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무간나락(無間奈落)
화연란의 집은 문자 그대로 허름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보수조차 받지 못한 듯 지붕 곳곳이 깨어져 있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보통은 겸양의 표현으로나 쓰일 말이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들렸다. 정천은 문지방을 넘어가면서 화연란에게 질문했다.
“어째서 보상금을 받지 않은 거니?”
“…….”
대답을 회피하듯 침묵을 하는 화연란. 그녀는 짐짓 정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말을 돌렸다.
“차라도 내 올게요. 마루에 앉아 쉬고 계세요.”
“내 말을 들었잖아, 란아야.”
결국 그녀가 한숨을 토했다.
“받는 순간부터 흑기단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흑기단?”
“오라버니는 잘 모르시겠군요. 북쪽 흑엽촌의 파락호 집단이에요.”
“파락호 집단?”
화연란이 흑기단에 대해 대강 설명했다. 그들의 배후를 봐주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흑기단주는 유준협이란 자예요. 그의 뒤엔 아버지이자 호궁위사대주인 유신청이 버티고 있지요. 그리고 그 뒤엔 그자의 할아버지인 호상장로 유군광이 있어요. 그들 유씨 삼대가 흑엽촌을 비롯한 주변의 마을을 좌지우지하고 있죠.”
“…….”
“그래도 오라버니가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용검대 조장인 오라버니가 계신다면 저들도 앞으로는 함부로 굴지 못할…….”
화연란이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용검대주 화륜패의 딸이다. 그리고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서 직접 검법을 전수받던 수제자이기도 했다.
그 덕에 화연란은 화륜패의 독문무공인 패화영신검(覇火永神劍)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다.
비록 수련의 기간이 짧아 성취가 삼성에 머물러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력을 가늠하는 정도의 눈썰미는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정천은 밑이 깨어진 독과 같았다.
“오라버니?”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화연란.
정천은 쓴웃음을 짓고서 대답했다.
“내 단전의 내력은 모두 소실되었다.”
“……!”
화연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상황이 모두 파악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랬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모두가, 모두가 죽었는데 오라버니라고 몸 성히 돌아왔을 거라 생각하다니.”
“자책하지 마라.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후회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정천이 화연란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나는 괜찮다.”
화연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은 안심하라는 미소를 짓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 봐야겠구나.”
“벌써 가시려고요?”
“가야 할 곳이 생각났거든. 어,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서 지냈으면 하는데.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
화연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빈집이라면 많이 있어요. 아니면 우리 집에서 지내셔도 돼요. 어차피 사는 사람은 저 혼자니까요.”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럼 내일부터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마.”
“네. 그럼…… 내일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그래.”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정천은 집을 나섰다.
청화촌을 떠나는 정천을 지켜보는 인영이 하나 존재했다. 비영대주 무엽의 명을 받고 파견된 비영대원 담미화였다.
빠른 움직임에 최적화되어 있는 흑색 무복이 부드러운 굴곡을 그려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복면 위로는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저자가 용검대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대주에게서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생각보다는 실망인걸.’
사실 어중간한 퇴역 무사들의 말로란 대개가 비슷한 법이었다.
배운 것은 칼질하는 방법뿐.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보니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 두는 일도 적다. 나이도 지긋한 까닭에 새로운 일을 배울 가능성도 그다지 크지 않다.
때문에 노름판과 기루를 전전하다가 어느 골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보통 무인이 아닌, 정파일통 천무맹에서도 최고의 타격대로 불리던 용검대의 조장이 아니던가.
듣기로는 그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자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 담미화가 관찰한 정천은 그런 대단한 무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이유야 있었다. 단전의 내력을 모두 소실한 만큼 무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동경했던 무인의 몰락이 실망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불꽃처럼 사라졌다면…….’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느니 죽음을 택한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 *
정천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현 비영대주는 생각보다 무르군. 저런 애송이를 갖다 붙이다니 말이야.’
이른 아침부터 감시자가 정천에게 붙은 차였다.
