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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四章 사령(邪靈) (4)
‘그렇군.’
음사는 비로소 자신의 용도를 깨달았다.
검왕이 왜 자신을 누강에게 배치했는지, 누강 옆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준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명확하게 안다.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 남겨진 것이다.
솔직히 누강이 자신에게 왔는지, 자신이 누강에게 배치되었는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누강은 검왕을 통해서 들어왔고, 자신도 검왕을 통해서 들어왔다. 검왕을 통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검왕은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한 적이 없다.
하다못해 누강을 잘 모시라는 말조차도 한 적이 없다. 그저 검성의 일원으로 평범하게 대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알겠다.
누강을 죽이라는 말, 석화 선생의 죽음을 보는 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남겨진 것이다.
녹촌 무인들은 한결같이 고수다. 누강 정도는 가볍게 뒤집어 버릴 고수들이다. 그들을 누미가 통제한다. 누미는 가히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한 장면을 지켜봐야 한다.
그것은 그가 음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무공은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단 하나, 은신술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부한다.
그 후로도 많은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십마 중에 한 사람인 비형은잠은 자신이 지닌 모든 절학을 아낌없이 넘겨주었다. 은신술 부분만 집중해서.
그 이유도 알았다.
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후후! 대주를 죽인다고? 어림없는 소리!’
사실, 어림없지는 않다. 정말 큰일 난 사람은 대주다. 상대가 제일령주다. 제일령 고수들이 전부 동원되어서 누강 한 사람을 죽인다는 말과도 같다.
중원에서 이런 명령을 들었다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없다.
그래도 도주해야 한다. 어떻게든 누강을 살려야 한다. 제일령주와 자신이 동시에 같은 말을 들었으니 먼저 움직이는 쪽에 조금 더 높은 승산이 있다.
스으으으읏!
음사는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저자는 어찌합니까?”
“내버려둬.”
“도주를 시도할 겁니다.”
“이 기회에 제일령주의 실력 좀 봐야겠어. 누강 한 명 잡지 못한다면 중히 쓸 만한 사람이 아니지.”
“어차피 중히 쓸 사람은 못 됩니다.”
녹천 무인의 말 속에는 ‘중원무인’에 대한 적의가 담겨 있다.
중원 무인들은 공격해서 죽여야 할 대상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중원 무림을 초토화시킨 후, 그 위에 새로운 무림을 건립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혈루마옥 무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적의로 가득 찬 생각만 주입받아 왔으니까.
누미가 녹천 무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중원 무림을 말살시킬 생각이야?”
“아닙니까?”
“중원 무림을 말살시키면 재미는 어디서 보고?”
“……?”
“사람을 지배하는 재미. 떠받들어지는 재미.”
“그것은…….”
“그런 재미를 무시하지 마. 그런 재미가 없으면 중원을 지배하는 맛도 없어져. 호호호! 우리는 강함만 보이면 돼. 굳이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 사람들은 말이야. 강한 사람은 존중하고 그 밑에 기어들어가. 하지만 혈인은 두려워해. 호호호호! 지금 무림에서 혈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검왕이야. 허니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 있으면 되는 거야.”
누미는 말을 하면서 촌장을 떠올렸다.
촌장 역시 혈인 역할을 한다. 그들이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고, 충분히 강함을 보인 자신이 혈인들을 제거한다.
중원은 굳이 정복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굴복한다.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발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누미는 그런 날을 보고 있다.
“중원 무림을 마음껏 부리는 날이 머지않았어. 그때가 되면 저들도 쓸 데가 많아.”
“알겠습니다.”
녹천 무인이 대답했다.
누미는 그 대답 속에서 불만을 읽었다.
확실히 누미의 생각은 녹천 무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녹천 무인들은 강함만을 추구한다. 중원 무림을 지배할 생각이 없고, 파괴할 생각만 가득하다.
중원을 피바다로 만든다!
이것이 혈루마옥의 신조다.
중원 무림에 나오자마자 사전 통보 한 장 보내지 않고, 혈첩 한 장 보내지 않고 적벽검문을 들이친 것도 그 때문이다.
굳이 통보할 필요가 없다.
강자존(强者存)!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약한 자는 도태한다.
혈루마옥은 정사대전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직접 저들을 치고 싶다. 굳이 큰 싸움을 벌인다면 중원 대 혈루마옥의 싸움이었으면 좋겠다.
녹천 무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배를 원하는 누미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촌장이 유지자문을 기다리느라 인내라는 것을 보였다. 즉각적으로 무림을 치지 않았다.
그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혈루마옥의 생각대로라면 무조건 중원을 공격하고, 유지자문이 나타나면 또 그들과 싸우고,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나타나면 또 싸우면 된다. 그러다가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혈루마옥이 도태되면 그만이었던 게다.
촌장은 지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다렸던 거다.
녹천이나 증평 무인들도 그런 점을 알기에 자신들의 혈심을 누르고 명을 따랐던 것이고.
누미가 지배를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누미는 녹천 무인들의 생각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들의 생각을 받아주면 안 되는 것이기에.
“석화 선생이 죽었습니다.”
“뭐라고!”
“누미가 대주님도 죽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누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석화 선생이 죽었다는 말에는 놀라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니 오히려 담담하다.
누강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죽더라도 누미 곁에서 죽을 생각인 모양이다.
“헌데 석화 선생이 죽기 전에 묘한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음사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소상히 말했다.
촌장이 오고 있다. 그 전에 누강을 보내라. 촌장이 오면, 그때도 누강이 있으면 누미가 죽을 것이다.
