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귀환병
“카악, 퉤!”
칠삼은 묵은 가래침을 뱉었다.
그날은 온종일 재수가 없었다.
멍청한 신참 녀석이 황보세가 도련님을 못 알아보고 시비를 걸다가 윗선 문지기들이 죄다 호출됐다.
결국 별 탈 없이 끝나긴 했지만 빌어먹을 세가 댁 애송이에게 별별 소릴 다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웬 반송장까지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군. 쳇!’
이곳은 청룡문이다.
정파일통 천무맹의 본부인 황룡성,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들락거리는 동문이다.
본디 천무맹에 큰 충성심을 지니진 않은 칠삼이라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사실 화풀이 상대가 필요한 게 컸다.
“야, 이 자식아!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느냐?”
송장 같은 놈이 칠삼을 돌아본다.
기이한 놈이었다.
추정 연령은 대략 이십대 중반쯤. 신장은 평균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체격 역시 딱히 뛰어날 게 없는 수준이었고.
수라장이라도 거쳐 온 것처럼 너덜너덜한 옷가지.
수척한 인상의 얼굴.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색.
왼팔은 무언가를 잔뜩 담은 포대를 둘러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몸 곳곳에 거적을 감아 둔 것도 특이점이었다.
감겨 있는 거적 위로는 마른 피가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사내의 움직임에선 부상의 기색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의미.
때문에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
사내는 황룡성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저갱 같은 눈동자가 빛을 토했으나 일순간일 뿐. 사내는 당장 하품이라도 할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문지기들을 보며 씩 웃는 것이다.
‘미친놈이 시비를 거는 건가?’
마침 기분도 더러운데 잘 됐다 싶었다.
칠삼은 동료 문지기에게 눈짓을 하고는 슬쩍 한 발짝 나섰다.
“이곳은 네놈이 함부로 어슬렁거릴 곳이 아니다. 곤죽이 나고 싶지 않걸랑 꺼져라.”
사내가 칠삼을 돌아봤다. 이윽고 그의 입가가 슬쩍 비틀어졌다.
그게 실소임을 모를 칠삼이 아니었다.
“이 자식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려던 순간.
사내가 물었다.
“황룡성이 맞나?”
“뭐?”
“이곳이 천무맹 본부가 맞느냐고 물었다.”
“허허!”
칠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황궁을 보면서 저기 황제가 사느냐고 묻는 격이었다.
“맞지. 암. 이 황룡성이야말로 천무맹의 본부라 할 수 있지. 왜, 맹주님이라도 찾아오셨는가? 아니면 군사이신 제갈현 어르신이라도 뵈러 오셨나?”
구경하던 동료 문지기들이 킥킥거리던 찰나.
“그래.”
놈의 대답이다.
칠삼은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뭐라고?”
“군사의 이름이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세대가 바뀔 정도로 시간이 흐른 건 아니겠군. 동명이인일 확률은 높지 않을 테니까. 그럼 천무맹주의 이름은 아마도 남궁운이겠군.”
점점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사내였다.
게다가 그 중얼거리는 모습이 꼭 오랜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랬었지.”
사내의 중얼거림에 칠삼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조롱이나 몇 마디 건네고 흠씬 두들겨 패 쫓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이놈은 정말 몇 대 맞아야 할 판이었다.
“그분들의 존함은 네놈 따위가 함부로 부를 것이 아니다. 이리 와라. 이 미친 자식, 일단 좀 맞고 나서 얘기하자꾸나.”
칠삼은 육모곤을 휘적거리며 놈에게 다가섰다.
그때였다. 잠자코 서 있던 사내가 칠삼을 향하여 무언가를 휙 던졌다.
“웃?”
움찔 놀라는 칠삼.
그러나 사내가 던진 물건은 그의 발치에 툭 떨어질 따름이었다. 암기가 아닐까 하고 잠시 겁먹었던 칠삼이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올해로 청룡문 문지기 생활이 이십 년째인 그다. 사내가 던진 물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를 리 없었다.
