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第一章 부활하는 청화촌 (13/146)

第一章 부활하는 청화촌

황룡성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낀 건 별안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곳저곳 들쑤시던 유군광의 모습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준협을 비롯, 흑기단과 호궁위사대까지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황룡성 바깥으로 훈련이라도 간 줄 알았다. 혹은 맹주나 장로회의의 명령을 받아 임무에 파견된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확실해졌을 때, 천무맹 사람들 모두가 실감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황룡성 전체를 휩쓸었다.

수많은 추측이 뒤를 이었다.

유신청의 피습 건으로 미친개처럼 날뛰는 유군광을 다른 장로들이 축출했다는 것에서부터, 천무맹에 염증을 느낀 그들이 수하들을 데리고서 비밀리에 탈퇴했다는 것까지.

물론 어느 것 하나 확신할 만한 추측은 아니었다. 증거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극소수의 호궁위사대원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유신청뿐.

실종 당일의 기록이라고는 단독 훈련에 임할 계획이라는 것뿐. 그 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오.”

집행부주 군월중이 말했다.

“흑기단과 호궁위사대에 관한 목격담조차 없소. 황룡성을 빠져나갔다면 사방위 대문의 문지기들이 목격했어야 정상인데 그들 역시 못 봤다고 하오.”

“수백의 무인들이 황룡성 내에서 하루아침에 증발했단 말이오?”

“혹은 문지기들 몰래 성을 빠져나갔을 수도 있소. 야음을 틈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오.”

군사 제갈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남아 있는 호궁위사대원들을 어떤 이들이오?”

“별것 없소. 전부 유신청의 호위를 위해 남겨진 이들이니까.”

“그들을 심문해 보았소?”

“이미 했소이다. 그러나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소. 고문을 했는데도 그러는 걸 보면 둘 중의 하나요. 정말 모르거나 세뇌라도 당했거나.”

“음.”

제갈현은 침음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유군광의 주특기가 스쳐 지나갔다.

“유 장로가 궁멸뇌살기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럴 가능성은 낮소. 그들의 정신이 붕괴된 것 같지는 않았으니.”

“그렇다면 정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오?”

“그렇소. 그리고 뭔가 짚이는 게 있다면 말단 대원들보다는 장로들에게 있을 것 같소만.”

제갈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소.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오.”

군월중이 코웃음을 쳤다.

“흥. 어쩌면 정말 그들이 담합하여 유군광을 제거한 것일 수도 있지. 장로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잖소?”

“군 부주, 말을 삼가시오.”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제갈현도 심정적으로 군월중에게 동조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으로도 장로들의 아귀다툼엔 신물이 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늙은이들이 더한다고 해야 할까. 끝없는 권력욕에 미쳐 있는 인간들이다.’

천무맹 내 장로들의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그 힘은 맹주 바로 아래에 있는 군사 제갈현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소위 천무맹의 삼대 부서로 일컬어지는 군사부와 집행부, 신룡부는 천무맹주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군사와 집행부주, 신룡부주는 만인지상의 힘을 지녀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것이 원칙.

그러나 장로들의 권력은 그 이상이다. 세 부서의 수장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물론 유군광처럼 마구잡이로 설쳐대는 장로는 많지 않았다. 보통은 배후에서 천무맹을 움직이길 좋아하는 그들이었으니.

하지만 설친다고 해서 어떻게 제재할 여력이 없는 것도 사실.

그 정도가 심하다 해도 장로회의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것 외엔 제재할 방도가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의문스럽구려.”

주름이 한층 깊어진 얼굴로 제갈현이 말했다.

“도대체 오백에 달하는 인원이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이오?”

“장로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소?”

“부주.”

“후, 알겠소. 어쩌면 정말 마교에 투항한 것일지도 모르지. 새벽녘에 황룡성을 몰래 빠져나갔다면 눈치채일 일도 없지 않겠소?”

“강제로 문을 열었다면 문지기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소?”

“그런 상식이 유 장로에게 통한다고 보시오?”

