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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五章 적멸(寂滅) (3)
스릉! 스릉!
검왕과 누산이 검을 뽑았다.
그들에게는 검이 필요없다. 손에 잡히는 모든 병기가 검을 대신한다. 하지만 검을 뽑는다.
그들은 적벽검문 문도다.
적벽검문 사람은 죽더라도 검에 죽어야 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게 검을 맞는 것은 죽는 자에게도 영광이다.
“내가 어떤 무공을 수련했는지 아느냐?”
누산이 파랗게 빛나는 장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누산의 장검은 이제 막 만들어 낸 듯 쇠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맞다. 이제 막 만들어낸 철검이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청강장검이다. 검왕과 일수 겨룸을 위해서 일부러 산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무유검(撫柔劍)이라고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
“적벽검문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이야. 무유검을 수련하면 제법 강한 것처럼 보이잖나. 또 내 나이에 내 경륜에 그 정도는 수련해줘야 하고.”
“보는 눈들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무공을 수련하셨습니까?”
“천붕(天崩).”
검왕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응을 하려고 해서 반응한 것이 아니다. 천붕이라는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적벽검문에 천붕이라는 검법은 없다.
혈루마옥에도 유지자문에도 천붕이라는 검법은 없다.
정도와 사도, 마도 중원 전역을 뒤져봐도 그런 검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산이 말한 천붕은 일종의 자신감이다.
허나 누산 같은 사람이 자신있게 천붕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 말을 믿어야 한다.
누산의 검에는 하늘을 무너트리는 괴력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만한 검을 지니셨다면 촌장이나 유지자문을 이용할 필요도 없지 않았습니까.”
“이용할 필요는 없었지.”
“……”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지.”
“……”
“허허허! 무공에 ‘절대’가 어디 있더냐. 내 무공에도 허점은 있을 터, 어느 누군가가 내 무공을 연구하고 파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밤잠인들 이룰까. 그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한다면.”
“촌장이나 유지자문 문주가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있겠지. 하지만 내가 염려한 사람은 네 명뿐이야.”
“네 명…… 상당히 많았군요. 촌장과 유지자문 문주만 대상인 줄 알았습니다.”
“너와 문주도 포함시켜야지.”
“그렇습니까?”
“적벽검문 문주…… 후후! 사형(師兄)…… 참 오랜만에 말해보는군. 사형이라…… 늘 문주라고만 불러서 말이야. 사형은 그런 수가 아니면 스스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그건 너도 알고 있을 터이고…… 후후후! 상수가 하수에게 죽는 일이 어디 흔하던가. 감히 녹천주 따위가 문주를 죽일 수 있던가. 문주가 스스로 죽지 않는 한…… 나도 힘들었을 거야.”
“결국은 목적이 아버님이었습니까?”
“아버님은 무슨.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처지에.”
파르르르!
검왕의 검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천축 무공인 요마랍기가 검에 실렸다. 벌새의 날갯짓처럼 작은 떨림이 일어나고 있다.
검신에는 붉은 기운이 일렁거린다.
이것 역시 적벽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잔양화소다.
전신의 모든 기운을 일시에 불사른다. 내공도 불태우고, 원정(元精)도 끌어내고, 잔기(殘氣)마저 한 줌 남김없이 끌어내어 일시에 폭멸시킨다.
“검성에 있을 때 별호가 군자검이던가? 나에게까지 정직하게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검왕의 검법이 환히 보인다는 말이다.
스륵!
검왕의 검에서 은은한 노을빛이 번졌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화화사령공을 세 번씩이나 행할 때는 미친놈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더니…… 네 검을 보니 해볼 만하구나. 하하하!”
누산이 검을 들어올렸다.
누간의 청강장검에서 푸른 기운이 풀풀 피어났다.
누산 역시 유기를 사용한다. 촌장이 무지개 빛을 발산하고, 검왕이 노을빛이라면 누산은 푸른빛이다.
아니다. 누산의 푸른빛은 곧 투명해졌다.
“아!”
검왕이 탄식했다.
무기가 유기를 이루었고, 유기가 다시 무기로 돌아간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누산은 무공에만 전념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상인이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 세상 안 가본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언제 이토록 고강한 무공을 수련했는가.
자신은 화화사령공을 세 번이나 썼다.
촌장은 절곡이 지닌 힘에 힘입어 중원인들보다 세 배, 네 배의 혜택을 입었다.
유지자문 문주는 평생을 무공에만 전념했다. 다른 것은 일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세상에 대한 미련도 두지 않고, 오직 무공 하나에만 전념했다.
누산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
“궁금하느냐?”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루마옥의 선물이다. 혈루마옥을 붕괴시키면서 나 역시 혈루마옥 사람이 되고 말았지. 후후후! 혈오가 없다면 나도 중원을 거닐지 못할 몸이 된 것이야.”
그렇구나. 누산의 무공은 원래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촌장을 염려해야 했다. 유지자문 문주도 염려했다. 누구보다도 아버님, 적벽검문 문주와 자신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야망은 컸다.
허나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
누산이 옛날에도 지금과 같은 무공을 지녔다면 적벽검문을 단신으로 무너트렸을 게다.
“하늘도 참……”
검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누산에게 덮쳐갔다.
“이렇게 환히 보일 수가. 허허!”
