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상식 위를 걷는 자
‘오라버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드넓은 비무장 한가운데에서 화연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 앞엔 살기등등한 제갈세연이 서 있었다. 어느새 가져왔는지 잘 세공된 화려한 검까지 들고서.
그런 가운데 정천이 중얼거렸다.
“구경꾼이 없으니 휑하군.”
“…….”
화연란은 이마를 짚었다. 그녀로선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을 따름이었다.
제갈세연이 말했다.
“자세를 취하세요.”
피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화연란은 심호흡을 하고서 패화영신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제갈세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주 맹물은 아니구나.’
정천이 자신할 만도 했다. 기수식만 봐도 화연란의 기세가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정작 본인은 그걸 몰랐지만.
‘괜찮을까?’
화연란은 걱정이 됐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세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기껏해야 삼류를 조금 벗어났다. 그 정도가 스스로에 대한 화연란의 평가였다.
‘그런데…….’
눈앞의 제갈세연은 그 위세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명문가의 명성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화연란은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놓았다.
“부장주쯤 되는 분이라 그런지 대단하시군요.”
“어차피 백부 덕에 얻은 감투일 텐데, 뭘.”
“오라버니!”
화연란이 정천을 나무랐지만 제갈세연은 도리어 침착했다.
“괜찮아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니까요. 그리고 전 이 정도 도발로 마음이 흔들릴 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정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군.”
“제가 어느 가문 사람인지 잊으셨어요?”
“가문과 네 자신은 결국 별개라고.”
제갈세연은 입을 다물었다. 정천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탓!
곧바로 천행보를 펼쳐 화연란의 품으로 파고드는 제갈세연. 그녀의 검이 화연란의 어깨를 노리며 허공을 갈랐다.
화연란은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나며 일초식 유사화를 펼쳤다. 결과적으로 그녀들 사이로 공간이 생겼다.
차앙!
검이 충돌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느꼈다.
‘정말로…….’
‘호각이잖아?’
제갈세연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화연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 그것은 한순간일 뿐.
제갈세연의 공세가 한층 강렬해졌다.
차차차창!
연달은 찌르기가 펼쳐졌다. 화연란의 몸 곳곳을 노리는 검신이 허공에 부채꼴의 형상을 남겼다.
“윽!”
처음 몇 차례의 검격은 어찌어찌 막아낸 화연란이었으나, 이내 그 속도에 밀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정천은 차분한 눈으로 그녀들의 비무를 감상했다.
‘역시 개인과 가문은 별개라니까.’
제갈세가의 검법은 그리 이름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력까지 낮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제갈세가의 검은 곧 냉혹의 검.’
상대의 약점을 빠르게 파악, 그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검격으로 그곳을 집요하게 노린다.
어찌 보면 비겁하거나 잔인하게까지 느껴질 정도. 그 위력이 제대로 발현될 때, 적들은 뼛속부터 치솟는 공포를 느낀다.
실제로 정천의 목숨을 여러 차례 구해 주기도 했던 것이 제갈세가의 검이었다.
‘하지만 저 꼬마와는 어울리지 않는군.’
제갈세연의 성정은 얼음보단 불에 가까웠다.
평소 냉정을 가장하긴 하나 껍질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이글거리는 격정이 있었다. 때로는 그 격정이 엄청난 화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녀가 익힌 검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도 그랬다.
지속적으로 공세를 점하고 있는 쪽은 제갈세연이었지만…….
“헉헉…… 헉!”
“하아하아…….”
두 사람 모두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호흡이 더 가쁜 쪽은 공세를 취한 제갈세연이었다.
정천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란아가 좀 더 경험이 있었다면 이겼겠군.’
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때문에 정천은 이 승부가 제갈세연의 승리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차앙!
화연란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검을 놓친 그녀가 홀가분하게 말했다.
“제가 졌어요. 패배를 인정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갈세연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고작 종이 한 장의 차이였음을 본인 역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화연란에게 다가간 정천이 물었다.
“감상이 어때?”
“잘 모르겠어요. 방어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검이 부딪치던 때의 감각을 잘 기억해 둬.”
화연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제갈세연을 돌아보았다.
“승리했군. 축하해.”
제갈세연의 대답은 없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정천이 화연란에게 향했다.
“그럼 우린 돌아갈까?”
“아, 네.”
화연란이 떨어트린 검을 주워 들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제갈세연이 몸을 돌려선 정천에게로 걸어갔다.
정천 앞에 선 그녀가 말했다.
“뭐가 문제였는지 말해 주세요.”
“뭐?”
“다 지켜봤으니 느끼고 있을 테죠? 뭐가 문제였는지 듣고 싶어요.”
