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222화 (222/225)

# 222

第四十五章 적멸(寂滅) (2)

걷고 또 걸었다.

그 먼 길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은 텅 비었고, 육신에서는 맥이 빠지고, 두 다리는 힘이 풀려서 휘청거린다.

산을 넘고, 들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넌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어서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저 앞에서 찍어놓은 발걸음을 쫓아서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귀찮다.

산도 지겹고, 하늘도 지겹고, 구름도 덧없다.

사랑은 무엇이고, 야망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무공을 배웠고, 누구를 위해 죽는가. 왜 죽는가. 과연 중원이란 곳이 죽을 가치나 있는 곳이던가.

걷는다. 걷는다.

“음…… 여기가…….”

십조잔괴가 중얼거렸다.

검왕은 길을 오는 내내 곡기를 끊었다. 음식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고 내처 걷기만 했다.

검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헌데 답답한 것이……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으면서 왜 그냥 물러섰느냐는 것이다.

제이령과 누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분명한데…… 허면 누미와 싸웠어야 하지 않나. 누미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설혹 상대가 안 된다고 해도 싸워야 하지 않나. 왜 싸우지 않고 물러섰나.

겁이 나서? 검왕에게 그런 말은 모욕이다.

검왕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그리고 곡기조차 끊고 휘청거리면서 걸어온 곳이 바로 그의 사문이다.

적벽검문!

적벽검문은 폐허가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적벽검문이 무너진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살았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텐데, 핏방울 한 점 남아있지 않다.

세월은 모든 것을 씻어낸다.

그러나 십마는 잡초밖에 남지 않은 곳에서 격렬했던 싸움의 흔적을 찾아낸다.

“음!”

백화요녀가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부서진 대문을 보고 있다.

박살이 나 있는 대문은 대문을 걷어찼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말해준다.

“이건 칼이군.”

십조잔괴가 반듯하게 잘려진 바위를 쓰다듬었다.

칼을 어떻게 썼기에 바위가 무처럼 잘려나갔나.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절단되었다.

“여기서 녹천도 절반이 희생됐다고 했지? 그럼 적벽검문도…… 아! 기분 이상해지네.”

좀처럼 말이 없던 흑포사추도 한 마디 거들었다.

지금 그들은 절세 무공의 현장을 보고 있다. 절세 무공들이 남긴 자국을 본다.

십마 또한 절세 무인들이다.

그들은 중원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이다. 그렇기에 자국에 남은 무공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난 이쯤에서 사망했겠군.”

십조잔괴가 문에서 몇 걸음 걷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적벽검문에 남아있는 자국들은 그토록 지고하다. 하나같이 절묘 절륜하다.

그들은 연무장이었던 듯싶은 넓은 마당에 앉았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넓은 마당을 휩쓸고 지나간다.

한때는 중원 최고의 강자들이 거닐었을 땅에 그들이 앉아있다. 지금은 잡초만 자라있지만.

검왕은 안으로 계속 걸어갔다.

연무장을 가로지르면 백팔 층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사십구 동혈(洞穴)이 나타난다.

내공 수련을 하기 위한 장소다.

누구든 내공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백팔 층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물론 내공수련은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다. 방 안에서도 할 수 있다. 연무장에서도 할 수 있다. 어디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적벽검문은 굳이 이런 장소를 마련했다.

백팔 층을 오르면서 마음을 하나씩 떨군다.

미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버린다. 쾌락을 떨구고, 눈물도 버린다. 모든 감정을 하나씩 버린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

체험!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

장님은 이 세상에서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장님이 아는 세상은 장님 스스로 만들어 낸 세상이다. 제 아무리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장님에게 이 세상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세상의 실체를 정확히 알려줄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눈을 떠라! 직접 봐라!

사십구 동혈로 오르는 백팔 개의 계단에는 그런 의미가 깃들어있다.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계단을 올랐다.

정말로 눈을 뜨고 오른 사람도 있고, 눈을 떠야 한다는 일념에 두 눈 부릅뜨고 오른 사람도 있다.

눈을 뜬 사람과 뜨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없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는 오직 본인 당사자밖에 모른다. 눈을 뜬 당사자가 눈을 떴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은 모두 장님이니까.

적벽검문에는 많은 사람이 눈을 떴다.

그들이 오르는 백팔 계단과 눈을 뜨지 않은 사람이 오르는 백팔 계단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참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계단이다.

검왕이 그런 계단을 오른다.

십마는 계단 아래에 머물러 있다. 계단에서부터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다. 그들도 백팔 계단의 신성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적벽검문은 무너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살아있는 문파이기 때문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오른다.

백팔 계단을 오르면 사십구 동혈이 나온다.

임자 없는 동혈들이다.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가서 수련을 하면 된다. 단, 들어갈 때는 안에 사람이 있다는 표식으로 작은 돌을 표석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사십구 동혈은 텅 비어 있다.

이미 멸문해 버린 적벽검문에 누가 와서 수련할 것인가.

헌데…… 헌데…… 표석 위에 작은 돌 하나가 놓여 있다.

백팔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 정중앙에 있는, 다른 때 같으면 시끄러워서 선호하지 않는, 한가운데 동혈에 작은 돌이 놓여 있다.

사람이 있다.

아닌가? 누군가가 여기서 수련을 하다가 녹천 무인들을 만난 것인가?

