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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三章 은장적검(隱藏的臉)[숨겨진 얼굴] (2)
“쯧! 그놈의 욕심이 뭔지.”
“그래도 세상은 참 공평해. 모자라면 채우는 것을 허락해주고, 꽉 차면 넘치도록 만들잖아.”
“가질 만큼만 가지라는 소리인데, 사실 그게 쉽지 않지.”
노인들이 주먹밥을 먹으면서 잡담을 나눴다.
촌장은 노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노인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을 취했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아무 방비도 없이.
노인들이 주먹밥을 다 먹고 행낭을 수습한 것과 촌장이 운공조식을 끝내고 눈을 뜬 것은 거의 동시였다.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촌장도 일어섰다. 그리고 노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꼭 하겠소?”
“점심 맛있게 드셨기를 바랍니다. 가급적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대를 직접 눈으로 보니 승패는 짐작이 되나, 그래도 손에 병기를 든 이상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그대 말대로 빨리 보내주기만 바라겠소.”
스릉!
촌장이 검을 뽑았다.
촌장은 검을 사용한 적이 없다. 무공을 사용하는 일조차 드문 사람이지 않은가.
허나 이번에는 검을 사용한다.
노인에 대한 예의? 아니다. 촌장도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승패가 났다거나 빨리 끝내겠다는 등 여러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승패는 겨뤄봐야 안다.
슷! 스슷!
노인들이 유령처럼 움직여서 촌장을 둘러쌌다.
헌데 진형이 조금 묘하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기는 했는데, 옆 사람과의 간격이 매우 불규칙하다. 어떤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섰고, 어떤 사람은 홀로 뚝 떨어져 있다.
촌장이 그들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검법이 서로 굉장히 상이한 모양입니다?”
“제 좋은 것을 수련하다 보니 그리됐소.”
“기대되는군요.”
“뭐 그렇게 딱히 보여줄 건 없소만…….”
스릉! 차앙!
노인들이 각기 병장기를 뽑았다.
어떤 사람은 검을, 어떤 사람은 겸(鎌)을, 어떤 사람은 칼[刀]을 들었다.
노인들이 촌장을 불규칙하게 에워싼 것은 공격 형태에 따른 행동반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공격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간격을 벌렸다. 초식을 전개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뚝 띄워놓은 것이다.
그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어떤 무공을 수련했는지는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안다.
혼자 뚝 떨어져 있는 사람, 매우 활동적이다. 움직이는 범위가 넓다. 반면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사람들은 매우 쾌속하다. 한 초식이면 족한 무공을 구사한다.
꾸르르릉!
촌장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전신을 휘돈다. 검을 든 손에 집중된다. 천둥 치는 소리를 흘리면서.
노인들은 일부러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지자문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아니, 유지자문을 떠날 때부터 이미 그 생각을 하고 떠났다. 그래서 유지자문을 봉쇄하고 떠나왔다.
사실, 돌아갈 곳이 없다.
중원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중원이 평온한 것도 혈풍을 일으킬 주역이 자신들을 쳐다보느라 중원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원은 소림사와 무당파가 멸문했다. 정사대전까지 벌였다. 검성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혈천성이 무너졌다. 피가 흐를 만큼 흘렀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중원은 평온하다.
정작 혈루마옥이 피를 뿌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허나 그것이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촌장은 누미를 대역으로 삼아서 중원에 피 비를 뿌리려고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을 죽여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악한 심성으로 물든 여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누미로 하여금 중원을 초토화시키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촌장이 나서는 게 낫다.
촌장, 이제 유지자문은 그만 쳐다보고 중원을 공격하시게.
유지자문 고수들이 터전을 떠나 중원으로 들어선 것은 그런 뜻이 숨어 있었다.
첫째, 누미를 제거한다.
둘째, 촌장을 제거한다. 제거하지 못해도 할 만큼 했으니 됐다.
적벽검문은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놨다. 후일을 도모할 씨앗 하나 남겨두지 않고 모두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
누강이 남았다. 죽을 것이다.
누산이 남았다. 죽을 것이다.
검왕이 남았다. 죽을 것이다.
이들의 죽음은 너무도 명확하다. 이들보다 먼저 죽는다고 해도 세 사람의 죽음을 의심하지는 못한다.
허면 적벽검문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적벽검문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혈루마옥을 저지시키는 거다.
검왕은 피로에 지친 촌장을 급습할 생각이다.
정인군자의 도리는 아니지만…… 누가 정인군자라고 했나. 누가 정도인이라고 했나. 오직 삶과 죽음만 염두에 둔 절대 살인자로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을 의식하고 천천히 걸었다.
검왕이 뒤따라오라고.
이제…… 싸운다. 촌장을 베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대가는 받아내야 한다. 그래야 검왕이 마지막 한 수를 쓸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게끔 자리를 깔아줘야 한다.
한 노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대한…… 버티시게들.”
노인들의 생각대로 검왕은 그들을 뒤따라왔다. 그리고 싸움을 지켜본다.
검왕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을 자리인데…… 하지 않아도 괜찮다.”
“후후! 하겠습니다.”
음악삼귀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
“잘 봐라. 저 힘이 너희를 몰아칠 것이다. 그 힘은 천력(天力) 같아서 단숨에 마신천강기를 깨트릴 것이다.”
“단숨입니까?”
“보면 알겠지.”
“보지 않아도 압니다. 검왕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맞는 말이겠죠. 하지만 ‘단숨’이라는 말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이왕 죽을 자리라면 더 괜찮게 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천력파혈단, 주십시오.”
음악사귀가 검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하하! 그렇지. 그게 있었지.”
삼귀와 오귀가 맞장구쳤다.
