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章 사냥의 밤 (10/146)

第九章 사냥의 밤

담미화는 당황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항시 정천의 곁에 붙어 있었다. 물론 제갈세연의 호위자들에겐 그를 감시하는 것으로 위장하고서.

정천은 조금 전 마을을 나서며 그녀에게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다.

마침 비영대 임무가 끝날 시간이기에 어색해 보이진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흑기단과 호궁위사대가 몰려왔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사, 오백.

당연히 그녀로선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그에게 알려야 해!’

담미화는 단번에 결론을 내리고서 몸을 날렸다.

경공엔 자신이 있는 만큼 저들의 숫자도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는 유군광. 그녀보다 몇 단계는 위의 고수였다.

“쥐새끼가 있군!”

별안간 소리친 유군광이 우수를 떨쳤다.

시퍼런 빛의 기운이 그의 손아귀에서 폭사되어 담미화에게 날아들었다.

콰과광!

마을 한곳의 벽돌담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곳을 잠시 지켜보던 유군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운이 좋은 쥐새끼로군.”

“조부님?”

유군광은 유준협을 돌아봤다.

“은신하던 놈이 하나 있었다. 네가 쫓아가라.”

“제가 말입니까?”

“급소는 피했지만 출혈이 상당할 게다. 속도의 사 할은 잃었을 테니 지금의 네 경공이라면 충분이 쫓아갈 수 있다.”

유준협이 조금 전 무너진 담벼락을 보았다. 과연 시뻘건 핏자국들이 일렬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군광이 두 눈에서 기광을 내뿜었다.

“가라. 완전히 숨통을 끊은 다음 돌아와라.”

“아, 알겠습니다.”

유준협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평소엔 실감하지 못했으나, 본연지기를 완전히 개방한 유군광의 기운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핏자국을 따라 몸을 날리는 유준협을 보며, 유군광이 중얼거렸다.

“어떤 놈이 풀어놓은 쥐새끼인지는 모르겠군. 뭐 어차피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그의 시선이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화연란이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방심했어.’

담미화는 이를 악물었다. 군계(群鷄)라고 생각했던 무리 사이에 학이 한 마리 숨어 있었을 줄이야. 아니, 이건 학이라기보다도 맹금이라 부르는 게 옳을 터였다.

그녀는 조금 전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노고수가 발출하던 파괴적인 기운 역시.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뿐.

분명했다. 호상장로 유군광이었다.

‘설마 그자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너무나 큰 거물이 나서고 말았다. 지금의 청화촌을 생각한다면 이건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는 머릿속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간신히 유군광이 내뿜은 기운을 피했으나, 그 과정에서 허벅지가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팔을 다쳤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때문에 그녀의 경공술은 평소의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추격자.

지혈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후후후. 다리를 다친 가련한 쥐새끼로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 다행히 유군광이 직접 쫓아오진 않은 듯했다.

하기야 그가 왔다면 벌써 뒤를 잡혔겠지만.

“지금 멈추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뭐, 마음에 따라 팔다리 정도는 잘라 버릴 수도 있겠지만. 어떠냐. 목숨이라도 건질 테냐?”

“…….”

“머리가 나쁜 놈이군.”

팍!

“크윽!”

반대편 허벅지에 칼날이 꽂혔다. 불에 덴 듯한 격통을 느끼며 담미화가 땅을 뒹굴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일어나려 했으나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출혈이 많아서인지 머릿속까지 혼미해져 왔다.

유준협이 쓰러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호오, 이제 보니 계집이로군.”

담미화는 일어서려 했으나 유준협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허벅지에 꽂힌 검을 붙들었다.

그리고 살짝 비틀었다.

“……!”

담미화의 몸이 고통스러운 듯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본 유준협이 비웃듯 말했다.

“비명도 지르지 않는 건가? 제법 훈련을 잘 받은 모양이군.”