‘제갈세가의 애송이 아가씨가 정보를 흘린 건지, 군사가 뒤늦게 의심을 가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정천은 눈치를 챈 티를 내지 않고서 감시자를 ‘감시’했다. 문지기 숙소에서 빈둥거리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 게다가 여자애. 실력은 제법 되는 것 같은데…….’
참으로 합리적인 안배였다. 내공을 상실한 정천이 눈치채지는 못할, 그러나 너무 뛰어나지는 않은 수준의 실력이니.
물론 그 시점에서 이미 저들은 실수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보아하니 두 시진마다 일각씩 자리를 비우더군. 아마도 보고를 위해서일 테지.’
전서구를 쓰지 않는 것도 나름 신중을 기한 선택일 터였다.
그리 흔하지 않은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정천의 의심을 사기 좋을 테니까.
‘내공을 잃긴 했어도 역전의 무인이라 판단한 거겠지. 꽤 신중을 기하긴 했다만, 안됐군.’
그녀로선 규칙적인 행동이 도리어 독이 된 셈.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정천으로선 당장이라도 그녀를 처리하고만 싶었다. 감시를 등 뒤에 달아 두는 것은 아무래도 찝찝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었다.
‘보통 방법으로는 떨쳐 낼 수 없을 테지.’
감시자인 비영대원은 비영대주, 나아가 군사 제갈현의 명령을 받고 있을 터였다.
되도록 자신의 비밀을 들키지 않고픈 정천으로선 특별한 방법을 써야만 했다.
정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그와 달리 인파 사이를 헤쳐 나가는 걸음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 제법 괜찮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정천은 거리의 주루 중 하나로 향했다.
그리고 반 시진 동안 갖가지 독주를 안주도 없이 마구 들이켰다.
“으, 취하는군.”
조금 뒤 주루를 나서는 정천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딛는 걸음걸이 역시 당장 넘어질 듯 위태위태했다.
“끄윽.”
트림까지 거하게 뱉은 정천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던 와중 골목 쪽에서 어슬렁거리는 시정잡배들을 발견했다. 내심 미소를 지은 정천이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툭.
일부러 건달 중 하나와 부딪쳤다.
건달패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뭐야, 이건?”
“어린놈이 대낮부터 취해서 지랄이군.”
생각보다 심심한 반응. 정천은 한 번 더 그들을 도발하기로 했다.
“흥. 쓰레기 같은 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말을 붙이는 거냐.”
“뭐야?”
“이거 원, 별 미친 자식을 다 보는군.”
정천은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누군지나 알고 떠드는 거냐? 내가 바로 용검대의 조장이란 말이다.”
멍하니 정천을 쳐다보던 건달들이 파안대소했다.
“으하하, 살다 보니 이런 미친놈도 다 있군.”
“아가, 형님들이 오늘 기분이 좋으시니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씩 웃은 정천이 건달 중 하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주먹질. 맞은 건달의 화만 돋우는 주먹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봐주려 해도 지랄이군!”
건달들은 대번에 몰려들어 정천을 두들겨 팼다. 그 기세가 워낙 살벌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차마 말리질 못했다.
정천은 그야말로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위세 좋게 선공을 한 것과 달리 반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몸 곳곳이 붉게 얼룩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디 하나 부러지는 것 같지는 않으니 신기할 노릇.
결국 패다 지친 건달들이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큰 대자로 땅에 누워 버린 정천을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헉헉, 미친 자식.”
“또 까불었다간 패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건달들이 물러났다.
“…….”
정천은 건달들이 물러간 뒤에도 한동안 널브러진 채 허공만 보았다.
피부 곳곳이 찢어지고 곤죽이 되어 참 처참한 외관이었다.
‘그래도 그다지 아프진 않군.’
동료들을 죽어갈 때마다 느끼던 격통에 비하면 강아지가 무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육신의 고통을 초월한 그이기도 했지만.
“자네, 괜찮나?”
