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사냥의 계절
정파일통 천무맹의 영향력은 어림잡아도 십이주에 걸쳐 있었다.
섬서에서 강서에 이르기까지의 드넓은 땅.
기실 중원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영향권 내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황룡성은 그중에서도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 그 넓이는 여느 황성이 부럽지 않은 규모였다.
그렇게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많은 비밀들을 감추어 두고 있기도 했다.
그중의 한곳.
초대 맹주 진운룡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일종의 미궁진(迷宮陣). 천무맹의 가장 중요한 기밀들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곳.
그것이 금역이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시커먼 안개가 사방을 가리는 곳이 있었다.
광륭혈독무(狂隆血毒霧)라 불리는 안개였다. 숨을 참더라도 피부로 스며들어 삽시간에 죽음으로 인도하는 절독 중의 하나였다.
천무맹주 남궁운은 그 가운데를 표표히 걷고 있었다. 안개가 머금은 극독조차 그의 몸을 침범하진 못했다.
그의 걸음이 한순간 멈췄다.
흑색으로 가득한 안개 너머, 몇몇의 인기척이 나타났다.
서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시야였으나, 어느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진마동 토벌대의 일부가 귀환했소.”
“……!”
남궁운의 말에 나머지 흑색 안개 너머로 안광들이 번뜩였다.
“그들이 돌아왔단 말이오?”
“그렇소. 정확히는 그들이 아니라 그라고 해야겠지만.”
“한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소.”
“그자가 누구요?”
“제삼조장 정천.”
“흐음.”
짤막한 침음 뒤로 묵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를 만나 보았소?”
“물론. 크게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것 같았소. 그는 내공을 상실하여 무인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상태였소.”
“내공을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소. 최소한의 선천진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소.”
그 정도라면 각종 내단과 영약을 복용한대도 재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 자체가 그 한계에 다다랐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나 한가운데에 위치한 안광은 그 날카로움을 전혀 거두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소, 맹주?”
남궁운의 몸이 움찔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드러났다.
“본좌의 오감과 기감(氣感)을 통해 직접 확인했소. 팔부혈선(八部血仙)들께선 지금 본좌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저 신중을 기하려는 것일 뿐이오.”
“그의 실력이 본좌를 아득히 뛰어넘는다면 모를까, 본좌의 신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소. 아니면 지금, 그런 자가 이 중원 무림에 존재할 거라고 말씀하고 싶은 거요?”
“맹주, 세상에 절대란 존재하지 않소.”
“본좌는 혈선들께서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구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없소이다.”
목소리의 울림이 한층 강해졌다. 주변의 광륭혈독무가 파르르 떨리며 물러났다.
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흑의로 몸을 감싼 혈선들은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다.
흑의 너머로 번뜩이는 안광.
남궁운으로서도 그들의 존재는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여덟 명의 혈선.
그들은 이십사 인의 장로회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이었다. 더불어 천무맹의 진정한 실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의 정보는 전무. 천무맹주인 남궁운조차도 그들에 대해선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두 가지뿐.
하나는 그들이 초대 맹주가 취임했을 때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대항하고서 목숨을 보전한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흥.’
남궁운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야 너희에게 몸을 숙이고 있지만, 언젠가 너희를 내 발아래 무릎 꿇리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그날이 오기 전까진 이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기분 나쁘긴 해도 그들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팔부혈선 중 중앙의 인물이 말했다.
“보고는 잘 들었소. 그 생환자 역시 맹주께서 잘 처분하시리라 믿고 있겠소.”
“…….”
“어쨌든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우리를 부르진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소만.”
“그렇소. 내가 의논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소.”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이 말을 이었다.
“마교가 다시 움직이려는 것 같소.”
혈선들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 * *
“안녕들 하신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문지기들이 치를 떨었다.
“당신은!”
“청룡문 문지기!”
“오랜만이군, 동업자들. 부장주께서는 안에 있겠지?”
“끙. 그분을 만나러 온 거요?”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헛걸음을 하셨군. 돌아가시오.”
정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왜는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오!”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
문지기들이 치를 떨었다. 알았다고 그냥 물러나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한 그들이 설명했다.
“총관께서 돌아오셨소.”
“총관? 와룡장의?”
“그럼 어디 다른 곳이겠소?”
정천은 곰곰이 생각했다. 제갈세가의 세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맏형인 제갈현은 천무맹의 군사, 둘째인 제갈백은 제갈세연의 아버지이나 지금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막내이자 셋째가 있었다. 와룡장의 총관이자 제갈세연에게 있어 숙부인 사내가.
