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第四十五章 적멸(寂滅) (1)
검왕, 무엇을 기다리는 거야?
제이령은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검왕은 촌장을 누미 앞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회생 불능인 사람을 결과가 뻔한 상황으로 떠밀었다.
왜? 분명히 검왕은 촌장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촌장이라면 누미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부축하고 누미에게 온 것은 누미를 죽이고, 녹천을 정리하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위해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쉬잇! 쒜에에에엑!
제이령은 선형일자(線形一刺) 초식을 전개했다.
신형을 띄우고, 화살을 쏜 것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가 목표를 타격한다.
쒜에에에엑!
제이령은 혈오를 노렸다. 그녀가 누미를 제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어림도 없다. 녹천 무인들을 정리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딱 한 가지 있는데, 혈오를 죽이는 거다.
더 이상 녹천이나 증평 무인들이 중원을 돌아다니게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비켯!”
제이령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검을 찔렀다. 헌데,
누강이 환하게 웃는다. 누미의 검을 몸통 한가운데 틀어박고, 피식 웃는다.
‘아!’
제이령은 선형일자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 쏘아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탄식을 흘리고 있었다.
누강의 의도를 알겠다.
스읏!
누강이 몸을 돌린다. 혈오를 보호하면서 선형일자 앞에 자신의 육신을 내놓는다.
석화 선생은 촌장이 오면 누미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누미를 죽일 사람은 누강이라고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누강은 누미를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오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 같다.
스읏! 푹!
제이령의 검이 누강을 뚫었다.
제이령은 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검 자루까지 틀어박으려는 듯이……. 그래서 앞으로 삐죽 삐져나간 검이 혈오를 관통할 수 있게끔 힘껏 찔렀다.
허나 그녀의 검은 혈오에게 닿지 않았다.
푹! 푸욱! 푸욱!
검들이 꽂힌다. 순식간에 제이령은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적어도 대여섯 자루는 훨씬 넘는 검들이 꽂아졌다.
“이해가…… 안…… 돼…….”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강이 이 자리에 왜 있는가. 왜 혈오를 그토록 끔찍이 보호하는가. 자신이 죽어가면서까지. 검왕은 왜 촌장을 보냈고, 또 누강을 보냈는가.
툭!
그녀는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증평 여인들은 촌장을 뒤쫓아왔다. 촌장은 그녀들에게 혈루마옥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어떻게든 촌장이 죽기만 하면…….
드디어 촌장이 죽었다.
그녀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싱겁게 죽었다. 적어도, 최소한 누미에게 어떤 상처라도 입히고 죽을 줄 알았는데……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누미는 너무 멀쩡하다.
녹천 무인들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촌장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끝났네.”
수월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중원은 그녀의 땅이 아니다. 누미의 땅이다. 어떻게든 기회만 생기면 치고 들어가려고 했건만.
“난 혈루마옥으로 돌아가.”
그녀는 증평 여인들에게 선포했다.
“누미에게 항복할 의사는 없어. 저 여자 말을 들을 이유도 없고. 절곡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살아갈 거야. 고독하고, 외롭게.”
그녀는 증평 여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혈루마옥은 증평과 녹천이라는 두 집단으로 갈려져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한가족이다.
증평 여인들은 녹천에 지아비를 두고 있다. 자식이 있다. 아버지가 있다.
아이들은 공동 양육되며, 지아비는 밝히지 않는 게 관례다. 그러므로 누가 자식인지, 누가 부모형제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짐작은 하지만.
“죄송하지만 저는…….”
“괜찮아, 가.”
“저도.”
수월화는 고개만 끄덕였다.
녹천과 뒤섞일 여인들이 그렇게 떠나갔다.
모두가 떠나고 수월화 곁에 남은 여인은 단 네 명, 다섯 손가락을 넘기지 못했다.
“우리만 남았네. 난 아주 홀가분해. 기분 좋게 돌아갈 거야. 그러니 혹여 나 때문에 남은 거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정말로 난 혼자 돌아가도 좋아.”
“혼자 가면 외롭잖아요.”
“어머! 정말 나 외로울까 봐 남은 거야? 괜찮아. 가서 잘 가꿔놓을 테니까 생각나면 들러.”
“아뇨. 같이 갈래요.”
“정말 괜찮아. 가고 싶으면…….”
수월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 떠나고 네 명만 남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사방(四方)을 점하고 있다.
그녀들은 그저 편하게 서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분명한 사상진(四象陣)이다. 아니, 이것은 증평주의 호위무인들에게만 전수된다는 사상멸절진(四象滅絶陣)이다.
“너희는!”
“아씨, 죄송하지만 혈루마옥으로 돌아가시더라도 하극상을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풀고 가셔야죠.”
스릉! 스릉!
여인들이 검을 뽑았다.
“너희들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이길 수 있으니까 남은 것 아니겠어요?”
“그래, 그럼 해봐.”
수월화는 촌장이 남긴 말을 상기했다. 하극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그것이 이것이었나?
촌장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싸움의 결과까지도. 그래서 그런 말을 남긴 것이다. 즉, 이 싸움은 그녀가 진다. 이들이 이긴다.
‘사상멸절진이 천고의 절진이라는 말은 들었어. 하지만 난 그렇게 강하다고 믿지 않아. 그런 진이 존재한다면 누미에게 써야지, 왜 내게 써?’