“죽은 건 아니지?”
건달들이 물러난 뒤에야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서 정천을 살폈다.
정천은 내심 피식 웃고서 몸을 일으켰다.
몇몇이 다가와 부축해 주려 했으나 손을 들어 사양했다.
“됐소.”
정천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한심하구나.’
담미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술에 취해 건달패에게 시비나 걸고, 도리어 얻어맞고서 거리 위에 널브러지다니. 전형적인 퇴물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어찌 됐든 임무는 임무.
그녀는 혀를 차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정천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했다.
‘뭐지?’
정천은 자꾸만 황룡성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담미화가 기억하기로 그 끝에 있는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저자는 지금 금역으로 향하고 있다!’
금역(禁域).
삼백 년 전, 황룡성의 첫 주춧돌이 놓였을 때부터 존재해 왔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금역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다. 옛 사교의 교주가 환술을 부려 저주한 땅이라느니, 초대 천무맹주를 노린 마교의 암살자들이 전멸한 땅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금역은 항시 새하얀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그것도 독기를 머금은 죽음의 안개에.
희한하게도 안개가 머무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었다. 초대 군사부의 인물들이 기환진(機幻陣)을 구축, 안개의 확산을 막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금역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독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황룡성에서도 후미진 곳에 위치한 까닭이었다.
정천은 지금 그런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술에 취하더니 정신이 나갔군. 그게 아니면…….’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가능성은 낮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과 현실의 비정함,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으레 택하는 것이 죽음으로의 도피였으니까.
담미화는 고민에 잠겼다.
금역의 독기는 문자 그대로 지독하다. 어지간한 일류 무인도 치를 떨 만큼.
이류, 삼류쯤 되는 이들은 들어간 지 반 시진 내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게 된다.
하물며 내공을 잃은 퇴역 무사라면?
십중팔구 일각 내에 죽음에 이를 터였다.
‘그를 이대로 둬야 하나?’
그녀가 받은 임무는 정천을 감시하는 것.
그러나 이대로 구경만 하다간 사람 하나 죽는 꼴을 보게 생겼다.
그렇다고 돌아가 어떻게 할지 묻고 올 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죽는 것은 매한가지일 테니.
앞서 걷는 정천의 발아래로 희끗한 기운이 다가들고 있었다.
이미 그는 금역의 경계선까지 와 버린 것이었다.
정천의 모습이 차츰 안개 안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담미화는 판단을 내렸다.
‘죽는 것도 결국은 그의 업보일 뿐이야.’
그녀는 본연의 임무인 감시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그 결과 정천이 죽는다면 그것으로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정천이란 남자는 결국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겠지.’
물론 그의 죽음은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임무는 임무였으니 말이다.
‘그러려면…….’
담미화는 정천에게 좀 더 접근하기로 했다.
안개로 인해 시야가 극도로 줄어든 까닭이었다.
입신지경(入神之境)에 이른 초고수의 신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초인적인 안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역의 안개는 그러한 안력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스스스.
금역으로 들어서는 담미화. 그녀의 몸에도 새하얀 안개가 말려들어왔다.
‘기분 나쁜 안개로군.’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그녀를 감싸들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아 백여 가지 독에 면역을 지닌 그녀였기에 안개의 독기가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담미화는 애써 불쾌감을 떨쳤다.
‘그자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정천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더욱 불안정해진 모습. 취기에 독기까지 올라 몸이 말을 안 듣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용케 금역의 보다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정천이었다.
게다가 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걸음걸이도 차츰 빨라지고 있었다.
안개가 한층 짙어졌다.
처음 백 걸음 거리로 그를 뒤쫓던 담미화였으나, 어느새 그 거리는 오십 걸음, 다시 이십 걸음 미만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리고 한순간.
그녀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
주변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깊이까지 금역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뇌리를 스치는 생각.
‘그자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설 수 있었던 거지?’
