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최악의 문지기
청룡문에 공식적으로 처음 배속된 날, 정천은 하루 종일 문지기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그 이튿날, 역시나 정천은 온종일 잤다.
사흘째 되는 날, 나흘째 되는 날 역시 동일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청룡문 문지기들 모두가 열불이 났다. 교대 인원이 충분하여 정천이 빠진대도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얄미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뭐하는 새끼야, 저거?”
“듣자 하니 군사부에서 뒤를 봐주는 놈이라던데?”
“뭐? 제갈세가 말단 찌꺼기라도 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러니 무서울 것 없이 잠만 쳐 자고 앉았지.”
“젠장. 완전 개자식이네.”
청룡문 문지기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정천을 씹어댔다. 물론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칠삼만은 동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문지기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계속 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냐?”
“어쩔 생각인데?”
“뻔한 거 아냐? 본때를 보여 줘야지!”
“아서라,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는다.”
“그래. 제갈세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동료들이 애써 말렸으나 말을 꺼낸 문지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건 모르는 일 아냐? 애초에 제갈세가씩이나 되는 곳에서, 말단이라고 해도 세가의 일원을 기껏 문지기로나 보내겠어?”
“으음.”
“그건 그렇군.”
“내가 보기엔 세가에 큰 잘못을 하고 여기로 좌천된 놈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문지기 노릇이나 할 리가 없잖아.”
제법 그럴싸한 말이었다.
제갈현의 눈 밖에 나서 좌천된 거라면 놈의 게으름 역시 말이 되었던 것이다.
“좌천이 된 주제에 아직도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있다는 거로군. 확실히 그쪽이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지? 그러니 놈한테 매운맛 좀 보여줘도 문제가 되진 않을 거란 말씀이야.”
“확실히 그럴지도…….”
문지기 중 상당수가 관심을 보였다. 기실 문지기 노릇이란 게 워낙 지루하다 보니 여러 곳에 관심이 쏠리는 법이었다.
말을 꺼냈던 문지기가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서 놈한테 신고식을 치러 줄 사람?”
몇몇 문지기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은 의기양양해져서는 정천의 방으로 향했다.
“좋아, 간만에 손맛 좀 느끼겠군!”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차에 잘 됐다!”
칠삼 역시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저것들이 정말 미쳤군.’
칠삼으로선 근심 반 기대 반이었다. 내공을 소실했다곤 해도 정천은 어쨌든 천무맹 최강의 타격대 출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문지기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닌 황룡성의 문지기인 만큼 몸 하나는 튼튼했던 것이다.
정천의 정체에 대해선 함구하도록 엄명을 받은 칠삼이었다. 그런 만큼 깊게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관심을 갖고 요 며칠간의 동향을 지켜보고는 있었다.
결국 호기심이 동한 칠삼이 그들의 뒤를 밟았다.
정천의 방에 도착한 문지기들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 건방진 자식!”
“오늘 선배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마!”
바로 뒤에 칠삼이 그곳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고 나니 정천의 방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입 주제에 언제까지 농땡이나 피울 참이냐?”
“오늘 한번 죽어 볼 테냐?”
전형적인 협박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녀석들이 당한 건가? 아니면 정천이?’
싸우는 소리가 나진 않았다. 칠삼이 의아함을 느끼며 지켜보자니 방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기묘한 표정을 한 채 문지기들이 걸어 나왔다.
애써 숨기려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미소가 채 감춰지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방 안을 돌아보며 살갑게 한마디씩을 했다. 조금 전의 살기등등한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흠흠.”
“정말 고맙네, 동지.”
“이 빚은 나중에 갚겠네.”
감사 인사까지 깍듯이 하고서 방을 떠나는 문지기들이었다.
칠삼이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니 정천이 방 안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는 웃는 것이었다.
“거기서 구경하고 있었군. 왜, 선배도 하나 가져가고 싶은 건가?”
“가져가다니, 뭘 말이냐?”
“이거.”
정천이 무언가를 휙 던졌다.
칠삼이 받아 보니 금전 한 냥이었다. 필시 군사 제갈현에게서 받은 성과급이 분명했다.
“그럼 이것을 저 녀석들에게……?”
“하나씩 쥐어 주니 좋아서들 물러가더군. 따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내 근무 시간까지 대신 맡겠다고 자청하더라고.”
