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청화촌, 습격당하다 (9/146)

第八章 청화촌, 습격당하다

유준협은 왈칵 짜증이 났다.

“젠장!”

사실 요사이의 그는 내내 짜증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백주 대낮에 암습을 당했다. 범인은 호궁각 위사대원들까지 모조리 때려눕히고서 유유히 도망쳤다. 그런데도 그 꼬리는커녕 자그만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속을 뒤틀어 놓았다. 그러나 더 열불 터지는 일은 따로 있었다.

“제갈세가의 계집이 청화촌을 드나든다고?”

“그, 그렇습니다.”

청화촌을 감시하던 흑기단원의 보고였다. 제갈현의 질녀이자 와룡장의 부장주인 제갈세연이 청화촌을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준협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와룡장은 흑기단으로서도 함부로 건들 수 없다. 아니, 호궁위사대와 호상장로 유군광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체 그 계집은 왜 청화촌에 드나드는 것이라더냐?”

유준협의 물음.

보고를 올렸던 흑기단원이 머뭇거렸다.

“저, 그것이, 어떤 계기인지는 몰라도 그녀와 화연란이 친분을 맺은 모양입니다.”

“화연란 그것이?”

유준협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면 와룡장 부장주와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청화촌은 항시 흑기단의 감시를 받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감시가 소홀해진 적이 최근에 있기는 했지만…….

‘설마?’

분명했다.

‘요 며칠 동안 무슨 수작을 벌인 것이다!’

황룡성 곳곳을 들쑤시느라 흑기단도 호궁위사대도 정신이 없었다. 화연란이 뭔가 수를 냈다면 그때밖에 없었다.

“크으, 그 영악한 년이……?”

태어난 이래 손에 넣지 못한 게 없는 유준협이었다. 든든한 가문이 있고 수하들이 있었다.

미녀가 되었든 재보가 되었든 그가 취하지 못한 건 없었다.

하물며 몰락한 무인가의 계집이라면.

화연란이 제법 오랫동안 버텨 오긴 했으나, 그것도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 청화촌은 고립되었고 흑엽촌과 흑기단의 위세는 막강했으니까.

만 냥의 금전 역시 화연란과 함께 자기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유준협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아니, 아직 변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그가 바라지 않는 형태로 변할지 몰랐다.

“그렇게 되게 둘 것 같으냐.”

벌떡 일어선 유준협이 걸음을 옮겼다. 흑기단 장정들이 쭈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유준협이 향한 곳은 호궁각.

그의 조부, 호상장로 유군광이 장로실에 있었다.

평소라면 주사청루(酒肆靑樓)에서 노름이나 여색으로 시간을 보냈겠지만, 유신청이 당한 이후론 호궁각을 지키고 있는 그였다.

“조부님.”

안으로 들어서는 유준협을 보며 유군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기하고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조부님, 언제까지 이러고만 계실 겁니까?”

“당연히 그놈의 단서를 찾을 때까지가 아니겠느냐. 네 아비의 복수를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는 동안 화연란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단 말입니다.”

유군광의 주름이 깊어졌다.

“네 아비가 당했는데 아직도 그깟 계집에게나 마음을 팔고 있느냐?”

“조부님.”

“그러게 내가 누누이 말했잖느냐. 그깟 마을쯤 단번에 쓸어버리고 계집을 취해 버리라고.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말이다.”

유준협도 미간을 찡그렸다.

잔혹한 성정은 비슷했으나 그와 조부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일전에도 크게 곤혹을 치르셨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흥!”

유군광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손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오래전 그는 주루의 기생들을 함부로 죽였다가 크게 곤혹을 치렀었다.

안 그래도 견원지간이던 군사부와 충돌했었던 것이다.

“그 기생년이 제갈세가 애송이 놈과 통정하는 사이인 줄 어찌 알았겠느냐.”

“어쨌든 내키는 대로 칼만 휘둘러선 안 되는 세상입니다. 뒤탈이 없으려면 머리를 써야지요.”

“흥. 예전이 좋았지.”

유군광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마교와 항시 으르렁거리던 그때가 좋았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그냥 쳐 죽여도 됐거든. 마교 놈들의 소행이라고 적당히 뒤집어씌우면 되니 간편하기도 했지.”

“어쨌든 지금은 그러기 힘듭니다. 보는 눈이 워낙 많으니까요.”

“나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얌전히 있는 것이 아니냐?”

다른 이들이 보면 거품을 물 일이었다.

