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내 손아귀엔 용이 산다
“이이익!”
유군광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이가 없고 열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놈이 내 아들을 그리 만들었다고?”
“그래.”
“그리고 내 손주도!”
“그렇다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그의 태도가 유군광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결코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놀고 있군. 누가 누굴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정천이 이죽거렸다. 유군광은 그를 노려보다가 수하들이 아직도 멍청히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하고 있나! 놈의 팔다리를 뽑아 버려라!”
흑기단원들과 호궁위사대원들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정천은 그들 사이에 은근슬쩍 끼어 있었다.
정확히는 무리의 한가운데.
너무나 정직한 위치인지라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놈을 죽여라!”
유군광이 다시 소리치고 나서야 수하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정천을 치려고 했다.
정천이 그보다 몇 수는 빨랐다.
스스스스.
정천의 눈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눈을 가득 채운 흑색의 기운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팔다리를 비롯한 몸 곳곳에서 흑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이 정천의 앞에 모여들었다.
흑색 기운은 이윽고 검의 형상으로 화했다.
기묘한 광경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유군광조차 잠시 넋을 잃고서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 그건 대체……?”
“강룡검(剛龍劍).”
정천이 대꾸하며 검을 쥐었다.
“쳐라!”
호궁위사대의 부대주가 소리쳤다. 무인의 감각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홀린 듯 정천에게로 덤벼들었다.
“차앗!”
“죽어라!”
다섯 개의 칼날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쇄도했다. 각각 왼팔과 오른다리, 양 옆구리와 목젖을 노리는 검격이었다.
정천은 전방을 향해 강룡검을 휘둘렀다. 덤벼들던 이들은 물론, 그 후방에 있던 무인들까지 일렬로 베어져 나갔다.
그런 다음 몸을 가볍게 띄웠다. 후방에서 짓쳐 들던 이들은 허공만 베었고, 그들의 머리 위로 두 번째 검격이 떨어졌다.
서거걱!
인간과 땅이 한데 베여졌다. 유군광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강기! 아니, 다르다!’
보통의 강기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그 차이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사실이었다.
‘그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그는 한순간 몸을 피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수하들을 베어 넘기는 와중에도, 정천은 그만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군광은 이를 악물었다.
“건방진 놈!”
그가 온몸으로 기세를 격발시켰다. 극성에 이른 파마열웅공이 전력으로 펼쳐졌다.
파바바밧!
무시무시한 기세로 푸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비교적 그와 가까이 있던 화연란이 기운에 밀려 날아갔다.
“꺄아악!”
그 순간 유군광은 정천의 눈치를 살폈다.
‘놈이 저 계집과 관련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저년을 염려한다면…….’
그렇다면 여차할 때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천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한결같은 시선으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유군광은 그 사실에 화가 났다. 잠시나마 인질을 사용하려 했던 자기 자신에게도.
“네놈의 사술 따위는 단박에 박살 내 주마!”
유군광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열웅진천세를 펼쳐 정천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유준협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콰콰콰콰!
그와 정천 사이의 모든 것이 터져 나갔다. 애꿎게 말려든 수하들조차 머리가 깨어져선 연달아 쓰러졌다.
그것을 본 정천이 비웃었다.
“성격만큼이나 난잡한 무공이군.”
“놈! 죽을 준비나 해라!”
정천도 강룡검을 고쳐 쥐고서 그에게로 돌진했다. 검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한 지점으로 뭉쳐 들었다.
제일검(第一劍), 열파나락(熱波奈落)!
두 기운이 삽시간에 충돌했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열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십여 장 거리에 있던 흑기단원들의 몸에 불이 붙었다.
“으아아악!”
“크아악!”
삽시간에 타오른 흑기단원들이 비명을 지르다 쓰러졌다. 워낙 불길이 강렬해서 끄거나 할 여유조차 없었다.
충돌의 중심에서 유군광이 튕겨져 나왔다. 그는 왼팔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이를 갈았다.
“이놈……!”
그의 왼팔은 화상으로 인해 빨갛게 부은 상태였다. 극성의 열웅진천세조차 놈의 열기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이었다.
정천 역시 몇 걸음 물러난 상태. 그러나 눈에 띄는 타격은 없어 보였다.
강룡검의 기운은 여전히 강렬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
“크윽!”
침음을 한 유군광이 지풍을 연달아 쏘았다. 정천은 왼손에 강기를 실어 주먹으로 지풍들을 쳐냈다.
파파파팡!
튕겨져 나간 지풍들이 날아간 곳은 흑기단과 호궁위사대의 무리. 각각의 지풍들이 그들과 충돌했다.