“…….”
“뭐, 이젠 나도 슬슬 출근해 볼까 해서 거절했지만 말이야.”
“출근하다니?”
“청룡문 말이야. 어쨌든 기왕 얻은 일이니 잘리지 않으려면 나가 봐야지.”
“하지만 안 나가도 저 녀석들이 알아서 해 줄 텐데?”
칠삼이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금전 한 냥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다. 칠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껴 쓴다면 몇 년을 능히 지낼 수 있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문지기들은 지금 그런 돈을 손에 넣은 것이다. 아마 정천이 앞으로 볼 때마다 발바닥을 핥으라고 해도 좋다고 따를 터였다.
칠삼의 말에 정천이 피식 웃었다.
“잠만 자려니 슬슬 지겨워서 말이야.”
“…….”
어련하실까. 칠삼은 한심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받은 금전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 * *
문지기 일에 나선 뒤에도 정천의 일과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활짝 열려 있는 청룡문 옆에 털썩 앉아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한가로이 구경하는 게 전부.
그럼에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미 동료들은 물론 상관에게까지 뇌물을 먹인 뒤였기 때문이다.
참 현명하다면 현명한 방법.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가량을 소일로 보낸 정천이었다. 그러고 나더니 다음 주부터는 아예 술병까지 하나 끼고서 일에 나섰다.
정천은 청룡문 옆 양지 바른 곳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아낙들을 보며 술 한 잔을 기울여 입안에 털어 넣었다.
청룡문을 드나드는 행인들이 힐끔힐끔 정천을 쳐다봤다. 하지만 오래 관심을 보이진 않았는데, 일개 문지기에 신경 쓰기엔 자기들 일이 더 바빴던 까닭이다.
정천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음주를 즐겼다.
“크, 죽이는군.”
탄성까지 뱉으며 술을 들이켜는 모습에 함께 나온 문지기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술이 고픈 것도 그랬지만, 저러다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싶은 것이 더 컸다.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어느 문지기가 중얼거렸지만 칠삼이 딱 잘라 말했다.
“됐다. 그냥 내버려 둬. 저러다 된통 걸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 하지만…….”
“저런 녀석을 걱정하느니 본인들 일이나 충실히 하자고.”
매몰차게 말하는 칠삼이었으나 문지기들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이었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기분 상한 정천이 금전을 다시 돌려달라고 한다면?
그들로선 그게 못내 걱정되는 것이었다.
칠삼은 그런 동료들을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어차피 저 녀석한텐 우리한테 준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다고. 쯧.’
칠삼이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한가롭게 자작자음하는 정천의 앞으로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갈색빛이 언뜻 감도는 긴 머리카락의 소녀.
나이는 이제 열 일고여덟쯤 되었을까. 거울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다만 고품이 흐르는 얼굴과 달리 입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해진 평민의 복색이었다.
“그렇게 술이 좋은가요?”
힐끔 시선을 올린 정천이 픽 웃었다.
“워낙 오랜만이다 보니 독주도 꿀맛 같군.”
“상당히 오랫동안 음주를 할 수 없었던 모양이죠?”
“그래, 네가 생각도 못할 만큼 오랫동안.”
소녀의 표정이 살짝 딱딱해졌다.
“자기 임무를 망각할 정도로 술이 좋다는 건가요?”
“내 임무?”
“청룡문을 지키는 것 말이에요.”
정천은 과장된 동작으로 청룡문을 돌아보았다.
“이곳이라면 지금 지키고 있잖아.”
“술병이나 기울이면서 말인가요?”
“내 권법은 취권(醉拳)이거든.”
태연한 대답에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정말요?”
“물론이지. 나는 특히나 취각법의 달인이지. 혹시나 황룡성 담을 넘어 다니는 도둑놈이 있으면 쫓아가서 잡아야 하니까.”
소녀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황룡성의 벽을 바라봤다. 이십여 장에 이르는 높이에 고개가 아파 올 지경.
“정말 저곳을 넘어 다니는 도둑이 있어요?”
“물론. 난 그런 녀석들을 잡기 위해 특별히 임무를 받아 평상시에 술을 마시고 있는 거라고.”
“그렇…… 군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별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별호는 고주망태라고 한다.”
“고주망태?”