누강은 음사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래 그는 생각이 많지 않다.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명령을 받고 행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번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더더욱 남아있어야겠지.”
“제일령주가 죽이러 올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어.”
누강은 즉시 일어섰다.
그는 검성 사람이다. 제일령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신 같은 사람은 일초에 나가떨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일령주는 검왕의 친구다. 그를 모를 수 없다.
누강은 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여유로웠다.
“넌 계속 도주하자고 말해라.”
“네?”
“다른 사람들이 들어야 하니까 계속 말하라고.”
“아, 네. 대주님, 지금이라도 빨리 도주해야 합니다. 제일령주의 무서움을 알지 않습니까.”
음사가 계속 말했다.
누강은 천천히 걸었다. 매우 느리게, 매우 여유 있게.
제일령주만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다. 녹천 무인들도 지켜보고 있다.
자신들은 그들을 따돌리지 못한다.
음사는 도주하자고 했지만, 도주할 길이 없다. 처음부터 도주로가 꽉 막힌 상태다. 사방이 고수들인데, 하찮은 무공으로 어느 곳을 뚫을 수 있단 말인가.
천만다행인 점은 그가 뇌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다.
석화 선생이 오고 난 후, 뇌옥 생활을 벗어났다. 남들처럼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 물론 석화 선생이 떠났으니 그 생활도 접어야 할 터이지만.
누미는 누강을 무척 싫어한다. 고문하고, 핍박하고, 가둬두기를 좋아한다. 누강을 보면서 검왕을 떠올리고, 적벽검문을 떠올린다. 그런 증오가 고스란히 누강에게 터진다.
누미는 누강을 죽이지 않는다.
누강은 죽일 대상이 아니다. 살려놓고 두고두고 괴롭힐 대상이다.
누강이 걸어갔다.
“대주, 지금이라도 탈출해야 된다니까요!”
음사는 사방에 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했다.
“손자를 보고자 합니다.”
누강이 녹천 무인에게 정중히 말했다.
“누가 네놈 손자인가!”
“아! 실례했습니다. 혈오님을 뵙고자 합니다. 방글거리면서 웃으시는 모습이 못내 보고 싶어서.”
스읏!
녹천 무인이 길을 내줬다.
혈오는 누강만 보면 방긋거리면서 웃는다.
혈오와 누강은 어떤 핏줄도 섞여 있지 않다. 하지만 진한 핏줄을 느끼는 듯 누강만 보면 울던 울음도 멈춘다.
누강에게는 혈오를 면접할 특권이 주어져 있다.
누가 누구에게 특권을 지시한 적은 없다. 하지만 녹천 무인들 모두가 혈오를 안다. 누강이라는 존재도 안다. 혈오가 누강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안다.
누강은 혈오에게서 친손자의 정을 느낀다.
이 모든 점을 알기에 길을 내준다.
누강이 녹천 무인 곁을 스쳐 지나갔다.
“네놈은 안 돼!”
녹천 무인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대답은 없다. 하지만 누강을 쫓는 그림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녹천 무인이 음사를 찾아냈고, 제지했다. 그런 일은 항상 있어 왔던 것이라 놀랍지도 않다.
누강이 안으로 들어서자, 녹천 무인 두 명이 그를 쳐다봤다.
“혈오님을.”
그가 말하기도 전에 녹천 무인이 고갯짓으로 혈오를 가리켰다.
혈오는 조그만 침상 위에 앉아있다가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손을 바지락거리면서 웃는다.
천천히, 천천히 혈오를 향해 걷는다. 그때,
“멈춰라!”
싸늘한 일갈이 등 뒤에서 터졌다. 아니다. 등 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문밖에서 터졌다.
녹천 무인 두 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냐!”
밖에 있는 무인이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저놈은 혈오를 인질로 삼으려는 겁니다. 허니 저놈을 혈오에게 보내면 안 됩니다.”
매우 차분한 음성이다.
역시 제일령주다. 녹천 무인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원인이다.
쉬잇! 슷!
제일령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에 있던 녹천 무인 두 명이 누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강은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강이 혈오를 인질로 삼는다니?”
“천주께서 누강의 죽음을 명하셨습니다. 저놈이 그것을 알고 혈오에게 접근한 겁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그럼 접근하게 하면 안 되지. 들었나?”
“돌아가라.”
문밖에서 녹천 무인이 말하는 것과 누강을 가로막은 녹천 무인이 말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누강은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당신 말을 거스를 생각이 없다. 돌아가라니 돌아가겠다. 그리고 누강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으아앙! 으앙!”
갑자기 혈오가 울음을 터트렸다.
혈오가 누강이 돌아가려는 것을 눈치챈 듯, 아니면 누강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보채는 듯…….
스르륵!
누강도 즉시 움직였다.
누강의 신형이 뱀처럼 미끄러진다. 석화 선생이 깜짝 놀라서 말했던 사행(蛇行)이다.
“이놈이!”
녹천 무인들이 누강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누강은 기름칠한 장어처럼 그들 사이를 삐져나갔다.
스읏! 슛!
녹천 무인들이 즉시 공격을 취했다.
허나 누강은 이미 혈오 곁에 다가섰다. 그리고 혈오를 안았다.
녹천 무인들의 공격이 멈췄다. 혈오를 안고 있는 누강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누강이 말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소. 다만 촌장님이 오고 계시다니, 촌장님 얼굴만 뵙고 갈 생각이오. 그동안 이곳에서 손자놈과 잘 놀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렇지? 까꿍!”
“까르르르르!”
혈오가 언제 울었냐는 듯 맑은 웃음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