근래 유군광의 발광에 화를 치르지 않은 집단을 찾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런 이들에게 신경 쓸 리 만무했다.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방금 전에 말씀 드렸잖습니까.”

“청화촌의 그 계집이 뭘 어쨌다고?”

“요사이 와룡장 부장주와 친하게 지내는 모양입니다.”

“부장주라면, 군사의 조카라는 그 계집?”

“그렇습니다.”

유군광이 끙 하는 신음을 냈다.

“또 제갈씨 그놈들이 문제인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칫하면 금전 만 냥도 빼돌려질지 모릅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유군광이 펄쩍 뛰었다.

자신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돈은 엄청났다. 흑기단과 호궁위사대의 유지비만 해도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성격상 이곳저곳에 뇌물도 많이 들었다. 호상장로의 위명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가 용검대의 성과급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유군광이 손자를 노려봤다.

“분명 이번 일은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했잖느냐. 그래서 네게 모두 일임했거늘,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느냐!”

“일이 이렇게 될지 제가 알았겠습니까?”

유준협이 억울한 듯 항변했다. 유군광은 무시하는 눈치였지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사정이냐. 그년이 제갈세가 계집과 어떻게 어울리게 된 거냐?”

“그걸 모르겠습니다. 분명 교류를 통할 징후 같은 건 없었는데…….”

“그럼 됐다. 이제 와서 원인 따위를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프지.”

안 그래도 요사이 머리 굴리는 일엔 아주 지친 두 사람이었다.

“그래, 방도는 생각해 두었느냐?”

유군광의 물음에 유준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발한 계책이 필요한 시점인데…….”

“쯧쯧. 너나 신청이는 그게 문제다. 이래서 무인가 자식놈은 먹물을 피해야 하는 건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까짓거 뭉개 버리면 그만 아니냔 말이다.”

유준협의 얼굴이 굳었다.

“제갈세가와 척을 지겠단 말씀입니까?”

“척은 무슨. 와룡장 계집이 없을 때 마을까지 통째로 쓸어버리면 군사인들 어찌하겠느냐.”

“마을까지 통째로요?”

“그래. 이참에 놈들에게 있는 돈도 모두 쓸어 담아 오고 말이다.”

“하지만 뒷말들이 많을 텐데요. 잘못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집행부도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고요.”

“그거야 무마해 버리면 그만이지. 금 일만 냥이면 집행부가 아니라 맹주의 마음이라도 돌릴 수 있다.”

“으음.”

유준협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역시 싹 쓸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팔다리를 부러트리면 화연란 그년도 발악할 수 없을 테고.’

유준협이 동하는 가운데 유군광이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목격자 따위야 모조리 제거하면 그만 아니냐. 이번 일로 너도 똑똑히 느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안 그래도 본인들부터가 증거가 없어 발만 구르고 있는 실정.

유준협도 완전히 마음이 넘어갔다.

“그럼 날은 언제로 잡을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괜히 여유를 두었다가 네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갈세가 계집이 없을 시각에?”

“그래야지. 그년을 건드렸다간 군사와 제갈세가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조부와 손자는 서로를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지금 당장 흑기단을 모두 모아라.”

* * *

제갈세연이 버럭 화를 냈다.

“좀 잘 알아듣게 설명해 주면 덧나요?”

“네가 멍청한 걸 대체 어쩌란 거냐?”

“머, 멍청하다고요?”

정천은 진심을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멍청해.”

“이익!”

제갈세연은 칼집을 씌워 둔 복룡세검(伏龍細劍)을 휘두르려다 애써 참았다.

“으, 내가 참아야지.”

“그래야지. 온종일 인내심 한 번 보이지 못했는데 이제라도 보여야지 않겠어?”

“이익!”

제갈세연이 얼굴을 붉히고서 발만 동동 굴렀다. 정천은 시큰둥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막대기를 휙 뻗었다.

딱!

“아야!”

손등을 맞은 제갈세연이 움찔거렸다. 내공 하나 실리지 않았는데, 어쩜 저렇게 아프게 때릴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사람 급소만 평생 연구했어요?”

“사람만 연구했을까.”

가볍게 대꾸한 정천이 다시 막대기를 휘둘렀다. 제갈세연은 그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려 했다.

“또 내공을 쓴다.”

정천의 말에 그녀가 움찔했다.

“이번엔 안 그랬어요!”

“무의식적으로 내공을 운용하려 했잖아.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어.”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아요?”