정천은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조언을 들을 순 있을 텐데.”
“직설적으로 얘기해 주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저나 백부님의 눈치를 보니까요. 그리고 안목 역시 신뢰하기 어렵고요.”
“나는 믿을 수 있다는 건가?”
“어쩌면…….”
제갈세연이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당신, 말하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는 것 같으니까요.”
“정천이다.”
제갈세연은 정천의 이름을 몇 차례 되뇌었다. 정천은 그런 그녀에게 슬며시 말했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땐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나?”
“윽.”
“특히나 예의를 아는 명문가의 아가씨라면.”
“으, 알았다고요.”
제갈세연이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드려요.”
“그러지. 우선은 성질을 죽여. 그다음으론 호승심을 죽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정을 죽여라.”
끝이라는 듯 정천이 몸을 돌렸다. 제갈세연은 약간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게 끝이에요?”
“이것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한 단계는 실력이 오를걸.”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해낸 사내를 본 적이 있지.”
정천의 목소리가 조금 아득해졌다.
“그자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검객이었다. 아마 현재 중원에서도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을걸.”
“그렇게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요?”
“그래.”
정천이 제갈세연을 슬쩍 돌아봤다.
“그는 제갈세가의 검법에 통달했었지.”
“……!”
놀란 얼굴의 제갈세연을 뒤로 한 채 정천은 밖으로 향했다. 화연란이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오라버니, 정말이에요?”
“응.”
“정말 제갈세가의 검으로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 사람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화연란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제갈세가의 검이 그렇게나 대단했어요?”
“그래. 최소한 세간의 평보다는 훨씬 대단하지.”
보통 검으로 이름 높은 문파를 꼽으라면 화산이나 무당의 이름이 언급된다. 명문가로까지 넘어간다면 남궁세가 역시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물론 그런 기준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무림에 절대적인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화연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라면 이름이 사해만방을 울려야 정상이잖아요?”
“그 검을 세인들에게 보여 줄 기회가 없었지.”
“그렇다면 그는…….”
“그래. 죽었다.”
화연란이 입을 닫았다. 어느 정도는 낌새를 느꼈지만 정천의 말을 듣고나니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그 역시 토벌대의 사람이었군요.”
“그래.”
화연란은 정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 속내야 화연란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고.
“흠. 어쨌든 이 정도면 썩 나쁜 거래는 아니겠군.”
아마도 실전된 것으로 보이는 무공 초식, 그리고 한 차례의 친선 비무.
어째 전자 쪽이 너무 큰 것 아닌가 싶었지만, 현실적으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조건으로 내걸은 검법 말이에요.”
“현원천단검? 그게 왜?”
“어느 정도의 검법이에요?”
정천은 잠시 가늠하고서 대답했다.
“내가 아까 말했던, 마지막 초식까지 대성한다면 정파지존도 가능하지.”
“……!”
화연란은 기겁했다.
“농담하는 거죠? 저 놀라라고 장난치는 거죠?”
“나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물론 그거 대성하는 건 아무나 못하는 거지만. 천재한테 가르쳐도 피똥 좀 싸야 할걸.”
“그렇게 대단한 검법이란 말이에요?”
“그래. 그 위력이 제대로 발현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 조건이 뭔데요?”
“아까 말했던 것.”
화연란은 그 조건이란 게 제갈세연에게 했던 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게 되면 너무 손해 보는 장사 아니에요? 고작 비무 한 차례와 그런 초식을 교환한다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 아까 말했듯이 안다고 해서 무조건 대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천이 픽 웃고서 덧붙였다.
“그리고 결코 한 번만으로 끝나지도 않을걸.”
* * *
화연란은 바로 이튿날에 그 말을 실감했다.
“정천 소협은 어디 계시죠?”
정오를 지날 때쯤 찾아온 제갈세연의 물음이었다. 그녀는 수행원조차 대동하지 않고서 홀로 청화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내방에 화연란을 조금 당황했다.
“그, 오라버니는 지금쯤 청룡문에 있을 거예요.”
“이미 갔다 왔어요. 요 며칠 동안 내내 출근하지 않았다던데요?”
“네?”
제갈세연의 말에 화연란이 더 놀랐다. 그녀로선 정천이 꾸준히 일을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표정을 본 제갈세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군요.”
“……그러게요.”
“할 수 없죠. 일단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화연란이 깜짝 놀랐다.
“이곳에서 말인가요?”
“네. 뭔가 문제라도?”
“아뇨. 문제는 없지만, 명문가의 분에게는 너무 누추할 텐데…….”
