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와룡장의 부장주 (7/146)

第六章 와룡장의 부장주

호상장로 유군광이 노발대발했다.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이오! 백주 대낮에 위사대주가 본부 침소에서 피떡이 된 모습으로 발견됐는데, 암습자의 꼬리도 잡지 못하다니!”

집행부주(執行部主) 군월중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집행부도 최선을 다하여 범인 추적에 열을 올리고 있소이다. 유 장로께서 아드님의 일로 심란하신 건 알겠소만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이게 이해만 바라면 될 일이오? 주변 놈들이라도 샅샅이 족쳐 봐야 할 것 아니오!”

“우리도 난처한 건 마찬가지요. 목격자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걸 어쩌겠소?”

유군광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군월중의 말대로였다.

그날 호궁각에 있던 위사대원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유신청도 마찬가지였다.

이빨이 죄다 박살 난 유신청은 엄청난 출혈로 현재까지 인사불성이었다. 후에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평생 죽만 먹고 살아야 할 터였다.

목숨을 건진 것이야 다행이었으나, 어찌 보면 죽은 것보다 못한 셈이었다.

“끄응. 빌어먹을 놈! 하필 본좌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호궁각을 급습하다니!”

군월중은 내심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유군광은 거의 항상 호궁각을 떠나 있기 일쑤였던 것이다.

장로 일에 몰두하느라 그런 거라면 또 모른다. 하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노름과 여색을 탐하는 데에 사용했다.

유신청 역시 피습당하던 날에도 여자를 품으려 했었으니, 부전자전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말을 본인 앞에서 했다간 목숨이 성하지 못할 터였다.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유군광이 역설했다.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하오. 이 유군광을 시기하는 무리가 철저하게 준비한 일이 틀림없소!”

“진정하시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소이다, 유 장로.”

“뭐요? 지금 놈들을 두둔하는 거요?”

눈에 핏발까지 세우는 유군광의 말에 군월중은 두 손을 저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소.”

“그럼 그따위로 말을 하지 말란 말이오!”

제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는 유군광이었다.

군월중은 난처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단단히 미쳤군. 유씨 가문 광견을 두들기다니. 노광견(老狂犬)이 한동안 이곳저곳 쑤시겠구먼.’

흑기단, 호궁위사대로 이어지는 유씨 삼대는 무당이나 화산 같은 대문파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잘못 성질을 건드렸다가 무슨 사단이 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옥연공자 유준협은 소광견(少狂犬)으로 불렸다. 물론 면전에서 대놓고 그렇게 부른 사람은 하나같이 성한 꼴을 보지 못했다.

그 아비인 유신청은 광견이요, 할아비인 유군광은 노광견.

누군지 몰라도 참 별명을 잘 지었다고 군월중은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 집행부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이해를 바라오, 유 장로.”

“반드시 놈을 찾아내시오!”

유군광은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듯 말하고는 부주실을 나가 버렸다.

군월중은 창가로 걸어갔다.

집행각을 나서는 유군광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경질을 내며 걸어가는 그의 뒤로 살기등등한 호궁위사대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미치겠군, 정말.”

유군광은 점잖은 작자가 결코 아니다.

이미 아들을 피습한 범인을 찾겠다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었다.

집행부로선 그 행패를 처리하는 것도 큰 골치인 상황. 호상장로의 위명과 유씨 삼대의 거대한 세력 앞에선 다른 이들도 눈치를 봐야 했다.

정말 큰 문제는 그가 이제 집행부까지 들쑤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사에 진전이 없으니 저 난리를 쳐도 말리기도 수월찮고, 으드득.”

군월중은 이를 박박 갈았다. 어떤 자의 짓인지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유준협은 흑기단 외에도 따로 건달 무리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사열식 날 그들을 청화촌 외곽에 집결시켰었다.

이참에 아예 청화촌의 금전들을 쓸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천이 우려한 대로였다.

다만 그 계획이 실행되진 않았다. 중도에 아버지 유신청이 피습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까닭이었다.

