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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三章 은장적검(隱藏的?)[숨겨진 얼굴] (4)
퍽! 퍽!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쇠붙이가 살을 찢는 소리는 항상 소름 끼친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노인이 검을 축 늘어트렸다.
노인의 검에서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촌장은 검을 가슴 높이로 쳐올리고 있다. 그리고 촌장의 검에서도 붉은 핏물이 툭툭 떨어진다.
“한 판 더 할 수 있겠소?”
노인이 말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을 할 기력도 없다. 힘이란 힘은 모두 소진해버렸다.
유지자문이 이토록 강했던가. 유기를 얻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사람은 반대가 되었을 것이고…… 이러니 유지자문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지.
“허허허! 난 그만 가겠소.”
촌장은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이 눈을 감았다.
노인은 선 채로 절명했다.
툭! 툭! 푸아왁!
노인의 가슴에서 실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두어 번 정도 울렸다. 그리고 연이어서 가슴이 쩍 벌어졌다. 붉은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촌장은 노인의 죽음을 보지 않았다.
노인 말대로 싸움을 한 판 더 치러야 한다. 이번에 치를 싸움은 노인과 벌인 일전보다 더 힘들 것이다. 정말로 사력을 쥐어짠 싸움이 될 것이다.
그 점은 죽은 노인도 알고 촌장도 안다.
검왕이 파놓은 함정이다.
필사(必死)를 생각하고 파놓은 죽음의 굴레다.
유지자문 노인들은 그런 점을 알면서도 행동에 나섰다. 검왕이 파놓은 함정 속에서 기꺼이 미끼 역할을 해줬다.
촌장도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자문……. 이 세상 최강의 무인들과 드잡이질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런 기회는 일생에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들다.
그래서 왔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지자문의 뿌리는 드러내야겠기에.
쿠우우우웅!
내기(內氣)를 끌어낸다. 들끓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뜨거운 피를 가라앉힌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참 오랜만에 맛보는 탈진 현상이다. 이런 육체적인 고통…… 오랜만에 맛보지 않나.
진기를 끌어내어 검에 집중시킨다.
고오오오……!
멀리서 진기가 밀려온다. 아주 큰 벽(壁)이 압사시킬 듯이 강한 힘으로 밀려온다.
‘마신천강기. 후후후!’
촌장은 쓴웃음을 흘렸다.
마신천강기는 매우 뛰어난 절학이다. 하지만 촌장 앞에서는 무기력한 절학에 속한다.
마신천강기의 마벽(魔壁)은 유기를 막지 못한다.
철검과 두부로 만든 벽의 싸움처럼 서로 싸운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그만한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저들은 두부로 만든 벽을 마치 금강석(金剛石)으로 만든 벽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진기를 한 점 남김없이 모두 끌어모았다.
허나 그 정도로는 이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없다. 아마도 진기를 보충해주는 단약이나 독약을 복용한 듯싶다. 아니, 그것만 가지고도 안 된다.
사기(死氣)……!
무공을 펼칠 때 드러나는 사기는 시기(尸氣)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
생사를 도외시한 사람에게서는 죽음의 기운이 풍겨 나온다. 아주 강력한 파괴력이 흘러나온다. 똑같은 힘으로 일격을 쳐내도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일권(一拳)에는 하늘을 무너트리는 권력(拳力)이 담겨있다.
싸움에 임해서 목숨을 던질 줄만 알아도 자신보다 배는 강한 고수와 싸울 수 있다.
저들이 지금 그렇다.
삶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죽음만 생각한다. 아니, 적을 쓰러트릴 생각만 한다.
그런 마음으로 펼치는 공격이니 강할 수밖에 없다. 몸으로 느껴지는 파괴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할 수밖에 없다.
허나……이 공격 속에도 검왕은 없다.
이번 싸움에서 검왕은 마지막에 나설 것이다.
검왕과 싸워야만 싸움이 끝나는 것인데…… 그에게는 마지막 일격을 떨쳐낼 힘밖에 남아있지 않다.