“으음.”

제갈현은 인정했다. 집행부주의 추측들 모두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것을.

유군광은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엔 제갈세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이래저래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정적이 사라졌으니 앓던 이가 쏙 빠진 심정. 솔직히 대강 사건을 처리하고픈 생각도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천무맹 군사의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았다.

“흑엽촌의 반응은 어떻소?”

“그들도 당황스러워하던 눈치더구려. 가족인 그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을 보면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행동을 취한 모양이오. 혹은 돌발적인 행동이었거나.”

“그렇군. 어쨌든 지속적으로 조사를 부탁드리겠소, 부주. 뭔가 발견하게 되면 기별해 주시길 바라오.”

제갈현의 말에 군월중이 되물었다.

“비영대를 파견하면 되지 않겠소? 우리 애들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그들이 조사를 맡는 편이 빠르고 확실할 텐데.”

“미안하지만 두 가지 사실 때문에 힘들겠소.”

“두 가지 사실?”

“그렇소. 우선은 이 일이 집행부의 관할이라는 것이오. 아직까진 실종 사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오.”

“이것을 단순 실종 사건이라 보시오?”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그럴 수밖에 없소. 비영대는 군사부 관할의 일에만 나서는 것이 천무맹의 원칙임을 잘 알 것이오.”

군월중은 내심 혀를 찼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가 궁금해하는 일엔 거리낌 없이 파견하지 않나.’

만통지재 제갈현이 비영대를 별별 일에 써먹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심증은 있되 물증이 존재하지 않기에 뭐라 하는 이가 없을 뿐.

제갈현과 비영대는 증거를 지우는 데 있어선 귀신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두 번째가 진짜 문제요.”

“진짜 문제라?”

제갈현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최근 마교 측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마교가 말이오?”

군월중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직면한 모든 문제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십 년간의 휴전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여전히 공존하기 힘든 관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유군광 무리의 배반이 의심되는 것 아니오?”

“그렇게 확신하긴 어렵소.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도 볼 수는 없지만 말이오.”

“으음.”

이쪽도 저쪽도 확신하기 어렵다. 행동하기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군월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제갈현이 재차 강조했다.

“그쪽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까닭에 비영대에도 여력이 없소. 모쪼록 집행부가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소.”

“수고해 주시오, 부주.”

“최선을 다하리다.”

대화를 마친 군월중이 방을 나섰다.

제갈현은 방 한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양이 평소보다 많은 이유는 물론 마교 때문.

마교가 움직임을 보이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는 사이.

지난 십 년이 지나치게 평화로웠기에, 앞으로의 평화가 더욱 염려가 되는 것이었다. 평화란 곧 힘을 기를 수 있는 시기란 말과 마찬가지니까.

제갈현은 가볍게 숨을 돌리고서 서류의 확인 작업에 나섰다. 지금은 유군광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정천에게는 더더욱.

* * *

청화촌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화연란의 지도하에 건물 전부가 싹 허물어졌다. 그녀는 이참에 지긋지긋하던 옛 모습을 지워 버리려는 생각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빠르게 치워졌다. 유군광이 부숴 놓았던 건물들도 이때 함께 처리됐다. 애초에 마을 전체가 무너져 가고 있었기에 목공들도 석수들도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았다.

정리된 부지 위로 새로운 주춧돌이 놓였다.

나무 기둥이 다시 그 위에 세워졌다.

담미화가 다수의 인부들을 고용한 만큼 작업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됐다.

물론 이 공사는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황룡성 자체가 유군광 무리의 행방불명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흑엽촌의 경우엔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더 이상 그들을 지켜주던 흑기단과 호궁위사대는 없었던 것이다.

반면 청화촌엔 막대한 거금이 주어진 상황.

십여 년 전과 상황이 거꾸로 되었다. 청화촌에 당장의 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대신 그들에겐 언제든 그것을 취할 수 있는 거금이 있었다.

