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第四十三章 은장적검(隱藏的?)[숨겨진 얼굴] (3)
가가가가각!
병기와 병기가 부딪친다.
촌장은 전력을 다하고 있다. 결코 방심하거나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합공을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온몸 구석구석에 상처가 생긴다.
패색이 짙다.
“고맙소.”
느닷없이 촌장이 말했다.
칼과 칼을 부딪치는 와중이다. 한 호흡에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를 판국이다. 결코 말 같은 것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촌장도 여유가 있어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깡깡깡깡!
순식간에 십여 합이 교차했다.
“만약 유지자문이 초반부터 개입했다면 녹천증평은 사라지고 없을 거요.”
쒜엑! 쒜에에엑!
노인들은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무공을 펼치는 데만 전념했다.
그렇다고 말까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촌장의 말을 들었다. 허나 다른 때라면 맞장구를 치겠지만 지금은 싸움을 벌이는 입장이 아닌가. 귀담아들을 요소가 전혀 없다.
“천(天)!”
촌장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순간 촌장의 전신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가 활짝 피어났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촌장을 휘감는다.
“력(力)!”
두 번째 일갈이 터지며 검광이 번뜩였다.
까아아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데 벼락 치는 소리가 울린다.
“크윽!”
처음으로 노인 중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칼을 든 노인이다. 노인은 촌장의 가슴을 후려치는 중이었다. 당연히 촌장은 방어를 했고, 검과 도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칼이 나아가는 길을 검이 막아섰다.
헌데 이변이 일어났다.
검에서 막강한 반탄력이 일어났다. 내리치는 칼과 쳐올리는 검……. 누가 봐도 칼이 우세한 상황인데, 오히려 칼날이 반으로 부러져 버렸다.
칼이 부러지고 노인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선다.
쒜에에엑!
촌장은 급히 돌아서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노인들의 합공은 촌각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질주하는 기마대에 휩쓸린 기분이 느껴진다.
파파파팟! 파팟!
촌장인 연신 검초를 떨쳐냈다.
이번에도 무지개가 검에 어렸다. 검이 흐르는데, 검 주위로 무지개가 피어난다.
퍽퍽! 깡!
쌍겸이 반으로 싹둑 잘린다.
무게가 여든 근은 훌쩍 넘어서는 철장(鐵杖)도 있다. 매우 위력적인 병기인데…… 그마저도 싹둑싹둑 세 동강이 나버린다.
타탓! 탓!
노인들이 잠시 뒤로 물러섰다.
노인들 중 다섯 명이 병기를 잃었다.
손잡이만 남은 검, 반 토막 난 칼, 절굿공이가 되어 버린 철장, 송곳이 되어 버린 겸…….
“아깝군. 당신 같은 사람이 유지자문에 왔어야 하는 것을.”
“허허허! 허면 벌써 촉두금력을 깨우쳤으려나?”
“그렇겠지. 후후!”
노인들이 허탈하게 웃었다.
순간…… 노인들의 의복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붉은 혈선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살이 쫙 벌어졌다.
툭! 투툭!
노인 두 명이 그대로 무너졌다.
다른 노인 세 명도 털썩 무릎을 꿇었다.
병기로 땅을 짚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온다. 피할 수 없다.
쿵! 턱!
노인들 다섯 명이 거의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승부는 끝났다. 아직 노인 한 명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촌장의 상대는 안 될 성싶다.
“단연 최강이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은 묵묵히 검을 들어 올렸다. 신비로운 무지개를 활짝 피워내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기 고갈. 아직 정점을 밟지는 못했군.”
“고갈은 아니오.”
“그렇군. 한 줌이 남았군. 그 한 줌마저 소실되고 나면 한동안은 무공을 쓰지 못하겠군.”
“내가 당신들을 찾아왔는데…… 후후! 어찌 내가 함정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드오.”
“함정에 걸린 게 맞소.”
스릉!
노인이 검을 뽑았다.
노인은 다른 노인들이 합공을 벌일 때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노인들이 매우 위급할 때도 도와주지 않았다. 무지개 검광이 육신을 관통할 때도 지켜보았다.
노인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필살의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인의 육신은 철갑처럼 단단한 내기로 감싸여져 있다. 그러므로 그런 내기를 부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내기가 필요하다. 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촌장은 전력을 다해서 일격을 쏟아냈다.
그것도 무려 다섯 번이나……. 촌각의 여유도 두지 않고 연달아서 펼쳐내야만 했다.
진기를 되돌릴 사이가 없이 방출하기만 했다.
사실, 지금 촌장은 어지럼증을 느낀다.
촌장 정도 되는 고수가 어지럼증을 느낀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진기가 일순간에 빠져나가면서 탈수 현상과 비슷한 탈진이 일어나고 있다.
허나 이것도 병법이다.
다섯 노인이 죽음을 감수하면서 진기를 고갈시킨 것도 강적을 상대하는 방책 중에 하나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부르르르르!
검이 떨린다.
무지개 검광이 흔들린다.
“타앗!”
노인이 일성을 토해내며 공격해 들어왔다. 그야말로 천지를 개벽시킬 듯한 기세로.
“가라.”
검왕이 음악삼귀에게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남은 거지 같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게 지낸 거지?”