“그 제갈순인가 하는 사람 말이로군?”
“끄응.”
문지기들이 침음했다. 총관 이름을 저리 함부로 불러대다니. 평소 같으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아가씨와 아는 놈만 아니었어도.’
‘넌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문지기들이 다시금 마음속에 참을 인을 새겼다.
“그분이 맞소. 어쨌든 오늘은 썩 물러가쇼.”
정천이 미안한 듯 웃었다.
“그러긴 곤란하겠는데.”
“뭣이 어째?”
“오늘 꼭 부장주를 만나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좀 들여보내 주지?”
문지기들에게 참을 인 세 번은 무리였다.
“야이, 개자식아! 그냥 썩 꺼지라니까 뭔 잔말이 그렇게 많니?”
“오늘 정말 몽둥이 맛 좀 볼 테냐?”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
세 번째 목소리는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문지기들이 그 목소리에 찔끔하여 멈췄다.
안채로부터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사람은 제갈세연, 그리고 다른 이는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백의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에 티 하나 없는 걸로 보아 무척 깔끔한 성격인 듯했다.
“정천 오빠?”
정천을 발견한 제갈세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정천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어제도 봤잖아요.”
“그러니까 오랜만이지. 어제 밤이 조금 길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천은 대답 대신 문지기들을 가리켰다. 얘들 치우고 들여보내 달라는 의미.
평소라면 그랬을 제갈세연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바로 옆 중년인의 눈치를 보았다.
중년인, 와룡장 총관 제갈순이 말했다.
“부장주, 저 사내는 누굽니까?”
“네? 아, 숙부님. 그러니까요…….”
“부장주!”
제갈세연이 아차 하는 얼굴로 정정했다.
“제가 자주 찾는 문파의 사람이에요, 총관.”
“그렇군요. 요사이 자주 들른다는 그곳 말씀입니까?”
“네.”
제갈순이 날카로운 눈으로 정천을 살폈다. 정천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속내를 감추는 능력은 제법 탁월하군.’
제갈순이 속으로 생각했다. 통심안(通心眼)이라 불리는 그의 눈썰미로도 정천의 속을 헤집어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가 정천에게 예를 표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본관이 직접 대접하겠소.”
“알겠소.”
정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하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인데. 꽤나 귀찮겠어.’
정천은 안채로 안내 받았다. 제갈세연과 제갈순이 나란히 그의 앞에 앉았다.
제갈순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원천단검의 마지막 구결을 알려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부장주를 통해 직접 보내셨다고요.”
“그렇소만.”
“놀라운 일이군요. 본가에서도 실전된 무공의 최후 구결을 알고 있다니.”
정천이 빙긋 웃었다.
“의심은 안 하오?”
“대강 확인을 해 봤소. 다른 일곱 초식의 구결들과 그 운문의 전개 방식이 동일하더군. 효능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원천단검의 묘리를 알고 있는 자의 글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역시 제갈세가로군. 그런 거 하루 만에 파악하기는 꽤 힘들 텐데.”
제갈순이 정갈한 콧수염을 살짝 쓰다듬었다.
“본관이 직접 해석했으니까요.”
“……칭찬해 달라는 거요?”
“됐소. 어쨌든 중요한 본론은 지금부터니 말이오.”
제갈순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원천단검의 구결을 얻은 경로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총관님 형님에게서 들으셨을 텐데?”
제갈순이 말없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가면 같은 얼굴 뒤에선 갖가지 생각이 스쳐 가고 있었다.
분명 그는 정천에 대해 제갈현에게서 들었다.
‘용검대 제삼조장, 진마동 토벌대의 일원.’
그는 와룡장 총관이기에 앞서 군사부의 요직에 있었다. 때문에 정천이 관련된 대강의 사건에 대해서도 똑똑히 기억했다.
하나같이 제갈세연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것들.
그녀가 정천과 친밀한 것 같긴 했으나, 어디 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장주.”
“……네?”
긴장하고 있던 제갈세연이 고개를 들었다. 제갈순이 똑 부러지는 말투로 부탁했다.
“찻상을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부장주께서 타 주는 차를 마시고 싶군요.”
“알겠어요.”
제갈세연이 못내 아쉬운 얼굴로 일어났다. 정천과 제갈순은 그녀가 방을 나설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그녀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제갈순이 말했다.
“현원천단검은 본가 유일의 절대비공. 동시에 미완의 무공이기도 하오. 하물며 진마동 토벌대엔 본가의 사람도 없었소.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현원천단검의 구결을 알고 있단 말이오?”
정천이 씩 웃었다.
“확인해 봤소?”