뚜벅! 뚜벅!

검왕은 작은 돌이 놓여 있는 동혈로 걸어 들어갔다.

“왔구나.”

안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혈은 회음(回音)이 심하게 울리도록 조성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라는 의미에서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게 만든 이유는 작은 행동도 조심하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뚜벅! 뚜벅!

검왕이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뇌성처럼 쿵쿵 울린다.

검왕은 조심해서 걷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습 그대로 휘청거리면서 걷는다.

화악!

동혈 안에서 불이 밝혀졌다.

제일 먼저 동굴이 꽉 찰 정도로 뚱뚱한 사람이 보였다. 기름진 턱과 불룩 솟은 배, 데굴데굴 굴러갈 듯한 몸……. 그리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비단옷.

털썩!

검왕은 누산 앞에 앉았다.

누산도 검왕 앞에 앉았다.

“올 줄 알았다. 한 잔?”

누산이 미리 준비해 놓은 호로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검왕이 대답이 없자, 호로병을 내려놓고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술보다는 차가 낫겠지.”

“왜 그랬습니까?”

또르륵!

누산은 대답 대신 백옥 찻잔에 차를 따랐다.

“누강을 죽인다는 말…… 없었지 않습니까? 누강의 임무는 유지자문을 끌어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

“누가 그러더냐?”

“…….”

“누가 누강의 임무가 거기서 끝난다고 했더냐?”

또르르륵!

백옥 찻잔에 차가 가득 담겼다. 아니, 넘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산은 계속 차를 따랐다.

누산의 눈과 검왕의 눈이 어둠 속에서 얽혔다.

누산이 가득 넘치게 따른 찻잔을 검왕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누강의 임무는 죽어야 끝난다. 누강의 죽음으로 혈오의 심장 속에는 증오라는 감정이 생겼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야. 녹천이든 증평이든……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혈오를 이용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누강을…….”

“바보 같은 소리. 혈오의 심장에 증오를 심어주려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죽어야겠지.”

끄덕! 끄덕!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이 찻잔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혈루마옥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후후후!”

누산이 웃었다.

끄덕! 끄덕!

이번에도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루마옥 무인들은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

그들은 혈오를 이용해야 한다. 혈오를 이용해서 풀어낸 저주는 한시적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혈오가 필요하다. 혈오가 저주를 풀어주어야 한다.

혈오는 치료제다.

헌데 혈오가 증오를 품고 저주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혈루마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나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다.

누산은 천하제일의 거부다. 그까짓 절곡 하나 통째로 없애는 데는 인부 만 명만 고용하면 하루아침에도 가능하다. 그동안은 혈루마옥 무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손을 대지 못했지만, 텅 빈 절곡 하나쯤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다.

혈루마옥 무인들은 뿌리 잃은 나무처럼 고사할 것이다.

이로써 다 끝났다.

은둔한 채 나오지 않던 유지자문이 끝났다.

저주에 걸려서 나오지 못하던 혈루마옥이 근래 들어서 저주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록 중원에 머무는 시간이 한 달에 불과할지라도 자발적으로 저주를 풀기 시작했다.

화천이 좋은 예다.

만약 그런 일만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혈루마옥의 저주를 알기에, 그 사람들이 중원을 어떤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기에, 그들을 모두 처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유지자문도 끝났고, 혈루마옥도 끝났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적벽검문도 끝났다.

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인가?

누미와…… 누산이다.

누산이 말했다.

“헌데…… 약간 실망했다. 그래도 누미는 베고 올 줄 알았는데.”

“저든 누미든 안중에 없으신 분이 무슨 말씀을.”

“차, 마저 마시지.”

“한 마디만. 이 세상 무엇이 그렇게 좋습니까?”

“허허허!”

“적벽검문 가족들. 모두 죽었습니까? 괜찮습니까?”

“어차피 남이 아니던가.”

“그렇습니까?”

“솔직히…… 모두들 내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지 않았나. 가족이니 뭐니 하면서.”

“그냥 문파를 떠나시지.”

“힘 있는 것들은 늘 골칫거리라서 말이지. 없앨 수 있으면 없애는 게 좋겠지. 봐라. 깨끗이 없애지 않았나. 네 덕분에 검성과 혈천성마저 없어졌으니 한결 좋구나.”

꿀꺽!

검왕은 백옥 찻잔에 든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허허허!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러면 더 좋겠죠.”

“더 좋다?”

“어차피 저 계단을 오를 때 모든 걸 놓고 왔습니다. 누산이라는 사람에 대한 증오도 놓고 왔지요. 한 계단씩 오르면서……. 그러다 보니 세상이 보입니다.”

“눈을 떴다?”

“떠진 눈으로 봤을 때, 누산이라는 사람…… 명이 다했군요.”

“그런가? 난 네 명이 다한 것으로 보이는구나. 나 역시 떠진 눈으로 봤을 때.”

“압니다. 이 찻잔 속에 용혈마진(溶血痲疹)이 섞여 있다는 것. 이런 것을 쓰지 않아도 저 같은 것은 눈에 차지 않으실 텐데……. 안전에 안전, 또 안전. 얼마나 안전해야 직접 손을 쓰실 건지.”

“지금 정도면 됐다.”

누산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검왕은 찻잔을 내려놨다.

두 사람,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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