유지자문 고수들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들은 이 정도로 끝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검왕이 짜놓은 각본일 테지.
‘후후! 화천, 그놈을 좀 더 강하게 키웠어야 했어.’
문득 이미 죽고 없는 화천이 생각난다.
인물 좋고, 무골 뛰어나고, 야심도 대단한 놈이었다. 머리도 좋았다. 능히 문일지십에 속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놈은…… 결정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과욕만 부렸다.
그런 점을 이용했기에 누미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런 식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누미를 얻어냈어야 한다. 그리고 화천을 잘 보살폈다면 능히 후계자가 되었을 놈이다.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나?
촌장은 산 중턱을 쳐다봤다.
그곳에 증평이 있다. 그들이 달려와서 이번 일격만 막아주면 한결 편할 것인데…… 저들은 오지 않는다. 증평주는 반심이 있을 리 없고, 아마도 수월화가 부추겼겠지.
“후후후!”
촌장은 가늘게 웃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아귀 안에서 놀고 있다는 것…… 그들을 내려다보는 입장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래서 검왕이 반갑다.
검왕은 어떻게 튈지, 무엇을 할지 모를 위인이다.
이번 싸움에서 손해를 입는다면…… 기련산에서 살려 보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게다.
츠으으읏!
검에 무지갯빛 검광을 실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살수는 없다. 죽는다.
죽음이 확정된 자리에서 공격을 펼친다는 것, 의외로 홀가분하다.
이 세상에 터럭만큼도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 아니, 이 세상은 이미 잊었다. 즐거움, 기쁨, 성냄 같은 감정도 사라졌다. 굉장히 마음이 편안하다.
마.신.천.강.기!
오직 마신천강기만 생각한다. 마신천강기에 모든 심력을 기울인다. 집중, 또 집중한다.
이런 집중은 의도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몸과 마음이 합일되면서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퍼뜩 일어난다.
몸도 마음도 자유롭다.
새가 되어서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다.
가가가가각!
마신천강기가 촌장을 덮쳐간다.
빠악!
첫 번째 부딪침이 일어났다.
촌장의 검이 삼귀의 어깨를 후려쳤다.
원래는 몸통을 치는 검이었다. 삼살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보였고, 몸통 대신에 어깨를 내줬다.
퍼억!
팔 하나가 수숫대처럼 떨어져 나갔다.
허나 그 순간, 음악삼귀는 일제히 검을 떨쳐냈다.
원래 그들의 병기는 검이 아니다. 활과 창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을 쥐었다.
어차피 촌장을 죽일 생각은 없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된다. 일격을 떨치고,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으면 되는 간단한 공격이다.
그런 생각으로 들이친 것이니 무엇을 해도 손해는 없다.
쒜에에에엑!
검이 촌장을 훑어갔다.
촌장이 비틀거리는가 싶었다. 허나 그 비틀거림은 음악삼귀의 공격을 피해내는 움직임이었다.
퍼억!
두 번째 터진 검이 음악사귀를 관통했다.
마신천강기는 깨졌다. 촌장이 내뻗는 무지갯빛 검광을 막아내지 못한다. 속절없이…… 아니다. 아무 대가가 없지는 않다. 촌장이 마신천강기를 뚫어내지만 촌장 역시 점점 무뎌진다. 눈에 확 드러날 정도로 무디다.
“좋다!”
음악사귀가 줄줄 흘러나오는 창자를 움켜잡으면서 활짝 웃었다.
“음! 패검(覇劍)…….”
강신천마가 중얼거렸다.
촌장의 검은 패검이다. 절대패검이다.
검이나 칼에 패(覇)라는 글자를 가져다 붙인 무인은 많다.
십마 중에 일인이며 검왕에게 죽은 패갑철마가 좋은 사례다. 그는 몸뚱이가 철갑처럼 단단하다는 뜻에서 패갑이라는 말을 별호로 사용했다.
패검, 패도, 패갑, 패강…….
허나 그 어느 것도 진정한 패(覇)는 아니다.