땅에 떨어진 것은 강철로 주조된 철패(鐵牌).
그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는 바로 용검(龍劍)이었다.
용검패(龍劍牌)!
이제는 사라진 용검대의 상징!
칠삼은 경악 어린 눈으로 사내를 돌아봤다.
말을 뱉는 그의 이빨이 딱딱거리며 부딪쳤다.
“서, 설마 당신은……?”
사내는 칠삼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군사와 맹주에게 전해. 용검대 제삼조장 정천이 지금 귀환했다고.”
* * *
“그가 돌아왔습니다.”
연분홍빛 복사꽃이 만발한 정원.
황룡성 내의 도원향이라 하여 용도원(龍桃園)이라 이름 붙은 곳에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한 명은 호호백발의 신선 같은 노인이었다. 청백색 도포와 혈색 좋은 얼굴, 왼손에 슬며시 쥐고 있는 군자검(君子劍)이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반대편에 앉은 사내는 반백의 머리칼과 학창의가 돋보이는 중년인.
이지적인 느낌의 얼굴에는 충격의 빛이 어려 있었다.
백발의 노인이 복숭아나무 숲을 응시했다.
“무려 십 년 만이로군.”
“그렇습니다.”
“나타난 이는 그 혼자뿐인가?”
“예. 본인을 비롯한 나머지 구십구 인의 용검패를 모조리 가진 채로 나타났습니다.”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약간의 아련함과 안타까움, 그 외의 형언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의미가 숨겨진 눈빛이었다.
그 의미만큼은 눈앞의 중년인으로서도 쉽게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고 봐야겠군.”
“아마도…….”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급히 오느라 자세히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고자에게 몇 가지 물어보니 외관상으로는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보고자?”
“예. 청룡문의 문지기인 칠삼이라는 자입니다. 별것 없는 문지기이니 맹주님께선 모르실 겁니다.”
백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흐드러진 복숭아꽃잎이 바람에 실려 용도원에 흩날렸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나직한 물음에 중년인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떠한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노인, 천무맹주 남궁운은 씁쓸히 웃었다.
“물론 그의 귀환에 대해서 말이지. 내 추측이 옳다면 그, 아니, 그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라장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네.”
그들이라 함은 물론 용검대를 말하는 것.
중년인, 천무맹 군사 제갈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수라장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진마동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거의 사라져 버렸고…… 용검대 역시 과거의 전설로 남았을 뿐입니다.”
“음.”
애초에 진마동과 관련된 정보들은 상당 부분 은폐되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천무맹과 마교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자칫하면 그 정보들로 인해 천무맹 물론 중원 무림 전체에 혼란이 도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동굴에서부터 나타난 괴생명체들.
그 존재가 밝혀진 순간의 혼란과 충격이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터였다.
때문에 천무맹과 마교의 수뇌부는 이 일을 감추었다. 물론 그렇다고 풍문이 도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으나, 증거를 인멸한 상태였던 만큼 소문이 수그러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애초에 목격자 역시 얼마 없었던 게 컸다. 대부분 죽은 뒤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 용검대 역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알려진 채, 자세한 연유는 의문으로만 남기고서.
“어쨌든…….”
남궁운이 몸을 일으켰다.
제갈현도 그를 따라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일단은 정천, 그 친구를 만나 봐야겠네.”
“알겠습니다. 이곳으로 부를까요?”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어찌 됐든 그는 우리 천무맹의 영웅이네. 이 정도의 수고야 마다할 바가 아니지. 게다가…….”
순간적으로 남궁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너무 순식간인지라 제갈현은 눈치채지 못했다.
“몇 가지 알아볼 것도 있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가시지요.”
살짝 목례한 제갈현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 * *
“으음.”
칠삼은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비틀어댔다.
