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224화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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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五章 적멸(寂滅) (4)

누미는 혈루마옥을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통제력은 혈오를 통해서 나온다.

현재 혈루마옥 무인들은 중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혈루마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게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간다.

헌데…… 어느 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완전히 끊어진 것 같은 혈루마옥의 저주가 언제 그들을 잡아챌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혈오를 주시한다.

여차하면, 혈루마옥의 저주가 돌아올 것 같으면 즉시 혈오를 통해서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할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혈루마옥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

혈루마옥 무인들은 항시 불안하다.

누미 곁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누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증평도 이런 부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 혈루마옥 근처에만 머물렀다.

혈오가 없는 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자유롭다. 다만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혈오는 여분의 목숨이나 다름없다.

“혈오는?”

“누님들이 보살펴서 그런지 한결 조용해.”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녹천은 무엇이고 증평은 무엇인가. 모두가 혈루마옥 가족들이지 않은가.

그들이 남자는 남자끼리, 여인은 여인끼리 편을 갈랐던 것은 혈루마옥 저주 때문이다. 서로 수련하는 무공이 극성인 탓이며, 음양의 조화를 깨트린 무공 때문이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여인은 여인의 무공을 수련할 수 있다. 사내들 역시 양강지공을 수련할 수 있다.

혈루마옥의 저주가 풀린 이상, 서로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

혈오는 사내보다는 여인이 돌보는 게 아무래도 낫다. 그래서 증평 여인들이 돌본다.

녹천 무인들은 혈오를 보호한다.

혈오는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제이령이 혈오를 죽이고자 했을 때, 아니 그것보다도 누강이 혈오에게 접근했을 때……. 누강에게 다른 마음이라도 있었다면 혈오는 죽었을 것이다.

혈오를 삼중, 사중으로 감싼다.

그들의 경계망을 무시하고 혈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미가 유일하다.

사박! 사박!

누미가 옷자락을 끌면서 힘없이 걸어왔다.

적수가 사라진 땅이기에 긴장이 풀린 것일까. 아니면 피로가 한꺼번에 엄습하는 것인가.

누미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슷!

녹천 무인이 작은 기척을 보냈다.

경계를 잘 서고 있다. 혈오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우리가 있는 한, 혈오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허나 누미는 그들이 흘린 기척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박! 사박!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첫눈 내리는 소리만큼이나 부드럽다.

“열어.”

누미가 문 앞에서 짤막하게 말했다.

문은 안쪽에서만 열 수 있다. 바깥 고리는 모두 제거했다. 누강이 침입한 이후에 만든 안전장치다.

철컹!

문이 열렸다.

혈오까지 가기 위해서는 문을 두 개나 더 지나쳐야 한다.

척!

녹천 무인들이 누미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누미는 그들 또한 쳐다보지 않았다.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힘없이 타박타박 걸었다.

“열어라!”

누미가 두 번째 문에 닿기도 전에 녹천 무인이 말했다.

철컹!

저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미가 이토록 피곤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누미를 편하게 해주고자 한다.

누미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혈오가 누미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혈오를 돌보던 증평 여인들이 혈오를 침상에 눕힌 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누미는 다소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피곤에 찌든 몸짓으로 혈오에게 다가갔다. 혈오를 보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랑을 담은 눈으로…….

침상 앞으로 다가서서 혈오를 안아 올렸다. 그때,

“아아아앙!”

혈오가 느닷없이 울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 눈동자는 불을 토할 듯이 새빨갛게 변색되면서, 똥오줌까지 지렸는지 매우 구린 냄새를 풍긴다.

“앗!”

쒜엑! 쒜에에엑!

증평 여인들이 소리 없이 들이쳤다.

문밖에 있던 녹천 무인들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누미가 아니다! 누미가 아닌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퍽! 퍽퍽퍽!

녹천 무인보다 증평 여인들이 한 수 빨랐다. 그녀들이 훨씬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누미를 칠 수 있었다.

퍼억!

가격당한 누미가 훨훨 날아가 떨어진다.

누미의 손에서 벗어난 혈오는 허공으로 둥실 띄워졌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증평 여인에게 안겼다.

“괜찮아?”

증평 여인들은 나가떨어진 누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미 녹천 무인이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침입자는 그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보다는 혈오의 안위가 염려된다.

“아!”

혈오를 안아 든 여인이 탄식했다.

혈오가 축 늘어진다. 손도 발도 힘없이……. 고개마저 툭 떨군다.

“주, 죽은 거야?”

“…….”

“아!”

증평 여인들은 탄식했다.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누미…… 그녀가 죽었다. 아니, 누미는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죽은 누미를 쏘아본다.

“누구냐?”

“비형은잠이라는…….”

녹천 무인이 말을 잇지 못했다.

비형은잠은 나이가 여든이 넘은 노인이다. 은은광한기라는 마공을 사용하는 마두다.

그런 자가 누미로 변복하고 침입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녹천 무인도, 증평 여인들도…… 할아범이 여인으로 변복했는데 알지 못했다.

비형은잠은 즉사했다.