때문에 그는 청화촌 습격 계획을 보류해야 했다. 화연란과 청화촌 사람들로선 다행한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화연란은 검을 눈앞에 직립한 채 심호흡을 했다. 본디 아버지인 화륜패가 애용하던 패검 중 하나인데, 주인이 주인이다 보니 그녀에겐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흡!”

가볍게 숨을 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가르고 간 허공에 열기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었다.

패화영신검의 일초식인 유사화(遊絲火).

대성하면 허공에서 화염이 격발된다고 하나, 삼성에 머무른 그녀로선 아지랑이를 피우는 게 고작이었다.

화륜패는 검법을 익혔음에도 도를 사용했다. 그다지 무기에 구애받는 성격이 아닌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의 독문무공인 패화영신검엔 그 영향이 크게 남았는데, 대부분의 살초가 베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속해서 수련을 해 온 모양이구나. 자세가 잘 잡혀 있는데?”

화연란이 고개를 돌렸다. 정천이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다녀오셨어요?”

“그래.”

“잠시만요. 식사를 준비할게요.”

“아니, 밥은 그곳에서 먹고 왔어.”

“그곳이라면, 청룡문 말이군요.”

“응.”

화연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천이 청화촌에서 지내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정천은 매일 아침부터 집을 나서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처음엔 그가 어딜 가는지 몰랐다. 결국 직접 물어보고 나서야 정천이 문지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지기요?”

“응. 청룡문 문지기.”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화연란은 천무맹의 높은 사람들을 원망했다. 온몸을 내던져 임무를 수행하고 온 이를 어쩌면 이렇게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천이 직접 자원한 일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원망을 지웠다.

그리고 안쓰러움을 느꼈다.

‘아마 무림의 냉혹함에 상처를 깊게 입으셨을 거야. 내공까지 소실되고 동료들은 모두 죽었으니…….’

그녀 역시 힘든 세월을 버텼지만 정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정천 앞에선 애써 밝게 지내려 하는 화연란이었다.

“하루 종일 성문을 지키느라 힘드셨죠? 이리 와서 마루에 앉으세요.”

“그러지. 근데 딱히 힘든 일은 없어. 온종일 빈둥대는 게 일이니까.”

화연란은 미소를 짓고서 검을 거두었다.

지금의 정천 앞에선 무기를 꺼내 드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의 악몽 같은 기억을 자극할까 봐서였다.

때문에 수련도 정천이 없을 때만 골라서 했다. 스승이 없는 만큼 별다른 진전도 없었지만.

그때 정천이 말했다.

“그만두지 말고 계속 초식을 펼쳐 봐.”

“네? 하지만…….”

“내가 봐 줄게.”

화연란이 정천을 돌아봤다.

“괜찮으시겠어요?”

“너만 좋다면. 아마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장벽에 막혀 있었을 것 같은데?”

정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수련은 순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토대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연란은 십 년 동안 패화영신검만을 수련했다. 오직 그것과 지금 쥐고 있는 검만이 화륜패가 남기고 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공을 익힐 생각은 딱히 없었고, 그럴 환경도 되지 않았다.

화연란은 여전히 주저되는지 검과 정천을 번갈아 보았다.

정천이 다시 말했다.

“난 그분의 무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계속 보아 왔어. 이론적인 면을 상당 부분 보완해 줄 수 있을 거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으면 말도 안 했을 거야. 내 성격 알고 있지 않아?”

화연란은 실소를 지었다.

정천은 고아였다. 본디 황룡성 뒷골목의 소매치기 노릇을 하던 걸 당시 집행부원이던 화륜패가 잡아서 데려왔다.

그리고 먹이고 재워 주며 무공을 가르쳤다.

화연란이 태어났을 때 정천은 이미 약관의 청년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정천을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녀는 언젠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릴 적의 일인데도 이상하게 기억이 생생했다.

“아빠, 왜 정천 오빠를 거두려고 생각하셨어요?”