그는 황룡성 동부 별관 앞에 있었다. 승천교(昇天橋)라 이름 붙은 다리 앞이었는데, 이번 일의 최초 보고자로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 군사부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몇 가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간 뒤였다. 칠삼이 아는 정보야 몇 가지가 되지 않았지만.
사실 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용검대의 정천이란 사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에구, 어서 빨리 돌아가서 얼큰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는데.’
칠삼으로선 이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북함 일면엔 호기심도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천무맹에서 이십 년 이상 근속했던 칠삼이다. 게다가 문지기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단 치고는 의외로 많은 정보를 꿰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용검대의 행방불명.
오랫동안 품어 온 수수께끼였던 만큼, 그 해답을 앞에 두니 자연히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저자는 십 년 동안이나 무얼 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칠삼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사내는 승천교 아래로 흐르는 냇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 냇가 쪽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는데, 오른팔로 버드나무를 짚어 균형을 취하고 있었다.
몸 곳곳이 거적에 감겨 있음에도 평온한 얼굴.
몸이 멀쩡하든가, 아니면 생각보다 경미한 상처뿐일지도 몰랐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사내에게 다가서고 있는 칠삼이었다.
찜찜한 부분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저…….”
칠삼의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시큰둥한 표정이 삽시간에 나타났다.
“뭐야?”
까칠한 목소리.
칠삼은 일단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부터 했다.
“아까는 시비를 걸어 미안했수다. 사실 그쪽이 술에 취한 주정뱅이인 줄 알았소. 그, 문지기 노릇을 하다 보면 별별 미친놈들을 다 만나는지라…… 게다가 오늘따라 좀 기분 더러운 일도 있었고 말이오.”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당신이더라도 비슷하게 반응했을 테니까.”
“어, 음. 그렇군. 고맙소.”
“그럼.”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가 다시 냇가로 눈을 돌렸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칠삼은 헛기침을 했다.
“그, 꽤나 고생을 한 것 같소만.”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의 직위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일개 문지기인 칠삼과 달리 사내는 천무맹 최고 타격대의 조장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다간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용검대는 없다.
게다가 사내에게서도 딱히 위협적인 기세가 흘러나오진 않았다. 단지 가까이 다가서기 힘들다는 것만이 느껴질 뿐.
‘아니…….’
칠삼은 두 번, 세 번 사내를 보고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에게선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흘려야 할 기도조차도.’
그 역시 고향인 순양(旬陽)에선 이름깨나 날리던 무인이었다.
종남파의 하위 문파인 벽운파의 기재로 명성을 떨쳤었던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일개 소문파의 기재일 뿐.
한 주(州)에 걸쳐 명성을 떨치는 무인들에 비할 바는 결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위엔 천하에 걸쳐 명성을 떨치는 이들이 있었다.
모래알과 자갈의 차이랄까?
무림은 자갈 같은 무인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스러져 사라지는 곳. 그들이 자갈이라면 칠삼은 모래알이었다.
칠삼도 그걸 알았기에 일찌감치 청운의 꿈을 버렸다. 그러고서 황룡성 문지기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이 근 이십 년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칼밥이 있는 만큼 눈치 하난 자신이 있었다.
문지기로 근속하며 수천, 수만의 무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종국엔 그들 개개인의 성취나 무력을 나름대로 가늠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한 칠삼이 보기엔 이 사내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일말의 내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력을 갈무리한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일말의 흔적은 남아야 하거늘…….’
솔직히 말하자면 칠삼 자신보다 약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를 속일 정도로 기척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칠삼은 문득 사내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들어 봐야 기분만 더러워질 텐데.”
“그렇…… 소?”
“그래. 온통 죽고 죽었다는 얘기뿐일 테니까.”
이죽거리는 것도 같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같은 목소리. 머쓱해진 칠삼이 다른 물음을 꺼냈다.
“저, 고향이 어디요?”