한쪽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을 구경하던 문지기들이 기어코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그제야 소녀는 자기가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얼굴을 붉혔다.
“거짓말을 한 거였어요?”
“그래. 그것도 바보가 아닌 이상은 결코 넘어가지 않을 거짓말이지. 뭐, 네 복장을 보아하니 그럴 만도 한 것 같다만.”
“내 복장이 뭐가 어떻다는 거죠?”
“겉옷은 누더기인데 그 안에는 제법 비싸 보이는 비단옷이 얼핏 보이는군. 명문가 아가씨께서 평민 놀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당황스러운 듯 소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어, 어떻게……?”
“눈에 뻔히 보이니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거기 앞섶 안쪽에 다 보이잖아.”
소녀가 황급히 앞섶을 가렸다. 정천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어쨌든 가라고. 농땡이 부리는 문지기 따위한테 관심 두지 말고.”
옆의 문지기들이 재차 킬킬거렸다. 소녀는 이제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정천이 결국 한숨을 뱉었다.
“제법 고집은 있군.”
“당신, 이렇게 게으름 피우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줄 알아요? 상부에 알리도록 하겠어요!”
“그러지 못할걸.”
묘하게 차분한 정천의 목소리에 소녀가 발끈했다.
“내가 못할 것 같아요?”
“응. 그거 위에다 찌르려면 네 신분도 밝혀야 하거든.”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정천이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아무래도 귀한 집 아가씨가 몰래 빠져나와 어설프게 위장하고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그런 걸 밝히려면 골치깨나 아프겠지?”
“그, 그건…….”
“아무래도 제갈세가 쪽과 연이 있는 것 같은데, 들켰다간 본인부터 힘들어지지 않겠어?”
그녀의 입이 대번에 벌어졌다.
“그, 그걸 어떻게……?”
“걸음걸이 보고. 천행보(天行步)를 대강은 익힌 것 같아 보이는군. 기껏 해야 어린애 걸음마 수준이지만. 확언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가문 사람들이 원체 오지랖이 넓기도 하고.”
소녀는 이제 귀신을 보는 눈으로 정천을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걸음걸이만으로 그것을……?”
“난 취권의 달인이니까.”
살며시 대꾸한 정천이 슬쩍 물러나서는 목소리를 다시 높였다.
“어쨌든 그만 가라. 어린애 얼굴이나 보려니 술맛 떨어진다.”
“…….”
두 손을 주먹 쥔 채 부르르 떨던 소녀가 물러났다. 정천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슬쩍 짓고는 그녀에게서 신경을 뗐다.
그때 머릿속에 나직하게 울리는 한마디.
—내 이름은 제갈세연이에요.
“…….”
정천은 조금 의외라는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오늘 빚은 언젠가 갚아 주겠어요.
전음을 보낸 소녀가 마지막으로 정천을 흘겨보고는 황룡성 안쪽으로 사라졌다. 정천은 픽 웃고서는 술잔을 들이켰다.
우물쭈물하던 칠삼이 슬며시 다가왔다.
“저기 말이야. 조금 전에 대체 무슨 대화를 한 건가?”
“그냥 선문답.”
“마지막엔 둘이서만 무슨 얘기를 하지 않았나?”
“그것도 선문답이야.”
아리송한 대답에 칠삼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아까 대화를 보자니 머리는 꽤 비상한 것 같은데, 이런 쓸데없는 일로 소일이나 하고 있으니.”
“쓸데없진 않지. 황룡성을 드나드는 수많은 인물들의 면면을 볼 수 있으니까.”
“인물들의 면면?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야. 말단 무사에서부터 천무맹 내의 주요 인물까지, 모든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지.”
“…….”
칠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천을 보았다. 어쩌면 이 사내는 역시 자신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은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뭐, 조금 뒤엔 다 까먹지만 말이야.”
들 리가 없었다.
칠삼은 한숨을 쉬고서 몸을 돌렸다.
“술이나 맛나게 들게나.”
“그럴 거야. 싸구려 분주인데도 혀가 녹는군. 대어를 낚은 직후라서 그런가?”
“응?”
칠삼이 미심쩍은 눈으로 정천을 돌아봤다. 정천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메기라도 한 마리 낚아 볼까 했더니 어린 잠룡이 걸려들었어. 오늘은 운이 좋은 날 같군.”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들어도 모를 얘기.”