“몇 번이고 해 봤소이다. 용검대 내엔 본가와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인물이 없었소.”
“용검대 말고 말이오.”
제갈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좋은 머리라면 바로 이해했을 텐데?”
제갈순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논리적으론 간단했다.
토벌대의 구성 조직은 용검대와 강룡단, 용검대에 없다면 강룡단에 있다는 소리다.
그러나 그것은 납득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룡단은 마교의 타격대가 아니던가.
제갈순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설마 본가의 인물이 마교에 가담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니 말이오. 그는 스스로에 대한 것은 내게 거의 말하지도 않았고.”
“으음.”
제갈순은 침음했다. 정천이 그렇다고 하는데 뭐라 더 따질 수도 없었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렸다. 달려온 모양인지 헥헥거리며 제갈세연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갈순은 의아함을 느꼈다.
“부장주, 왜 숨을 헐떡이시오?”
“예? 아, 그러고 보니 보법 쓰는 걸 깜빡했네요.”
제갈순이 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제갈세가는 세간의 생각보다는 심하게 예의나 범절을 따지는 편이 아니다. 집안에서 경공을 펼치며 날아다닌다면야 문제겠지만, 걸어갔다 오는 일에 보법을 쓰는 것까지 뭐라 하진 않았다.
하물며 제갈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녀라면.
‘결국 본인이 의식적으로 보법을 펼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일체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는 것, 정성검의 수련법이 아닌가?’
제갈순이 정천을 돌아봤다. 그녀에게 그런 조언을 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이자는 우리 세가의 무공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내심 확신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타당성은 충분했다.
그가 다시 정천을 돌아봤다.
“그대의 말을 믿도록 하겠소. 확실히 그자에게서 구결을 전수받은 모양이군.”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오?”
“오히려 이쪽이 고맙다고 해야겠지요. 실전된 무공을 완성할 수 있게 됐으니. 대체 그자는 어디서 구결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 친구가 만든 거요.”
제갈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하셨소?”
“그 마지막 초식, 그 친구가 만든 거라고 했소. 누구에게서 전수받은 게 아니라.”
제갈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공의 창시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무공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미완의 무공이란 깨어진 병과 같은 것.
그 형태에 정확히 들어맞는 조각을 끼우지 않고선 물이 샐 수밖에 없다.
지금의 구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히 익혔다간 나머지 초식들과 충돌, 주화입마에 이를 수도 있었다.
“지금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소?”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소. 그가 만든 초식은 완벽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믿는 게 좋을 거요. 그는 삼성검(三省劍)을 모두 통달했었으니.”
“……!”
제갈순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역대 제갈세가 최고의 무인이라 불려도 손색없었다. 물론 그가 과연 본가의 인물인지는 의문이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오?”
“정 못 믿겠으면 믿지 마시오. 어차피 내가 달리 증명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증명하려 버둥거릴 필요도 없잖소?”
“으음.”
제갈순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할 얘기를 다했으면 그만 가 보고 싶소만.”
“그러시오. 본관이 너무 붙잡아 두었군.”
정천은 제갈세연이 따라 준 차를 단번에 들이켜고서 일어섰다.
“으, 더럽게 쓰네.”
“머리가 맑아지는 차라니까요?”
“내 머린 지금도 충분히 맑아.”
정천이 짤막히 대꾸하고서 그녀에게 눈짓했다. 제갈세연이 제갈순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제갈순이 한숨 쉬며 웃었다.
“다녀오십시오, 부장주.”
“고마워요, 숙부님!”
제갈세연이 쪼르르 밖으로 나섰다.
정천이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할 때 제갈순이 말했다.
“본관이 그대를 언제 한 번 찾아가 보아도 되겠소?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소만.”
정천이 피식 웃었다.
“당신, 군사부 사람 아니오? 상관이야 없지만 당분간은 바쁘지 않을까 싶은데.”
“음? 무슨 일이 있소?”
“아니 뭐, 내가 바쁠 수도 있고 그쪽이 바쁠 수도 있다 이거요.”
“미안하지만 요즘은 군사부의 일도 그리 많지 않소. 이곳의 관리도 그리 손이 많이 가진 않고.”
“뭐, 그러면 다행이지만.”
정천이 밖으로 나갔다.
제갈순은 현원천단검과 그것을 익혔다는 무인에 대해 생각했다. 때문에 정천과의 마지막 대화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웠다.
하지만 얼마 뒤, 군사부는 정천의 말마따나 미칠 듯이 바빠지게 됐다.
“근데 왜 오신 거예요?”