“섬서성.”
칠삼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그와 같은 지역 출신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뭔가 말문이 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칠삼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칠삼이라고 하오. 고아 시절에 날 거두어 준 노인네가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이지. 숫자만 겨우 셀 줄 아는 노인네가 붙여 준지라 우스꽝스럽지만 말이오. 쳇, 그치 말로는 가장 재수 좋은 숫자 두 개를 붙였으니 운수도 좋을 거라더군. 근데 지금 내 팔자는 황룡성 문지기 노릇이오.”
의외로 사내가 말을 받았다.
“문지기 노릇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소? 말 그대로 문이나 지키고 서 있는 짓인데. 아마 황룡성에서 가장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 직급이 문지기일 거요.”
“잘난 자부심 따지다가 뒈지는 것보다야 낫겠지.”
“…….”
칠삼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몰라도 사내의 목소리엔 기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괜한 생각이겠지.’
고개를 휘휘 저은 칠삼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사내의 말투가 기분 나쁘긴 했지만 용검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던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용검대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끓어올랐다.
천무맹 제일, 아니, 무림 제일의 타격대라 불려도 손색없을 그들이다.
그런 용검대의 이야기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필시 얼치기 무인들이 떠들어 대는 자기 자랑과는 격이 다를 터.
그간 들어온 숱한 무림의 전설들과도 비견될 것이 분명했다.
일찌감치 청운의 꿈을 버렸던 칠삼이다.
그런 만큼 최고 수준의 무인들에 대한 동경만은 더없이 깊었다.
그러나 칠삼은 더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마침 그때 두 명의 사내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상당한 거리임에도 확연히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존재감.
고개를 돌린 칠삼이 숨 막힌 소리를 냈다.
“헉……!”
천무맹주 남궁운과 군사 제갈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너머로나마 그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칠삼은 허리가 구부려져라 고개를 조아렸다. 내버려 두면 오체투지까지 할 기세였다.
정천은 미동하지 않았다.
왼팔을 편히 하고서 오른팔로는 버드나무를 받친 자세 그대로였다.
남궁운은 정천과 열 걸음쯤 떨어진 위치에 섰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사실 직위가 직위인지라 서로에 대해 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돌아왔군, 정천.”
“그간 격조했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이 말했다.
“자네의 것을 포함, 용검대 백 인의 용검패를 모두 가져왔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용검대가 전멸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남궁운은 눈을 감았다.
“너무나 큰 희생이로군.”
“…….”
“자네를 비롯한 용검대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듯하이. 화륜패 그 친구도 그렇고 말이야.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 답지 않게 비오는 날에 시구를 읊조리는 것을 좋아했었지.”
“돌아가면 맹주님과 밤새도록 대작(對酌)하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아까운 친구를 잃었어.”
중얼거리는 남궁운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칠삼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무인들의 감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상을 자르며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개죽음이었지요.”
정천의 목소리였다.
남궁운은 물론이고 제갈현과 칠삼도 움찔했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 채 반응하기도 전에 정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보다도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본론?”
“포상금 말입니다. 분명 진마동과 관련하여 성과금이 마련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진마동?’
칠삼이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언가 중요한 단어이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정천을 보던 남궁운이 제갈현을 돌아봤다.
약간 당황한 제갈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음, 그러고 보니 일인당 금전 오십 냥씩의 성과급을 준비해 두었었습니다. 그들의 실종으로 인해 결국 지급되진 않았습니다만.”
“거기에 추가 수당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정천의 말이 이어졌다.
고개를 끄덕인 제갈현이 대답했다.
“물론일세. 순직 수당까지 하여 개인당 오십 냥의 금전이 따로 마련되어 있네.”
“저를 제외한 구십구 인이 백 냥씩을 받게 되겠군요. 기왕 주시는 김에 저한테도 주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에게도 같은 수당을 주겠네.”
남궁운의 말이었다.