그는 무신경하게 검을 뽑아선 담미화의 복면을 치웠다. 그녀의 맨얼굴을 본 그의 눈이 엽색의 빛을 띠었다.

“호, 제법 반반한 얼굴이군.”

화연란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미인의 범주에 드는 얼굴이었다. 화장이나 치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는 음심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요사이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여자를 안아 보지 못했다.

그가 칼끝으로 담미화의 목을 겨누었다.

“누가 네게 청화촌에 숨어 있으라고 명령했나.”

“…….”

“흥.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유준협이 차갑게 웃고는 담미화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상처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라도 대답하면 목숨은 살려 주지. 팔다리도 자르지 않겠다. 오히려 곁에 두고서 실컷 귀여워해 주마. 어떠냐?”

“윽……!”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영영 걸을 수 없게 될 거다.”

담미화는 그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유준협의 눈엔 탐욕만 가득 차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대답하더라도 다를 것은 없으리라. 무공이 폐해진 채 놈의 노리개가 되어 사육당하겠지.

어차피 그녀는 대답할 수도 없었다. 정천이 걸어 놓은 금제가 지금도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대답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유준협의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멍청한 년. 결국은 죽음을 택하겠다는 건가?”

“…….”

“편히 죽이지 않을 것이다. 팔다리를 끝에서부터 잘근잘근 잘라 네 두 눈으로 직접 구경하게 한 다음 내장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눈을 뽑은 다음 심장을 으깨 주지.”

잔혹한 말이 계속되었지만 담미화는 떨지 않았다. 그의 말이 얼마나 잔인하건 간에 그녀가 겪었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에 비하면…….’

무엽의 옥나수정신조차 견뎌냈던 그녀다.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유준협의 협박에 굴할 리 없었다.

담미화는 비웃음 띤 표정으로 유준협을 노려봤다.

“……흥.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유준협은 협박을 포기한 듯 발을 치웠다. 그러나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밤은 기니까 천천히 즐기도록 하지.”

“큭!”

“어차피 이런 외진 곳까지 올 사람은 없으니까, 허튼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담미화는 차라리 혀를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유준협이 한 발 앞서서 그녀의 혈도를 짚어 버렸다.

널브러진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유준협이 웃었다.

“출혈이 심해 곧 죽겠군.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즐길 수 있으니 다행 아닌가?”

이제는 도망칠 방법도, 대항할 방법도 없었다.

바로 앞으로 다가드는 콧김을 느끼며 담미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아비나 자식 놈이나 다를 게 없군.”

“뭣……!”

유준협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목소리에 담미화도 눈을 떴다.

달빛을 받은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몸 위로 길게 늘어졌다. 유준협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놈은 또 뭐냐?”

“청룡문 문지기.”

“뭐야?”

달빛을 등진 채 정천이 미소 지었다.

“자주 출근하지는 않지만 말이지.”

유준협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안력을 돋웠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저런 얼굴을 지닌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천은 그를 무시한 채 다가왔다. 유준협이 긴장해서는 검을 내밀었다.

“뭐하는 놈인지 몰라도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정천은 그 말을 무시한 채 담미화의 옆에 섰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여 그녀의 허벅지를 짚었다.

“우선 지혈하겠다. 치료는 조금 뒤에 해 주지.”

정천은 곧바로 점혈당한 혈도 역시 풀어 주었다. 담미화는 한층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그와 유준협의 칼끝은 지척.

유준협은 어이가 없어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이런 미친 새끼를 보았나.”

“너, 유신청인가 그 자식 아들놈이지?”

“뭐야?”

몸을 일으킨 정천이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생긴 게 비슷하군. 하는 짓도 비슷하고. 네가 담미화를 쫓아온 걸 보니 마을 쪽에 있는 건 네 할아비인 유군광인가? 결국 돈 욕심을 참지 못해 움직인 모양이군. 뭐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이런 놈이 다 있는가? 그저 미친놈이라 생각했는데 하는 말이 모두 맞아떨어진다.

