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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217화 (21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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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四章 사령(邪靈) (2)

퍽! 퍼퍽! 퍼퍼퍽!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검이 흐르고 살이 베어진다.

풀썩! 툭! 털썩!

촌장을 공격했던 여인들이 썩은 집단처럼 무너진다.

그녀들은 급살을 맞은 듯하다. 쾌속하게 검을 쳐내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움찔거리더니 풀썩 쓰러지고 만다.

“쿠우!”

촌장이 긴 한숨을 쉬며 허리를 쭉 폈다.

촌장은 되살아났다. 기세가 강해지고, 표정도 되살아났다. 무엇보다도 검이 말해준다.

파라라랑!

검에서 무지개가 활짝 피어났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까딱거리기는 하지만…… 심맥이 이미 끊긴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완벽하게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순,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계속하겠느냐?”

촌장이 조용하게 말했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촌장을 살핀다. 정말로 정상인지 살핀다.

검에 유기가 흐른다. 무지갯빛 유기가 영롱하게 빛난다. 간혹 깜빡거리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하지만 촌장의 정신까지 흐릿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죽은 여인들을 살핀다.

촌장은 일격에 여인 다섯 명을 무너트렸다.

죽은 여인들은 피를 아주 적게 흘린다. 얼핏 보면 검에 맞은 것이 아니라 권력에 맞아 죽은 시신처럼 보인다.

요혈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베는 검이 아니다. 찌르는 검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고수 다섯 명을 저승으로 안내했다.

촌장은 여전하다.

“지금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수선화가 검을 거꾸로 잡고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펼쳐놓은 것들을 거둬야겠다.”

“펼쳐놓은 것 속에는 저희도 포함되겠죠?”

“그렇지.”

“그럼 어쩔 수 없잖아요. 저희도 최선을 다해서 발버둥 쳐야 되겠죠?”

“절곡으로 돌아가라.”

“……?”

“너희는 펼쳐놓은 대상이 아니다. 평생을 함께해온 누이며, 딸일 뿐이다. 그러니 절곡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무림은 잊고 편히 살기 바란다.”

“정말이세요?”

촌장은 대답 대신 검을 거뒀다.

스륵!

검이 검집 속으로 들어갔다.

촌장은 오연히 서서 수선화를 쳐다본다. 이제 네 결정만 남았다는 듯이.

“알았어요. 저희는…… 절곡으로 돌아가겠어요.”

수선화가 돌아갔다.

촌장과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 기껏해야 한 달이다. 한 달 동안만 버티면 된다.

촌장이 말했다.

“돌아가면 잘 생각해서 행동해라. 넌 증평주를 죽였다. 하극상을 벌인 셈이지. 이런 부분을 내버려두면 앞으로 혈루마옥에서는 하극상이 종종 벌어질 터, 단단히 단도리 해야 할 것이다.”

“충고 고맙습니다.”

수선화가 읍했다.

촌장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하늘을 쳐다봤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후후! 괜찮을 리가 있나.”

“그럼……?”

“수선화, 그 계집은 여우다. 고것이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촌장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쳤다.

제이령이 촌장 옆에 앉았다.

“미안하구나.”

촌장이 문득 말했다.

제이령은 묵묵부답 말하지 않았다.

“목발이 있어야겠다. 양쪽 모두. 두 개 부탁한다.”

촌장이 다시 말했다.

제이령은 살며시 일어나서 숲으로 걸어갔다. 아주 태연하게, 목발을 만들 만한 나무를 구했다.

촌장이 목발을 짚고 걸어간다.

제이령은 그 뒤를 따른다. 사방을 경계하지만 긴장감은 없는 듯하다.

목숨을 버린 자, 긴장하지 않는다.

정말로 목숨을 버렸는지 아니면 가식인지는 어깨에 얹어진 긴장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진정으로 목숨을 버렸다.

“아! 기회를 놓쳤어.”

수선화가 탄식했다.

촌장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물러나자마자 나무를 등지고 앉은 것이 좋은 증거다.

촌장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했다.

그동안 제이령이 시선을 끌었다. 목발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정말인 줄 알고 지켜봤다.

촌장이 목발을 짚고 걷는다. 허나 그 모습은 어디로 보나 불편한 몸을 의지한다는 측면이 없다. 목발을 병기 삼아 사용하려는 의도가 짙다.

심맥이 끊긴 사람…… 최대한 목숨을 연명하려는 게다.

“촌장님이 어디로 가시는 걸까요?”

“누미.”

수선화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답했다.

“호호호! 그럼 잘됐네요. 촌장과 누미가 싸우면 용호상박, 한쪽이 이겨도 다른 쪽은 이미 상했을 터이니.”

“누미가 죽어.”

“예?”

“누미는 촌장님 상대가 안 돼.”

수선화는 촌장의 검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 유기를 떠올렸다.

촌장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정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무공에 관한 한 촌장은 최정상에 있다.

일반적인 무공 같으면, 검초를 펼쳐내야 하는 무공 같으면 몸 상태가 영향을 끼치겠지만…… 촌장은 찰나에 펼치는 검을 쓴다. 그래서 증평 여인들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찰나에.

누미는 아직 그 정도까지 올라서지 못했다.

허면 좋지 않은가. 누미가 정리되고, 촌장도 죽고.

여기서 수선화는 고개를 흔든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촌장은 말했다. 증평주를 죽인 것은 하극상이다. 이런 일을 내버려두면 차후 혈루마옥에는 하극상이 종종 벌어질 것이다. 철저하게 단도리하라.

이것이 과연 그녀에게 어떤 충고를 했다고 봐야 할까?