반면 흑엽촌은 당장 자존에 집중해야 할 상황. 그들을 지켜 주던 무력이 사라진 이상,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결국 흑엽촌으로선 일단 숨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청화촌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어머, 이게 다 뭐야?”

제갈세연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최근 청화촌을 찾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마을은 엄청난 변화를 겪은 뒤였다.

새로이 지어지고 있는 건물들.

수많은 석수들과 목공들로 인한 활기.

청화촌은 예전의 황폐하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변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세연아.”

제갈세연을 발견한 화연란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 역시 몰라볼 만큼 밝아져 있었다.

“언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떻게 되긴. 흑기단 무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지. 이때다 싶어서 보상금을 수령하고서 사람들을 부른 거야.”

“그랬군요.”

제갈세연은 납득했다. 하기야 이들로서는 최적의 상황이었으리라.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와룡장을 지켰다. 이는 물론 유군광 무리의 실종 때문이었다.

기실 황룡성 내의 각 세력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갖가지 풍문이 나도는 만큼 앞으로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서야만 했다.

이런 때일수록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각 집단은 경거망동을 삼가고서 몸을 사렸다.

때문에 제갈세연 역시 와룡장을 지켜야 했다.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일단은 부장주였으니, 함부로 밖을 돌아다닐 순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지금에야 겨우 외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천 오빠는요?”

“응? 지금쯤 청룡문에 있을 거야. 낮잠 주무신다면서 나가셨거든. 보다시피 건축 공사라는 게 워낙 시끄러우니까.”

“네에?”

제갈세연이 정말 놀란 표정을 했다.

“그 오빠, 아직도 문지기 일을 하고 있었어요?”

“응. 일단은.”

“그렇게 농땡이를 피우고도 잘리지 않았다는 건가요?”

“응. 그런 것 같더라.”

“으, 그런 사람이 황룡성의 대문을 지키고 있다니.”

제갈세연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반쯤은 장난기가 어린 표정이었지만.

미소 띤 채 그 모습을 보던 화연란이 손뼉을 쳤다.

“아, 그래. 오라버니가 네가 오게 되면 부탁하라고 한 게 있었어.”

“부탁이요?”

“응. 정확히는 와룡장에 부탁하는 거겠지만. 너는 부장주니까 결정권이 있을 테지?”

“경우에 따라 달라요. 이름뿐인 자리이다 보니. 그래도 일단 얘기를 들어볼 수는 있겠죠.”

“그럼 얘기할게. 이번에 우리가 수령한 금전 전부를 와룡장에 맡기고 싶어.”

제갈세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만 냥의 금전 전부를 말인가요?”

“정확히는 구천 냥을 조금 넘는 정도야. 이번 공사에 지불한 돈이 꽤 많거든. 마을 어르신들에게 나눠 드렸다면 더 적었겠지만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으셨어. 너무 부담스러우신가 봐.”

“어쨌든 어마어마한 양이잖아요! 하지만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래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지난번에야 흑기단 무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잖니.”

“그건 그렇군요.”

제갈세연이 생각에 잠겼다.

정천의 요구는 타당했다. 거금을 수령하게 된 만큼 이제는 도둑 걱정을 해야 했으니까.

방비 튼튼한 와룡장에 돈 조금 떼어 주고서 맡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게다가 명문가의 지부인 만큼 빼앗길 일도 없을 테고.

“숙부님, 아니 총관에게 말씀드려 볼게요.”

“응. 그리고 말인데, 거동하기 힘든 어르신들도 좀 맡아 줄 수 있겠어? 사례는 확실히 할게.”

“마을 어른들 말인가요?”

“응.”

이번에도 제갈세연은 의아함을 느꼈다. 정천이야 워낙 게으름뱅이니 그렇다 쳐도, 화연란이 노인들 모시기를 귀찮아할 리는 없었던 것이다.

“괜찮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또 정천 오빠가 그러라고 시킨 건가요?”

이어진 화연란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아니, 이건 내가 결정한 거야.”

“언니가요? 어째서요?”