그 와중에 유준협은 깨달았다.

“네놈이 설마 우리 아버지를?”

“어, 그 새끼 이빨을 다 날려 주었지.”

“이런 미친 새끼!”

유준협이 검기를 출수했다. 새파란 빛의 기운이 그의 칼끝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파앗!

“죽어라!”

그는 빠른 속도로 정천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담미화에게 펼칠 때와는 수준이 다른 검격이었다.

열웅진천세(熱熊進天勢). 유군광을 호상장로의 자리에까지 올려 준 파마열웅공의 절초였다.

정천은 담백하게 웃었다.

그리고 유준협의 검을 붙잡았다.

까앙!

“……!”

유준협은 세 번 놀랐다. 정천이 맨손으로 칼날을 붙든 것에, 살을 베는 감촉 대신 강철을 때린 듯한 느낌에.

그리고 주변을 잠식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스스스스!

정천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흑색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유준협은 그가 무시무시한 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조금 전까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거늘!’

당황한 유준협이 말을 더듬었다.

“너, 너. 그 기운은 도대체 뭐, 뭐야?”

“강룡수라마공(剛龍修羅魔功).”

“마공이라고? 그렇다면 마교의……?”

“아니.”

정천이 손아귀를 그러쥐었다.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종잇장처럼 우그러들었다.

“나락의 가장 깊은 곳에서 완성된 무공이다.”

“나락이라고? 미친놈이 개소리를!”

부웅!

정천의 왼팔이 횡으로 그어졌다. 찰나의 순간 유준협의 눈앞에 흑색 일선이 그어졌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유준협은 자신의 이빨들이 우수수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크어억!”

유준협이 입을 움켜쥐고서 버둥거렸다. 정천의 주먹이, 그가 입을 벌린 짧은 순간 동안 이빨들을 일렬로 치고 지나간 것이다.

정천이 빙긋 웃었다.

“참을성이 좋군. 네 아비는 한 방 맞고 그대로 뻗어 버렸는데 말이야.”

“으어어…….”

“뭐 그땐 이빨만 때린 게 아니었지만.”

정천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히이익!”

유준협이 기겁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경공을 펼쳐 달아나려는 그의 목덜미를 정천이 붙들었다.

“조금 아쉬운걸. 너를 해치우는 건 란아에게 직접 맡기고 싶었는데.”

“사, 살려 주…….”

“하지만 난 어쭙잖은 동정심이나 여유로 우환을 남겨 둘 생각이 없어.”

콰직!

정천의 손아귀가 유준협의 목뼈를 그대로 부수었다. 유준협의 몸이 순간 움찔하더니 목각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그의 시체를 내던진 정천이 담미화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정천을 보고 있었다.

“내가 싸우는 건 처음 보겠군.”

“……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그거랑 별로 다르지 않을 거란 말이군. 어쩌면 더 심할 수도 있겠고.”

담미화는 아차 싶었다.

“죄송합니다.”

“됐어.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는 사람들보단 적에게서 자주 보게 될 표정이니까,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아.”

정천은 담미화의 허벅지에 손을 댔다. 그런 다음 움찔하는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편안히 있어. 대강 치료할 테니까.”

“네? 하지만 어떻게…….”

정천이 그녀의 몸속에 기운을 주입했다.

파앗.

담미화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몸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정천의 기운은 강렬했다.

정천은 상처 부위의 회복력을 활성화시켰다. 수십 일이 걸려야 할 자생회복(自生回復)이 수 초에 지나지 않는 속도로 전개됐다.

빠르게 아무는 상처를 보며 담미화는 할 말을 잃었다. 선인쯤은 되어야 이런 신기(神技)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정천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별별 것을 다 배워야했지. 마교의 무공과 다른 문파의 무공, 나아가 갖가지 비술과 신술들까지 말이야.”

