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216화 (216/225)

# 216

第四十四章 사령(邪靈) (1)

호랑이의 발톱이 빠졌다. 이빨도 뽑혔다.

호랑이는 나이가 들었는지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하다. 간신히 거동만 할 뿐이다.

예전의 호랑이가 아니다.

스읏! 스스슷!

호랑이 주위로 늑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결코 늑대가 아니다. 그들 역시 호랑이다. 다만 늙은 호랑이에 비하면 힘도 날램도 약해서 늑대 취급을 받을 뿐이다. 그것도 예전 이야기이지만.

지금은 모든 게 바뀌었다.

취리릭!

첫 번째 검이 쏘아졌다.

나타난 자들은 결코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넉넉하게 주면 오히려 되잡힌다는 사실을 안다.

“물러섯!”

제이령이 쩌렁 일갈을 토해냈다.

그러나 검은 그녀에게도 쏟아졌다. 그녀가 촌장 옆을 지키는 이상, 그녀도 공격대상이다.

“미안! 촌장님부터 편안케 해드리고 말은 나중에!”

쒜에엑! 쒜엑!

공격이 거침없이 퍼부어진다.

“후웁!”

제이령이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그리고 검을 고쳐잡았다. 순간,

스르릉!

그녀의 검에서 백색 유기(有氣)가 피어났다.

검왕이나 촌장이 펼쳐낸 것에 비하면 색깔도 맑지 않고 형태도 뚜렷하지 않지만 특정한 기운이 세상 밖으로 표출된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쒜에엑! 깡깡깡!

그녀도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죽이고자 하는 검과 살고자 하는 검이 부딪쳤다.

결과는 제이령의 승리다. 아니, 우세다.

백색 유기가 현란한 검초들을 반으로 갈라냈다. 모든 검초가 사라지고 백색 유기만 남았다.

쒜에엑!

그녀는 제이검을 떨쳐냈다.

이번에는 피가 튄다. 사람이 쓰러진다. 그녀를 공격해 왔던 증평 여인들이 픽픽 쓰러진다.

“죽기 싫으면 물러섯!”

그녀가 다시 쩌렁 일갈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일갈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촌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촌장이 죽든가 증평이 끝장나든가 둘 중에 하나만 남았다.

이런 점을 제이령도 알고 증평 무인들도 안다.

다만 제이령은 증평 여인들을 죽이고 싶지 않기에 일갈을 내질렀을 뿐이다.

그때, 한 여인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제이령, 이미 끝났잖아. 죽기 싫으면 검을 거둬.”

“너희들에게도 내가 제이령인가?”

“네가 우릴 버리고 중원에 나간 순간부터 넌 제이령이야. 아니, 촌장님이 우릴 기만하고 널 중원에 내보낸 순간부터 넌 제이령이 되어버린 거야.”

“너희를 위한 일이다.”

“알아. 그럼 이번에도 우리를 위해서 검을 놔.”

쒜에에엑!

여인들은 말을 하는 가운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제이령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간간이 한두 마디를 흘릴 뿐이다.

깡깡깡깡!

접전이 횟수를 더해갔다.

백색 육기는 점점 옅어졌다. 처음에는 뿌연 기류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력이 백색 유기를 유지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사인생(死因生). 죽음으로써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남으로 해서 죽는 게 아니다.”

문득, 촌장이 중얼거렸다.

“알아요. 이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알아듣지 못하네요. 호호! 아무래도 그 수수께끼는 다음 생에서나 풀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것도 좋겠지.”

촌장이 몸을 움찔거렸다.

검이 날아든다. 몸을 움직여 피한다. 반격은 하지 않고, 검을 쓰지도 않고 오로지 신법만으로 피한다. 몸을 살짝살짝 움직이는 것도 신법에 포함된다면.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위태로웠다.

“치잇!”

수선화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제이령은 아주 약은 여자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지 않은가.

촌장도 그에 동조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면서 시간을 벌고 있다. 아마도 내부 진기를 다스리는 중일 게다. 일초라도 쓰기 위해서.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승산이 없다.

“배신의 끝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쉬잇!

그녀가 신형을 쏘아냈다.

쒜에엑! 까앙!

제이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불벼락을 봤다. 그래서 황급히 검을 쳐올렸다.

백색 유기가 산산이 흩어진다.

흩어진 안개 사이로 빨간 불덩이가 떨어진다. 그녀를 산산조각낼 기세다.

“우웃!”

제이령은 격한 신음을 쏟아내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꽈앙!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수선화, 그녀가 검을 들고 서 있다.

그녀는 검은 경장을 입고 있다. 들고 있는 검은 서슬퍼런 삼척 장검이다.

빨간 모습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헌데 왜 그녀 모습이 빨간 불덩이로 보였을까? 증평 무공 때문이다. 화혈역심공 구수 오십사초 때문이다. 오십사초가 펼쳐지면서 그녀의 검이 불덩이로 변했다.

“정수를 깨달은 모양이네.”

제이령이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스읏!

수선화는 검을 쳐들었다.

역시 말은 필요 없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너무 빤히 알고 있지 않은가. 증평 무인들에게 시간이 없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쉬이이잇!

사방에서 불나방이 날아올랐다.

그녀들은 오직 한 점, 촌장만을 공격한다. 수선화가 나타난 순간부터 제이령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누가 시켜서 펼친 검형이 아니다. 진형이 아니다.