“문파를 만들고 싶었거든. 정확히 말해 아버지의 검문(劍門)을, 그 대를 잇고 싶었어.”

“아…….”

폭뢰검 화륜패의 패화영신검.

화연란이 그 검을 연마해 왔다는 것은 제갈세연도 잘 알았다. 하지만 문파까지 만들어 검을 잇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하긴 문파를 운영하려면 어르신들을 보살피긴 힘들겠네요. 그런데 그럼 언니가 문주가 되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게 될 거야. 오라버니한테 부탁해 봤는데, 거절했거든. 자기는 문주를 맡을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

“그건 그렇겠죠.”

무공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내공을 상실한 무인이 문주를 맡을 순 없었다. 문주의 무위는 곧 문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사실 화연란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지만.

실소를 지은 화연란이 말했다.

“잠시만 보살펴 주면 돼. 내가 충분히 힘을 기르면 그분들을 다시 불러들일 거야.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강해지려는 거였으니까.”

“알겠어요. 그리 많은 수도 아니니 보살펴 드리는 데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고맙구나, 세연아.”

“헤헤.”

싱긋 웃은 제갈세연이 물었다.

“그런데 문파의 이름은 정해 두셨어요? 원래부터 이름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패화영신검은 화륜패의 독문무공이다.

화륜패 홀로 갈고닦은 검이며, 화연란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전수한 적이 없었다. 정천이 그 초식과 무리(武理)를 알고는 있다지만, 그건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것일 따름이었다.

따라서 문파 역시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생기게 된다면 화연란이 개조(開祖)가 되는 셈.

조금 머뭇거리던 화연란이 말했다.

“화륜문…… 이 어떨까 생각 중이야.”

“헤, 좋은 이름이네요.”

사심 없이 웃는 제갈세연이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화연란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특유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대낮부터 실실 웃고들 있는 거야?”

두 여인이 돌아보니 정천이 터덜터덜 다가오고 있었다. 화연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 청룡문에 가신 게 아니었어요?”

“가려고 했지. 가다 귀찮아져서 낮잠만 잤지만.”

“낮잠이라고요?”

“응. 가다 보니 나무 하나 큰 게 있더군. 그늘이 꽤 괜찮아서 좀 누워 있다가 왔지.”

제갈세연이 한숨을 쉬었다.

“어휴, 청룡문에선 저런 사람을 왜 안 자르는지.”

“돈의 힘이지. 세상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단다, 아가야.”

“누구보고 아가라는 거예요? 그리고 뇌물 먹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지 좀 마세요.”

정천은 어깨만 으쓱거리고는 화연란을 돌아봤다.

“배고파, 밥 줘.”

“나가서 사 먹지 그래요?”

재차 쏘아붙이는 제갈세연. 정천은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밥할 것도 아니면서 웬 참견이냐?”

“연란 언니가 불쌍해서 그래요!”

“귀청 떨어지겠군. 알았으니 그만 쫑알거려.”

제갈세연은 기가 막혀서 더 쏘아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정천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자꾸 쫑알대면 수련이고 뭐고 없다.”

“치, 치사하게 그러기예요?”

“응.”

한마디로 제갈세연의 말문을 막는 정천이었다. 그는 마을로 향하려다 한창 공사 중인 모습을 보고는 몸을 휙 돌렸다.

“생각해 보니 저긴 시끄럽구나. 오늘은 거리로 나가서 식사를 하는 편이 낫겠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혼자 먹고 오지 그랬어요?”

“넌 배 안 고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사 준다고 할 때 고맙게 먹어.”

제갈세연은 결국 두 손 다 들었다. 정천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돈 맡아 달라는 얘기는 란아에게서 들었겠지? 되도록 사람을 좀 빨리 보내 줬으면 좋겠군.”

“아, 그러고 보니 그 금전들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저렇게 많으니 지키기도 힘들 텐데.”

“허물지 않은 창고에 두고 있어.”