칠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 * *
맹주 남궁운의 지시까지 받고서도 제갈현은 한동안 정천에 대해 잊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감시자 역시 파견하지 않았다.
이유라면 여럿이었다.
우선은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성격이 비뚤어진 것도, 의욕이 줄어든 것도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였다. 오히려 미치지 않은 것이 용할 따름이었다.
또 다른 이유라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천의 내공 소실은 천무맹주 남궁운이 직접 확인한 것. 정파무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의 판단이라면 틀림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정천은 일말의 문제조차 될 수 없는 입장.
그런 이에게 비영대 같은 인재를 파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문지기 상관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하라고만 해 놓은 차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잊고 있었던 보고가 들어왔다.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보고였다. 게다가 염려와 달리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듯했다.
‘그 처절한 수라장을 겪고 온 사람치고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군.’
처절한 기억은 그만큼 깊게 각인되는 법이다. 동료들을 눈앞에서 잃었다면 더더욱 그러할 터. 정천이 반쯤 미쳐서 날뛴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진마동 내부를 직접 확인한 적은 없는 제갈현이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접했던 정보만 가지고도 그 안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천과 용검대, 그리고 마교의 강룡단은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뼈아픈 손실이 뒤따르긴 했지만…….’
제갈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강룡단과 용검대는 과거의 유물일 뿐. 지금은 그 일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던 와중, 그의 방 천장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오고 계십니다.”
“이런, 오늘도 말인가?”
제갈현은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귀찮음 반, 반가움 반의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행색을 바로하고 기다리자니 부드러운 발걸음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의 방문을 스르륵 여는 갈색 머리칼의 소녀.
“백부님, 저 왔어요.”
제갈세연의 방문에 제갈현은 난감한 듯 웃었다.
“오늘도 그 우스꽝스런 복색을 했구나.”
“백부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갈세연이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제갈현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동생 부부가 남기고 간 여식이었다.
그런 만큼 제갈현 본인이 거두어 금지옥엽처럼 키워 온 제갈세연이었다.
얼마 전까지 본가가 있는 융중산에서 지내던 그녀였으나, 황룡성을 방문하기를 자청해 왔다. 워낙 공주처럼 키워 온 조카딸의 생떼에 천하의 천무맹 군사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황룡성에서 지내게 된 제갈세연. 그녀에겐 황룡성의 모든 것이 그렇게나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자주 바깥 외출을 하고 있었다. 저 기묘한 복색으로 차려입고선.
“역시 이상해 보이세요?”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묻는 제갈세연이었다. 제갈현은 빙긋 웃고서 대답했다.
“정말 평범한 복색을 하려 한다면 지나치게 해진 옷은 피하도록 하려무나. 열심히 감추어도 움직이다 보면 안쪽의 옷감이 드러나게 마련이니. 특히나 그렇게 몸보다 큰 웃옷이라면.”
물론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백옥 같은 얼굴만은 어쩌지 못하겠지만.
제갈현은 그 말까지 하려다가 애써 참았다. 안 그래도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조카딸이 오만해질까 싶어서였다.
“역시.”
제갈세연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유모의 옛날 옷을 입은 게 실수였나 봐요.”
“굳이 그렇게 변복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황룡성 안엔 원체 많은 귀인들이 있다 보니 크게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것 같긴 해요. 그래도 화려한 옷을 입고서는 갈 수 없는 곳들도 있잖아요?”
“성내의 빈민가 같은 곳이나 그렇단다.”
“전 그런 곳도 가 보고 싶은걸요. 유모한테는 엄청 혼나겠지만.”
제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녀 몰래 뒤를 따르게 명령해 둔 비영대원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이따금 제갈세연이 비상한 꾀를 내어 따돌리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풀어놓는 것이 아닌가 싶기는 했다.
사실 그녀의 이런 돌발 행동부터가 세가의 입장에선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큰일이라도 당하면 안 됐으니 말이다.
때문에 제갈세연은 유모를 비롯한 세가 사람들을 따돌리고서 황룡성을 쏘다녔고, 세가 사람들 역시 제갈현의 눈치를 보느라 반쯤 눈 감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풀어 둘 수는 없겠지. 슬슬 주의를 줘야겠군.’
제갈현은 내심 결심했다.