검왕은 순순히 천력파혈단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천력파혈단은 만들기가 꽤 까다로운 단약이다. 약초를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한 알을 만드는데 능히 성 하나를 살 만한 돈이 들어간다는 말도 있다.
그런 단약, 아니 독약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다.
사전에 이런 일을 예상하고 단단히 준비해 놓았던 것 같다.
“우리도 그게 필요할 것 같은데…….”
십마가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잘해.”
검왕이 유화아를 쳐다봤다.
“걱정 마세요. 맡은 일은 해낼게요. 하지만…… 저도 함께 촌장을 공격하고 싶어요.”
“저쪽을 막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
“알았어요.”
유화아가 활짝 웃었다.
십마와 유화아는 증평주를 막아야 한다. 오래 막을 필요는 없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싸우지 않고 막을 수 있다면 백 번이고 그렇게 해야 한다.
일격을 펼칠 동안만!
검왕이 십마와 유화아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동안 촌장을 급습한다. 음악삼귀가 마신천강기로 일격을 무력화시키고, 검왕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음악삼귀는 절명할 것이다.
촌장이 펼치는 무공은 인력으로 받아낼 수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늘의 힘이라고 하지 않나.
그 틈을 노린 검왕도 살기는 어렵다.
촌장과 유지자문 고수들의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지만…… 가급적이면 오래 싸워야 한다. 촌장의 진기가 거의 소진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습이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 것이고.
십조잔괴가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기왕 공격할 것이라면 유지자문 늙은이들하고 같이 싸우는 것은 어떤가?”
“무공이 너무 다릅니다.”
“……?”
“저 싸움에 우리가 가세하면 방해만 됩니다. 서로 방해가 되죠. 우리도, 저분들도 어느 쪽도 마음 놓고 싸울 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십조잔괴가 놀라서 물었다.
검왕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 하지만 합공에 방해가 될 정도로 무공이 다르려면…… 양쪽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는 아주 깊이 파고들어 갔어야 한다.
너무 깊이 정심해서 다른 무공이 방해가 된다.
유지자문 고수들이 그 정도로 강하다면…… 그런 사람들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촌장은 얼마나 강한가. 그것도 촌장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니.
유화아가 전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유지자문은 정말 신비롭네요. 저런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무공만 닦고 있었다니. 유지자문 문도는 얼마나 돼요?”
“없어.”
“네?”
“저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후후후! 적벽검문, 유지자문, 혈루마옥…… 세상 사람들이 경이롭게 생각하는 세 문파가 한날한시에 공멸하는 거야.”
“그러지 마세요. 공멸하지 마세요.”
유화아가 눈물 어린 눈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검왕은 유화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볼 것 같아서.
쒜에엑! 쒜엑! 쒯!
병기들이 허공을 난무한다.
노인들의 손길은 깔끔하다 못해서 산뜻하다. 군더더기가 일절 없고 선과 각이 딱 맞아 떨어진다.
보기에는 좋다. 하지만 공격을 당하는 사람은 무척 어려울 게다. 속도도 변화도 완벽하니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스으으읏!
촌장은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아니, 빠져나가지 못했다.
퍽! 퍽!
낫이 어깨를 찍는다. 검이 옆구리를 베며 지나간다.
피가 솟구친다. 허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지를 축축이 적시며 땅에 떨어진다.
쒜에엑! 쒜엑!
칼이 하늘을 가둔다. 검이 땅을 결박한다.
노인들의 합공은 허실(虛實)이 없다. 허는 없고 오직 실만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날카로운 병기로 가득 찬다.
“촉두금력! 깨달았군!”
촌장이 비룡번신(飛龍翻身)으로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유기를 뚫고 들어올 검이라면 금력(禁力)이 아니오!”
“허허허! 그렇소.”
노인이 웃었다.
금력은 힘을 가둔다. 힘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힘을 초월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힘을 금력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페엣! 퍼억! 쒜에엑! 퍼억!
촌장이 검과 도에 상흔을 입었다.
검이 목을 쭉 그으며 지나갔다. 목이 갈리면서 핏물이 가로로 쭉 그어졌다. 한 치만 더 깊이 베었어도 살이 벌어지며 핏물이 솟구칠 뻔했다.
칼은 등을 갈랐다.
등이 세로로 쭉 갈라지면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촌장이 밀린다. 촌장이 더 강할 것 같았는데 손도 써보지 못하고 있다.
유지자문 고수들은 방심하지 않는다. 들뜨지도 않는다. 촌장을 격타하는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무공을 펼친다.
그러나 노인들의 모습에서는 전력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상대가 없이 혼자 수련하는 것처럼, 강가에서 홀로 초식을 연마하는 것처럼,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건강 삼아 운동하는 것처럼…….
언제 어느 순간에 죽어도 최선을 다하다가 죽는 모습이다. 최선을 다하는 중에 절명하게 된다. 그러니 죽는 사람도 여한이 있을 리 없다.
촉두금력이 확실하다.
촉두금력을 깨우친 사람이 아니라면 이토록 완벽한 무공을 펼칠 수 없을 게다.
완벽한 무공!
펼치는 사람이 여한이 없는 무공을 말한다. 승패를 초월한 무공을 말한다. 삶과 죽음조차도 상관없은 곳에서 초연히 펼치는 무공을 말한다.
노인들이 그런 무공을 펼친다.
쒜에에엣! 쒜엑!
겸이 날아든다. 촌장의 머리카락을 싹둑 가르며 지나간다.
잘린 머리카락이 뜯겨진 잡초처럼 휘날린다.
촌장은 겸을 쳐다보지 못했다. 바로 뒤를 이어서 검이 날아들고 있다.
촌장이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