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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十二章 화화(火火) (5)
유화아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동굴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저들이 누구인지 안다. 마군과 수하들이다.
마군의 수하들은 무공이 일취월장했다. 옛날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 개개인이 능히 십마에 버금갈 정도로 강해졌다. 그러니 십마 다섯 명이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아니, 여섯 명.
검왕을 도와야 하나?
검왕은 도움이 필요 없다. 혼자서도 능히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 저들 역시 검왕을 어찌하고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죽으려고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한 팔이라도 거들고 싶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막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싸움이 벌써 끝나버렸다.
검왕은 마군과 십마에 버금가는 마군의 수하들을 눈 깜짝할 순간에 처리해 버렸다. 마군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절명했다.
굉장한 무공이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어서지 못했다. 아니, 이번에는 마치 동토(凍土)에 갇혀버린 동태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스으으읏!
누군가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 이 사람들이 적이었다면, 그녀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막을 수 없었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등 뒤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공격을 막을 수 있겠나.
스으으으으읏!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다.
‘검왕이 위험해!’
그녀는 마음이 다급해졌고,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그리고 또 이번에도 일어서지 못했다.
“잠시 앉아 있거라. 방해받고 싶지 않구나.”
등 뒤에서 음성이 들린다.
“누구……?”
그녀의 물음은 점혈(點穴)로 답해졌다.
등 뒤 요혈 네 군데가 툭툭 찍혔다. 그리고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몸에 해는 없을 게다. 잠시만 기다리면 봉혈(封穴)은 저절로 풀릴 터…… 애쓰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있거라.”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몸은 점혈되었지만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도 아닌 바에야.
몸이 굳어있다.
만약 사내가 점혈을 하지 않고 살수를 썼다면 몸이 굳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을 것이다.
스으읏!
유화아는 마지막 사내가 지나가는 느낌을 감지했다.
벌써 세 번째, 일어서려는 마음만 있고 몸은 움직이지 못한다. 두 번은 자의에 의해서였고, 마지막 세 번째는 타의에 의해서, 공격을 받아서다.
“마지막 도박인가?”
“그렇습니다.”
“요행히 성공했군.”
“천운입니다.”
“누강을 봤네. 뼈가 크다는 놈들 숱하게 봤지만 그놈은 정말…… 킥킥킥! 덕분에 우리 일이 한결 수월했어.”
“작업이 성공했다는 뜻입니까?”
“말해 무엇해.”
“그럼 이제 남은 건…….”
“천운이지. 우리도 천운을 기다려야지. 하늘이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후후!”
유화아 옆을 지나친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도 팔순은 훨씬 넘어 보였다.
“그놈, 이번 일 마치면 무공을 못 쓸 거야.”
“…….”
“크크큿! 자네…… 적벽검문…… 정말 치 떨리도록 차가운 문파야. 어쩌면 그렇게들 죽음 앞에서 담담한지.”
“자신만 죽는 건 괜찮지. 다른 사람들까지 태연하게 죽음 속으로 밀어 넣잖아. 누강이 무슨 잘못인고. 누미는 또 무슨 잘못이고. 이게 모두 적벽검문 농간 아닌가.”
“궁금한 게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주겠나?”
노인 중에 한 명이 검왕에게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이대로 가면 적벽검문은 끝이야. 자네가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촌장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고. 누강, 누미 모두 촌장 손아귀에 있고.”
“문파 보존 말씀입니까?”
“요점을 바로 알아채는군. 그렇네. 아무래도 말이야, 적벽검문…… 뭔가 남겨놨을 것 같단 말이지.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남긴 것은 없습니다.”
“정말 없는가?”
“방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치 떨리도록 차가운 문파라고. 후후! 저희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문파는 두 번 다시 남겨놓지 말자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문파의 맥을 끊는다…….”
“적벽검문의 차가움은 무림 안위에서 비롯됩니다. 무림 안위를 위해서 제 살, 제 뼈는 과감하게 잘라내고 베어낼 수 있는 거죠. 헌데 이 제 살이나 제 뼈…… 이것 역시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한 사람이 죽거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무림은 이런 희생을 더 이상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린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더 이상 희생을 치를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런가. 그런 생각인가.”
“대답이 되셨는지요?”
“됐네. 충분하네. 이로써…… 적벽검문과 본 유지자문의 부채관계는 끝났네.”
“그동안 도움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후후후!”
“클클클!”
노인들이 웃었다.
저들의 대화를 듣고,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적벽검문에 생존자는 없다.
몇 명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혈루마옥과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모두 죽고 없을 것이다.
검왕, 누강, 누미…….
모두가 죽는다. 죽을 결심이다. 그래야 지금 검왕이 노인들에게 한 말을 입증하는 게 된다.
무림을 위해서 더 이상 희생을 치를 사람도 없다.
희생을 치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다. 희생을 치를 만한 육신이 없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희생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다.
‘처음부터 죽을 결심이었어.’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검왕의 무공은 최강이다. 누구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죽음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누가 다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검왕 앞에 서면 모두 마군같이 되리라.
그런데 검왕도 혈루마옥 촌장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단다.
정말 그런가? 그럼 왜 촌장은 아직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나.
유화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투툭! 투투툭!
몸속에서 실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봉혈이 풀렸다. 점혈이 풀리면서 딱딱하게 굳었던 등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허나 또다시…… 네 번째로 주저앉혀졌다.
“잠시 예 있게.”