증평 여인들은 하나같이 고수다. 혈루마옥 고수들이 그렇듯이, 그녀들 역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무공만 수련했다. 살기 위해서는 무공을 닦아야 했다.

화혈역심공, 그것을 모르면 존재할 수 없다.

혈루마옥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뼈가 끊어지고 살이 떨어지는 아픔을 이겨가면서 화혈역심공, 양강지기를 닦아야만 했다.

물이 불을 머금는다.

태생이 물인데, 불을 머금으면서 살아간다.

물이 과하면 불을 꺼트리고, 불이 과하면 물이 소진된다.

그녀들은 이런 무공을 수련한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생명의 선을 유지해온 것이다. 물론 녹천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을 건너다녔다.

그런 고로 그녀들은 삶과 죽음에 민감하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를 안다. 촌장이 죽음 직전까지 떠밀린 사실도 정확히 간파한다.

헌데 촌장이 되살아나고 있다.

검왕의 유기에 심맥이 끊겼으니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은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녹천이나 증평,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말살시킬 수 있다.

촌장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촌장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한다. 죽은 증평주의 말을 쫓아서 충성을 표시했어야 한다.

허나 촌장 옆에는 제이령이 있다.

제이령은 이미 변심했다. 그녀는 혈루마옥 무인이 아니라 중원 무인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촌장 옆에서 속삭이는 이상, 촌장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심할지 모른다.

증평 무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혈루마옥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사실 그런 우려만 없었다면 촌장을 공격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촌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정상이 아니다. 심맥이 끊겼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이룰 게 없어졌다.

허면 촌장이 운명할 때까지 한 달이란 기간 동안 숨죽이고 참을 수는 없었나.

그럴 수 있다면 그리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촌장이 작심을 하고 모든 일을 돌이킨다면……. 그때는 증평도 녹천도 없다. 세상을 혈오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되돌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촌장을 공격한 일은 일종의 시험이다.

촌장의 생명은 기껏해야 한 달 남았다. 허니 촌장이 모두의 뜻을 헤아린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모두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지 않는가.

헌데 촌장이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쒜에에에엑!

검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날카로운 파공음만 일어난다. 검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화혈역심공의 정수가 펼쳐지고 있다.

“이놈들…… 그 무공을 내가 전수했건만.”

촌장이 웃으면서 빙글 한 바퀴 선회했다.

깡깡깡깡깡…… 깡깡!

사방에서 불통이 튀었다. 촌장이 들고 있던 검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머리를 쳐들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파공음을 격타했다.

투투툭! 툭툭!

촌장을 공격했던 여인들이 힘없이 밀려났다.

허나 촌장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허리를 푹 숙인 채 거친 숨을 쏟아냈다.

“후욱! 컥!”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도 쏟아졌다.

예전 같으면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증평 여인들이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무섭다. 이빨 빠지고, 발톱 빠진 호랑이는 한낱 늑대에게도 잡혀먹히는 법이다.

쉬잇! 퍽!

드디어 검 한 자루가 촌장을 찔렀다.

촌장이 휘청거리는 틈을 놓칠 증평 여인들이 아니다. 이미 촌장을 제거한다는 생각이 굳어진 상태다. 촌장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상황이다.

검에 미련이 남아있을 리 없다.

“검이 떨렸다.”

촌장이 배를 뚫고 나온 검첨을 보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검을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벤다는 느낌은 없어야 할 터. 승리, 패배, 우려, 불안…… 그 어떤 감정도 검첨을 떨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물러가라.”

스읏!

촌장을 뚫었던 검이 쑥 빠졌다.

여인은 뒤로 물러갔다. 하지만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촌장은 그녀를 공격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한 수 지도를 했고, 그녀가 지도받은 대로 싸워주기를 바란다. 그녀를 공격할 기회는 그때다. 그녀가 최선을 다했을 때, 이제 여한이 없다고 생각할 때…… 공격하고 죽인다.

이것이 혈루마옥의 전투 법칙이다.

츠읏!

촌장이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검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촌장이 유기를 끌어내고 있다. 이미 심맥이 끊어진 상태에서, 다시 말하면 이미 육신이 기능을 정지한 상태에서 진기를 온전히 일으키고 있다.

아니다. 온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증평 여인들은 속이지 못한다. 그녀들은 촌장의 유기가 유지자문 고수들과 싸울 때에 비해서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직감했다.

그때는 무지갯빛 광채가 단단한 보옥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푸석푸석한 안개처럼 느껴진다. 검은 제대로 쓰겠지만 강도는 훨씬 약하다. 아직 진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일격을 펼치려는 것뿐이다.

여인들도 사력을 다해 진기를 끌어냈다.

이번 일초, 반드시 촌장을 제거한다.

‘이런!’

제이령은 촌장을 흘깃 쳐다봤다.

촌장의 상태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저 일전이 끝날 즈음에는 촌장이 쓰러져 있을 게다.

촌장은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 일으키고 있는 유기는 원정진기를 바탕으로 한다. 생명의 마지막 끈을 이끌어내서 쓰고자 한다.

저 일전을 막아야 한다.

푸아악!

그녀는 검에 실린 유기를 있는 힘껏 펼쳐냈다. 할 수만 있다면 수선화를 일검에 베겠다는 기세로 검을 썼다.

쓔우웃! 슈웃!

그 순간, 증평 여인들도 촌장을 공격해 들어갔다.

제이령이 그토록 촌장의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싸움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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