“크아악!”
“아악!”
연달은 비명과 함께 수하들이 쓰러졌다. 다른 수하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비쳤다.
유군광이 황급히 소리쳤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놈은 내 손으로 직접 머리를 으깨 버리겠다!”
“으으으…….”
수하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군광은 한번 한다고 말을 하면 실행하고야 마는 인물이었다.
정천으로선 그 성격이 도리어 고마웠지만.
“이거 고맙네. 저 녀석들 도망가면 쫓아가기 귀찮을 텐데 말이야.”
“닥쳐라. 네놈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죽는 것은 네가 될 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천이 갑자기 강룡검을 손에서 놓았다. 검의 형상이 삽시간에 풀려서는 흑색 연기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천의 몸속으로 다시 스며드는 것이었다.
유군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수작이냐?”
“오늘은 네놈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거든. 이걸 썼다간 까딱 실수만 해도 네가 죽을 테니까. 조금 전에 부딪쳐 보니 확신하게 되는군.”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유군광이 다시금 정천에게 돌진했다. 이번엔 그 성가신 검이 없으니 대결을 벌여도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의 생각을 읽은 정천이 웃었다.
“강룡검이 없어도 너 정도는 충분해.”
정천이 보법을 펼쳤다. 마교의 삼대비공의 하나로 꼽히는 전륜천마보(轉輪天魔步)가 펼쳐졌다.
유군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역시 이 보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은! 녀석은 역시 마교의 첩자인가!’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마교의 첩자가 왜 자신들을 노렸단 말인가?
유군광은 더 생각을 잇지 못했다. 지척까지 쇄도한 정천이 권각을 뻗었던 것이다.
각기 다른 네 개의 권각술이 펼쳐졌다.
소림의 연신나한권(練神羅漢拳).
무당의 태극복마권(太極伏魔拳).
마교의 절마열풍각(絶魔熱風脚).
사교의 비화엽사각(秘火獵蛇脚)까지!
파파파팍!
눈코 뜰 새 없이 연격이 이어졌다. 유군광은 두 번까지를 방어했으나, 세 번째와 네 번째 각법에 복부를 허용했다.
“커억!”
그의 내장이 진탕이 됐다. 절정의 호신강기가 몸을 감싸고 있는데도 그 충격이 안팎으로 그를 흔들었다.
‘어떻게 마교와 정파, 사파의 무공까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끓어오르는 의문을 해소할 길은 없었다. 아직 공격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정천의 양 주먹이 다시 그의 명치와 인중을 격타했다. 그의 쌍장이 유군광의 양쪽 갈빗대를 부쉈고, 이어진 앞차기가 갈빗대를 완전히 으스러트렸다.
“커어억!”
유군광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밀려났다. 공세에서 겨우 벗어난 그가 검을 휘둘렀으나 정천은 피하지 않고서 맨손으로 잡았다.
유군광의 얼굴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미친놈. 감히 내 검을 손으로 쥐고 무사할 성싶으냐?”
그는 체내의 기운을 모두 끌어올렸다. 반격을 하려면 지금뿐이라는 걸 체감한 까닭이었다.
파마열웅공의 기운이 검으로 모여들었다. 정천은 손바닥이 치지직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물러나진 않았다.
‘그간 거쳐 온 수라장에 비하면!’
정천은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강룡수라마공의 기운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의 눈빛이 다시금 흑색으로 물들었다.
오른팔에 뭉쳐든 기운이 다시 손아귀로 몰려들었다. 정천은 그 힘으로 검기를 짓누르는 동시에 외마디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압!”
콰아아앙!
유군광의 검이 폭발하여 산산이 조각났다. 유군광은 어이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대, 대체 그 손은 뭐냐?”
“이빨. 너희의 살점과 뼈를 물어뜯기 위한 용의 이빨.”
정천이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 손아귀엔 용이 살거든.”
“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땅을 박찼다.
“크윽!”
유군광은 기겁하여 내공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이미 진탕이 되어 버린 그의 몸은 더 이상의 여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천의 주먹이 유군광의 배에 꽂혔다. 초식이 아닌 막무가내 주먹이었으나 그 위력은 강철 같았다.
“크아악!”
유군광이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르며 그의 뱃속을 찢어발겼다.
정천의 왼손과 오른손이 연달아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치기.
빠아악!
이마가 깨진 유군광이 비틀거렸다. 정천은 마지막으로 그의 단전에다 주먹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콰직!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유군광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피로 범벅이 된 그가 숨만 겨우 쉬는 듯 들썩거렸다.