정천의 내력은 고갈됐다. 천무맹의 지존인 맹주 남궁운이 직접 파악한 만큼 틀림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금역의 독기에 중독되어 나자빠져도 진작에 나자빠졌어야 정상이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지금의 기운은 백독불침지체인 담미화조차 내공은 운용해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었다.
암만 대단한 신체를 지녔더라도 내공 없인 버틸 수 없는 독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천은 살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
담미화가 낭패 어린 신음을 토했다.
정천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뒷모습을 잡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죽은 걸까?’
아까 전이라면 그렇게 확신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상황은 그녀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역시 아직은 애송이로군.”
“……!”
바로 옆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흠칫 놀란 담미화가 그쪽으로 우수를 휘두르며 물러났다.
은색의 검광이 안개 속에서 번뜩였다. 어느새 그녀의 우수엔 비도가 들려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비도를 뽑아 든 것이다.
어지간한 절정 고수도 당황할 속도.
그러나…….
카앙!
비도는 허공에서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졌다. 동시에 담미화는 오른쪽 손목에 뻐근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무쇠를 두드리는 듯한 느낌.
수백 년 된 느티나무를 맨주먹으로 후려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대체 누가?’
긴장한 그녀가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다시금 놀랐다.
정천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엉망진창이던 모습은 어느새 감쪽같이 아문 직후였다. 얼굴만 같은 별개의 인물인가 싶을 정도. 그러나 걸레짝이 된 옷가지가 그대로인 걸 봐선 정천 본인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담미화는 이를 악물었다. 추측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실감하며.
“임무를 수행하려는 자세는 제법 좋더군.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든 감시 임무를 수행하려 노력하다니. 하지만 그 외엔 전부 감점 요인밖에 없어.”
“……!”
“우선은 보고 방식. 차라리 전서구를 날리는 편이 나을 거야. 네가 만든 일각의 공백이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으니까. 보고를 하는 주기 역시 두 시진으로 고정시킨 것도 멍청한 짓이지. 네 행동 방식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꼴만 되니까.”
담미화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사내, 정천은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서 자신을 속였다!
“무엇보다도 넌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래. 이 금역까지 제 발로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함정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지. 나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짧게 덧붙였다.
“뭐, 그렇게끔 만든 내가 사실 대단한 거지만.”
내내 침묵하던 담미화가 입을 열었다.
“취한 게 아니었군.”
“물론.”
“건달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은 건가?”
정천이 씩 웃었다.
“맞는 모습이 제법 실감났지?”
입술을 살짝 깨문 담미화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정천, 옛 용검대의 제삼조장, 그리고 진마동 토벌대의 이백인 중 하나, 그리고 그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내력을 상실했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야. 너 역시 제갈현이나 비영대주에게서 들었을 테지만.”
그의 말대로였다.
분명 비영대주 무엽은 정천이 내력을 소실했다는 것을 거듭 말했었다.
천무맹주의 신안을 통해 확인한 것인 만큼 그 신뢰도는 절대적.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상황이 황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어떻게 내력도 없이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거지? 어떻게 내 비도를 튕겨 낸 거지?”
“그것까지 설명할 생각은 없다. 설명해 봐야 네가 이해할 것 같지도 않고.”
담미화는 슬그머니 왼손을 뒤쪽으로 뺐다. 그리고 등허리에 들린 비도 뭉치를 몰래 쥐었다.
“당신에게 숨겨둔 능력 같은 게 있다는 것은 잘 알겠어. 그런데 대체 그 능력을 가지고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정천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여유로운 동작이었다.
“비영대 소속이니 진마동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대주의 명령을 받을 정도면 최소한 이급 이상이란 거니까. 실력을 보자니 특급일 리는 없고, 아슬아슬하게 일급에 턱걸이할 수준이겠군. 뭐, 나이를 생각한다면 제법이지만 말이야.”
사람을 재단하는 듯한 기분 나쁜 말투. 그러나 담미화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정천이 명령하듯 말했다.
