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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五章 적멸(寂滅) (5)
혈오는 좋은 이용물이었다. 혈루마옥 마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혈오만 있으면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
혈루마옥 무인들은 거의 대부분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상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질서라는 것이 있다.
누미가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절대적인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혈오의 힘이 크다.
또한 혈오는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다.
혈오는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꿈 많은 소녀를 단 일 년 만에 요녀로 둔갑시켰다. 맑고 싱싱하던 마음에 저주와 증오를 심어주었다.
기이한 것은…… 이상하게도 혈오에게는 모성애(母性愛)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혈오를 대하면 마치 남의 자식을 보는 것처럼 무덤덤하다.
아니, 남의 자식도 예쁠 때가 있다.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헌데 혈오에게는 그런 감정마저 일어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싫다.
그런 감정은 혈오가 죽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비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이제부터는 혈루마옥 무인들을 힘으로 통제해야 하는구나, 약간 귀찮게 생겼구나 하는 느낌만 든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녹천 무인과 증평 여인이 누미에게 말했다.
누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고 싶은 자는 가도 좋다는 뜻이다.
사실, 그녀에게는 이들이 필요 없다.
혈루마옥 무인들이 대단히 착각하는 게 있다. 그들이 그녀를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보호막을 떠나면 저들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
이 세상에 저들만 한 무공을 지닌 자가 없단 말인가?
검왕만 해도 그렇다. 검왕은 저들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무공을 지녔다.
그래도 가고 싶다면 가라.
혈루마옥 출신이라서 어쩔 수 없이 따르던 자들은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진정 무림에 야욕이 있는 자들은 남을 것이다.
무림을 피로 씻을 준비가 된 자들만 있으면 된다.
어중간한 자들은 모두 가라!
물론 저들을 힘으로 억누를 수는 있다. 떠나겠다는 자들을 한두 명쯤 죽여버리면 그다음에는 떠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어디에 쓰겠나.
“갈 거야?”
“거기로 돌아가기는 싫어. 그런 골짜기에서 또 살라고? 앓느니 죽겠다.”
“나도 거기로는 안 가. 하지만 여긴 떠날 거야.”
“어디로 갈 건데?”
“여긴 촌장님도 안 계시고, 녹천주님, 증평주님. 참 존경하던 분들이신데 모두 돌아가셨잖아. 그것도 남의 손에 운명하셨나? 세 분 모두 우리 손에 가셨어.”
“음!”
“여긴 싫어.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괜찮은 데 있으면 눌러앉을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혼자 떠난 사람도 있고, 남녀가 짝을 이뤄 떠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더기를 이뤄 떠나기도 했다. 서로가 아버지, 어머니, 자식임을 알고 있으니까.
남는 자들, 떠나는 자들…… 그 어느 쪽도 관심이 없다.
무림에 대한 관심도 없다. 중원인들은 혈루마옥 사람들이라고 하면 전부 살인귀로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누미라고 하면 악마 중의 악마로 여긴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을 많이 하지 않았다.
혈루마옥은 적벽검문을 무너트렸다. 구대문파 상승 고수들을 제거했다. 유지자문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 밖에 또 무엇을 했나?
혈루마옥 무인들이 직접 중원에서 무공을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 헌데도 ‘혈루마옥’ 하면 악마를 떠올린다.
누미도 중원에 관심이 없다.
적벽검문과 혈루마옥, 이 둘만이 그녀가 아는 세상의 전부다.
그녀가 죽이고 싶은 사람들은 이 두 세계 속에 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적벽검문이 무너지는 순간, 그녀의 복수심도 절반 이상은 소멸된 셈이다.
힘이 생기니 무림을 지배하고픈 욕망도 있다.
아니, 이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목표마저 버리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무림을 지배한다.
그따위 것을 지배해서 뭐가 달라질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복하고 볼 일이다. 헌데,
츠으으읏!
그녀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순간, 바로 그 기운이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도 눈치챘다.
‘검왕! 검왕이다!’
‘참 질긴 사람.’
검왕을 보자 제일 먼저 일어난 생각이다.
검왕을 완벽하게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너무도 멀쩡하지 않은가.
누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적벽검문 참선동이 붕괴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대체 목숨이 몇 개야?”
“참선동에는 비밀이 있지.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러니까 마공관에서 처음 본 날, 그때 이미 참선동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거지? 적벽검문 몰락부터 지금 상황까지.”
“정사대전만 제외하고 거의.”
“이렇다니까. 모두 이 사람들 손아귀에서 놀아난 거라니까. 호호호! 솔직히 당신 만나면 촌장을 죽인 계획, 아주 멋있었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내가 기련산에서 누산을 잡았을 때 그 사람, 왜 안 죽인지 알아?”
“…….”
“죽이려고 하면 내가 당할 것 같더라고. 호호호! 그때만 해도 내가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뭐라고 할까? 입으로는 큰소리쳤지만 속으로는 찔끔 했다고 해야 하나? 좌우지간 누산 그 사람 그때부터 경계 대상이었지. 헌데 결국은 그 사람도 죽었네?”
“이대로 떠나줬으면 좋겠다.”
검왕이 뜬금없이 말했다.
“지금 그 소리…… 내게 한 거야? 떠나라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해서.”
“맞게 들었다.”
“떠나라? 호호호! 싫다면?”
검왕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언제나 그런 식이지. 다음은 뭐야? 검을 뽑을 차례인가? 저 죽을 줄 모르고?”
스릉!