“응? 왜, 그놈이 널 괴롭히기라도 하더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해서요.”

“독한 놈이라서.”

“독하다고요?”

어린 화연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천이 평소 무뚝뚝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긴 했지만, 독한 것 같진 않았던 것이다.

화륜패는 과거를 생각하는 듯 씩 웃었다.

“녀석은 집행부 최고의 말썽거리였지. 잡으려 해도 도무지 잡히질 않았으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망칠 때 자주 숨는 곳이 있더구나.”

“자주 숨는 곳?”

“황룡성의 금역.”

화연란은 찔끔 놀랐다. 금역에 대해서 들은 얘기 중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무서운 곳에요?”

“그래. 어릴 적부터 독안개 가득한 그곳을 집으로 삼았던 모양이더구나. 그 와중에 내성이 생겼던 모양이다. 뭐, 독기가 극심한 곳은 알아서 피했겠지만 말이다.”

“…….”

“그런 곳으로 자꾸 숨으니 집행부원들로서도 잡기가 힘들 수밖에. 하여간 녀석의 독기가 제법 마음에 들더구나.”

화륜패는 수염이 까칠까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담백하게 웃었다.

“놈은 언젠가 큰일을 해낼 거다,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었지.”

거기까지의 대화를 떠올린 화연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찔러서였다.

‘오라버니의 내공만 소실되지 않았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아쉬움이 자꾸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천이 침묵하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결정은 했어?”

화연란은 생각했다.

‘내가 오라버니의 몫까지 강해져야 해.’

청화촌 사람들을 홀로 지켜온 그녀였다. 이제 거기에 정천 한 명이 더해지는 것뿐이었다.

“네, 부탁드려요.”

“좋아. 그럼 그 검부터 버려.”

“……네?”

“네겐 너무 커. 아마 대주님이 애용하던 검일 테지? 아끼는 마음은 알겠지만 네겐 맞지 않아.”

“하지만…….”

정천의 말에도 화연란은 머뭇거렸다. 정천은 매몰차게 느껴질 만큼 딱 잘라 말했다.

“검만 바꿔도 당장에 패화영신검을 오성까지 깨칠 수 있을 거다.”

화연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무기가 바뀌는 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성취가 는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정천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 말을 믿어.”

“알겠어요.”

결국 화연란은 고집을 꺾었다. 그러나 설마 그렇게까지야 될까 싶은 심정이었다.

정천은 언제 가져왔는지 검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건 뭔가요?”

“하나 주워 왔지.”

호궁각을 습격할 때 가져온 검이었다. 유신청의 침소 벽에 걸려 있던 것 중 하나였다.

“장식으로 녹스느니 쓰이는 편이 낫겠지.”

“네? 장식이라니요?”

“응? 아,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한번 쥐어 봐. 삼십절검(三十絶劍)이나 백팔군검(百八軍劍)엔 미치지 않겠지만 그런대로 쓸 만은 할 거야.”

“오라버니도 농담은…….”

화연란이 실소했다.

삼십절검은 일대 천무맹주 진운룡이 제자들에게 선물했다는 명검이고 백팔군검은 황룡성의 대주급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패검이었다.

어지간한 문파의 수제자급이나 되어야 쥐어 볼 명검이란 소리.

화연란으로선 꿈도 꿀 수 없는 무기들이었다.

그녀는 정천에게서 받은 검을 찬찬히 살폈다.

갓 만들어진 검을 만지는 듯한 느낌. 그만큼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디…….’

그녀는 조심스레 검병을 쥐었다.

“어?”

깜짝 놀라 검을 다시 보는 화연란. 손가락들이 마치 검병에 찰싹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화연란이 정천을 돌아봤다.

“오라버니?”

“그 정도면 나쁘진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검의 무게 중심이나 촉감이 너무나 뛰어났다. 화연란은 놀란 얼굴로 검과 정천을 번갈아 보았다.