은은광한기로 혈오의 내부를 박살 내는 순간, 그의 내부도 증평 여인들의 손길에 박살 났다.

증평 여인이 혈오를 꼭 안은 채 내놓지 못했다.

물론 누미에게는 이미 혈오가 죽은 사실을 말했다. 사실을 말하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그러나 차마 혈오를 내밀 수가 없어서 품에 안고만 있다.

누미가 냉랭한 눈으로 혈오를 쳐다봤다.

“그래도 죽음이 빨랐습니다.”

증평 여인이 말했다.

이런 말이 누미에게 위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헌데,

“소문내지 마라.”

누미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식이 죽었는데도 냉담했다. 혈오의 죽음, 자식의 죽음을 말하는 대신 ‘입 다물라’는 말부터 했다. 눈빛도 차가웠다. 죽은 혈오를 보는 눈에 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리 혈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해도 열 달이나 배 속에서 함께 한 아이인데…….

“시신들은 치우고, 너희는 여길 계속 지켜. 혈오가 죽은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촌장님, 아무리 그래도…….”

파팟!

누미에게 항변을 하던 여인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누미의 눈가에 찬바람이 일어난다. 죽음의 기운이 어린다. 그리고 이 느낌은 진정이다. 누미가 살의(殺意)를 떠올렸고, 한 마디만 더 내뱉으면 죽일 게다.

하기는…… 혈오를 지키지 못한 죄, 백번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

누미가 냉랭하게 말했다.

“내 곁을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나가라. 나가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 단,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나가라. 숨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나가.”

유계판서가 점을 쳤다. 그리고 말했다.

“죽었다!”

“확실해?”

“내 점괘는 언제나 확실했지. 크큭!”

“비형은잠은 기어코 돌아오지 못했네.”

모두들 절곡을 쳐다봤다.

비형은잠이 안으로 스며든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비형은잠은 늘 은신술을 펼친 채 움직이는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늘 그 자리에 있겠거니 했다.

비형은잠이 입고 있던 옷을 발견한 후에야 그가 남몰래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십마가 무엇을 할 수 있나? 혈오를 죽이는 것밖에 못 한다. 헌데 그것도 불가능하다. 녹천과 증평이 혈오를 휘감고 있는 한,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누강은 혈오를 죽였어야 한다.

비형은잠이 그 일을 한 것이다.

“비형은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젠 우리도 쫓기는 신세야.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천살마노가 투덜거렸다.

하오문이 누미에게 충성하고 있다. 검성 제일령이 누미의 충견이 되었다.

그들은 십마를 최대 적수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이 검성 소속이었을 때나 누미에게 속해 있을 때나 십마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

“쫓아오든 말든 이놈의 세상, 더 이상 미련 없어.”

백화요녀가 활짝 웃었다.

검왕은 붕멸(崩滅)에서 살아오지 못했다.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새워가며 기다렸고, 혹여 무너진 잔해 속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땅도 파보았지만 검왕은 발견되지 않았다.

붕멸은 전체적으로 이루어졌다.

검왕이 빠져나갈 다른 통로는 없었다. 동혈 자체가 연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안이 꽉 막힌 구조였다. 그러니 앞쪽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은 삶을 바랄 수 없다.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누미를 칠 수는 없다. 그들 전부가 합공을 펼쳐도 누미 한 사람을 상대하지 못한다. 옛날, 검왕에게 쥐어 터졌을 때처럼 가차 없이 무너질 게다.

누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혈오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 아직 갓난아기도 벗어나지 못한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저들을 혈루마옥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혈루마옥의 저주가 다시 도진다는 전제하에.

물론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저주가 풀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혈오를 괜히 죽인 게 된다. 비형은잠과 혈오는 개죽음을 한 게다.

“그럼 우리도 여기서 헤어지지. 서로 같은 운명을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스르륵!

흑포사추가 어둠 속에 몸을 묻었다.

“아! 저 사람.”

백화요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이 무림 대세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밀렸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게 있다. 적어도 누미의 충견만큼은 척살할 수 있다.

흑포사추는 제일령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

그가 입을 열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흑포사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다.

“내 힘이 약간 필요할 거야.”

쉬이이잇!

백화요녀가 흑포사추를 뒤쫓아서 신형을 쏘아냈다.

“그럼 나도. 당신들 셋은 늘 같이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도 같이 움직이도록 하고. 저승에서 봅시다.”

유계판서가 백화요녀의 뒤를 쫓았다.

강신천마, 십조잔괴, 천살마노…… 그들은 제이령의 수족이었다. 제이령과 함께 혈루마옥을 떠받들던 사람들이다. 죽은 삼첨수괴와 같은 배를 탔었다.

저들도 그런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저들은 세 사람이 중원인이라는 사실도 안다. 한때는 혈루마옥 편에서 움직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있다. 누미의 충견, 하오문주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지!”

십조잔괴가 먼저 신형을 쏘아냈다.

그들은 지켜보는 눈은 없다. 그들에게 누구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없다. 마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 중원을 구원할 마음 같은 게 있을 리도 없다.

그들은 지금 검왕이 살아있다면 했을 것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왕이라는 자에게는 깊은 정이 들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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