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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三章 은장적검(隱藏的臉)[숨겨진 얼굴] (5)
까앙! 깡!
검과 검이 부딪쳤다.
순간, 촌장은 강력한 힘에 떠밀려 주르륵 밀려났다.
“크억!”
촌장이 입으로 검은 피를 게워냈다.
“하아! 하아! 좋……군.”
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스륵!
검왕이 뜻밖의 행동을 했다. 촌장이 반주검 상태인데…… 계속 공격하지 않고 검을 거뒀다.
“훗! 후후훗!”
촌장이 웃었다.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자네…… 뜻밖에도 잔인한 면이 있군.”
“유지자문, 적벽검문. 두 개 문파를 끝장냈습니다. 이제 막 무공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친구들도 죽이셨습니다. 허면 조그만 대가라도 치르셔야지요.”
“내 목숨만으로는 안 되겠다?”
“사람 목숨은 떨어지면 그만입니다.”
“서글픈 말이군.”
“왕후장상의 목숨이나 망나니의 목숨이나. 촌장님의 목숨, 값지게 쓰겠습니다.”
검왕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검만 더 쳐내면 촌장을 죽일 수 있다.
이대로 촌장을 살려주면 두 번 다시 그에게 검을 들이댈 기회는 없어진다.
촌장을 죽이기 위해서 유지자문 고수들이 목숨을 내놨다. 음악삼귀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한 줌의 진기마저 소진시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기회다.
검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안 돼!”
유화아가 신음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신법을 펼쳐냈다. 허나 그녀는 곧 십조잔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놔요!”
“왜? 가서 촌장을 죽이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검왕이 그걸 몰라서 물러섰을까.”
순간, 유화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머릿속이 텅 비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백치가 된 듯.
“뭐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그녀는 십조잔괴와 촌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후우!”
십조잔괴가 긴 한숨을 불어 쉬었다.
“촌장은 끝났다. 이미 심맥이 가닥났어. 저 상태로는 길어야 한 달을 버티지 못한다.”
십조잔괴 대신에 유계판서가 말해주었다.
유계판서는 별호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주 잘 파악한다. 저승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일 경우, 언제쯤 저승 문턱을 넘어설지도 판단해낸다.
그는 촌장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일부러 살려준 거라고요?”
“후후후! 상처 입은 사자는 다른 사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지. 검왕은 아마도 누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골육상잔(骨肉相殘)이라고 할까? 혈루마옥끼리 싸움을 붙이려는 것 같다.”
“누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가만 놔둬도 한 달을 버티지 못하는데 일부러 공격할 리 있을까요?”
“누미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촌장이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또 촌장은 가만히 있고 싶어 하나, 혈루마옥 무인들이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야.”
유화아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저들끼리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녀는 그제야 다급한 마음을 버렸다.
검왕…… 한순간이지만 검왕의 판단을 믿지 못했다. 검왕을…… 무조건 믿었어야 하는데.
유화아는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인을 봤다.
제이령주, 그녀가 걸어온다.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히 걸어온다. 검왕 앞으로.
그렇구나. 제이령은 검왕을 철저하게 믿었구나.
이것이 차이인가. 검왕으로부터 마음을 받으려면 제이령처럼 철저하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유화아는 검왕이 살았다는 안도감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듯 허전한 느낌…… 무엇인가를 상실한 느낌이다.
두 사람이 만났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그리고 헤어짐이 있을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러니 한 번 더 보면 그만큼 좋은 것이다.
마지막일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나니 덤으로 만난 것이다.
이번 만남도 덤이다. 여분으로 만나진 것이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미어진다.
제이령이 먼저 말했다.
“결국 유지자문을 움직였네?”
항상 그녀가 먼저 말한다. 검왕은 애잔한 눈길로 쳐다보기만 할 뿐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움직일 줄 알았잖아.”
역시 멋없는 대답이다.
묻는 말에 너무 정직한, 고지식한…… 이런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내다.
“휴우! 알았지. 바보 같은 촌장님이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려들 것도 알았고.”
“가자.”
검왕이 손을 내밀었다.
제이령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얼굴을 덮고 있는 면사가 바람에 흔들린다.
“내가 갈 길은…… 불행히도 없는 것 같네.”
“나와 같이…… 가자.”
“나도 바보지만 검왕도 참 바보야. 그렇지? 유화아라는 여자, 봤어. 좋은 여자 같던데. 잘해봐.”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와 떠나자.”
“저분…….”
제이령이 촌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게 누군지 알지?”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나와 같이 가자고 하는 건…… 참 이기적이지 않아? 날 생각하면 그런 말, 못하지.”
“우린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할퀴는구나.”
“그러게.”
“힘들다 싶으면…… 그냥 가.”
검왕이 죽음을 말했다.
이 세상을 힘들게 버티지 말고 그냥 가라고, 편히 가라고 당부했다.
“그럴게.”
제이령이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한 번 안아봐도 될까?”
검왕은 팔을 벌렸다.
그녀가 검왕에게 안겼다. 편안하게.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꼭 찾아갈게.”
“아니, 그러지 마.”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난 잊어버리고. 검왕…… 정말 미안해.”
검왕은 그녀의 등을 다독거렸다.
“아! 됐다! 역시 검왕의 품은 따뜻해. 안겨있다 보니까 한 잠 자고 싶잖아. 됐어!”
그녀가 검왕의 가슴을 탁 밀쳤다. 그리고 쏜살같이 검왕 곁을 지나쳐서 촌장에게 갔다.