정천이 손뼉을 쳐서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좋은 무기라 해도 쓰지 않으면 없느니만 못하겠지. 어디 한 번 패화영신검의 초식들을 처음부터 펼쳐 봐. 지금의 네 성취로는 육초식까지는 대략 흉내는 낼 수 있겠지?”

화연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패화영신검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초식은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아아, 그랬지. 당시엔 아직 미완성의 검법이었으니.”

“네? 당시엔…… 이라고요?”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정천이 말했다.

“대주님께선 패화영신검을 완성하셨다.”

“……!”

화연란의 두 눈이 크게 빛났다. 정천은 미소를 짓고서는 말했다.

“일단 펼칠 수 있는 것부터 펼쳐 봐. 네가 모르는 초식들은 차차 가르쳐 줄 테니.”

“정말인가요?”

“설마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까? 어쨌든 초식부터 펼쳐 봐.”

“아, 네!”

화연란이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보다도 훨씬 절도와 힘이 들어간 동작이 펼쳐졌다.

정천은 내심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이 아이의 벽은 마음의 벽이었군.’

기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의 수련을 관찰해 온 정천이었다. 문지기 일을 하러 나가는 척하면서 몰래 숨어 구경을 했던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스스로가 검에 확신을 두지 못하고 있다.’

간단한 동작을 하더라도 예전의 화연란에게선 망설임이 묻어났다. 때문에 십을 최대로 둘 때 항상 일, 이 정도가 부족했다.

패화영신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였다.

‘하긴 있는 것이라고는 대주님이 드문드문 가르친 기초뿐이었으니.’

무기 역시 문제였다. 그녀가 낼 수 있는 완력에 비해 쓸데없이 무겁고 컸다.

그 두 가지를 고친 것만으로도 화연란의 초식의 전과 다른 위력을 내었다.

화르륵!

“앗?”

검격이 수놓아지던 허공에서 약간이지만 불꽃이 튀어났다. 초식을 전개하던 화연란이 깜짝 놀라 멈췄다.

“계속해.”

“아, 네.”

그녀는 놀라 하면서도 검을 다시 휘둘렀다.

네 개의 초식이 펼쳐지고 난 뒤, 정천은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특히나 삼 초식과 사 초식은 제대로 깨치지 못했던 까닭에 교정할 부분이 많았다.

그 작업을 마친 정천이 화연란에게 말했다.

“흔히 하는 착각이 패화영신검이 그저 힘만 추구하는 검법이라는 거다. 너도 아마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할 테지?”

“네.”

화연란은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이 검법은 본래 극도의 쾌속을 추구하는 검법이거든.”

“정말인가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럴 테지.”

‘쑥스러워서 말할 수 없었을 테니까.’

화륜패는 사실 패화영신검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본연의 실력이 워낙 월등한 데다, 애초부터 그도 정천과 같은 실전주의 무인이었던 까닭이다.

검법을 만들고도 대도를 사용한 것 역시 이 까닭.

그는 사실 딸인 화연란을 가르치기 위해 패화영신검을 만들었다. 정작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초식을 펼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 상대방을 베는 게 아닌, 그자가 포함된 공간을 베어 넘기는 게 기본이란 것을.”

“그자가 포함된 공간……?”

“뭐, 언젠가 자연히 깨우칠 수 있을 거야. 넌 아직 실전 경험이 적을 테니 당장 깨치는 건 무리지.”

정천이 바로 질문했다.

“가장 최근에 누굴 베었지?”

조금 생각하던 화연란이 말했다.

“지난겨울에 마을을 습격해 온 깡패 무리가 있었어요. 그들과 싸웠던 게 마지막이에요.”

“깡패 무리? 흑기단 녀석들인가?”

“아뇨. 말 그대로 뒷거리의 시정잡배들이에요. 유준협은 대놓고 습격하는 짓을 벌이진 않으니까요.”

“최소한 겉으로는 깔끔한 척한다는 거군.”

“네. 그 아비들과는 달리…….”

말끝을 흐리면서도 적개감을 드러내는 화연란이었다.