“진마동에 대해 아는 대로 읊어 봐라.”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 십 년 전 나타난 괴인 무리의 본거지로 밝혀진 곳. 그 무리의 척결을 위해 천무맹에선 용검대를, 마교에선 강룡단을 파견하여 토벌대를 조직.”
“비록(벙錄) 암기를 열심히 했군. 하지만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은 잊어버린 모양이지?”
“어차피 당신은 당사자니까.”
정천이 픽 웃었다.
“빠져나갈 궁리를 하느라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고?”
“……!”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에 담미화는 왼손에 들린 비도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정천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 말만 계속할 따름이었다.
“그토록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말해 주지.”
담미화는 문득 주변의 기운이 한층 스산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정천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기묘한 기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곳은 무간나락이었다.”
무간나락(無間奈落)!
따로 이렇다고 정의 내려진 표현은 아니었다. 같은 의미의 단어인 아비지옥, 무간지옥 등은 결국 인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단지 정천이 거쳐 온 수라장이 보통이 아니란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따름.
“우리가 그곳에 진입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 입구가 붕괴되었지. 엄청난 양의 토사로 막혀 버린 입구는 이백 명의 절정 무인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규모였다.”
“…….”
“우린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였기에.”
음모가 있었다.
모두들 어렴풋이는 느끼고는 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탄하거나 분통을 터트릴 여유조차 없었고.
“놈들은 무저갱 깊은 곳으로부터 끝도 없이 몰려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무어라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모를 것들이 우릴 죽이기 위해 시야 가득 모여든 모습 앞에 기도 차지 않더군.”
담미화는 자신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색채 없이 검은 정천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나락의 한가운데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정천의 눈빛이 문득 아득해졌다.
“우리는 죽이며 살아남았다.”
전투와 살육, 죽음과 위기의 나날이 이어졌다.
용검대와 강룡단의 무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손발이 맞았다. 그래야만 능히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집념으로 전진해 나갔다.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마수들은 강대해졌고, 하나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나날이 강해져 갔다.
그들은 계속 살아남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단을 강구했다.
죽은 마수의 살을 뜯어 먹으며 연명을 했고 서로가 지니고 있는 무공을 비교, 분석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용검대의 검법과 강룡단의 심법, 나아가 여타 문파들의 무공이 총동원되었다. 그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생존자가 반으로 줄었을 때 그들은 실감했다. 지금 자신들의 실력은 중원의 기준으로 절정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점에서라면 입구를 막은 토사를 부술 수 있으리란 것도.
그러나 아직은 돌아갈 수 없었다. 퇴각하는 모습을 구경하고만 있을 마수들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토벌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아래엔 지금껏 만났던 놈들을 상회하는 괴물들이 있을 테지. 우리가 지금 돌아가 버리면 그 괴물들이 중원에 풀려날 것이다.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다. 난 앞서 죽은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이 심연의 밑바닥까지 가 보고 말겠다. 우릴 이곳에 가둬 버린 음모에 대해 따지는 것은 그 이후다. 이 끝에 위치한, 이 개 같은 놈들의 우두머리를 갈가리 찢어 버리지 않고는 속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용검대주 화륜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의 눈에서 붉은빛 귀기가 번뜩였다.
기실 그들 모두는 광기의 바다에 반쯤 발을 담근 상태였다.
살육의 나날이 이어졌다.
부쩍 강해진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자는 조금씩 늘어만 갔다.
생존자가 쉰 명이 되었을 때, 그들 모두는 한 번 이상의 환골탈태를 경험한 뒤였다.
생존자가 서른 명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 강룡단과 용검대의 무공을 조합한 새로운 무공이 완성되었다.
생존자가 다시 스무 명으로 줄었을 때, 그들 개개인은 중원에서도 절대 강자로 불릴 실력에 이르렀다.
그게 다시 열 명으로 줄었을 때, 마침내 길고도 깊던 진마동의 끝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놈’이 나타났다.”
“놈이라고?”
담미화의 반문에 정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광경을 떠올리듯 아득한 눈빛을 할 뿐.