스슷! 스슷! 스스슷!
여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북에 위치한 두 명은 왼쪽으로 휘돈다. 동서에 위치한 두 명은 오른쪽으로 돈다.
그녀들은 때때로 겹친다.
휘익! 휘이익! 휘이이이익!
그녀들은 점점 빠르게 돈다. 누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시작할 거야, 말 거야?”
수월화는 그녀들을 똑바로 봤다. 그녀들이 매우 빠르게 휘돌고 있지만, 두 명이 서로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혼동되는 점이 있지만, 그래도 네 명 모두 육안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사상멸절진이라면…… 어림도 없다.
그때, 두 명이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두 명은 여전히 주위를 맴돈다. 한 명은 좌에서 우로, 또 한 명은 우에서 좌로.
쒜에에엑!
허공에 신형을 띄운 여자들이 쏘아져 왔다.
“아, 정말 뭐하자는 건지.”
수월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공격은 아주 평범한 합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빨리 끝낼 생각을 했다.
어차피 같이 돌아가지 못할 사람들, 적이 된 사람들이라면 빨리 끝내는 것이 속 편하다.
파앗!
섬광 한 줄기가 허공을 그었다.
섬광은 허공에서 낙하하던 두 여인을 정확하게 갈랐다.
그녀들은 갈라졌다. 빨간 피를 뿌리면서. 공격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신형을 날린 것 같다. 꼭 그런 느낌이 든다.
‘뭐지?’
그녀는 비릿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리고 향긋한 꽃향기도 맡았다.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꽃, 일명 죽음의 꽃이라고 불리는 파화(櫇花)의 향기다.
파화는 혈루마옥에만 피어난다.
혈루마옥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꽃이다. 그래서 아주 가까이에 두고 산다. 집집마다 파화를 심지 않은 집이 없다.
허나 바깥세상에서는…… 중원에서는 죽음의 꽃이 된다.
저주받은 혈루마옥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지만, 저주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준다. 그래서 죽음의 꽃, 사화(死花)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꽃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아!”
그녀는 탄식했다.
꽃향기를 맡는 순간 전신에서 기력이 쭉 빠진다.
그녀는 허공에 신형을 띄운 여인들이 왜 그토록 무기력했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혈루마옥의 저주에서 벗어난 여인들에게 파화는 죽음의 꽃이 된다. 사화가 된다. 파화의 향기는 그녀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혈루마옥에 있을 때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독화(毒花), 독향(毒香), 독분(毒紛).
써억! 스각!
검 두 자루가 그녀를 벤다.
순간, 그녀도 검을 쳐냈다. 아무리 파화에 중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일.
파파파파팟!
그녀를 베고 지나가는 두 여인에게 폭죽 터지듯 검광이 쏟아졌다.
풀썩! 풀썩!
그녀들은 예상했던 대로 쓰러졌다. 헌데…… 쓰러진 위치가……?
쓰러진 여인들은 다시 사상을 점하고 있다. 죽은 시신이 동서남북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사상 멸절!’
수선화는 비로소 사상멸절진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들은 처음부터 살 생각이 없었다. 그녀 곁에 남을 때부터 죽을 준비를 했다.
이들은 파화 이외에 또 다른 독을 준비했다.
시독(屍毒)!
죽은 시신이 뿜어내는 독이다. 사람이 만든 독이기 때문에 극독이며, 해독이 불가하다.
지금 시신이 어디 있나? 있다. 죽은 여인들이 시신이다.
그녀들은 급속히 부패되고 있다. 방금 검을 썼을 뿐인데, 벌써 얼굴이 쭈글쭈글 찌그러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피하면 되지 않을까? 늦었다. 벌써 이들의 몸에서 시독이 풍겨 나온다. 아주 지독한, 오뉴월에 음식 쓰레기가 썩는 듯한 냄새를 맡았지 않나. 그것이 시독이다.
털썩!
수선화는 주저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파화에 시독…… 견딜 수 없는 독이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녀는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할 생각이다. 가장 그녀답게 죽을 각오로 앉았다.
십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누강이 선 채로 죽었다. 제이령도 꼬치가 되어 죽었다.
죽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십마는 죽은 두 사람이 검왕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침묵했다.
제이령과 누강이 죽을 때, 검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검왕이 달려간다고 해도 두 사람의 죽음에는 변함이 없다.
누강과 제이령을 누미에게 보낸 사람은 검왕이다.
헌데 그런 그도 이들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던 듯싶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스읏!
검왕이 몸을 돌렸다.
“검왕, 이대로 갈 생각인가?”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미, 녹천, 증평…… 혈루마옥 무인들에게는 볼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혈천성.”
“혈천성으로 가라고?”
“거기가 텅 비었으니까. 십마가 검성에 갈 수는 없지. 후후! 혈천성으로 가야지.”
“자넨 어디로 갈 생각인가?”
뚜벅! 뚜벅!
검왕이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고.
허나 십마는 검왕의 걸음걸이에서 투사의 의지를 읽었다. 검왕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그는 싸우러 가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누강, 제이령이 누미에게 죽었는데…… 그는 누구와 싸우러 간단 말인가.
뚜벅! 뚜벅! 뚜벅!
검왕이 묵묵히 걸어갔다.
그가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함일 게다.
제이령, 누강…… 그들은 검왕의 가슴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