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사열식의 날
금역을 벗어난 정천은 담미화를 한적한 곳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뉘였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으응…….”
낮게 신음하던 담미화가 눈을 떴다. 그리고 정천과 눈을 마주쳤다.
“아!”
귀신이라도 본 듯 담미화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기야 지금의 정천은 귀신보다도 두려운 존재일 터.
정녕 압도적인 공포 앞에선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던가. 지금 담미화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입맛을 살짝 다신 정천이 말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라. 잡아먹지 않으니까.”
“…….”
“네 몸을 공포로 금제해 버린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내 말만 잘 따르면 앞으로 별 탈은 없을 거다. 거역한다면 얘기가 또 다르겠지만.”
담미화는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혀를 살짝 찬 정천이 말했다.
“말할 줄 모르나?”
“아, 알고 있습니다.”
“좋군. 앞으로도 되도록 고개만 끄덕일 게 아니라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날 감시하되, 적당히 내용을 꾸며 거짓 보고를 올려라.”
담미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를 감시해야 하는 시간은 어떻게 되지?”
“묘시(卯時)부터 한나절 동안입니다.”
“그 이후엔 자유롭다는 거군. 잘 됐어.”
고개를 끄덕인 정천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다음의 인물들에 대해 조사해라. 물론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게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네가 조사할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무상장로 암중천, 중황장로 엄백, 교현장로 용운…….”
하나같이 최소 십 년 이상 근속한 장로들이었다.
눈치 빠른 담미화인 만큼 그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파악했다.
“십 년 전, 당시 장로회의에 참석하던 장로들이군요.”
“그래. 은퇴한 자도 있을 것 같지만 대부분은 아직 남아 있을 테지. 그들과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자세하게 조사해서 내게 알려.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전부다.”
“……알겠습니다.”
정천이 홀가분하단 표정으로 일어서서는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간다. 일 잘하라고.”
지나치게 태연한 말투로 한마디를 하고는 멀어지는 정천.
불과 몇 분 전에 공포와 격통의 금제를 건 것치고는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그렇기에 담미화로선 더욱 그가 두려운 것이었다.
‘인간도 아니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그녀였다. 생각조차 조심스럽게 해야 하다니, 새삼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금제를 풀 수는 있을까?’
진지하게 고심해 봤다. 그러나 그런 고심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 담미화.
아무래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지.”
“꺄악!”
화들짝 놀란 담미화가 외마디 비명을 토했다.
뒤돌아 도망치려는 그녀의 손아귀를 정천이 붙들었다.
“야, 안 잡아먹는다고. 말만 걸어도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면 어쩌자는 거냐? 이거 완전 비영대 실격이로군.”
“하, 하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끝을 흐리는 담미화였다.
사실 그녀로선 이래저래 억울했다. 공포를 각인시킨 당사자가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다니, 말이나 된단 말인가?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생각도 혹시나 몰라 중도에 관뒀고.
“하지만이고 뭐고, 한 가지 물어볼 것을 깜빡해서 말이야.”
“뭐, 뭔가요?”
“별건 아니고, 혹시 흑기단이란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
“흑기단 말인가요?”
“그래. 유준협인지 뭔지가 단주라던데.”
잠시 동안 할 말을 정리한 담미화가 입을 열었다.
“전형적인 무력 집단입니다. 그것도 흑엽촌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에 세력을 뻗고 있어요.”
“황룡성 집행부도 처리하지 못하는 건가?”
“호상장로 유군광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요.”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다는 소리군. 뭐, 지금은 그 정도면 됐어.”
담미화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서 맡은 일을 하도록 해. 그리고 바지는 꼭 갈아입도록 하고.”
“네?”
정천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담미화는 잠시 후에야 자신이 실금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녀의 얼굴이 당장 터질 듯이 붉어졌다.
* * *
정천은 자신의 방에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저갱 같은 무의식 속으로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이번에는 다르길…….’
그는 진마동을 떠나온 이래로 되도록 운기조식을 하지 않았다.
단전의 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의식의 영역이 눈을 뜰 때마다 악몽과 같은 기억과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있던 ‘놈’이 깨어났다.
크아아아아!
정천은 온몸이 쓸려 나갈 듯한 압박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애써 이를 악물고서 눈을 떴다.
놈이 그곳에 있었다.