정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수당은 용검대원들의 가족들에게 알아서 전해 주시길.”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이 말했다.
“음, 알겠네. 그럼 자네의 몫을 뺀 나머지 성과급을 청화촌(靑花村)으로 보내도록 하지.”
“청화촌?”
의문 섞인 정천의 반문에 제갈현이 대답했다.
“용검대 소속 무인들의 가족들이 거주 중인 마을일세. 천무맹 무인의 가족들이 황룡성 안에 기거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랬던 기억이 났다. 단지 정천 본인에게 가족이 없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
황룡성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한데다 그 인구 역시 엄청나다.
때문에 내부에 지역을 여럿 두어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해 두었다.
“청화촌은 그중 용검대 소속 무인들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이들의 마을일세.”
정천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진 않았다.
머쓱해진 분위기에 남궁운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래. 더 바라는 것은 없는가?”
“일단 바로 포상금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만.”
“…….”
남궁운이 제갈현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는 약간이지만 짜증마저 눈빛에 어려 있는 듯했다. 제갈현이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지금 바로 가져오게끔 하겠네.”
“빨리 좀 부탁합니다.”
정천의 말에 남궁운이 결국 한마디를 했다.
“너무 닦달하지 말게. 설마 우리가 돈을 떼어먹기야 하겠나?”
“뭐, 그건 그렇군요.”
픽 웃으며 대꾸하는 정천.
남궁운은 낮게 침음했다. 아무래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
‘그럴 만도 하지.’
칠삼이 한심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잠깐 동안이긴 했으나 그가 본 정천이란 자는 전형적인 속물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동료들의 죽음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개죽음이라고 말하다니. 게다가 돈만 바라는 태도 역시 전형적인 속물의 그것이었다.
일개 문지기인 칠삼조차 그렇게 느낄진대, 남궁운과 제갈현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때였다.
“음?”
순간적으로 남궁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기실 아까 전부터 대화하는 내내 정천의 몸을 샅샅이 살피고 있던 그였다.
“설마 자네……!”
경악 어린 목소리에 칠삼과 제갈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말에 그들도 경악했다.
“설마 단전이 파괴된 것인가?”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갈현의 물음이었다. 칠삼도 놀라긴 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정천은 태연했다.
“뭐, 목숨을 건진 것치고는 싼값이겠죠.”
“그게 무슨 말인가?”
“단전의 내력을 모조리 소모했습니다. 때문에 체내의 내공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 이후로도 매일같이 운기조식을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효험은 없었습니다. 뭐, 무인으로선 완전히 끝난 셈이죠.”
“으음……!”
여러 의미가 담긴 침음이 흘러나왔다.
남궁운은 복잡한 눈으로 정천을 응시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정천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염세적이고 날이 선 정천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오히려 이제는 동정심마저 드는 것이었다.
“내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봄세. 자네 같은 인재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됐습니다. 이젠 무인 노릇은 도무지 못해 먹을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받은 포상금으로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낼 생각입니다.”
“으음.”
남궁운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용검대의 제삼조장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제갈현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뭔가 달리 바라는 것은 없는가? 되도록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네만.”
“글쎄요…….”
정천의 시선이 문득 칠삼에게 향했다. 그의 입가에 속물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아까 보니 문지기 노릇이 꽤나 편해 보이더군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니 완전히 날로 먹는 일 같았습니다만.”
제갈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문지기…… 말인가?”
“예. 무엇이든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죠?”
“들어주도록 하게.”
남궁운이 말을 자르듯 끼어들었다. 제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운은 복잡한 눈으로 정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네.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네만, 맹주의 자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군. 후에 기별을 할 터이니 그동안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뒤이어 제갈현이 말을 이었다.
“자네를 청룡문의 문지기로 배속시키겠네. 저자에게 숙소를 안내 받게나. 금전 백 냥 역시 그곳으로 보내도록 하지.”