“나, 오늘내일 어디 좀 다녀올 생각이거든. 그러니 찾아와 봐야 만날 수 없으니 헛걸음하지 말라고.”
“누가 오빠 보러 거기 가는 줄 알아요? 오빠가 없으면 연란 언니랑 놀면 돼요.”
“너, 우리 집에 놀러 오냐…….”
고개를 휘휘 저은 정천이 말했다.
“그리고 란아도 계속 바쁠 거야.”
“네? 왜요?”
“뭐, 그런 일이 있어. 그나저나 평소에도 내력을 들이지 않는 수련을 하는 것 같던데, 열심히 해 봐.”
제갈세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헤헤, 네!”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알아듣는다.”
쓴웃음을 지은 정천이 와룡장 밖으로 나섰다. 그의 등 뒤에 대고 제갈세연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애견들한테 먹이 주러.”
“네? 강아지 키웠어요?”
정천은 대답하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제갈세연은 뒤를 쫓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돌렸다. 그 대신 열심히 해 보라던 정천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정천이 와룡장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 담미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왜 굳이 군사의 눈에 띌 행동을 하시는 거죠? 저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와룡장과 접점을 두는 것도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정천은 지그시 웃었다.
—그래야 그가 납득할 테니까.
—네?
—군사 말이야. 제갈현은 자기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는 인간이거든.
만통지재. 그의 별호를 떠올린 담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속적으로 그의 시야 안에 있으면 의심을 피할 수 있지. 어쨌든 지금까지의 내 행동 전부는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니까.
—그건 그렇군요.
담미화는 납득했다.
제갈세연을 가르친다거나 비급의 구결을 알려 준다거나, 모두 내공을 잃은 옛 고수가 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이었다.
—게다가 제갈세연과 제갈순, 두 사람 모두 군사가 신뢰하는 이들이지. 그런 이들이 지속적으로 내 이야기를 해 줄 테니 군사 역시 나에 대한 의심을 줄이게 될 거야.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보다, 목공과 석수들은 수배했나?
—네. 바로 일을 시작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좋아. 일이 끝날 때쯤엔 흑엽촌이나 다른 마을이 청화촌을 건드리진 못하겠지.
—하지만 그곳의 사람은 화 소저를 제외하고는 노인들밖에 없잖습니까.
—사람이야 새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야. 청화촌이 언제까지고 용검대 식구의 마을일 수도 없는 거고. 옛 사람이 사라졌다면 새 사람을 받아야지.
—그렇군요.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일정량을 노인들에게 배분해 준다고 해도 그들에게 남는 것은 수천 냥의 금. 그 정도면 청화촌 정도의 마을은 몇 개고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 청화촌을 괴롭히는 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군광 무리의 소식은 언제 퍼지게 될까요?
—며칠 내로. 이르면 오늘이 될 수도 있지. 수백의 인원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황룡성이 혼란에 빠지겠네요.
—그럴지도. 뭐 나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정천이었으나 담미화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긴장이 됐다.
‘무서운 사람.’
정천이 두려운 것은 비단 압도적인 무력 때문만이 아니다. 도리어 심리의 허를 찌르는 그의 방식이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적으로 둬선 안 될 인간이다. 그게 천무맹이 되었든 마교가 되었든.
정천이 담미화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 난 지금부터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담미화는 그 말뜻을 대번에 깨달았다.
—유군광 말씀이군요.
—그래. 지금부터 그 녀석과의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거든.
유군광은 정천이 어딘가에 숨겨 놓았다. 그를 가지고서 다른 이들 모르게 무언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담미화로서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 * *
유군광은 정신을 차렸다.
밤이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청화촌을 멸하러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웬 이상한 놈을 만나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놈을 떠올리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
뭔가 이질감을 느낀 유군광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다.
몸이 부자연스러웠다. 안으로는 단전이 부서졌으며 곳곳의 뼈가 박살 났고, 밖으로는 온몸의 상처에서 고름이 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하반신은 땅속에 파 묻혀 있는 상태. 팔로 밀어 빠져나오려 했지만 고통만 배가될 뿐이었다.
“달이 참 밝지 않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이윽고 눈앞으로 두 개의 다리가 나타났다.
유군광은 고개를 들고 나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개자식!”
“자주 듣는 말이군. 예나 지금이나.”
정천은 담백하게 웃었다. 유군광은 그 미소를 보며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도대체 네놈은 뭐냐! 어디서 나타난 놈이기에 본좌에게 이런 수모를 준단 말이냐!”
“그런 너는 누구이기에 청화촌을 습격하고 그곳 사람들을 죽이려 했지?”