소리 없이 나타나서 그녀 앞에 선 사람……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느낌으로 누군지 알겠다. 귀면사자를 어린애처럼 죽여버린 비형은잠이다.
“무슨 일인데요?”
“검왕이 직접 말한 것이네. 잠시 예 있게.”
“혹시 혼자 가려고?”
“후후후! 검왕이 그토록 무정한 사람은 아니지.”
“알았어요. 검왕이 직접 말한 것이라면…… 따라야죠.”
“이보게, 충고 하나 하지. 검왕…… 마음에서 내려놓게. 마음속에 담아봐야 고통뿐이야.”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하죠.”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이 얼마나 크면 애별리고라는 말까지 생겼을까요. 알아요. 검왕과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런가? 알고 있었나?”
“그래서 더 헤어지지 못해요. 마지막 순간에 꼭 옆에 있고 싶어요. 아니, 옆에 있을 거예요.”
유화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검왕이 회생했을 때만 해도 기쁨으로 들떴는데, 유지자문 고수들과의 대화를 듣고는 다시 절망에 빠져버렸다.
비형은잠이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그런 소원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나. 후후후!”
신장 구 척, 몸무게는 이백팔십 근, 무기는 감산도, 무공은 철포삼과 금종조 그리고 혈음마벽, 별호는 강신천마.
그는 원래 철포삼과 금종조를 수련한 외공 무인이다.
그런 그에게 혈음마벽이라는 절정 무공을 안겨준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강신천마에게 한 가지 약조를 받아냈다. 한 사람에게 충성을 바치겠노라는.
일격이 살점을 모두 찢어버린다고 해서 파벽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무공이 있다.
잔혈철조공, 십조잔괴.
잔혈철조공이라는 무공은 무림사에 등장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십조잔괴가 창안했거나, 십조잔괴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림에 등장한 무공이라는 뜻이다.
십조잔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유성과 같다.
예전에는 없었던 존재인데, 어느 날 불쑥 무림에 나타나서 거침없이 휘젓고 다닌다.
헌데 그도 한 사람에게 충성한다.
장(杖)에 연침을 박고, 거기에 혈오독을 묻혔다. 누구든 살짝 스치기만 해도 신경이 마비되어 죽는 극독이다.
혈인장, 혈오독, 그리고 혈응신공(血鷹神功).
사람들은 혈인장과 혈오독은 알아도 혈응신공은 알지 못한다.
천살마노 입장에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무림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무공이니 알 수가 없다. 예전에 누군가가 사용했던 무공이라면 알겠는데, 처음 보는 무공이다.
강신천마, 십조잔괴, 천살마노……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 처음 보는 무공을 구사한다. 무림사에 나타난 적도 없고, 누군가가 사용한 적도 없으며, 무리(武理)도 가상된 적도 없는 처녀 무공이다.
둘째, 세 사람 모두 한 사람에게 충성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십마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며, 오직 세 사람만의 비밀이다.
검왕이 그들 앞에 섰다.
“결심을 끝낼 때가 된 것 같은데?”
백화요녀, 유계판서, 흑포사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클클! 하나 묻지. 전에…… 패갑철마를 단숨에 때려죽였는데, 왜 그랬나?”
천살마노가 물었다.
“촌장 사람이기 때문.”
“클클! 역시 그랬군. 눈치 깠을 줄 알았지. 어쩐지 한 점 망설임도 없이 일 장에 쳐 죽이더라니.”
“뭐야, 그럼 당신들…… 혈루마옥 사람들이야?”
백화요녀가 세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어린 것이 어디서 반말지거리야! 이것아! 혈루마옥 사람이라니! 그럼 우리가 골 비었다고 혈루마옥과 싸우고 지랄이겠냐! 저건 머리에 똥만 들어 가지고…….”
천살마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럼 뭐야 방금 그 말은? 패갑철마가 촌장 사람이라서 일 장에 때려죽였고…… 당신들에게는 결심을 끝내라는 말이…….”
백화요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이미 강신천마를 비롯한 세 사람이 무엇인가 다른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곧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강신천마가 감산도를 땅에 던지며 말했다.
“대답이 됐나?”
검왕은 땅에 떨어진 감산도를 쳐다봤다.
언뜻 보면 항복한다는 말로 보인다. 무인이 병기를 버렸다는 것은 포기를 의미한다.
순간, 검왕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어쩐지…… 이령, 이령, 이령…… 정말 못난 여자구나. 못난 여자야. 후후!”
검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신천마를 비롯한 세 사람은 오직 한 명, 이령에게 충성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령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다. 무공을 전수해 준 사람은 따로 있다. 다만 무공을 전수하면서 당시에는 갓난아기에 불과한 어린아이에게 충성해 달라고 약조를 받았을 뿐이다.
그 갓난아기가 성장해서 제이령이 되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사람은 혈루마옥 고인이 아니었나 싶다.
혈루마옥 사람이면서, 촌장과 뜻을 같이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
강신천마, 십조잔괴, 천살마노는 혈루마옥 사람이 아니다.
혈루마옥 사람으로 십마의 일인이 된 패갑철마나 마군, 그리고 마군의 수하들과는 족보가 다르다.
허나 혈루마옥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제이령이 혈루마옥 쪽에서 계속 활동했다면, 그들 세 사람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게다. 중원인이면서 중원인을 말살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약조를 깨면 된다.
허나 세 사람은 약조를 깨지 못한다. 약조를 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제이령과의 관계가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검왕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갑시다. 가서 촌장이나 죽입시다.”