“못 믿겠으면 이것도 그만두든가. 네가 때려치우면 난 오히려 고맙지.”

“으…….”

제갈세연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수련법은 단순했다. 검갑을 채워둔 검으로 정천과 대결하는 것.

여기엔 다음 조건이 따랐다.

내력을 일체 운용하지 말 것, 외공도 사용하지 말 것, 그저 육체의 힘만으로 싸울 것.

처음엔 제갈세연도 호기롭게 받아들였다. 화연란을 통해 정천이 내공을 잃었다는 것을 들었던 까닭이다.

‘예전엔 대단한 사람이었다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실제로 붙어 보니 상황이 달랐다.

정천이 상상 이상으로 비겁했던 것이다.

그녀가 기회만 잡으면 내공을 쓰고 있네 어쩌네 하며 멈추게 했다. 분명 제갈세연 자신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녀의 흐름은 금세 끊겼고, 그럴 때마다 정천은 막대기로 급소를 쿡쿡 찔렀다.

아픈 건 둘째 치고라도, 이게 과연 도움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심술부리는 거 아니에요?”

“귀찮은 거 무릅쓰고? 난 싫으면 싫었지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아.”

“하지만…….”

“이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징징대는 거야?”

“윽!”

제갈세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 고작 며칠 되지도 않은 수련이 아니던가.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내내 청화촌을 찾아왔다.

한동안 그녀를 피해 다녔던 정천이었으나, 결국은 붙들려서 부탁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부탁이란 간단했다.

“내 수련을 도와줬으면 해요.”

“내가? 너를?”

“그래요. 정 소협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백부님의 눈치만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어요. 정 소협이라면 제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정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이렇게 될 줄은 미리 짐작했었지만.

“조건이 있다.”

“그게 뭐죠?”

“우선은 주기적으로 란아와 대련을 해 줄 것. 그리고 청화촌 일에 신경 쓰지 말 것.”

“네?”

“네가 란아에게 말했다는 거 알고 있어. 이곳의 성과급을 와룡장으로 옮기겠다고 했다며?”

제갈세연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을 휘두르던 화연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그만 털어놓았어.”

“언니!”

정천이 끼어들었다.

“너한테 악의나 딴생각이 없다는 건 안다. 청화촌 사정도 대강 들었을 테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하고.”

“그런데 왜 거부하는 거예요? 와룡장이라면 저 거금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보관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날파리가 꼬이기도 쉽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아아. 제갈세가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곳은 황룡성이고, 청화촌엔 적이 상당히 많거든.”

그건 그랬다. 제갈세연 역시 화연란에게서 소상한 이야기를 들은 까닭에 알고 있었다.

“그나마 흑기단 같은 놈들만 얼쩡대는 것도 소식이 거의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와룡장으로 돈이 굴러 들어가는 순간 황룡성의 모두가 그 존재를 알게 되겠지.”

“그건…….”

“와룡장을 두드릴 수야 없을 테니, 결국은 돈의 주인인 청화촌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와룡장이나 제갈세가로서도 딱히 도울 길은 없잖아?”

제갈세연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와룡장은 그 성격상 무인보다도 문인들이 많았기에, 청화촌을 호위해 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다른 호위들을 고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도리어 분쟁의 가능성만 키울 확률이 높았다.

흑기단에 대해선 그녀도 대강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 있으려고요?”

“방법은 차차 생각할 거야.”

“너무 속 편한 대답 같은데요.”

“나만큼 걱정 많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정천이었다.

그렇게 제갈세연의 수련이 시작됐다. 그녀는 매일같이 청화촌을 찾아왔고, 정천은 귀찮아하면서도 수련을 도왔다.

“근데 정말 이게 효능은 있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어째 책임 회피 같은데요.”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제갈세연이 정천을 흘겨봤다.

“도대체 이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 건데요?”

“제갈세가의 검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지. 냉정을 기반으로 하는 정성검(靜省劍), 냉혹을 기반으로 하는 중성검(重省劍), 냉혈을 기반으로 하는 무성검(無省劍). 이건 그중 정성검을 단련하기 위한 수련이다.”

제갈세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

무척 오래된 구분법이긴 했으나 분명 제갈세가의 검을 구분하는 방식이 맞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너무 혈기가 넘쳐. 그 성질부터 죽여야 정성검의 묘리가 제대로 발현될 거다.”

“만약 그렇게 되면요?”