검왕이 검을 뽑았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검왕은 누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누미는 촌장과도 일전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혈루마옥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검왕이 누미에게 검을 들이댄 것은 매우 무모해 보인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계획은 사람이 세우는 거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린 거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
한 가지, 적벽검문의 계획에서 한 가지 누락된 게 있다.
누미 말이 맞다. 누미가 이토록 강해질 줄은 몰랐다. 이 부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예상은 촌장과 혈루마옥의 동사(同死)다. 촌장이 혈루마옥을 정리하고, 그 역시 죽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검왕이 검을 들어 올렸다.
질 줄 알면서, 죽을 줄 알면서, 패할 것이 뻔한 상태에서도 검을 들이대는 것…… 적벽검문이니까 가능하다.
스릉!
누미도 검을 뽑았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할 때부터, 그 기운이 검왕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때부터 검을 준비했다. 잘 쓰지 않는 검이지만 상대가 검왕이니 검을 가져왔다.
검왕을 검으로 죽인다.
스르르르릇!
검왕의 검에서 빨간 기운이 번져 나왔다.
검왕의 유기는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그의 검광이 빨간색인 이유는 근본 무공으로 혈영마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적벽검문 무공이 아니라 마공을 사용하고 있다.
살심(殺心)을 극도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런 사람에게 뭘 더 기대하겠다고. 자신에 대해서 손톱만큼도 생각해주는 바가 없는데……. 풋! 이런 자가 첫사랑이었나. 차라리 죽은 남편이 더 인간적이지 않았나.
그래, 너에게는 내가 이용물에 불과했단 말이지.
쉬이이잇!
그녀가 신형을 쏘아냈다.
일검에 찔러죽이리라. 일검에 심장을 관통시킬 것이다. 검으로 방어를 할 것이나, 검을 분질러 버릴 것이다. 또 다시 되살아나는 일이 없도록 완벽하게 목을 쳐버릴 것이다!
쒜에에에엑!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검왕은 천천히, 그러나 전력을 다해서 검을 쳐들었다.
누미 예상대로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누미의 검을 일차로 막아내고, 틈을 봐서 공격하겠다는 심산이다. 아니면, 누미의 검력(劍力)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볼 생각일 게고.
‘끝이야!’
쒜에엑! 까앙!
하얀 검광이 붉은 검광을 반으로 갈랐다.
누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촌장을 꺾은 검이기에 그래도 약간 긴장했는데…… 생각보다도 형편없다. 유지자문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촌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검이다.
“겨우 이따위로!”
쒜에에엑! 까앙! 꽈지지직!
붉은 검이 부서지면서 검편이 분분히 비산했다. 그리고 검왕의 얼굴을 향해 철검이 날아간다. 순간,
슈웃! 푹!
갑자기, 느닷없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 무엇인가가 옆에서 번쩍하더니 옆구리를 파고든다. 곧이어 극심한 통증이 일어난다.
“큭!”
누미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옆을 돌아봤다.
유화아! 그녀가 검을 들고 있다.
왜? 왜 이 여자를 보지 못했지? 왜 이 여자의 투살진기를 감지하지 못했지?
그녀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검왕을 쏘아봤다.
스읏!
유화아가 누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검왕이 손잡이만 남은 검을 버렸다.
누미는 그제야 자신이 왜 유화아를 인지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검왕이 가려준 것이다. 자신의 검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죽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유화아를 가려주었다.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어차피 검왕의 무공으로는 전력을 다해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투살진기를 전력으로 삼겠다는 생각…… 가장 효율적인 공격방식이다.
쉬잇! 퍼억!
유화아가 마지막 검을 내리쳤다.
유화아는 화화사령공을 목격했다.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그리고 그 무공이 적벽검문에만 전해져 온다는 것도.
적벽검문 문도를 죽일 때는 화화사령공을 펼칠 수 없게끔 완벽하게 죽여야 한다.
“내가 잔인했나요?”
유화아가 검왕에게 물었다.
검왕은 망연히 하늘만 쳐다봤다.
* * *
무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혈루마옥 무인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혈루마옥으로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 혹시나 해서 혈루마옥을 찾아본 사람이 있지만 혈루마옥의 저주는 완벽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혈루마옥은 어느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고, 나올 수 있는 평범한 절곡으로 변했다.
그곳에 혈루마옥 무인들은 없었다.
검왕도 사라졌다.
적벽검문은 황폐해졌고, 그 누구도 재건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잡초로 덮였고. 한때나마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지워져 버렸다.
유가는 건재했다.
허나 강남제일미녀 유화아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가장이 어려울 때도 있었고, 건승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도 유화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검성과 혈천성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검성이 무너졌고, 혈천성도 무너졌다. 두 곳을 2중심으로 뭉쳤던 무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제일령도 사라졌다.
제일령이 남아있었다면 검성이 그토록 쉽게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나…… 귀선부가 사라진 검성은 지도자가 없었다. 무림을 짓누를 힘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점은 혈천성도 마찬가지다. 십마만 모습을 보였어도…….
십마가 존재하지 않는 혈천성은 모래성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혈천성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오늘도 소림사에서는 범종이 울린다.
오늘도 무당산에서는 도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처참했던 싸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몇몇 사람의 화상(畫像)만 걸려있을 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나?
검왕이 쳐다봤던 하늘도, 누미가 쳐다봤던 하늘도, 촌장이 쳐다봤던 하늘도…… 부와 힘과 권력을 모두 가졌던 누산이 쳐다봤던 하늘도 똑같은 하늘일지니.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