촌장의 검법을 보다 보면 비로소 패라는 글자를 이해하게 된다. 아! 패라는 말은 저럴 때 사용하는 거구나.
촌장의 검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찢어버린다.
어떠한 방패도 필요 없다. 어떠한 공격도 무력화시킨다. 오직 강력한 힘으로 짓눌러 버린다.
촌장의 검에서 뻗어나오는 힘은 절대적이다.
마신천강기를 힘으로 찢어버린다. 삼귀, 사귀, 오귀를 힘으로 찍어버린다.
검왕은 유화아를 음악삼귀와 같이 보내지 않았다.
마신천강기는 방패요, 투살진기는 창이다. 음악오귀와 유화아는 한 몸처럼 싸워야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수련한 것도 그것이다. 그들이 펼치는 연수는 그 어떤 합공보다도 뛰어났다.
허면 지금은 왜 음악삼귀만 보낸 것인가.
음악삼귀는 죽어도 좋고 유화아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가? 그녀가 여자라서?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십마는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았다.
음악삼귀는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촌장의 검을 무디게 할 수 있다. 허나 유화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녀의 투살진기는 촌장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그녀의 강함은 촌장의 강함을 이기지 못한다.
음악삼귀는 부딪쳐야 찢을 수 있다. 반드시 부딪쳐야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투살진기는 아니다. 투살진기를 상대하기 위해서 반드시 부딪칠 필요는 없다.
쏘아져 오는 검을 피하고 검을 쳐내면 된다.
유화아의 음악삼귀가 그런 점에서 다르다. 음악삼귀는 촌장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지만 유화아는 털끝조차도 건드리지 못한다. 아무 대가 없이 죽임만 당한다.
그런 점은 십마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십마 중에서 어느 누가 촌장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촌장의 패검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잘 가요.”
유화아는 쓰러지는 음악삼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후욱! 후욱!”
촌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지자문 노인들과 싸우면서 워낙 많은 진기를 빼앗겼다.
그들과 싸운 것은 몇 수 되지 않는다. 결코 긴 싸움을 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수 한 수가 고비였다. 검 하나, 칼 하나 피할 때마다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긴장과 고요는 함께 온다.
극도의 긴장은 극도의 고요처럼 보인다.
절대 집중은 무신경, 무관심, 무덤덤하게 보일 수도 있다.
싸움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고수들은 싸울 때도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고.
검에 맞아서 살이 찢긴다. 그런데도 얼굴은 평온하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는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진다. 뼈가 으스러진다. 그런데도 웃는다.
고수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절대긴장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진기를 극도로 소모시킨다. 몇 수 싸우지 않아도 기력이 탈진한다.
촌장은 몸과 정신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었다.
그때, 드디어 검왕이 나타났다.
스읏! 쒜에에엑!
검왕은 보이지 않고 검만 보인다. 기련산에서 봤던 바로 그 고요가 보인다.
“후후후!”
촌장은 웃었다.
이놈 무슨 짓인가? 지금 마신천강기를 펼치고 있지 않은가? 아니, 마신천강기 속에 혈영마공이…… 혈영마공도 아니다. 이게 무슨 무공이지?
촌장은 검왕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스읏! 파파파파팟!
촌장은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을 물러서니 두 걸음을 물어서야 하고, 순식간에 십여 보나 밀리고 말았다.
퍼억!
검이 살을 찢고 지나간다.
“후욱!”
촌장은 아랫배를 움켜잡고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어떻게 알았느냐?”
촌장이 고요한 음색으로 물었다.
유기의 단점, 약점…… 같은 강함끼리 부딪치면 진기가 급속히 고갈된다는 사실…….
촌장도 이런 사실을 유지자문 고수들과 싸우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 진기 손실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죽을 맛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왕은 그런 점을 계산하고 이 함정을 팠다.
검왕은 촌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쳐왔다. 아주 강한 유기를 싣고.
파아아아아앗!
검왕의 검에서 은은한 노을빛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