“휘황찬란한 별호 하나 달게 되겠지. 무림일화(武林一花)니 뭐니 하는 것들.”

“정말 그 정도까지 될 수 있어요?”

“그래. 나아가 중성검까지 깨치게 되면 무림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거다.”

“그럼 무성검까지 성취한다면요?”

“네 이름만 듣고 오줌 지릴 놈들이 산천에 가득할걸. 뭐, 사람대접 받기는 힘들어지겠지만.”

“그, 그건 무슨 뜻이에요?”

“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그렇게 될 가능성도 극히 낮으니까. 어쨌든…….”

정천은 막대기를 내던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에? 벌써 그만두게요?”

“벌써는 무슨. 이미 해가 지고 있다고.”

정천의 말마따나 그림자가 길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제갈세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복룡세검을 허리춤에 찼다.

화연란이 부엌 쪽으로 향했다.

“밥 먹고 갈 거지? 변변한 건 없으니 이해해 줘.”

“괜찮아요, 언니. 저 아무 거나 잘 먹어요.”

흔쾌히 대답하며 마루에 앉는 제갈세연. 정천이 떨떠름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밥도 먹고 갈 거냐?”

“그래요. 문제라도 있어요.”

“웬만하면 빨리빨리 들어가지? 허울뿐이지만 부장주인데 너무 나돌아 다니는 거 아냐?”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내가 없는 편이 일하기 편하니까요. 게다가…….”

제갈세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두 분은 모르겠지만 사실 이 근처에도 수행원들이 널려 있어요. 백부님께서 붙여 놓은 사람들이에요. 이젠 어린애도 아닌데 너무 저를 감싸시려는 것 같아요.”

정천이 픽 웃었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정천이 말을 돌렸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 역시 얘기하지 않았다.

‘일급 비영대원 셋에 특급 한 명이라. 끔찍하게도 조카딸을 아끼는 모양이군.’

담미화 정도는 눈치도 못 채게 기습해 버릴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포섭한다면 그녀보다도 유익하게 쓸 수 있을 터.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갈 듯했다.

‘더 뽑아낼 정보도 딱히 없고 말이지.’

비영각 서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비영대원들조차 접근할 수 없는 정보뿐이었다.

정천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종이와 붓, 벼루를 가지고 나왔다.

제갈세연이 즉각 관심을 보였다.

“서화라도 그리려고요?”

“너, 정말 바보냐.”

“윽. 이번엔 또 왜요. 갑자기 그런 걸 갖고 나오면 떠올릴 만한 게 뭐가 있다고…….”

“저번에 말한 현원천단검 있잖아. 그거 마지막 초식의 구결을 적어 주려고 그런다.”

“아, 그거요? 아하하. 난 또 뭐라고.”

어색하게 웃던 제갈세연이 이내 놀랐다.

“그런데 그 구결을 적어서 주겠다고요?”

“그래.”

“구결을 전부 외우고 있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제갈세연이 할 말을 잃은 듯 정천을 쳐다봤다.

사실 그녀가 생각을 못한 것도 당연했다. 보통은 이미 존재하는 서책이나 무공서를 준다고 하지, 직접 써서 바로 주겠노라 하지는 않는 것이다.

말이야 쉽지, 구결을 외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본디 자신의 것도 아니라면.

천재 소리 듣는 제갈세가의 인재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글자나 되는대로 적으려는 건 아니죠?”

“들켰군. 비밀을 알았으니 살려 둘 수 없겠는데?”

“대체 어느 쪽이 농담이에요?”

“맞춰 봐.”

정천은 가볍게 대꾸하고서 마루 위에 종이를 펼쳤다. 그러고는 오른손의 붓을 왼손으로 다시 잡았다.

“어. 정 오빠, 왼손잡이였어요?”

“대체 누가 네 오빠냐?”

“소협이나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보단 낫잖아요. 근데 정말 왼손잡이에요? 아까 보니 오른손잡이 같던데.”

“오른손잡이 맞다.”

“그런데 왜 왼손으로 글을 쓰려고 해요?”

어깨를 으쓱거린 정천이 대답했다.

“필적을 본 누군가가 내 천재적인 실력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려고.”

“에휴.”

제갈세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현원천단검의 구결을 적어 나갔다.

정말 못 봐줄 만큼 삐뚤빼뚤한 글씨로.

“대체 그렇게 써서 누구더러 알아보라는 거예요? 발로 써도 그것보단 낫겠네.”