사실 그러했다. 제갈세연도 들어오기 전까진 폐가가 아닐까 생각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여기 마을 어귀에다 돈 더미를 쌓아 놓았던데요.”
“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화연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얘기하자면 조금 길어요.”
“잘 됐네요. 시간은 넉넉해 보이니까.”
내친김에 마루에 걸터앉는 제갈세연이었다.
“부장주이신데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으세요?”
“오히려 아랫사람들은 더 좋아할걸요. 수십 년은 어린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밖에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유모뿐이에요.”
“그렇군요.”
화연란도 제갈세연도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만난 기간은 짧았지만 왠지 마음이 잘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천 소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글쎄요…….”
그간 정천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엔 문지기 일을 나가는 척하고는 숨어서 화연란의 수련을 지켜봤다.
그러는 동안 담미화가 분주히 오고 다니며 갖가지 자료를 구해 왔다.
정천이 원한 것.
천무맹 장로들에 대한 정보였다.
그녀는 그동안 비영각의 서고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물론 다른 대원이나 눈치 채이지 않게끔 최대한 조심하고서 말이다.
담미화는 장로들과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았다. 그리고 일일이 필사했다.
정천은 그렇게 모인 서류들은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 손아귀에 든 채로 그대로 태워 버렸다.
‘모두 외웠다는 건가?’
그에 대해 잘 몰랐다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녀는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죄다 필사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담미화였다.
그런 만큼 정천이 그 모두를 머릿속에 담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편 정천 역시 확신하는 게 있었다.
‘누락된 기록이 존재한다.’
어느 장로가 되었든 일정 시기 동안의 기록이 아주 전무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크게 둘.
하나는 십 년 전의 백여 일 동안이었다. 이 시기는 물론 누구보다도 정천 자신이 잘 알았다.
‘진마동이 열렸던 기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기는 십오 년 전.
그 두 시기가 긴밀한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장로들 모두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용검대와 강룡단, 천무맹과 마교의 최고 타격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도 금세 은폐되었다는 것. 그건 말 그대로 거대한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었다.
‘장로들을 쳐야 한다.’
정천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은 아침부터 담미화가 호출을 받았다. 비영대주 무엽이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제갈현의 호출일 테지.’
뻔했다. 정천에 대해 자세히 물으려는 것일 터. 와룡장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게 분명했다.
정천은 담미화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알아서 적당히 둘러대라는 말을 남기고서.
그런 다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물론 담미화는 자신이 미행당하는지를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제갈현이나 무엽도 마찬가지일 테고.
정천은 그들 모두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담미화는 비영각이 아닌 군사부 본당으로 향했다. 정천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녀의 방향을 확인한 정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향하는 곳, 군사부 본부에 시선을 맞췄다.
스스스스.
그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안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수백 장 거리에 있는 본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수준은 몇 개의 창과 문이 있는지조차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
정천은 본당의 호위 규모를 파악했다. 그다음 본부 내의 인기척 역시 확인했다.
그를 감지할 만한 실력자는 없었다.
비영대주 무엽이란 자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이참에 그자의 실력도 확인해 보지.’
정천은 한달음에 군사부 본당까지 갔다. 그리고 가볍게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사람도, 기척을 느낀 사람도 전혀 없었다.
* * *
담미화는 제갈현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제갈현은 집무실 한가운데에 앉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지방을 넘어서던 담미화가 제삼의 존재를 감지했다. 천장 위.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하는 걸 보며 제갈현이 미소를 지었다.
“무엽이 추천할 만한 실력이군.”
“감사합니다.”
제갈현이 천장을 향해 말했다.
“자네도 내려와 앉게.”
스으으으.
마치 연기처럼 한 사내가 제갈현의 옆에서 나타났다. 비영대주 무엽이었다.
제갈현이 담미화에게 말했다.
“요 며칠 동안 정천을 감시해 왔다고 들었다. 오늘은 그동안 뭔가 알아낸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불렀느니라.”
“뭐든 물으십시오.”
“그러지. 그가 운기조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담미화의 시선이 제갈현의 얼굴에서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무엽은 표정의 변화 없이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정신까지 난도질할 것처럼 날카로웠다.
무저갱과 같은 눈동자.
금역 속에서 보았던 정천의 눈빛과 비슷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담미화가 내심 긴장하며 대답했다.
“흐음. 그런가? 어제는 그 친구가 와룡장을 찾아왔었다던데.”
“네. 보고 역시 그렇게 올렸습니다만…….”
“보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야. 그저 추가로 물어볼 게 있는 것뿐이니 너무 긴장할 것은 없다.”