“본좌는 호상장로 유군광이다! 천무맹의 장로란 말이다! 본좌의 뒤에 천무맹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 빌어먹을…….”
유군광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녀석이 정말 모르고서 질문을 했을 리가 없었다.
정천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정천. 용검대 제삼조장이자 진마동 토벌대의 유일한 생환자다.”
“진마동!”
유군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기억 구석에 치워 뒀었다.
그들은 돌아올 수 없기에.
버려진 인간들이기에!
“네, 네가 진마동의 귀환자라고?”
“그래.”
정천이 유군광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저 간단한 동작일 뿐인데도 유군광의 온몸에서 오한이 돋았다.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나, 나는…….”
“역시 모든 것은 장로들의 계획이었나?”
유군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은 팔부혈선의 지시였어! 그들이 우리에게 너희를 보낼 것을 종용했다. 우린 그저 명령에 따른 것뿐이야!”
“팔부혈선?”
“장로회의를 지배하는 여덟 혈선! 그들에 대한 것은 우리도 잘 모른다. 단지 천무맹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 왔다는 것만 알 뿐이다!”
“나도 알아.”
정천이 차갑게 웃었다. 유군광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 기억을 직접 살펴보았지. 그리 유쾌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난 마교의 마안을 익혔거든. 그것도 극성으로 말이야.”
“으음!”
유군광이 침음했다. 마안은 마교인 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궁극의 마공이 아니던가.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내게서 모든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유군광이 아는 정보라야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은 그저 혈선들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지시를 따르는 데 있어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는 거지만.
그들은 즐거운 낯으로 용검대의 죽음을 환영했다.
그 죽음에 있어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왜 우릴 사지로 보냈지?”
“그, 그건…….”
“나도 알아. 그저 명령을 따른 것뿐이지. 하지만 너희에게 있어 용검대는 눈엣가시이기도 했지. 우린 그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채 천무맹만을 위해서 일해 왔으니까.”
유군광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회의에 참석했는지. 진마동을 붕괴시키며 어떤 기분이었는지.
촤아아악!
유군광의 머리 위로 끈적이는 액체가 쏟아졌다. 입으로 스며들어오는 시큼한 맛에 유군광이 자지러졌다.
“이, 이게 뭐냐!”
“닭의 피. 천무맹 장로답지 않게 너무 겁이 많은데?”
“이, 이걸 대체 왜 뿌리는 거냐!”
“네 피 냄새엔 독기가 너무 많거든. 그래서 녀석들이 잘 접근하지 않더군.”
“녀석들이라고?”
우우우우——!
멀리서부터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천이 말했다.
“늑대들. 먹잇감을 찾아 밤을 헤매는 짐승들.”
“무, 무슨……!”
정천이 유군광의 뒷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뇌호(腦戶)혈을 짚었다. 지금부터는 정신이 아주 말짱할 거야. 평소라면 기절할 법한 충격을 받아도 쌩쌩한 정신으로 느낄 수 있을 테지.”
우우우우!
다시금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까 전보다 더 가까워진 위치였다.
유군광은 다급해졌다.
“사, 살려 주게! 목숨만 살려 준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 자네에게 충성하겠네! 다른 장로들의 약점과 능력도 모두 알려 주겠네!”
“이미 내 머릿속에 있는데.”
“그, 그렇다면 돈을 주겠네! 억만금, 아니 내가 가진 전 재산이라도 주지. 물심양면으로 자네를 돕겠네!”
“필요 없어.”
우우우우!
이제 외침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보다 조금 옆에서 다시, 그보다 조금 뒤에서 다시, 마침내는 수십 군데에서 동시에.
피 냄새를 맡은 늑대 떼가 물려오고 있었다.
정천은 마지막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유군광은 이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하고 있었다.
“살려 주시오, 제발!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소. 그대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테니 제발 살려 주시오!”
“잘 죽어라.”
짤막히 말을 마친 정천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기척과 존재감을 완전히 죽이고서 늑대들의 사이를 빠져 나갔다. 늑대들은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유군광을 향하여 슬금슬금 걸어갔다.
먹잇감을 향해.
“안 돼! 제발! 살려 줘! 으아! 아, 안 돼!”
콰드드득!
생살을 씹어 뜯는 소리가 정적 속에 울렸다. 단말마의 비명이 그 뒤로 길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멈췄다.
정천은 문득 걸음을 멈춰 허공을 보았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시린 빛을 흩뿌렸다.
“이걸로 끝이 아니지.”
정천은 낮게 중얼거리고서 걸음을 떼었다.
사냥의 계절은 이제 시작이었다.
〖강룡검제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