“…….”

“이 정도면 괜찮을 거다. 소모한 피까지 보충하지는 못했지만.”

과연 그녀의 허벅지는 상당 부분 아물어 있었다. 완전히 나았다고 할 순 없지만 움직이기엔 불편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촉박하니 이 정도로만 만족해.”

담미화는 이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정천이 대뜸 그녀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무, 무슨……!”

“가만히 있어.”

정천이 다시금 기운을 주입했다. 그 순간 담미화는 가슴속에 존재하던 거북스런 기운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금제를 해제했다.”

담미화가 놀란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어째서 그런 거죠?”

“이젠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

“제가 말인가요?”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로들에 대한 정보는 대강 얻었으니, 딱히 네게 더 시킬 건 없어. 앞으로는 네 좋을 대로 행동하도록 해. 어차피 나에 대해 알릴 마음은 들지 않겠지만.”

그건 그랬다. 조금 전의 정천을 본 이상은…….

‘아!’

담미화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소리쳤다.

“큰일이에요! 마을에 호상장로와 그 무리가…….”

“알아.”

짤막한 대꾸에 담미화는 흠칫했다. 그리고 조금 전 정천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그래.”

정천은 흑기단과 호궁위사대가 몰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제갈세연을 데려다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직은 군사 제갈현이 눈치를 채선 안 되기에!’

더불어 정천은 유군광과 그 무리가 마을로 들어서게 두기로 했다. 그래야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로 인해 도출되는 분명한 사실 하나.

담미화는 두려운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을 미끼로 사용한 거군요.”

“그래.”

“대체 어째서죠?”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하니까.”

담미화는 몸을 떨었다.

처음엔 정천이 청화촌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화촌의 사람들은 그의 형제와 같다던 용검대의 식구들이기에.

그러나 정천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다.

“가장 확실한 복수를 꿈꾸는 거군요. 모든 적을 확실하게 쓸어버릴 수 있는 길을.”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면 필연적으로 먼저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적들이 달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아가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역시.

때문에 정천은 일부러 기다린 것이다. 저들이 마을 안에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말이다.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이 죽을 수 있음에도.’

“그런 내가 무섭지?”

피식 웃으며 묻는 정천. 담미화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출혈이 많으니 금방 움직이긴 힘들 거야.”

정천이 몸을 돌렸다.

“마을로 가시는 건가요?”

“지금이라면 완전히 덫 안으로 들어왔을 테니까.”

“…….”

“이젠 사냥하는 일만 남았지.”

정천이 청화촌을 향해 땅을 박찼다.

* * *

화연란은 담벼락이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드디어 왔구나.’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놓은 지하실에 숨게 했다.

예전부터 대비해 온 일인 만큼 행동을 빠르게 이루어졌다.

모두가 숨은 걸 확인한 화연란은 집 밖으로 나섰다.

‘죽는 것은 나 하나면 충분해.’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문득 검을 가져오지 않은 게 아쉬웠다. 한 명의 적이라도 해치우고 죽는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러나 마을 어귀의 무리를 보고는 그 마음을 싹 접었다.

발악이나마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계집이로구나.”

무리의 선두에 있던 노고수가 말했다. 화연란은 그가 바로 호상장로 유군광임을 알아봤다.

“작은 마을을 상대로 수백이나 되는 무리를 끌고 온 건가요?”

“그래.”

거리낌 없이 대꾸하는 유군광.

그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일렁였다.

“흔적도 없이 다 짓밟아 버리려고 말이다.”

“…….”

화연란은 이를 악물었다. 유군광의 기운은 정파인보다도 차라리 마교의 그것에 가까웠다.

지금 같은 세상에 정과 마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은.

“바라는 게 뭐죠?”

그녀의 물음을 들으며 유군광은 화연란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에 탐욕의 빛이 스쳤다.

‘과연.’