그 앞에선 야수라거나 괴물이라거나 하는 표현조차 귀엽게 느껴질 정도. 놈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공포가 집결하여 탄생한 존재 같았다.
마룡이란 이름으로나 겨우 그 공포를 표현할 수 있을 괴물.
흑색 강철로 만들어진 듯한 일곱 개의 머리. 거기에다 이 세상의 살의와 증오를 모두 모아 놓는다면 저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놈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흉포했다.
크아아아—!
“으으윽!”
“아악!”
한 번의 비명에 동료들이 귀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절정을 아득히 넘어선 내력을 지닌 그들이 칠공에서 피를 흘렸다.
그런 동료들의 위로 놈이 도약하여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겨우 몸을 피하는 이들을 향해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우드득! 콰직!
나락을 헤쳐 나오며 단련된 육체가 삽시간에 부서져 나갔다. 힘겹게 성취해 낸 금강불괴지신도, 극한에 이른 호신강기도 놈의 앞에선 무의미했다.
놈의 이빨이 동료들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내력을 빨리고는 그대로 먹이처럼 삼켜졌다.
놈이 입에서 토해 내는 강맹한 기운에 휩쓸려 형체조차 남지 않게 된 동료들도 있었다.
“공격해라! 도망치기만 해선 살아 나갈 수 없다!”
가슴을 울리는 외침이 그곳에 있었다. 용검대주인 폭뢰검 화륜패, 모두의 아버지와도 같았던 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수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 화륜패에게로 놈의 아가리가 쇄도했다.
콰드득!
“오냐, 내 살점을 먹고 뼈를 씹어라! 네놈의 죽음을 위해서라면 뭐든 주겠다!”
화륜패는 놈에게 물어뜯기는 와중에도 대도를 미친 듯이 휘둘러 댔다.
“크아앗!”
“타핫!”
곳곳에서 기합성이 울렸다.
절정의 초식으로 펼쳐진 수많은 병장기와 강기(剛氣)가 놈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럴 때마다 놈은 포효 같은 비명을 뱉으며 더욱 발악했다.
크— 아!
진마동 전체가 젖을 듯한 피를 쏟아 내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뛰는 마룡. 놈에 의해 대부분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정천은 놈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동시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살의 역시 느꼈다.
이것을, 이놈을 죽여야 한다!
“으아아아!”
정천 자신도 있는 힘껏 기합을 토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마지막 남은 동료들이 붙었다.
“우리가 방패가 되겠다!”
“저 개자식을 죽여 버려!”
그들의 외침이 귓가를 생생히 울렸다.
그 뒤로 어떻게 싸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바로 곁에서 하나, 둘 죽어 갔다는 것만은 기억났다.
단 일격.
정천의 공격을 위해!
푸욱—!
정천은 결국 놈의 핵심(核心)에 검을 박았다.
그리고 놈의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더욱 깊이 검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크으!”
정천은 신음을 토하며 눈을 떴다. 흘러내린 식은땀에 온몸이 흥건히 젖은 뒤였다.
아랫배의 기운은 여전히 허했다. 대신 그의 흉부에선 거대한 기운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용의 심장.
정천의 가슴팍에 박힌 그것은, 과거 단전이 해 주었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천이 기억하는 것은 놈의 핵심을 도려냈다는 것, 그리고 울분을 담아 그것을 씹어 삼켰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놈의 심장은 자신의 가슴에 옮겨 와 있었다.
그의 단전은 마지막 전투에서 완전히 고갈되었다. 소실된 내력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 거대한 기운을 머금은 심장을 손에 넣었다. 목숨마저 바치고 사라져 간 동료들에게 미안해질 정도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정천은 결코 기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 이백 명의 목숨까지 짊어지게 되었기에.
어쩌면 동료들의 뜻이 아닐까 싶었다. 살아남아 그들의 복수를 해 달라는…….
이 심장에 대해 정천이 아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장이 품고 있는 기운의 규모.
과거 궁극에 달했던 그의 내공보다도 월등한 수준의 기운이 거기 담겨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그 형질.
천무맹주 남궁운마저 알아보지 못했듯, 체내에 갈무리된 정천의 기운은 무인들이 간파해 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기본부터가 내공과는 다른 성질이기에 그런 듯싶었다.