듣기로 얼마 전 유신청이 습격을 당했다는데, 그녀로선 그저 고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정천은 뭔가를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어쨌든 사람 베는 감각을 좀 키워야겠구나.”

“사람을…… 베는 감각이요?”

“그래.”

화연란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살인을 하란 말씀인가요?”

“그런 것까진 아니고. 실전의 감각을 느껴 봐야 한다는 거지.”

정천이 밖으로 나서며 손짓했다.

“따라와. 잠깐 마을 밖으로 나가자.”

“네? 하지만…….”

화연란이 주저했다.

그녀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언제 유준협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천은 괜찮다는 얼굴을 했다. 동시에 담미화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곳을 지켜.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네.

정천은 재차 화연란에게 말했다.

“걱정하진 마. 녀석들도 당분간은 꼼짝도 않을 테니까. 너도 소문은 들었지?”

“대강은요.”

“흑기단도 호궁위사대도 쓸데없는 곳을 쑤시느라 당분간 여기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겠지만…….”

말끝을 흐린 화연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려는 건데요?”

정천은 간단히 대꾸했다.

“와룡장.”

* * *

거대 문파나 유명 세가의 경우엔 황룡성 내에도 각자의 지부를 두고 있었다. 세력 확장 및 경쟁을 위해서였다.

제갈세가황룡성지부(諸葛世家黃龍城支部)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워낙 이름이 길어서인지 보통은 다르게 불렸지만 말이다.

와룡장(臥龍場).

두 사람은 그곳을 앞에 두고 있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화연란을 돌아본 정천은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넌 여기 처음 와 보겠구나?”

“오라버니는 와 보셨어요?”

“아니, 나도 처음이야.”

화연란의 입이 벌어졌다.

“그냥 무턱대고 오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대책 없는 녀석 같아?”

“그럼 이곳 사람과 얘기라도 해 둔 건가요?”

“아니.”

화연란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오신 거예요, 그럼? 막무가내로 들어가려 했다간 그냥 쫓겨날 텐데.”

“그렇지 않을걸.”

빙긋 웃은 정천이 걸음을 옮겼다. 화연란이 뒤늦게 말리려고 했지만 정천의 걸음이 더 빨랐다.

와룡장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정천을 보고는 창을 세웠다.

“정지. 뭐하는 놈이냐?”

“여기 볼일 있는 사람.”

“선약이 있소?”

“아니.”

문지기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와룡장주께선 선약이 없는 한 아무나 만나지 않으시오.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을걸. 정천이 왔다고 전하기나 해.”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와룡장 문지기들이 살짝 위축됐다.

“실례지만 직함이 어찌 되시는지……?”

“나? 청룡문 문지기.”

“…….”

와룡문 문지기들은 잠시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청룡문 문지기라고?”

“그래. 동업자 부탁을 무시하진 않겠지?”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열 받은 문지기들이 정천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때 화연란이 재빨리 정천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오라비가 잠깐 실성을 한 모양이에요!”

“란아야, 누가 미쳤다는 거냐?”

“오라버니는 가만히 계세요! 죄송합니다. 바로 끌고 갈 테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문지기들도 처음 기세처럼 계속 으르렁거리진 않았다. 절색의 미녀가 고개까지 조아려가며 부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흠흠. 정말 미친놈이라면 우리가 이해해야지.”

“하지만 계속 이러면 곤란하오.”

“감사합니다. 바로 끌고 가겠어요.”

화연란은 안도했고, 정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됐고, 어서 와룡장주나 불러 와.”

“오라버니!”

“이 오라비 귀청 안 떨어졌다. 하여간 장주가 됐든 뭐가 됐든 얘기가 통할 놈 좀 불러 와.”

문지기들이 고개를 저었다.

“말로 해선 안 되겠군.”

“용서해 주려고 했거늘.”

그들이 창을 고쳐 쥐었다. 당황한 화연란이 정천을 붙들고 도망치려고 할 때였다.

“무슨 소란이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소리와 별개로 문지기들은 기겁을 했다.

“부, 부장주님!”