손자가 탐을 낼 만도 했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을 텐데, 그녀의 미색은 천무맹 안에서도 가히 수위를 다툴 지경이었다.

유군광은 화연란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본좌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화연란이 미간을 찡그렸다.

“금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가요. 원한다면 수령증이든 양도 증서든 뭐든 써 줄 테니.”

“그리고 내 손자가 네게 마음이 있나 보더군.”

“……마을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면, 유준협의 뜻대로 하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유군광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본좌가 네년을 취할 것이니까.”

“…….”

“그리고 이곳은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끔 싹 말이다.”

“그만둬요! 원하는 것만 가져가면 되잖아요!”

화연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유군광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후환을 남기는 멍청한 짓을 할 수야 없지.”

“이곳엔 움직이기도 불편한 어르신들밖에 없어요!”

“그거야 네놈들의 사정일 뿐.”

유군광이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장난감을 찾는 아이의 눈 같았다.

“어디에 있을까? 필시 한곳에다 늙은 것들을 죄다 몰아 두었을 테지?”

“……!”

“눈빛을 보니 맞는 모양이군.”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오른손을 들어 보인 유군광이 어느 집을 겨냥했다.

“이런 짓이다.”

그의 손에서 강렬한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푸른빛의 장력은 삽시간에 집으로 쇄도해서는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집을 보며 화연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만해요!”

“누구도 본좌에게 명령할 순 없다.”

“그만두지 않으면 혀를 깨물어 자결하겠어!”

“해 볼 테면 해 봐라.”

그 순간 화연란은 온몸이 돌처럼 굳는 것을 느꼈다. 유군광이 궁멸뇌살기를 약하게 쏘아 그녀의 자유를 빼앗은 것이다.

물론 자아가 붕괴되지 않게끔 힘을 조절했다.

‘백치보단 제정신인 계집을 안는 편이 재밌을 테니 말이야. 저년이 쏟아 낼 비명 소리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군.’

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장력을 발했다.

콰과광! 콰앙!

연달아 몇 개의 집채들이 날아갔다. 화연란은 무력하게 굳은 채로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안 돼……!’

이제 마을엔 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노인들이 숨어 있는 집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지만…….

‘아니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군광이 이미 그 집이 어딘지 알고 있다는 것을.

그 정도 되는 초고수가 그것을 감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내 모습을 보면서 즐기고 있는 거야.’

그 사실을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무력하기만 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유군광은 그녀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질리는군.’

너무 간단해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마을의 녀석들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무력하고 멍청했다.

‘혹여나 도망치는 녀석이 있을까 하여 수하들을 전부 데려왔거늘.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왔어도 됐겠군.’

그는 입맛을 쩝 다셨다.

‘뭐, 재미야 저 계집을 갖고 보면 될 일이니.’

그의 손이 어느 집으로 향했다. 노인들이 숨어 있는 바로 그 집이었다.

“이제 끝을 내자.”

“아…….”

화연란은 무기력하게 신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유군광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준협이 이놈은 너무 늦는데.”

“바로 만나게 해 주지.”

낯선 목소리가 별안간 끼어들었다. 그 순간.

쉬이이익!

무언가가 유군광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군광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그것을 피했다.

퍼어어억!

뼈와 살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유군광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주, 준협아!”

유준협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 전 충돌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피에 절은 흑룡포가 분명한 증거였다.

“어떤 개자식이!”

유군광이 시체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기단 단원들의 사이에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네놈은 뭐냐!”

“청룡문 문지기.”

“뭐라고?”

유군광이 얼이 빠진 표정을 했다. 사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네 자식을 불구에 천치로 만든 놈.”

“네, 네가?”

“네 손자를 죽인 놈.”

“네놈이……!”

“그리고 너와 네 수하들 모두를 죽일 놈.”

유군광이 이를 악물었다.

정천은 무저갱처럼 깊은 눈을 빛냈다.

“무자비하게 사냥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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