“정말 발로 써서 줄까?”

“칫, 됐어요. 그거라도 주세요.”

제갈세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는 동안 화연란이 간단한 죽과 산채 등을 내왔다.

“와, 맛있겠다.”

밝은 얼굴로 젓가락을 집은 제갈세연이 산채를 집어 입에 물었다. 초라한 밥상일 텐데도 그녀는 정말 맛있는 듯 꼭꼭 씹었다.

“언니 정말 요리 잘하시네요. 쓸데없이 호화롭기만 한 음식들보다 맛있어요.”

“그러니? 재료만 더 있었어도 이것저것 만들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어요.”

“고기 먹고 싶다.”

“…….”

초를 치는 정천을 제갈세연이 흘겨봤다. 화연란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고는 죽을 따로 그릇에 담아 들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옆집에 좀 다녀오려고. 장씨 댁 할머니가 이빨이 안 좋으셔서.”

“아…….”

“먼저들 먹고 있어. 오라버니, 잠깐 다녀올게요.”

“응.”

화연란이 집을 나갔다. 제갈세연은 감동받은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언니, 그동안 고생이 정말 심했을 거예요. 들어보니 혼자서 마을을 이끌어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더군.”

“그런데도 힘들단 소리 한번 하지 않는 걸 보면 너무 대단해요. 안타깝기도 하고요.”

“말로는 무슨 소리를 못하겠어.”

제갈세연이 정천을 홱 돌아봤다.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돼요?”

“하고픈 말은 신경 쓰지 않고 말한다는 주의라서.”

“그러는 정천 오빠야말로 언니에게 뭘 해 줄 수 있어요? 집에 눌러앉아 있는 것 말고는 없으면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제갈세연이 흠칫하여 입을 닫았다.

차라리 정천이 반박했다면 같이 열이라도 냈을 텐데, 너무 간단히 인정해 버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정천 오빠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 텐데…….”

“됐다. 어쨌든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오히려 그 아이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

정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갈세연은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적잖이 놀랐다.

그 표정은 이내 사라져 버렸지만.

“꾸역꾸역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나지?”

“누, 누가 꾸역꾸역 먹었다는 거예요?”

제갈세연이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하는 게 무색하게 그녀의 그릇은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그것을 본 정천이 피식 웃었다.

“잘 먹는군. 하긴 그 나이면 의자라도 씹어 먹을 때니까.”

“흥!”

토라진 제갈세연이 구결이 적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문지방을 나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같이 안 갈 거예요?”

“내가 왜?”

“혼자 가면 심심하단 말이에요.”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싫은 티를 내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정천이었다. 제갈세연이 헤 하고 웃었다.

“백부님한테 말고는 이렇게 어리광도 부리지 못한단 말이에요. 좀 봐주세요.”

“그래야지. 어린애 상대로 뭘 어쩌겠냐.”

“그렇게 날 바보 취급하는 사람은 오빠가 유일한 거 알아요?”

“제갈세가엔 겁쟁이들이 많군.”

두 사람은 거의 투닥거리다시피 하며 청화촌을 나섰다. 이내 그들의 모습이 마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커먼 인영들이 청화촌을 중심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삽시간에 수십을 넘어 수백으로 늘어났다.

인영들의 선두엔 두 사람이 있었다. 흑룡포를 차려입은 노인과 손자.

유군광이 마을의 어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엔 일만 냥에 이르는 금전 더미가 존재했다. 정확히 말해 구천구백 냥이었으나, 그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 자기 것이 될 테니까.

그를 본 군사부 무인들이 하얗게 질렸다. 유군광은 그들의 눈을 힐끔 쳐다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네놈들은 제갈현, 그놈의 끄나풀이렷다?”

“누, 누구십니까?”

“알 것 없다.”

순간 유군광에게서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빠르게 쇄도해선 무인들의 이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헉!”

무인들이 신음을 삼켰다. 유군광이 쏘아낸 궁멸뇌살기(弓滅腦殺氣)가 그들의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윽고 무인들 모두가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그들은 남은 평생을 백치로 살아야 할 것이다.

신의(神醫)쯤 되는 이가 치료를 해 준다면 모를까.

“치우게 해라.”

“네, 조부님.”

유준협의 신호에 흑기단원들이 그들을 들어다 치웠다.

청화촌의 전경을 한눈에 돌아본 유군광이 중얼거렸다.

“한 식경 내로 흔적조차 남지 않게 멸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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