“난 그 입구의 붕괴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천무맹이 주도한 것인지 마교의 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중 어느 쪽도 믿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때문에 내 힘에 대해 비영대주에게도, 제갈현에게도, 나아가 맹주 남궁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내 목적은 하나뿐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어가야 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정천이 말했다.
“그것을 알고 싶을 뿐.”
담미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지금 확실한 느낌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이자라면 반드시 결의한 바를 해내리라는, 그 앞에 무엇이 있든 해내고 말 것이란 느낌.
그러나 그 상대는 무림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하늘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다. 천무맹과 마교.
그 두 세력을 상대로 홀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담미화는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쳤다. 다시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내겠다는 거지? 천무맹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미쳤군. 차라리 태산을 맨손으로 옮기겠다는 말을 믿겠어.”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네 신뢰 따위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정천이 픽 웃었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의 뻔뻔스러운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아무 이유도 없이 했을 것 같나? 네게 한 말이 비영대주나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털어놓지도 않았을 거다.”
담미화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죽일 건가?”
“아니.”
짤막히 대꾸한 정천이 말했다.
“지금부터 너를 부려 먹을 생각이다.”
“부려…… 먹는다고?”
“그래. 비영대원이라면 정보를 수집하기엔 안성맞춤일 테니까. 하나쯤 수하로 두어도 나쁘진 않겠지. 일급 이상의 알짜배기가 아니라는 것은 좀 아쉽지만.”
담미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당신을 위해 천무맹을 배신할 것 같아?”
“그래야 할걸.”
담미화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왼손을 전방으로 출수하며 비도를 내던졌다.
쉬이이익!
허공을 가르는 비도의 모습이 여섯 개로 나뉘어졌다. 비영대 고유의 비도술인 육엽비산(六葉飛散)의 수법이었다.
정천은 왼쪽으로 몸을 날려 여섯 비도를 모두 피했다. 그 순간 담미화는 먼저 움직여서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고 있었다.
애초에 그의 반응까지 예상하고서 다음 움직임을 먼저 취한 것이다.
오른손의 비도가 허공을 갈랐다.
부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정천의 앞섶이 찢겨져 나갔다.
그 순간 담미화는 보았다. 정천의 왼쪽 흉부에 자갈처럼 박혀 있는 흑색의 금속체를.
“……!”
기괴한 형태의 금속체였다. 분명 금속 특유의 광택을 지니고 있었는데, 몇 가닥의 가느다란 선들이 그 위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핏줄처럼.
‘아니, 이건 분명히 핏줄이야!’
담미화는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비록 약동을 하고 있진 않았으나, 정천의 가슴에 박혀 있는 그것은 분명…….
“심장?”
“그래. 용의 심장이지.”
정천이 나직이 대꾸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붉은 빛의 기광을 뿜었다.
콰아아악!
“크윽!”
담미화는 순간적으로 목을 졸리는 느낌에 신음했다. 정천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그녀의 몸을 옭아맨 것이다.
그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
‘마안!’
분명했다. 마교의 몇몇 강자들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를 눈빛을 통해 내뿜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붙은 이름이 마안(魔眼).
그러나 지금 정천의 귀기는 마안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제압을 넘어 압살에 가까운 기세였으니 말이다.
숨을 쉬는 것조차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삽시간에 호흡이 가빠지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헉. 허억…….”
뱀을 눈앞에 둔 생쥐처럼 담미화의 몸이 굳어 갔다. 도망친다거나 반격한다거나 하는 생각 따윈 이성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로지 본능과 공포뿐.
담미화의 두 눈에 핏발이 돋았다.
“아, 안 돼……!”
비영대원들은 갖가지 고통에 대처하는 특훈을 받는다.
간단히는 살갗을 저미는 고문을 버티는 방법부터 정신을 파괴하는 약물이나 사술에 대한 대처법까지, 그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담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정신은 극한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아아악!’
이대로는 자아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지는 것도 금방이리라.