그의 단전이 완전히 깨어졌다. 정천과 달리, 어떻게 해도 내공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지만.’
정천은 가볍게 숨을 뱉고서 몸을 돌렸다.
새하얗게 질린 흑기단원들과 호궁위사대원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했다. 유군광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천이 보이는 무지막지한 파괴에 몸이 얼어붙은 것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어느 흑기단원이 말했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목소리를 내었다.
“살려 주십시오. 우린 그저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제발. 집에는 늙은 노모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천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뿐.
“너희 역시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죽이고 괴롭혔겠지. 누군가의 부모나 누군가의 자식을.”
“…….”
목소리가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협자 행세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게 무림이고 강호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너희들이 목숨을 구걸하더라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는 것을 비웃을 생각도 없다.”
그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건 살려 주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내가 말할 것은 하나뿐이다. 내겐 파멸시켜야 할 자들이 있다는 것.”
정천의 등 뒤로 흑색 기운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들과 관련 있는 자들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것.”
“큭!”
“이런 개 같은……!”
이제는 확실해졌다.
저 괴물 같은 놈은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
정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발악하든 도망치든. 너희는 모두 여기서 죽는다.”
“으아아아!”
비명 같은 기합을 내며 흑기단원 하나가 정천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이들 역시 무기를 쥐거나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천은 그들 모두를 참살했다.
* * *
담미화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시체가 그곳에 가득했다. 갖가지 형태로 참살당한 시체들이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구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옮겼다.
정천이 그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정천 님?”
그녀를 발견한 정천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돌아왔군. 싸우러 온 것 같진 않으니 계속 내 곁에 있겠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지?”
담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도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그럼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
“전부 어떻게 하시려고요?”
“흔적도 없게 태워야지. 땅에 묻으면 어떻게든 흔적이 생길 테니.”
“태우더라도 흔적은 남을 텐데요?”
“나라면 안 남길 수 있어.”
담미화는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정천이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리라.
그녀가 시체들을 옮기며 물었다.
“모두 죽인 건가요?”
“하나 빼고 전부.”
“하나라면 누구 말이죠?”
“저거.”
정천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담미화가 돌아보니 시커먼 피로 범벅이 된 유군광이 큰 대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건가요?”
“저래 보여도 천무맹 장로니까. 단전이 박살 났다고 해도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담미화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천은 과연 저자를 살려 두어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일까?
“거래에 이용하려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정천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거래라니?”
“유군광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하려는 것 아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놈을 써먹을 데가 어디 있다고?”
천무맹 장로에 대한 것치고는 너무 짠 평가가 아닌가 싶었다. 하기야 주변에 적투성이인 유군광을 누가 데려가려 할까만은.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죽여야지.”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무엇 하러 지금 살려 둔다는 말인가?
그녀의 표정을 본 정천이 말했다.
“녀석은 장로야. 십여 년 전의 회의 때 우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놈들 중 하나지. 그리고 우리가 얽힌 음모와 깊은 관련이 있고. 유준협 같은 놈처럼 고통 없이 보내 줄 수야 없지.”
담미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고통 없이 보내 준 거였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 모으기가 끝났다. 기력이 고갈된 담미화보다는 기운 팔팔한 정천이 대부분의 작업을 해냈다.
그의 오른손에 불꽃이 맺혔다.
정천은 시체 더미 위에 불을 놓았다. 불은 피를 기름인 양 삼키며 삽시간에 거대해져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멸혼겁화(滅魂劫火). 대주님의 패화영신검에서 파생된 수법이지.”
담미화는 대주님이라는 자가 용검대주 화륜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이 난리통의 한곳엔 화연란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정천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불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정천이 몸을 돌려 화연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정천을 따라 움직였다. 정신이 나가진 않은 모양.
정천이 바로 앞에 왔을 때 화연란이 말했다.
“내공을 잃지 않았군요.”
“비슷해.”
“단전이 고갈됐다는 것도 거짓말?”
“그렇진 않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내공을 쓸 수 있게 됐다.”
“왜 내게 그 사실을 숨겼어요?”
“아직은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의 눈에 약간은 생기가 돌아왔다.
“우리 모두 죽을 뻔했어요.”
“알아.”
“오라버니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겠죠?”
“되도록 놈들을 일망타진하고 싶었다. 동시에 내 존재를 최대한 숨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이곳으로 불러들여 처리하는 게 가장 나았어.”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군요!”
“응.”