아니다. 촌장은 하극상을 벌인 그녀를 징치할 것이다. 누미를 끝내고, 그녀마저 끝내고…… 촌장의 마음이 더 완벽한 곳에 있다면 증평 여인들마저 모두 죽인 후에 떠나갈 것이다.

허면 유지자문, 적벽검문, 혈루마옥…… 삼파…… 인간 세상을 벗어난 무공 집단들이 모두 멸절한다.

‘결국은 나를 공격할 거야.’

수선화는 눈빛을 차게 굳혔다.

툭! 툭툭! 툭! 툭툭툭!

촌장이 제이령의 혈을 쳤다.

제이령이 촌장을 안마해야 하는데, 반대로 촌장이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펼친다.

“진기를 움직여라.”

스으읏!

제이령이 진기를 움직인다.

“느리게. 느리게.”

제이령의 진기는 촌장의 손끝을 따라 흐른다.

촌장이 느리게 움직이면 진기도 느리게 움직인다. 촌장이 빠르게 움직이면 진기도 빨라진다.

촌장의 손가락이 몸 곳곳을 누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슴과 비처(秘處)까지 모두 훑어내린다.

멀리서 보면 남녀 간에 애무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두 남녀가 찰싹 달라붙어서 호흡을 함께한다.

“휴우!”

촌장이 숨을 불어냈다.

“잘 기억해라. 이것이 일(一)이다.”

제이령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진기를 겨우 일주천시켰을 뿐인데, 한여름에 태양 밑에서 질주한 것처럼 땀이 흐른다.

“진작 가르쳐 주시지 그랬어요.”

“지하 백 장 밑에서 태어나 평생 빛 한 점 못 보고 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빛을 말해주려면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알아들을까?”

알아듣는 방법은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수천 마디를 해줘도 알아들을 수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를 빛이 있는 세상으로 데려오면 된다.

본인 스스로 알게 한다.

이것은 무가의 가르침이다. 많은 스승들이 이 방법대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혈루마옥 무인들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떤 절초를 가르칠 때면 꼭 이 말을 하고는 한다.

본인 스스로 알아야 한다. 스승은 단지 밝은 세상으로 길을 안내할 뿐이다.

촌장이 말했다.

“너를 보니 목숨을 버렸더구나. 후후! 언제 어느 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래야 이걸 배울 수 있다.”

“……?”

“이것은…… 생명에 여한을 가진 사람은 배울 수 없는 것이야. 이 세상에 남겨놓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지.”

“훗! 그런가요?”

“진정한 무심(無心)은 무아(無我)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에서 혼자 손짓하는 것이지. 내가 그런 무공을 수련했고…… 검왕도 그런 무공을 수련했다.”

“그렇군요.”

제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이 유기를 펼쳐낼 때…… 그러니까 기련산에서…… 검왕은 기련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사랑도 여인도 모두 놓았다.

그는 유화아에게 무심하다.

제이령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심한 것이 아니다. 사랑 자체를 놓아버렸기 때문에 무심했던 것이다.

언제 죽어도 좋다니.

“후우!”

제이령은 한숨을 쏟아냈다.

검왕이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 때, 그녀는 아직도 촌장의 명을 쫓아서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를 이용해서 정사대전을 벌이고, 유지자문을 끌어내고…….

“다시 해보자.”

촌장이 그녀의 요혈을 짚기 시작했다.

“한 줌의 미련이라도 남았거든 모두 버려라. 사소한 감정은 울혈(鬱血)이 되어 맺힐 게다. 허면 진기가 주저하거나 폭주하게 되니 주화입마(走火入魔). 이 무공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상에 남겨둔 단 한 줌의 욕심이다.”

꾸욱! 꾹! 꾸우욱!

촌장이 제이령의 혈을 눌렀다.

“후후!”

검왕은 피식 웃었다.

문득 사부의 말씀이 떠오른다.

- 정말 다 버렸다고 생각하느냐? 세상에 한 줌의 미련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아직 미움이 남았다. 그래서 넌 공부를 지속할 수 없다.

마공관에서 유기를 깨우치지 못했다.

사실은 유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마공관 절기들을 모두 섭렵했지만 유기만큼은 깨우치지 못했다.

유기를 알게 된 것은 화천에게 죽은 다음이다.

혈천성주가 살려주었을 때, 사술로 몸이 정상이 아닐 때…… 그때 비로소 이 세상에 남겨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고 나니 알게 된 것이다.

그제야 유기를 접하게 되었다. 적벽검문이 멸문하기 전, 비로소 유기를 배웠다.

- 장님 세상에서는 장님으로 살아도 좋은 것을.

사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사부는 자신이 최종 무공을 터득해도 기뻐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지나가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사부는 유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적벽검문이 멸문당할 때, 사부는 녹천주에게 일검을 맞았다.

녹천주를 일수에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지녔음에도 오히려 죽음을 맞이했다.

유지자문.

사부는 혈루마옥보다도 유지자문을 경계했다.

유지자문은 유기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 무공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그런 무공은 종국에 이르렀다 싶으면 반드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혈루마옥도 문제이지만 유지자문도 문제다.

사부는 유지자문을 불러내기 위해서 본인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이 유기의 정신이다.

촌장이 알고, 자신이 알고, 사부가 알았던…… 아니, 촌장은 제외해야 한다. 촌장은 유기에 이기심을 보탰다. 혈루마옥의 비뚤어진 정신이 담겼다.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가 극성을 부른다.

이제 제이령이 유기를 맞이한다.

그녀 또한 세상에 남겨놓은 것이 없다. 검왕이라는 자도 내려놓았다. 진정으로.

“그래. 그래.”

검왕은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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