화연란이 시선을 돌리니 와룡장 안쪽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인 그녀마저 순간 눈길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를 본 정천이 살짝 놀랐다.

“뭐야, 부장주씩이나 됐단 말이야?”

소녀도 정천을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문지기 아저씨?”

“누구더러 아저씨라는 거야?”

“그럼 고주망태 문지기?”

“저번에 당한 게 못내 아쉬웠나 보군.”

소녀, 제갈세연은 실소를 지었다. 그러는 중에도 놀란 표정만은 채 지우지 못했지만.

그녀는 문지기들을 돌아봤다.

“어떻게 된 일이죠?”

“그, 그게 말입니다…….”

“저자가 장주님을 뵙기를 청해서…….”

제갈세연이 정천을 돌아봤다.

“선약이 있으신가요?”

“없어.”

“그럴 줄 알았어요. 장주님께선 지금 출타 중이세요.”

“그렇군. 뭐, 상관은 없지. 부장주쯤 되어도 말은 통할 테니까.”

“제가 부장주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럴 리가.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제갈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연란은 황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따름이었다.

그녀가 문지기들에게 말했다.

“저분들을 안으로 들이세요.”

제갈세연은 두 사람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녀의 시비가 찻상을 내왔다.

“드세요.”

직접 차를 따른 제갈세연이 고풍스러운 태도로 두 사람에게 건넸다. 향긋한 향기 속에 화연란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받았다.

정천이 향을 맡아 보고는 말했다.

“이거 쓴 거지?”

“한번 음미해 보세요. 머릿속이 맑아지는 효능이 있어요.”

“쓰다는 소리군.”

제갈세연이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예절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군요.”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는 어린애보다는 낫지.”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무게를 잡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는군.”

“하, 좋아요.”

제갈세연의 자세에서 힘이 빠졌다. 여전히 미색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또래 소녀의 발랄한 생기가 더욱 커졌다.

“제가 이곳의 부장주인 줄 모른다고 했었죠?”

“그래.”

“그럼 저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는 거군요. 무슨 일로 와룡장을 찾아오셨죠?”

정천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친선 비무를 청하려고.”

“친선 비무요? 본인이 말인가요?”

고개를 저은 정천이 화연란의 어깨를 짚었다.

“아니, 이 녀석이다.”

제갈세연은 살짝 놀랐다.

화연란은 당황해서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오, 오라버니?”

“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들었으니 무슨 말인지 알 것 아냐?”

“어, 어떻게 제갈세가와…….”

“암만 생각해 봐도 여기가 가장 적당하니까.”

제갈세연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죠?”

정천은 약간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첫째, 이곳이 청화촌에서 가장 가깝다. 둘째, 제갈세가는 자그만 문파라고 무조건 홀대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만큼, 작은 문파라 해도 그 제안에 실효성이 있다면 받아들이려 하겠지. 최소한 얘기라도 들어 보려고는 할 테고.”

제갈세연으로선 기분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어쨌든 세가에 대한 칭찬은 그녀에 대한 칭찬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셋째, 제갈세가가 가장 만만하다.”

벌떡!

제갈세연이 매서운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세가를 모욕하고 성히 돌아가기를 바라나요?”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감히!”

제갈세연이 팔을 부르르 떨었다. 화연란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정천을 쳐다봤다.

자칫하면 두 사람 모두 시체가 되어 이곳을 나가게 될지 몰랐다.

정천은 차분한 눈이었다.

“앉아서 얘기나 더 들어 봐.”

“필요 없어요!”

“너나 제갈세가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요? 대체 무슨 조건을 가졌기에? 아니, 그전에 문파 이름이나 있나요?”

정천이 태연히 화연란을 돌아봤다. 화연란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청화장(靑花場).”

제갈세연이 픽 코웃음을 쳤다.

“이름도 없는 무명 문파에서 무얼 줄 수 있다는 건가요?”

정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너, 원래 그런 성격이냐?”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저는 와룡장의 부장주이자 천무맹 군사 제갈현의 질녀예요.”