그때, 죽음보다 더한 격통의 중심에서 정천이 눈길을 거두었다.
“허억!”
숨통이 트이는 걸 느끼며 담미화가 주저앉았다.
그녀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정천을 보았다.
실금을 하여 둔부가 뜨뜻하게 젖었는데도 느끼질 못하는 상태였다.
정천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죽이지는 않는다. 정신을 부수지도 않을 거다. 망가진 인형은 제대로 써먹을 수도 없으니까.”
“그, 그럼…….”
“두 가지 금제로써 너를 제약할 거다. 하나는 조금 전에 끝마쳤다.”
“끝마쳤다고…… 요?”
담미화의 말투는 어느새 공손해져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색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정천에겐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흠. 이제야 존댓말을 쓰는군. 이렇게 생겼어도 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어르신이란 말씀이다.”
정천이 농담조로 말하는데도 담미화는 몸만 바르르 떨 뿐이었다.
그것을 본 정천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이제 나에 대한 공포가 네 무의식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을 거다.”
“…….”
“그 금제는 네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 거대한 공포에 직면하지 않는 한은 말이지.”
담미화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적인 언어인 양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두 번째 금제를 네게 걸 것이다. 첫 번째만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만에 하나 나의 마안을 뛰어넘는 공포에 직면할 수도 있으니까.”
“시, 싫어…….”
담미화가 가련한 신음성을 토했다. 그러나 정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게 자비나 배려를 바라진 마라. 망설임이나 동정 따윈 무저갱 밑바닥에 처박아 두고 왔으니까.”
촤아아악!
정천의 손아귀에서 흑색 기운이 분출되었다. 무섭게 쇄도한 기운이 담미화의 심장에 창날처럼 처박혔다.
들썩!
담미화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얼핏 보아선 심장을 꿰뚫려 즉사한 것만 같은 모습.
물론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죽음보다도 끔찍한 고통과 공포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꿈틀! 꿈틀!
쿵쾅거리는 심장 위로 정천이 발출한 기운의 다발이 감겨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정천이 말한 두 번째 금제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네 가슴속에 금제를 걸겠다. 이 금제는 네 무의식을 신호로 삼아 언제 어느 때건 너를 엄습할 것이다.”
“아아…….”
“내 의지를 반하는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격통이 찾아올 것이다. 죽음에는 이르지 않지만 그 고통만은 생살이 찢기는 것이 우스울 정도지.”
담미화가 애원하는 눈으로 정천을 바라봤다. 제발 그만하라는, 이만 용서해 달라는 눈빛.
그러나 정천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시선을 받아칠 따름이었다.
“자결로도 이 격통에선 도망칠 수 없다. 죽으려 해도 발동이 되게끔 안배해 놓았으니까. 죽음보다 앞서 엄습한 고통이 네 의지를 앗아 갈 거다.”
“제, 제발…….”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걸.”
말을 마친 정천이 손을 뒤로 뺐다.
담미화의 심장을 찌르고 있던 흑색 기운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미 정천이 말한 금제가 걸린 상태.
‘나는…… 이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담미화가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혼절했다.
방금 전 엄습했던 격통만으로도 정신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정천이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안개 속을 헤쳐 나갔다.
미안한 마음, 양심의 가책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원한을 짓밟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살아남으며 세 가지를 맹세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가운데 정천이 말을 이었다.
“하나, 내 마음껏 살아갈 것이다. 둘, 이백 형제들의 원념을 해소할 것이다. 셋, 우리가 왜 싸워야 했는지.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가 깊은 나락의 끝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은 백 개의 용검패뿐.
그러나 한편에는 또 다른 형제라 할 수 있는 강룡단의 넋 역시 존재했다.
물론 아직은 수면 아래에서 때를 고를 시기였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지금은 누가 적이며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러나 정천의 행보가 시작됐다는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천무맹을, 혹은 마교를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양쪽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 전부를.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직한 정천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모든 적에게 파멸을 선사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