고 있을 텐데. 처음 우리에게 다가와서 시비를 건 쪽이 어느 쪽인지 말이야.”

윤평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습니다.”

“빨리도 하는군. 아까 놈이 설칠 때에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것은…….”

“하지만 그쪽도 잘난 듯 떠들 수는 없지 않나요?”

윤평이 어물거리자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이지적인 느낌의 미녀였다. 제갈세연과 비슷한 또래일 텐데도 더욱 성숙한 느낌이 났다. 다만 사람이 쉽게 다가서기 힘든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정천이 물었다.

“이름은?”

“모용린.”

정천은 깨달았다. 그와 화연란의 대화를 엿듣던 이가 이 여인이란 것을.

‘제법 꼼꼼한 성격 같군. 뭐,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지만.’

“조금 전의 그건 무슨 얘기지?”

정천의 물음에 모용린이 말했다.

“일차적으로 이쪽에 실수가 있었음은 인정하죠. 하지만 그게 이런 상황으로까지 퍼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소협의 잘못이 아닌가요?”

“한심한 걸 한심하다고 지적하는 것도 잘못이었군.”

“우선.”

그녀가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오늘 여기서 모임을 가진 것은 엄밀히 말해 제갈가의 아가씨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가입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본인이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러던 중에 당신들과 있는 것을 알게 됐고 말이죠.”

“처음부터 놈이 그걸 알고서 접근한 게 아닐 텐데?”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용봉소회를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진 말아 주었으면 하군요.”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앞으로는 주의하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소협이 굳이 그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저 소저가 결투에 나서는 일 역시 없었을 거예요. 소협이 도망치려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라니까. 패하지 않을 싸움인데 왜 도망친다는 거지?”

“그럼 왜 점소이에게 뒷문이 있나 물었죠?”

“잠시 뒷간이나 다녀올까 해서.”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응.”

태연히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본인이 그렇다니 모용린으로서도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쨌든 저 소저는 크게 다칠 겁니다. 서 공자는 여자라고 해서 봐줄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정천은 속으로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죠?”

“뭐, 간단해. 너희로서도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은 심심할 것 아냐? 게다가 저 녀석이 패배한다면 용봉소회의 이름에도 먹칠하게 되겠고.”

용봉소회 일원들의 얼굴에 의문이 드러났다. 내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평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간단하다. 내기를 하자는 거지.”

“내기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말했다.

“이쪽의 조건은 용봉소회에 받아들여 주는 것. 란아가 이긴다면 저 아이를 너희 모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는 거다.”

“……만일 진다면?”

“돈을 걸지. 금전 오천 냥이면 되겠나?”

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용린이 손을 들어 진정시킨 다음 물었다.

“어떻게 그 돈이 있다는 걸 보장할 수 있죠?”

정천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제갈세가가 보증할 거다.”

그의 손끝엔 얼떨떨한 표정의 제갈세연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오, 오빠?”

“금전 오천 냥이야. 세가에서 보증할 수 있어, 없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그리고 곧바로 몰리는 시선들에 더욱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천을 믿기로 했다.

“와룡장의 부장주이자 군사 제갈현의 질녀인 저, 제갈세연이 보증하겠습니다. 화륜문엔 금 오천 냥을 지불할 능력이 있습니다.”

모용린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요?”

“저는 분명히 말했어요.”

“가문의 이름을 걸겠다는 거군요. 모임에 마음대로 불참하는 분의 보증이라 신뢰하긴 힘들지만.”

“불참하진 않았지요. 여기 왔잖아요?”

“그런 궤변을…….”

모용린은 문득 고개를 저었다. 더 말장난을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윤평을 돌아봤다. 다른 이들 역시 그를 바라보는 걸로 보아, 그가 이 모임의 실질적인 중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윤평이 말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우리에게도 잘못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져야겠지요.”

정천은 빙긋 웃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모용린이 쏘아붙였다.

“아끼는 여동생의 패배를 지켜보게 될 테니까.”

용봉소회 회원들이 물러났다. 그제야 제갈세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정천을 다그쳤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오빠? 언니가 잘못되면 어쩌려고요! 게다가 도망칠 궁리까지 하다뇨!”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냐?”

정천이 혀를 찼다.

“내 신뢰도 바닥에 떨어졌군.”

“원래부터 신뢰가 없었던 게 아니고요?”

“…….”

그러는 사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제갈세연은 황급히 난간 쪽으로 향했고,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니…….”

화연란과 서윤학.

두 사람이 중앙의 연못을 사이에 둔 채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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