음악삼귀가 유화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유화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왜 얘를 울리고 그래. 네 덕분에 사람답게 살아봤다. 우리 같은 사람과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고. 시간이 없어서 그만 간다. 우리 너 많이 좋아했다.”
음악오귀가 말했다.
“시간 없어! 가자!”
음악사귀가 다른 두 명을 잡아끌었다.
쉬이잇! 쉬이이익!
음악삼귀가 쾌속하게, 은밀히 전장으로 달려갔다.
“죽겠죠?”
“너도 가.”
유화아가 검왕을 쳐다봤다. 아주 잠깐만. 그리고 곧 신형을 돌려 질주해갔다.
“거참, 되게 무정하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조짐이 좋지 않은데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지.”
백화요녀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검왕은 백화요녀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촌장과 노인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휴우!”
백화요녀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유화아는 ‘여자’를 말하는데, 검왕은 ‘검’을 말한다. 유화아가 몇 번을 말해도 검왕은 오직 검만 말한다. 검왕은 절대로 ‘여자’를 말하지 않는다.
검왕에게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제이령의 그림자가 얼마나 깊은지 다른 여자는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다.
검왕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나마 괜찮다.
지금처럼 정신을 집중할 곳이 생기면 ‘여자’라는 말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쉬이잇! 쉬이이잇!
십마가 유화아를 쫓아서 신형을 날렸다.
“촌장님이 위험해 보이네요.”
“검왕까지 가세하는 모양인데…….”
그들은 전장을 향해 치달려 오는 음악삼귀를 봤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는 검왕도 봤다.
그들이 와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았다.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검왕은 반드시 유지자문 고수들의 뒤를 쫓아올 것이다. 그가 유지자문 고수들을 불러냈는데, 촌장을 상대케 함인데, 그 뒤를 쫓지 않겠나.
“그럼 우리도 슬슬 내려가 볼까?”
증평주가 옷소매를 말아 올렸다.
그때, 수월화가 증평주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 가지 말죠.”
“뭐라고?”
“촌장님이라면 저 정도 난관은 혼자 뚫고 나와야 하지 않나요?”
“너!”
“우리 앞에 십마가 있어요.”
증평주는 수월화를 노려봤다.
수월화 말대로 십마와 유화아가 자신들을 가로막기 위해 앞쪽으로 다가왔다.
허나 그들 정도는…… 솔직히 수월화 혼자만 나서도 뿌리칠 수 있다. 모두 죽일 수 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이 저쪽 마음이 아니라 이쪽 마음이다.
증평 무인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면 음악오귀가 검왕이 끼어들 공간은 사라진다.
노인과 촌장의 싸움은 공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싸움에 다른 자들이 어부지리를 얻어서는 안 된다. 헌데,
“전 촌장님이 무서워요.”
수월화가 뜻밖의 말을 했다.
“차라리 녹천처럼 중원을 피바다로 물들이겠다면 따르겠어요. 하지만 촌장님은…… 그 정도로 만족하실 것 같지 않네요. 군림. 완전한 군림을 원하실 거예요.”
“그거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 세상에서 아옹다옹하는 거니까. 허나 촌장님은 지옥을 만들 것 같아요. 우리…… 십마 핑계로 내려가지 말아요.”
“말도 안 되는!”
증평주는 말을 하다말고 눈을 부릅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너!”
“죄송해요.”
수월화가 순순히 시인했다.
독에 암산을 당했다. 독에 당하면서도 당하는 줄도 몰랐다. 느낌조차 없었다.
어떤 독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이 정도 독이라면 오직 석화선생만 만들 수 있다.
“무슨 생각이냐?”
“말 그대로예요. 촌장님만 버릴 거예요.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촌장님 그늘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것도 인간이 아닌 축생으로 살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말도 안 되는!”
“우리 그냥 여기서 지켜봐요.”
수월화가 증평주를 돌려세웠다.
증평주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피는 뜨겁게 흐른다. 경맥만 굳히는 것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마혈(痲穴)을 짚듯이 잠시 운신을 제한하는 거다.
“휴우!”
증평주는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게다.”
“촌장님 싸움이 어떻게 되든, 제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어요. 목숨도 괜찮고요. 그 정도 생각 없이 하독을 했겠어요? 저도 단단히 각오했다고요.”
수월화가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까앙! 까아아앙!
검과 검과 부딪친다.
노인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인다. 촌장은 간신히 막아낸다.
허나 촌장은 여유 있는 표정이고, 노인은 미간을 찌푸린다.
원래 이 싸움은 단박에 끝났어야 한다. 일격에 승부가 결정 나야 정상이다.
촌장이 버틴다는 것……. 한 줌 진기만 남은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는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다. 한 줌 진기로는 쓰러져도 벌써 쓰러졌어야 정상이다.
노인이 공격을 멈추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후욱! 후욱! 후욱!”
촌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나 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다. 노인은 전신 진기를 검에 집중시키고 있다. 다음 한 판으로 승부를 결할 생각이다.
‘한 사람만 남는다!’
촌장은 노인의 의지를 읽었다.
츠으으으읏!
촌장이 검에 진기를 몰아넣었다.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세맥에 깃든 진기까지 모두 끌어내서 검에 넣었다.
파파파파팟!
검에 다시 무지갯빛 검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 빛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초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