화연란이 몸이 순간 굳었다. 정천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내 가장 큰 목표는 동지들의 원한을 갚는 거야. 그러려면 아직은 정체를 들키지 않는 편이 좋아. 다소간의 피해를 감수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원한을 갚는다고요? 그깟 복수를 한다고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와요?”
“그렇진 않지.”
정천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내 자기만족이다. 위선일 수도 있고. 뭐라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난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따름이고,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화연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심으론 정천이 다르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들을 지켜 주겠다거나 하는 꿈결같은 말을.
그러나 정천은 현실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리라는 현실을.
당연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왠지 서러웠다.
“그러니까 네가 강해져.”
“네?”
화연란이 고개를 들었다. 정천은 사그라지는 화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도와주지. 다음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 도움 없이도 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야.”
“……정말인가요?”
“난 거짓말은 안 해. 아니,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니까.”
평소의 정천 같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화연란은 어울리지 않게도 실소가 나오는 걸 느꼈다.
“나,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요?”
“못해도 일주지존(一州至尊) 정도? 네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겠지만.”
“청출어람은 어려울까요?”
“그거야 당연히 불가능하지.”
딱 잘라 말하는 대답에 화연란은 웃어 버렸다. 웃음이 나올 상황도 아닌데 이상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정천은 불길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단언대로 시체들은 약간의 재를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불타 버린 상태였다.
“담미화.”
그의 부름에 담미화가 다가왔다.
“황룡성 근처에서 짐승들이 가장 득실거리는 숲이 어디지?”
“네? 그것은 갑자기 왜 물으시죠?”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게 됐어?”
아차 하는 얼굴로 담미화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마도 종화산의 숲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방향과 거리는?”
“말을 타고 달려도 남서쪽으로 닷새 정도예요. 물론 제때 말을 갈아탈 수 있을 때의 경우에요. 그렇지 않다면 훨씬 시간이 걸리겠죠.”
“하루면 다녀오겠군.”
담미화는 놀라지 않았다. 정천이라면 정말 가능할 거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이것들인데.”
그는 박살이 난 건물들을 돌아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것이야 둘러댈 수 있어도 이것만은 변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진이 났다고 해 봐야 안 먹히겠지? 그냥 천재지변 쪽은 생각도 않는 게 낫겠어.”
정천이 담미화와 화연란을 돌아봤다.
“담미화, 내일 당장 목공과 석수들을 수배해. 란아야, 내일 바로 금전 전부를 수령해서 그들에게 지불하도록 해. 제갈세가 아가씨에겐 내가 말해 두지.”
“아, 그러고 보니!”
담미화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까 유군광이 군사부 무인들에게 이상한 사술을 걸었습니다.”
정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걔들 죽었어?”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냥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어요.”
“어디 있는데?”
“그게…….”
담미화가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것까진 미처 못 보고 마을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정천의 표정도 살짝 구겨졌다. 혹시나 모르고 아까 그들까지 처리했다면…….
“저기 저 사람들 아니에요?”
화연란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을 보니 담장 아래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운도 좋은 놈들이군.”
정천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화연란이 담미화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아, 저는…….”
담미화가 얼굴을 붉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화연란이 그 사실을 알고는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의 편이죠?”
“네.”
반사적으로 대꾸한 담미화가 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의 편이라기엔 조금 미묘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화연란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도 오라버니를 잘 보좌해 주세요.”
“……네.”
결국 그렇게 대답하고 마는 담미화였다.
정천은 군사부 무인들의 상태를 살폈다. 하나같이 정신에 타격을 입은 듯 넋이 나가 있었다.
잠시 그들을 살핀 정천이 생각했다.
‘다행이군.’
정신의 근본까지 완전히 파괴되진 않았다. 그저 사술을 부려 머릿속을 헝클어트려 놓았을 뿐.
그거라면 다시 복구하는 것도 가능했다.
정천은 그들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한 후 마안을 펼쳤다. 그의 눈에서 쏟아진 기광이 무인들의 눈동자로 투영되었다.
마안의 기운이 그들의 머릿속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궁멸뇌살기에 의해 엉망이 된 머리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크윽!”
“으으으.”
무인들이 신음을 흘리거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차례 그것을 반복하고 나니 그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이 정도면 됐군.”
정천이 일어나서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담미화, 이 녀석들을 몰래 옮기도록 해. 홍등가 골목길에 적당히 버려두면 될 거야. 오늘의 기억은 하나도 없을 테니 취했던 줄 알고 넘어가겠지.”
“알겠습니다.”
“란아야, 너는 어른들에게 적당히 설명하도록 해. 나에 대해선 최대한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알고 있어요.”
정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대강 정리는 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