물론 살의를 담아 체외로 뿜어져 나왔을 때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마치 나락 끝의 마룡이 그러했듯.
‘세상 어느 심공의 기운과도 다른, 나만이 지닐 수 있는 기운.’
애초에 심공이라 함은 체내의 공력을 특정한 형질로 발현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교인의 기운과 정파인의 기운, 또 사파인의 기운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유일한, 정천만이 지니고 있는 심공이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정천은 새삼 한숨을 토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그의 머릿속으로 엄습해 오는 악몽과 같은 기억.
보통 꿈의 수준이라면 차라리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정천은 현실보다 생생한 악몽에 끝도 없이 몸서리를 치다가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삶은 당분간 계속될 듯했다.
“뭐, 힘을 얻은 대가치고는 싼 편이지.”
정천은 가볍게 체내의 기운을 일주시켰다. 몸이 적당히 달아오르면서 식은땀이 증발되어 사라졌다.
그런 과정을 마치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흠.”
다른 동료들은 모두 청룡문으로 나간 뒤. 그러고 보니 오늘 청룡문에서 사열식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나한테 얘기해 준 사람은 없지만 말이지.”
사실 다른 방에서 동료들이 떠드는 것을 엿들은 차였다. 어차피 소용없을 줄 알고 정천에겐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어쨌든 나도 청룡문 문지기인데.”
그날의 정천은 기분이 좋았다. 악몽에 시달린 것만 뺀다면 말이다.
어제는 거의 혈육이나 다름없는 화연란을 만났다. 십 년 사이에 상당히 모습이 변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밤톨처럼 조그만해서는 자주 안기려 들었었는데.”
애교 많고 미소 많은 아이, 그게 바로 화연란이었다.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생각보다 많이 변한 상태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차차 밝아지게끔 노력해 봐야지.”
감시자인 담미화를 처리한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제갈현이나 비영대도 다른 감시자를 보내진 않을 테니까.
정천은 황룡성 내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셈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얻었으니, 오늘 정도는 일을 열심히 해 봐도 괜찮을 듯했다. 어쨌든 문지기란 직업은 가히 나쁘지 않았으니까.
정천은 청룡문으로 향했다.
동료들은 이미 문 옆에 사열한 상태였다.
그중 칠삼이 정천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정천은 씩 웃고서 그의 옆으로 갔다.
“자네! 여긴 왜 온 거야?”
떠들 수 없는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묻는 칠삼. 정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사열식이 있다며? 그래서 나왔지.”
“자넨 안 나오는 게 돕는 거야!”
“거, 각 잡고 줄 서는 짓 가지고 엄청 유세 부리는군.”
“유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 오늘 이 사열식은 우리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니 그러는 걸세.”
“문지기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네. 우리뿐 아니라 몇몇 무인 집단들도 참여해 벌이는 대규모의 사열식이란 말일세.”
“흐음.”
흥미가 동한 정천이 물었다.
“어떤 녀석들이 참가하지?”
“말도 말게.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니까. 자넨 천무맹 내에 몇 개의 문파와 무인 집단이 있는지 알고나 있나?”
정천은 잠시 가늠을 하려다 포기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럴 테지. 황룡성 내 집단 숫자는 비영대에서도 셀 수 없다는 말이 있네. 그만큼 그 숫자와 종류가 엄청나다는 거지.”
정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선배도 모른다는 거잖아.”
“험험, 중요한 건 그게 아닐세. 그만큼 많은 문파와 집단이 참여하는 대규모 사열식은 중요한 자리라는 말이라네.”
“알았어. 결국 실수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 아니겠나.”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문지기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천이 걸음을 옮기면서도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태청장(太靑場). 자네라면 어딘지 알고 있겠지?”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 황룡성 내에서도 가장 넓은 마당이었다. 누군가의 말로는 백만대군을 몰아넣어도 꽉 차지 않을 거라나?
몇 개의 거리를 지나며 태청장으로 향하는 집단들이 늘어났다.
그중 잿빛 무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청룡문 문지기들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어? 뭐야, 이건?”
“집 지키는 개 아니야?”
“주인을 따라 산책이라도 나온 거냐?”
잿빛 무복의 사내들이 문지기들을 보며 낄낄거렸다.
“…….”
“…….”