“되도록 빨리 보내 주셨으면 좋겠군요.”
“알겠네. 그럼…….”
남궁운과 제갈현, 두 사람은 몸을 돌려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마치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삽시간에 멀어져서는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칠삼은 그 신기(神技)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그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한 절정의 경신술이었다.
정천은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보는가?”
남궁운의 물음이었다.
주변의 풍광이 빠르게 두 사람을 스쳐 가고 있었다. 야생마가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였는데,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렸다.
이는 제갈현 역시 마찬가지.
두 사람은 고요 속에 있는 것처럼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운 무인을 잃은 심정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설마 십 년 사이에 사람이 저리 변해 버릴 줄이야.”
“지옥도를 경험한데다 내공까지 모두 소실했으니까요. 저렇게 자포자기를 하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만.”
그러나 남궁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을지도 모르네.”
“그건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 아닐까요? 그의 몸 상태를 직접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군.”
분명 그러했다. 정천의 단전은 거의 소실되어 버린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닌 신안(神眼)을 지닌 남궁운 본인이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었다.
칼로 난도질당한 것 이상으로 큰 부상이나 다름없는 상태. 무인에게 있어 단전의 파괴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제갈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체 그곳, 진마동 내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남궁운이 제갈현을 돌아봤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이는군. 최고의 무인들이 죽거나 완전히 망가져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
제갈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맹주의 말대로다. 진마동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만큼, 그곳에서 있었을 일 역시 유추 가능한 그였다.
진마동은 괴인들과 마수들의 본산이었다. 비영대의 보고에 따르면 그곳에서부터 끝도 없이 괴인들이 쏟아져 나왔었다고 했다.
내부에선 필시 엄청난 혈투가 있었을 터.
남궁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지옥도를 헤치고 돌아온 사내일세. 반쯤 폐인이 되어 돌아온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
“…….”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을 붙여 그를 감시하도록 하게. 뭔가 특이한 사항이 있으면 즉시 내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 * *
“자.”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뗀 정천이 칠삼을 돌아보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선배.”
“서, 선배?”
“나보다 문지기 노릇을 오래 했으니 선배가 아니겠어? 연배도 나보단 많아 보이고.”
“으으음.”
확실히 그건 그랬다. 정천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십대의 청년이었으니까. 실제 나이를 가늠해 봐도 오십대의 칠삼보단 어릴 터였고.
연배 많은 선배한테 반말지거리를 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따져 봐야 나만 손해겠지.’
내심 침음을 뱉은 칠삼이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기껏 얻은 직책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문지기라니…….”
“이런저런 사람을 구경할 수 있으니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재미라니…….”
“게다가 예쁜 처녀라도 지나간다 치면 수작이라도 부려 볼 수 있을 테고.”
내키는 대로 말을 뱉는 정천. 칠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에라, 용검대는 무슨.’
지금의 정천을 보자니 용검대에 대한 호기심도 쑥 사라지는 듯싶었다. 물론 본래부터 저런 수준 미달의 인간은 아니었겠지만…….
“으, 피곤하군. 어쨌든 안내나 해 달라고. 철 쪼가리라도 백 개씩이나 끌고 오니 힘들어 죽겠군.”
“…….”
칠삼은 한숨을 쉬고서 걸음을 떼었다.
“따라오게. 청룡문에 대해 대강 설명해 줄 테니.”
“어, 그건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 피곤해서 일단은 잠부터 자고 싶은데.”
“어휴!”
한숨을 토한 칠삼이 졌다는 듯 소리쳤다.
“마음대로 하게!”
두 사람이 떠난 도화원에 바람이 불었다.
정천이 짚고 있던 버드나무의 이파리가 바람 속에 흐드러졌다.
아마 칠삼이나 남궁운, 제갈현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화들짝 놀랐으리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들이 새하얗게 죽어 있었던 것이다.
버드나무 줄기엔 흉터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정천이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