제갈현은 무엽과 달리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담미화가 긴장을 풀진 않았지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일전에 정천을 만났을 때, 그는 더 이상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직장 역시 황룡성 최말단인 문지기를 택했고. 하지만 요 며칠 동안의 행보는 조금 미묘하더군.”
“…….”
“그는 화륜패의 딸을 위해 와룡장을 찾아왔다. 그리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검법의 절초를 조건으로 삼아 거래를 했지. 각별한 지인을 위해서라지만, 어쨌든 다시 무림의 일에 관여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담미화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제갈현이 예상보다도 정천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그녀와 달리 제갈현은 정천의 본 실력을 모른다. 그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가 내공을 상실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천에게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할 만한 게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 검법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담미화가 딴생각을 하는 동안, 제갈현은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꺼내고 있었다.
“그가 검을 쥐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말인가?”
“네.”
담미화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휘두른 적은 없지만, 검을 손에 쥔 적은 있었다. 화연란에게 주기 위해 호궁각에서 하나를 빼돌리던 당시에.
제갈현의 질문이 이어졌다.
“정천이 여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정천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네?”
담미화가 무심코 반문하고 말았다. 앞선 질문들과는 그 성질이 달랐던 것이다.
제갈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언제부터 비영대원에게 반문이 허용되었나?”
“죄, 죄송합니다.”
담미화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나직이 응시하던 제갈현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자네를 직접 불러 질문을 붙인 것은 최근 보고의 신뢰성이 의심되기 때문이었다.”
“…….”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자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담미화의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발각된 걸까? 하지만 어떻게?’
그때 잠자코 있던 무엽이 움직였다.
그가 담미화를 향해 팔을 뻗었다. 순간적으로 담미화는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듯이 당겨졌다.
콰아악!
“큭!”
목을 붙들린 담미화가 신음을 토했다. 무엽의 악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것이다.
무엽은 다른 팔로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그녀의 시선에 맞췄다.
“나를 봐라.”
스산한 목소리. 담미화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서 몸서리쳤다.
‘아!’
머릿속으로 칼날이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약간은 익숙한 느낌. 분명 금역에서 정천이 펼쳤던 마안과 비슷했다.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그러나…….
‘아니야.’
정천의 마안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무엽의 술수는 그의 마안과 비교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물론 그의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저 상대가 좋지 않을 뿐.
계속해서 몸서리를 치는 담미화였으나, 처음과 달리 이제는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술수가 먹히지 않는다는 게 알려지면 그건 그것대로 의심을 살 터였기 때문이다.
무엽이 물었다.
“너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나?”
“아…… 닙니다.”
고통스러운 척하며 힘겹게 대답하는 담미화였다. 무엽은 비슷한 질문을 몇 차례 던졌으나, 그때마다 그녀는 같은 대답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현이 말했다.
“이제 됐네. 그만하게나.”
무엽이 움켜쥔 목을 놓아주었다. 담미화는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갈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 전의 일을 잊어라.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좋다. 네 보고의 신뢰성은 확인이 됐다. 물러나서 맡은 바 임무를 계속하도록.”
담미화가 목례를 하고서는 물러났다.
두 사람만 남은 가운데, 제갈현이 말을 꺼냈다.
“마교의 수법까지 쓸 필요는 없었던 것 같군.”
“제대로 확인해 보자면 불가피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녀가 거짓말을 할 확률은 아주 없는 셈인가?”
“제가 펼친 옥나수정신(獄拿囚精神)은 대상의 공포심을 자극해 말문을 여는 수법입니다. 제가 심은 것보다 더욱 큰 공포에 붙들려 있지 않은 이상은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물론 그 이상의 공포에 묶여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하나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그럴 테지.”
제갈현이 무엽의 말에 동의했다.
내공을 소실한 정천이 무엽이 말한 것과 같은 짓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삼자가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분간은 그에게서 신경을 꺼도 되겠군.”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정천은 나직이 대꾸하고서 빙긋 웃었다.
담미화는 훌륭히 대처해 주었다. 그리고 제갈현은 본인의 말마따나 당분간 정천에게서 신경을 끌 터였다.
‘그는 합리를 따르는 인간이니까.’
정천에겐 내공이 없다. 나아가 담미화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담미화의 보고는 무결(無缺)하다.
제갈현이 전개한 논리일 터였다.
물론 이 논리는 대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갈현은 당분간 그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그 역시 상식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이기에.
‘문제는 내가 너희의 상식 위를 걷고 있다는 거지.’
정천은 곧바로 군사부 본당을 떠났다.
이제 남은 일은 가장 가까이 있는 쓰레기부터 치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