제갈세연의 미소 앞에서 봄날 눈처럼 녹아 버리는 결심이니 문제였지만.
“그래, 오늘도 많은 것을 보고 온 모양이구나.”
“네. 오늘은 황룡성의 네 성문을 돌아보고 왔어요.”
백부와 질녀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자식이 없는 제갈현이나 부모가 없는 제갈세연이나 서로를 친부와 친딸처럼 대했다.
여느 때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던 제갈세연이 문득 손뼉을 쳤다.
“아, 맞아. 이상한 사람을 하나 봤어요.”
“이상한 사람?”
“네, 청룡문에서 만난 문지기인데…… 말 그대로 이상했어요.”
“문지기?”
웃는 낯이던 제갈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극히 미세한 차이였기에 제갈세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네. 술병까지 옆에 끼고서 아무렇게나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제갈현의 기억에 그럴 만큼 배짱이 큰 문지기는 황룡성에 없었다.
있다면 한 명뿐일 터였다.
‘이놈이 거짓말을 했군.’
보고를 올린 문지기를 문책하리라 내심 다짐한 제갈현이 질문을 던졌다.
“그것뿐이더냐?”
“아뇨. 그것뿐이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죠. 어째서인지 일개 문지기가 제 정체를 알아봤어요.”
“알아봤다고?”
“아차.”
입을 살짝 가린 제갈세연이 당부했다.
“유모한텐 말씀하지 마세요. 또 무슨 잔소리를 할지 모르니까요.”
“걱정 말고 말해 보거라.”
“그럴게요. 음, 우선은 제 복장을 보고서 눈치를 챈 것 같았어요. 백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 정도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에 그쳤다면 제갈세연이 구태여 말을 하지도 않았을 터.
그렇게 생각한 제갈현이었음에도 이어진 제갈세연의 말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 걸음걸이만 보고서 세가의 무공을 알아맞췄어요.”
“걸음걸이만으로?”
“네. 제가 요즘 천행보를 익히고 있다는 것까지 귀신처럼 알던걸요?”
“으음.”
제갈현은 침음했다.
천행보 자체는 널리 알려진 보법이었다. 제갈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기본 보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걸음걸이만으로 간파했다는 건 필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역시 이빨이 빠졌어도 용은 용이란 건가.’
용검대 제삼조장의 위명은 헛것이 아니었다. 하긴 기억해 보면 십 년 전에도 용검대주 화륜패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정천이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이상하구나. 그 정도의 통찰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군사부 내에서도 중용될 수 있을 터인데.’
그런데도 문지기를 택한 채 술이나 마시며 소일하고 있다니.
정천을 이해하기 힘든 제갈현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그가 가장 꺼리는 것이기도 했다.
만통지재(萬通之才).
제갈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정파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인 비영대를 수중에 두고 있었다.
그런 만큼 무림의 거의 모든 정보와 통해 있었고, 그만큼이나 정보의 부재를 못 견뎌했다.
지금 제갈현에게 있어 정천이란 존재는 말 그대로 수수께끼 같았다.
“으음.”
침음하는 제갈현을 보며 제갈세연이 살짝 걱정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세요, 백부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걸요.”
제갈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민한 아이를 곁에 둔다는 것은 확실히 신경 쓸 게 많은 일이었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일 것 같아서 그렇단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물러가거라.”
“벌써요?”
토라진 얼굴을 하는 제갈세연.
평소라면 그녀의 표정에 못 이길 제갈현이었으나, 오늘만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다.”
“알겠어요. 군사 일도 중요하지만 몸도 생각하세요, 백부님.”
“그러마. 시간이 나는 대로 찾아가겠다.”
못 이긴 척 일어선 제갈세연이 목례를 하고선 방을 나섰다.
미소 띤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제갈현이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무엽(無葉).”
“예, 군사.”
제갈현의 말에 천장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까 전 제갈세연의 도착을 알렸던 목소리였다.
“비영대원 중 한 명을 차출하여 정천의 감시로 붙이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정체가 발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보다 비영대를 신용하는 제갈현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신중을 요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
무엽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담미화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담미화를? 너무 어리지 않은가?”
“나이에 비해 실력이 무척 출중한 편입니다. 성격도 꼼꼼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제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널 믿겠다.”
“예, 군사.”
천장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제갈현은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넨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정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