화연란이 크게 놀랐다.

와룡장 부장주라기에 대단한 인물일 줄은 알았지만, 설마 군사의 조카딸일 줄이야.

정천은 눈만 살짝 크게 뜨는 정도였다.

“그래? 어쨌든 일단 앉아서 얘기나 들어.”

‘어?’

제갈세연은 조금 당황했다. 왠지 이게 아닌데 싶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신분 앞에선 당황하거나 예의를 차렸다. 그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생리(生理)라는 것도 잘 아는 그녀였다.

그런데 정천은 태연하다.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봐도 다를 건 없었다. 그녀의 정체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멍청해서?’

그럴 리는 없었다. 최소한 그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지난번의 만남에서 느꼈으니까.

‘그렇다면…….’

제갈세연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얘기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이 아이와 주기적으로 친선 비무를 할 사람을 골라 줬으면 한다. 다른 문파 보기가 창피하다면 비밀리에 해도 상관없다.”

“그 대가로 무얼 줄 수 있죠?”

“현원천단검(玄元天檀劍)의 마지막 초식.”

제갈세연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게…… 뭐죠?”

“군사는 알고 있을걸.”

“백부님이 말인가요?”

“그래. 못 믿겠으면 사람을 보내든지 해서 물어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갈세연은 접견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녀는 재빨리 서신을 작성하고는 전서응(傳書鷹)을 날렸다.

일각쯤 지나서 전서응이 돌아왔다.

바삐 서신을 풀어 보니 짤막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무조건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녀의 백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정천의 조건이 파격적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제갈현이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제갈세연은 의심을 접고서 다시 접견실로 돌아갔다.

그녀를 본 정천이 빙긋 웃었다.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지?”

“……잘 아시는군요.”

“군사라면 그 초식의 가치를 알 테니까. 게다가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면 거짓말이 아니란 것도 눈치를 챘을 테지.”

제갈세연이 기가 막힌 듯 정천을 바라봤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너희 백부님에게 물어봐. 어차피 날 만난 얘기까지 죄다 떠벌렸을 것 아냐?”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애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

제갈세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천이 그 모습을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어쨌든 그보다도 대답을 듣고 싶은데.”

“……좋아요. 부장주의 권한으로 청화장에서 요청한 친선 비무를 받아들이죠.”

“좋군. 되도록 이류 이상의 무인을 선발해 줬으면 하는데. 일류여도 좋고.”

“내가 하죠.”

정천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화연란도 놀랐는지 제갈세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가?”

“그래요.”

“흠.”

정천은 재단하는 눈으로 제갈세연을 살펴봤다. 제갈세연은 마치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어 얼굴을 더욱 붉혔다.

‘왜 이러지?’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건데, 정천은 그녀의 가장 숨기고픈 치부까지 밝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그녀를 살피던 정천이 말했다.

“뭐, 그 정도면 괜찮겠군. 더 욕심을 부릴 것까진 없겠지.”

“뭐, 뭐라고요?”

제갈세연은 기가 막혔다. 평소 자기 또래에선, 그것도 여검객 중에선 수위에 드는 실력을 지녔다고 자부해 온 그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천의 반응은 딱 중간. 나쁘진 않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식이었다.

이런 평가를 받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 어째 그에게 얕보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감히 나를 얕잡아 본단 말이야?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겠어!’

정천 역시 그녀의 속내를 읽었다.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군.’

그래서 거기에 기름을 붓기로 했다.

“지금 실력이라면 아마 호각일걸? 아니, 어쩌면 란아가 이길지도 모르겠는데?”

제갈세연이 화가 나서는 화연란을 쳐다봤다.

“비무,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되겠죠?”

“네, 네?”

“비무장으로 안내하겠어요. 따라오세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제갈세연이 접견실을 나섰다. 졸지에 휘말리게 된 화연란이 야속하다는 듯 정천을 보았다.

“오라버니!”

정천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열심히 해봐. 아마 힘들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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