정천의 말에 제갈세연이 멍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만 관리해도 괜찮아요? 다들 훔쳐가려고 난리가 날 텐데.”

“대비를 해 두었지.”

정천은 창고 주변에다 기환진을 쳐 놓았다. 사람들의 심리에 작용하여 무의식중에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장치였다.

물론 간이식으로 설치하여 정교하지는 못했지만 인부들을 못 오게 막을 정도는 되었다.

“일단은 와룡장에 들르도록 하지.”

정천의 말을 따라 세 사람은 와룡장으로 향했다.

대강의 사정을 들은 제갈순이 눈을 빛냈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여 큼지막한 주판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주판을 굴리며 계산을 했다.

“해당 금전을 지키기 위한 인력, 맡아 둘 장소, 위험 비용 등을 모두 셈해 보았소. 전체 금액의 삼 푼은 되어야겠으니 연간 삼백 냥씩 주시면 되겠소.”

정천이 망치로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이거 완전 날강도로군. 돈 좀 맡아 주면서 매년 삼백 냥씩 챙겨 먹겠다는 거요?”

“그런 거금이라면 꼬이게 될 날파리 또한 부지기수일 거요. 이 정도 청구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오만?”

“차라리 대놓고 돈을 뜯겠다고 하쇼.”

“싫다면 다른 곳을 찾아보시오. 황룡성의 어느 상회나 방파도 이런 값을 부르진 않을 거요.”

정천이 주춤했다. 솔직히 그는 본디 상계 쪽 물정에 훤한 편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십 년의 공백까지 있었던 직후.

“……이백오십 냥으로 합의 봅시다.”

“이백팔십. 더 깎을 수는 없소.”

“좋소. 대신 마을 사람들 역시 무상으로 보살펴 줬으면 하는데.”

잠시 생각하던 제갈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다. 거래는 성립되었소.”

“쳇. 총관이 아니라 장사꾼이군.”

“지금 뭐라고 하셨소?”

“방금 들었을 거 아뇨, 총관 나리.”

정천과 제갈순,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봤다. 으르렁거리지만 않을 뿐이지 당장에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먼저 관둔 쪽은 제갈순이었다.

“그만둡시다. 이 나이에 귀공 같은 이와 애들처럼 눈싸움이나 벌일 수야 없지.”

“누가 할 소리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내 눈치를 보고 있던 제갈세연이 제갈순에게 부탁했다.

“숙부님, 그럼 지금 바로 사람들을 보내 주실 수 있겠어요?”

“총관입니다, 부장주. 어쨌든 사람들은 바로 보낼 것입니다. 금전 구천 냥이면 수레가 여럿 필요하겠군요.”

“노인 분들을 모셔 올 땐 주의해 주세요.”

“알고 있습니다.”

제갈순은 곧장 백지로 된 전표 뭉치를 가져와 화연란에게 건넸다.

“제갈세가의 묵인(墨印)이 찍혀 있는 백지 전표입니다. 구천 냥 이내의 소비라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총관님.”

“감사할 것 없습니다. 우린 그저 거래를 한 것이니 말입니다.”

화연란은 미소를 지었다. 거래라고는 하지만 제갈순이 그들을 배려해 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천은 그것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런데 부장주.”

“네?”

고개를 돌린 제갈순이 제갈세연에게 넌지시 말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유모가 부장주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만.”

“앗! 그러고 보니!”

제갈세연이 화들짝 놀랐다. 의아함을 느낀 화연란이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오늘이 용봉소회(龍鳳少會)에 참석하는 첫날이었거든요. 유모가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어요.”

정천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용봉소회? 이름 한 번 거창하군. 십 년 전엔 그런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개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임이라 그렇소.”

제갈순이 설명했다.

“용봉소회는 일종의 소모임이오. 정파의 후기지수들만을 위한 모임이지.”

“후기지수를 위한 모임?”

“그렇소. 각 명문세가와 유명 문파의 어린 기재들이 모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소. 가입 조건은 회원들 전원의 인정을 받는 것이오. 본인의 실력이 뛰어나거나…….”