문지기들은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체구가 좋긴 했으나 사내들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사내들을 훑어보던 정천이 물었다.
“뭐야, 저것들은?”
“쉿. 신경 쓰지 말게. 흑기단 놈들일세.”
“흑…… 기단?”
“그래. 요새 잘나가는 무인 집단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놈들이지. 어쨌든 저것들이랑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네. 보아하니 이번엔 배후라 할 수 있는 호궁위사대까지 참가한 모양이더군.”
“흠.”
턱을 쓰다듬은 정천이 픽 웃었다.
“왠지 인연이 많은 놈들인데.”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천은 입을 다물고서 신경을 껐다.
그 뒤로도 이동은 계속됐다. 흑기단 쪽 무인들은 연신 문지기들을 조롱했고, 문지기들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정천이 한마디를 했다.
“잘들 참는군. 자주 있는 일인가 보지?”
곧이어 동료들의 눈총이 되돌아왔다. 그들도 좋아서 참기만 하는 건 아닌 것이다.
칠삼이 한숨 쉬듯 말했다.
“우리라고 좋아서 참겠나? 괜히 놈들 시비에 넘어가 봐야 험한 꼴만 볼 테니 할 수 없이 참는 거지.”
“저 시선들만 봐도 알겠군.”
그렇게 말하는 정천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칠삼은 왠지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아 그에게서 시선을 치웠다.
그 때문에 정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볼 수 없었다.
‘저 녀석들이란 말이지.’
정천은 흑기단의 무인들을 꼼꼼히 살폈다. 그 하나하나의 얼굴을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시켰다.
‘미안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사실 당분간은 실력을 선보이지 않으려 했다. 담미화를 굴복시켜 감시를 무력화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근데 잘 생각해 보니, 굳이 힘을 숨기기만 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결국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암만 군사부와 비영대가 대단해도 황룡성 모든 곳을 꿰뚫어볼 수는 없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적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활개를 치면 그만이다.’
물론 아직까진 군사부나 비영대를 적으로 규정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감시자를 보내게 만든 것도 정천이었다. 처음부터 비영대원을 한 명 정도 수중에 두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만큼은 무림 전체에서도 최고인 비영대니까 말이지.’
담미화는 정말 운 나쁘게 정천에게 걸려든 셈.
어쨌든 정천은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네놈들이 그 시작점이 될 거다.’
흑기단 무인들을 보며 중얼거리는 정천이었다.
그러던 중.
‘음?’
흑기단 무리의 한쪽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정천의 귀를 붙들었다. 수십 장 떨어진 거리였으나, 정천에겐 별문제가 아니었다.
별것 아닌 잡담 따윈 그냥 무시했으리라. 그러나 낯익은 이름이 나오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너희들은 날 따라오도록 해라. 우린 여기서 빠져나와 청화촌으로 간다.”
“또 그 계집에게 가시는 겁니까, 단주님?”
“물론. 군사부 놈들이 사열식을 위해 빠져 있는 지금이 기회 아니겠느냐.”
정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화연란이 금전을 수령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도 있는 듯했다.
군사부 무인들이 돈을 지키다 보니 저들도 함부로 해코지를 못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사열식 때문에 그들도 물러난 모양.
단주라는 놈은 그 틈을 노리려는 듯했다.
‘이름이 분명, 유준협이라 했나?’
이름은 번지르르한 놈이 생각하는 것은 시정잡배가 따로 없었다.
‘옥연공자인지 뭔지 하는 별호가 울겠군.’
정천은 그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골목 여럿이 교차하는 곳에서 유준협과 흑기단원 몇 명이 슬쩍 빠졌다.
청화촌으로 향하려는 것일 터.
정천 역시 문지기 행렬에서 슬쩍 이탈했다.
“쯧쯧. 결국은 중간에 빠질 거면서…….”
칠삼이 혀를 찼지만 정천은 픽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는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담벼락 위로 도약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담미화.”
은신중이던 담미화가 정천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청화촌으로 가. 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보호해 줘. 그게 누군지는 알고 있지?”
고개를 끄덕인 담미화가 물었다.
“정천 님은 가지 않으시나요?”
“난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겠다.”
단순히 유준협과 흑기단을 처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더군다나 그 배후에도 세력이 존재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아무 일도 없으면 숨어서 감시만 하되, 위급한 경우엔 나서도록 해. 도저히 상대할 수 없겠다 싶으면 전력으로 내게 달려와.”