누산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검왕은 혈영마공을 사용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변해서 공격을 펼쳤다. 검에서는 은은한 노을빛이 연신 번져나왔다. 검초는 눈부시게 펼쳐진다.
누산은 모든 공격을 여유있게 피했다.
빠름에서 누산이 한 수 앞선다.
패력에서 누산이 한결 강한 우위를 보인다.
검왕이 펼치는 변화는 모두 간파되는 반면, 누산의 움직임은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릿하다.
스릇!
한 순간, 검왕의 검이 사라졌다.
요마랍기가 검왕의 검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검왕이 무엇을 휘두르기는 하는데…… 괜히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없군. 이렇게 환히 보이니.”
스읏!
누산이 신형을 비틀면서 검왕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푸욱!
누산의 검이 정확하게 검왕을 파고들었다. 가슴과 가슴 사이를 완벽하게 관통했다.
“자네를 이렇게 쉽게……”
누산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얼굴에 피어오르던 미소도 감쪽 같이 사라졌다.
검이 허공을 찌르고 있다. 분명히 검왕의 가슴을 찔렀는데, 손에 묵직한 감촉이 전달되었는데……
푹!
짧은 파육음이 터졌다.
검은 등 뒤에서 찔러왔다. 그리고 심장을 반으로 갈랐다.
“이게 뭐…… 지?”
누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쳐다봤다.
“요마랍기입니다.”
검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요마랍기는 검을 가려준다. 안개로 감싸듯이 흐릿하게 가려준다. 허나 검왕은 검을 가리는 것을 넘어서 몸 전체를 가려버렸다. 환영을 만들어냈다.
“분명히 찔렀는데……”
“잘 가십시오.”
“허허! 벌써 가란 말인가.”
누산이 몸을 돌려세웠다.
누산의 가슴에는 검왕의 검이 꽂혀 있다. 하지만 그는 아파하지 않는다.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검 같은 것에는 찔린 적이 없다는 듯이 편안해 보인다.
“이혈역공(移穴逆功)!”
적벽검문 무공 중에 이혈역공이라는 것이 있다. 일시로 혈을 옮기는 수법으로…… 이혈역공이 극성에 이르면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치명적인 요혈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산은 검왕을 찔렀다. 하지만 허공을 쳤다.
검왕은 누산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심장이 아니라 치명적이지 않은 곳을 찔렀다.
둘 다 이혈역공이다. 요마랍기다.
스읏!
누산이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검왕에게 던져주었다.
검왕이 자신의 검을 받았다.
“힘으로 해볼까? 힘을 보고 싶군.”
스읏!
검왕은 대답대신 검에 진기를 실었다.
잔양화소가 일어난다. 전신에서 끌어낸 모든 진기가 검에 모인다. 은은했던 노을빛이 새빨갛게 변해간다. 마치 혈영마공을 극성으로 일으킨 것처럼.
누산도 진기를 검에 집중시켰다.
파란 빛이 일렁거린다. 온 세상에 파란색으로 물든 것 같다.
쒜에엑! 쒜에엑!
두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한 점에서 우뚝 멈춰섰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하지만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쇠와 쇠가 부딪쳤는데 아무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우르르르릉! 꽈아아아앙!
천둥번개가 몰아친다. 동혈이 무너지고, 백팔계단이 모래성처럼 흩어진다.
“헉!”
“이런!”
십마는 분분히 신형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동혈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마치 화약 십만 근을 터트린 것처럼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검왕이 저곳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누산이 눈을 끔뻑거렸다.
“화화사령공입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사형께서는 세상에서 검을 펼쳤습니다. 세상의 검과 지옥의 검이 부딪쳤는데, 누가 이기겠습니까? 힘을 떠나서 생사의 문제입니다.”
“그런가……”
누산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가…… 누산은 ‘그런가’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누산은 검왕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말은 산 사람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검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무공으로도 누산을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또 한 번 화화사령공을 펼쳤다. 싸우는 도중에, 죽음을 택했다.
혈맥을 끊었다.
촌장이 그랬듯이 자신 역시 심맥을 절단시켰다. 스스로.
죽은 것이다. 죽어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에 누산의 검을 봤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죽은 자의 눈에는 산 자의 모든 것이 보이기에.
누산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우르르릉! 우르르릉!
동혈이 무너지고 있다.
이미 출구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누산과 검을 부딪치면서 만들어낸 공명(共鳴)이 동혈 전체를 무너트리는 중이다.
그는 누산 곁에 앉았다.
사실 움직일 기력이 없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다. 모든 힘은 잔양화소에 실려나갔다.
스르륵!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꽈르르릉! 꽈아아아아앙!
수련동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이건……”
십마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왕은 수련동이 무너지면서 함께 묻히고 말았다.
수련동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검왕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니, 어떤 사람도 나오지 못했다.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조차도.
검왕은 죽었나, 살았나.
십마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검왕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지금 상황을 봤다면,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라면 안에 들어간 사람이 살아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한다.
“검왕이…… 왜 이곳에 온 거지?”
한참만에 백화요녀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검왕이 누구를 만났는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림사를 단번에 바꿔버릴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막연하게 깨닫고 있다.
그들은 멍하니 무너진 동혈을 쳐다봤다. 아니, 무너진 야산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