“가! 더 이상 말 걸지 말고. 제발!”
검왕은 하늘을 쳐다봤다.
참 어둡고 침침하다. 참 힘들다.
그는 발길을 옮겼다. 드디어…… 마지막 만남인 것을 확인하면서.
“같이 가도 된다. 허락한다.”
“호호호! 너무 늦었어요.”
“그렇게 말해도 난 후회 없다.”
“저는 후회해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인 것을. 저 사람도 참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가 촌장을 부축했다.
검왕을 만나서 적벽검문을 알아냈다. 검왕을 통해서 적벽검문의 실체를 파악했다. 적벽검문의 위치며, 무공이며…… 거의 대부분을 파악해냈다.
검왕에게 미인계가 제대로 먹혔다.
아니, 사실은 검왕을 통한 미남계가 그녀에게 먹혔는지도 모른다.
검왕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여기에도 내막이 있다. 적벽검문은 검왕을 통해서 적벽검문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적벽검문이 일부러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 많은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검왕은 단지 한 여인만을 만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적벽검문과 혈루마옥이 치열한 정보전을 펼쳤다.
결과는 혈루마옥의 일방적인 승리다.
적벽검문은 망하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내놨다. 혈루마옥은 무너트리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수집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을 때, 적벽검문은 멸문했다.
허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혈루마옥 역시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했다. 녹천과 증평은 물론이고 촌장의 무공까지……. 그리고 적벽검문 멸문을 통해서 수집한 정보를 확인했다.
나를 죽여서 적을 죽이는 방법이다.
아니다. 이것은 삼자공망(三者共亡)이다.
적벽검문, 유지자문, 혈루마옥…… 절대 무가 세 곳이 함께 패망하는 길이다.
그중 두 곳은 완벽하게 멸문했고, 다른 한 곳은 멸문을 향해서 치닫는다. 검왕이 촌장을 살려준 이상…… 혈루마옥 역시 멸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이령이 말했다.
“우리 이대로 돌아갈까요?”
“후후후! 약해졌구나.”
“혈루마옥으로 돌아가요.”
“기껏 벗어났는데 다시 돌아가자는 말이냐?”
“그곳에 있을 때가 편했어요. 중원은 너무 시끄럽고 번잡하고……. 가는데 칠 주야면 될 거고…… 한 이십 일 정도 편히 모실 수 있어요. 거기서 인생…… 정리하시지 않을래요?”
“허허허!”
촌장이 웃었다.
“일다경 정도면 숨이 돌아올 거예요. 어떻게 하실래요?”
“실수는 한 번이면 됐다. 만약 이 일로 질책을 하신다면 달게 받아야지. 가자.”
증평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도 상황을 파악했다. 검왕이 촌장을 일부러 살려준 것이며, 촌장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까지.
만약 증평이 제때에 달려나가기만 했어도 검왕의 일격은 막아낼 수 있었을 게다. 물론 중간에 십마가 가로막아 서겠지만 그들 정도는 수월화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다.
촌장이 저 지경이 된 것은…… 증평의 배반 때문이다.
촌장은 이 부분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남은 생명이 한 달가량이라고는 하지만 증평주를 질책하기에는 충분하다. 일다경 정도면 숨이 돌아올 것이고, 예전 무공을 되찾을 것이니. 물론 많이 약화되었겠지만.
증평주는 질책을 달게 받을 생각이다.
촌장이 남은 생을 다할 때까지 옆에서 모실 생각이다. 헌데,
푸욱!
그녀의 등을 뚫는 비수가 있다.
“으음!”
증평주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촌장이 죽는다면…… 호호호! 누미 정도는 제 상대가 안 되는 것, 아시죠? 허면 이 세상은 제 천하예요. 아! 검왕도 제가 처리할게요. 걱정 마세요.”
“오판했구나.”
“뭘요?”
“너 말이다. 너…… 검왕을 아주 잘못 봤어. 지금 넌…… 검왕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런가요? 호호호!”
“날 죽여라. 그리고 흔적없이 묻어. 하지만 촌장님은 잘 모셔라. 검왕 생각대로 움직여서는 안 돼. 촌장님과 싸우면 공멸이다. 너도 죽고 촌장님도 죽어.”
“촌장님은 어차피 얼마 안 있어서 죽을 것이고……. 아니, 지금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요?”
“아!”
증평주가 탄식했다.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비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팍! 팍! 팍! 팍……!
뺐다 꽂았다 뺐다 꽂았다…… 증평주의 등을 난장으로 만들었다.
털썩!
증평주가 무너졌다.
“잘 가세요. 그리고…… 저도 이번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도박이라는 것 아니까 최선을 다할게요.”
“아아!”
증평주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공격해!”
수월화는 즉시 명을 내렸다.
촌장을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은 일다경뿐이다. 겨우 향 한 자루 타는 순간뿐이다. 그 시간 안에 적어도 되살아나는 기력을 소진시키기라도 해야 한다.
지금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틀림없이 촌장을 죽일 수 있다. 지금 촌장은 닭 모가지조차 비틀 힘이 없다. 누구라도 한 번만 칼질하면 끝난다.
심맥이 절단 난다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할 정도로 중상이다.
수월화는 이미 절명해 버린 증평주에게 말했다.
“우리 많이 참았잖아요. 녹천이 활개 칠 때도 참고, 정사대전이 벌어질 때도 구경만 하고. 호호호! 촌장이 죽는 마당에서까지 참으라는 건 너무 하잖아요. 안 그래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