“알아주는 가문이나 문파 등의 배경이 있어야겠군.”

“정확하오. 어쨌든 구성원이 구성원인지라, 그곳에 드는 것이 숙원인 젊은 후배들도 부지기수요. 부장주께선 그 자격이 충족되어 이번 모임부터 참석이 허가되었소.”

“딱 봐도 감이 잡히는군.”

정천이 피식 웃었다.

“명문가 자제들과 유명 문파 제자들의 친목회, 혹은 실력 행사의 장이겠지. 그 어린것들이 모여서 머리를 굴려 봐야 무슨 성취가 있다고.”

“동감이오.”

의외로 순순히 말하는 제갈순이었다. 정천은 그의 표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읽었다.

“이제 보니 그 모임을 좋아하지 않나 보군. 하긴 댁 성격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아침부터 저 녀석을 달달 볶았겠지.”

“부정하진 않겠소. 있는 자들만의 잔치라는 점엔 나도 염증을 느끼니.”

“댁도 생각만큼 꽉 막히진 않았군. 장사꾼 같은 성미만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요.”

“남의 귀중한 인력을 날로 먹으려 드는 귀공만 하겠소이까?”

“…….”

“…….”

다시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화연란과 제갈세연이 한숨을 쉬었다.

“왠지 미안해지는구나.”

“제가 드릴 말씀이에요.”

화연란이 제갈세연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그런데 왜 용봉소회에 참석하지 않은 거니? 보아하니 정말 까먹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어, 제 연기가 어설펐나요?”

“그렇진 않았어. 근데 머리 좋은 네가 그런 사실도 잊고 있었을 리는 없잖아.”

제갈세연이 감격한 얼굴로 화연란을 보았다.

“언니, 그렇죠? 저 머리 좋은 편이죠?”

“아마도?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

“정천 오빠가 항상 바보 취급하니까요.”

화연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정천이 그렇게 취급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아했다.

제갈세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이유라면 간단해요. 숙부님 말씀대로 저도 그들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러니?”

“네. 왠지 천무맹이란 울타리 안에서 일부러 편을 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들이 잘났다고 유세 부리는 것 같기도 해서요.”

화연란은 내심 감탄했다.

처음 제갈세연을 보았을 때 그녀가 받은 인상은 단순했다.

콧대 높은 세가 댁 아가씨.

그러나 말을 섞게 되고 친분을 쌓게 된 지금, 그녀는 제갈세연의 성품이 무척 곱고 수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천은 그저 어린애 취급할 뿐이었지만.

쿵쿵쿵쿵.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앗!”

그게 누구 것인지 깨달은 제갈세연이 퍼뜩 일어나서는 정천의 손을 붙들었다.

“그만 가도록 해요!”

“응? 갑자기 뭐야?”

“빨리요!”

제갈세연은 정천의 항의를 무시하고서 그를 끌어당겼다.

정천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화연란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숙부님,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제갈세연이 다급히 말을 남기고 달려 나갔다. 다른 두 사람도 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그녀가 와룡장 문지방을 넘어섰을 때 그녀의 유모가 나타났다. 칠순을 코앞에 둔 데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아직까지 정정한 여걸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도망치지 마시고 돌아오세요!”

“유모, 미안! 용봉소회엔 다음에 나갈게요!”

도망치는 와중에도 대꾸는 꼬박꼬박 하는 그녀였다. 유모에겐 별 의미가 없을 테지만.

더 쫓아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제갈세연의 유모가 제갈순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총관 어르신!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붙들어 두셨어야지요!”

“흠흠. 하지만 부장주를 붙든다는 것이…….”

“순 도련님!”

유모의 호통에 제갈순이 움찔했다.

“미, 미안하오, 유모.”

마흔 줄의 그가 꼼짝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갈세연의 아버지인 제갈명을 비롯, 그들 삼형제를 기른 것도 그녀였던 것이다.

제갈순은 한참 동안 유모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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