“알겠습니다.”
스스슥!
삽시간에 멀어지는 담미화. 정천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는 아래쪽을 응시했다.
조금 떨어진 골목. 신나게 달리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서 질주하는 놈은 분명 유준협.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기회가 온 것 같지만…….”
의외로 이 주위엔 보는 눈이 많았다. 어찌 됐든 황룡성 내에서도 번화가에 속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정천은 계획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처음엔 유준협이란 놈을 곤죽을 내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얕은 생각 같았다.
‘흑기단, 호궁위사대, 호상장로. 저놈들은 삼대가 결탁한 거대 세력으로 봐야 한다.’
세 개의 세력을 하나로 놓고 봤을 때 유준협과 흑기단은 그저 꼬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노리려면 몸통을 노려야겠지?”
턱을 쓰다듬는 정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분명 호궁위사대란 놈들도 사열식에 나섰다고 했겠다.”
* * *
“이런 썩을?”
호궁위사대주 유신청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분명 이곳은 그의 침소였다.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여아 두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분명 그렇게 명령을 해 두었던 것이다.
사열식이 있는 날이었지만 참석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호궁위사대원들만 보내고서 침소에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리따운 계집들은 온데간데없고, 웬 이상한 놈 혼자 서 있는 게 아닌가?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냐! 어떻게 여기에 숨어든 거냐!”
끽해야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놈이었다. 보아하니 사열식을 틈타 호궁각에 잠입한 모양.
기막혀 하는 유신청에게 사내, 정천이 말했다.
“네가 유신청이냐?”
“뭐어? 네가 유신청이냐아?”
“그래. 네가 유신청이냐고.”
유신청은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토했다. 일진이 사나우려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오냐, 내가 유신청이다. 그러는 네놈은 대체 뭐냐?”
정천은 대답하는 대신 말했다.
“거, 자식새끼 교육 좀 똑바로 시키지?”
“뭐야?”
“네 자식 말이야. 유준협인지 옥연공자인지 하는 놈.”
“허.”
유신청은 벽에 걸린 대도를 스스릉 꺼내 들었다.
“미친 자식,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 목을 당장에 날려 버리겠다!”
정천은 웃고 말았다.
“친절한 성격이군. 덤비지 못해 안달이라니.”
“뭐가 어째? 오늘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열이 머리끝까지 솟은 유신청이 대도를 허공에 대고 붕붕 휘둘렀다.
대도의 칼날 위로 희끄무레한 기운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정천이 감탄한 얼굴을 했다.
“제법인데? 어설프긴 해도 도기(刀氣)까지 펼칠 정도라니.”
“미친 자식, 모가지가 달아난 뒤에도 그렇게 떠들 수 있나 보자.”
스산하게 소리친 유신청이 정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앗!”
쇄애액!
유신청의 대도가 정천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별것 없어 보이던 외관과 달리 그의 도법은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했다.
어디까지나 외관보다는.
착.
“응?”
유신청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기를 머금은 자신의 대도가 눈앞에서 멈추어 버린 것이다.
정천의 두 손가락에 붙들려서.
“누가 어떻게 된다고?”
“그, 그것이…….”
유신청은 두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는 성격이 급하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 상황만으로 정천의 실력을 파악할 정도는 됐다.
그로선 감히 넘보지도 못할 고수! 잘못 걸려도 정말 단단히 잘못 걸렸다.
급해진 유신청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대, 대협. 우리 잠깐 무기를 거두고 대화로 해결을 보는 것이…….”
정천도 마주 웃었다.
“싫어.”
뻐억!
“쿠웨엑!”
정천의 주먹이 유신청의 입안에 처박혔다. 유신청의 이빨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유신청의 몸이 몇 장을 날아가서는 벽에 처박혔다.
침소 바깥에서 우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유신청의 비명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뭐야?”
“이게 무슨…… 헉!”
“대주님!”
기겁하는 호궁위사대원들.
정천은 그들을 돌아보고서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죽이진 않았어. 앞으로 음식 씹기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
“너희들도 죽이진 않을 거다.”
주먹을 가볍게 그러쥔 정천이 말을 이었다.
“대신 오늘을 결코 잊지 못하게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